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7:27:14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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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700,#ffd700> 김옥균
金玉均 | Kim Ok-kyun
파일:Gim_Okgyun.png [1]
출생 <colbgcolor=#fff,#1f2023> 1851년 ( 철종 2년) 2월 23일
충청도 공주목
(現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2]
사망 1894년 ( 고종 31년) 3월 28일 (향년 43세)
청나라 장쑤 성 상하이
(現 중국 상하이시)
본관 신 안동 김씨[3]
직업 문신, 정치가
신장 155cm[4]
학력 문과 장원 급제
백온(伯溫)
고균(古筠), 고우(古愚)
가명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5]
시호 충달(忠達)[6]
종교 유교( 성리학)→ 불교
저서 기화근사 (箕和近事)
치도약론 (治道略論)
갑신일록 (甲申日錄: 手記)[7]
직책 1874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1882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1883년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8]
1883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1883년 호조 참판(戶曹參判), 판서서리(判書署理)[9]
파일:1882.jpg
김옥균의 초상 사진(1882년)[10]

1. 개요2. 생애3. 평가
3.1. 북한에서의 평가
4. 기타5. 대중매체에서
5.1. 소설/만화5.2. 영화5.3. 연극5.4. 드라마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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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고종 시기의 정치가, 개화사상가.

1851년(철종 2)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났다.[11] 일찍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서구 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급진개화 세력에 참여하여 1884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동했으나 실패하고, 국외로 도피했으나 홍종우에 의해 피살되었다.

2. 생애

파일:金玉均.jpg
1894년 3월 상하이 출발 전 나가사키에서 촬영한 사진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김옥균의 묘비명[12]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천하를 훤히 다 비추는구나."
김옥균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출생으로 안동 김씨 김병태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6촌 형제 김병기[13]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김옥균의 어린시절을 설명할 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덕분에 탄탄대로를 걸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의 양부는 세도가 출신이기는 하나 김상용의 후손이라 정작 세도를 누린 외척들과는 촌수가 까마득하게 먼데다가, 양부 본인도 과거에 끝내 합격을 못해 음서를 통해 외직을 전전해야 했고 자식이 성장해 관직에 나가게 되어서야 출세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교육환경이 좋았던 건 사실이나, 그가 젊을 때부터 출세할 수 있었던건 본인 능력 덕분이다.

어린 시절부터 포부가 대단했던지 을 보고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아버지가 강릉 군수 등 외직을 주로 전전했기에 김옥균도 그곳에 따라 가야했는데, 어릴적엔 과거 합격을 위해 주로 강릉의 송담서원에서 공부했다. 송담서원은 이이의 고향에 세워진 서원으로, 기호학파의 정통인 노론-낙론계 학맥을 이은 곳이다.

문과 알성시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개화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 승려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 사상을 배우게 되고 고종의 매제 박영효, 서재필과도 친구가 된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고, 17만 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프랑스식 개혁을 주장했다. 일본으로 직접 건너간 김옥균은 청불전쟁의 동향을 미리 살펴보는 일본 정부로부터 당시 300만 원의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 했지만 차관 교섭에서 실패했다. 차관 교섭 실패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급진 개화파는 동력을 상실하고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불을 내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와중에 수구파로 전향한 옛 동지 민영익도 다쳐 정동 미국 공사관으로 후송된다. 이후 김옥균은 스스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라 개혁을 공표한다.

하지만 창덕궁에 원세개 청나라군 1,500여 명이 들이닥친다. 이를 막아야 할 일본군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지원 약속을 어겼다. 급히 몸을 피한 개화파들은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에 올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김옥균은 개명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정변에 적극 가담한 김옥균의 형제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연좌죄를 물어 떼죽음을 당했다. 친아버지 김병태(金炳台)는 정변 한 달 뒤인 1885년 1월 체포되어 천안옥사에서 10년간 복역하다가, 도피 생활을 하던 아들 김옥균이 암살 당한 시신으로 돌아와 부관참시된 지 한 달 뒤 고종의 명에 따라 1894년 73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14] 동생 김각균(金珏均) 역시 감옥에서 옥사하고 어머니는 음독자살했다. 여동생 김균은 죽은 것으로 위장해 겨우 몸만 피한 뒤[15] 지방을 떠돌며 어렵게 살다 서천군 판교에서 1941년 사망할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 아내 정경부인 기계 유씨 유치상(兪致庠)의 딸과 김옥균의 딸은 살아남았으나 노비가 되고 만다.[16] 양아버지 김병기도 연좌제로 체포되어 사약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김옥균을 파양해 연을 끊는 형식으로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감옥에 수감되어 옥사한다. 김병기의 경우 허직이 정변과는 무관하니 사면해달라고 상소를 올렸음에도 고종은 거부했고, 결국 수감된지 7년 만에 감옥에서 옥사한다. 안동 김씨 문중은 균 자 항렬을 전부 규 자로 바꿔야 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일본인으로 지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역적인 김옥균을 가만두지 않았다. 일본에 2번이나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인 지운영을 몰래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지운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당했다. 청일 양국은 김옥균의 신변 문제로 계속 부딪혔으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신변 보호를 이유로 오가사와라 섬, 홋카이도 옆 낙도 등에 보냈다.

이 시기부터 김옥균은 난잡한 여성 관계와 유흥에 빠졌다. 망명 직후 기거하며 신세를 지던 '야마구치 신타로' 집의 모친과 관계를 맺어 임신시켰고 온천과 여관을 오가며 홍등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오타루에서 사귄 일본 기생을 데려다 동거에 들어가 살림을 차린 뒤에 한량처럼 지냈다. 이때 동지이자 절친한 후배 박영효가 김옥균을 보고 사람이 변했다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조선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바보 흉내를 내라”는 친구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는 말도 있다.[17]

그러던 김옥균은 1894년 당시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이홍장의 양자)의 설득에 따라 청나라로 건너갔다.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해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이홍장에게 설파하려는 의도였다. 회동 약속 하루 전인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낮잠을 자던 김옥균은 수구당 민영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김옥균은 프랑스 유학파이자 갑신정변 때 죽은 동지 홍영식의 친척인 홍종우를 의심하지 않고 곁에 두었다. 암살당하기 직전 김옥균은 호텔 방에 짐을 풀고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으며 홍종우가 꺼내 쏜 권총에 3발을 맞고 절명했다고 보고됐다.[18] 김옥균의 암살 순간은 사극마다 다른데, 1982년 KBS 대하드라마 <풍운> 외 대다수 작품들에선 독서하다 총을 맞은 걸로 나왔지만 2002년 <명성황후>에선 가만히 있다가 총을 맞은 걸로 나왔다.

홍종우는 암살 직후 도주하다가 출동한 청국 경찰에 일단 체포되지만 조선과 청 정부 간의 협의로[19] 방부제 대용의 페인트를 칠한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국내 송환되었고 조정에서 포상과 함께 공직에 등용된다. 1894년 양력 4월 14일 김옥균의 시신이 조선으로 송환되었고 곧바로 양화진 백사장에서 거열되어 찢어진 후 목과 손발 하나씩이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써갈겨진 천과 함께 효수되었으며, 시신의 나머지는 발가벗겨 칼질을 한 다음[20] 옆에 버려졌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잔혹한 처리에 대해 국내외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왜냐면 당시 조선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반역죄 소급 적용에 대해 영조 대부터 문제가 제기되었고 정조 때 성문화되어 폐지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옥균의 사지를 찢고 목을 효수한 것은 이미 조선의 실정법상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하지만 김옥균에게 맺힌 게 많았던 조선 조정의 보수파 관료, 민씨 척족들이 대명률에 역도는 능지처사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식자층의 반발은 당연했다. 나아가 송환된 김옥균의 시신을 부관참시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주재 각국 외교관들은 곧바로 회합해 조선 정부에 시신 훼손 불가 의견을 내기로 결정했으나,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들 의견을 취합한 때는 이미 조선 정부가 시신 훼손을 결정한 뒤였다. 시신 도착 하루 만인 14일 밤 오후 9시 양화진으로 형 집행인들을 보내 김옥균 시신을 조각 내 버렸고, 일본, 오스트리아 등 각국 외교관들은 이를 야만적인 처사로 보고 본국에 중요사건으로 보고했다. # 일본 내의 여론도 들끓어[21] 조선에는 희망이 없고 우리가 개화시켜야 할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여론몰이에 이용되었다.[22] 효수된 김옥균. 뒤에는 시신도 보이며, 김옥균의 목이 달린 나무 구조물에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한자 글귀가 써진 천이 붙어있다. 오래된 흑백 사진이지만 김옥균의 목과 시신의 사진이므로 사람에 따라 무섭거나 불쾌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23]

나중에 김옥균의 머리는 어느 일본인이 수습해 도쿄의 한 묻었다. 하쿠산역 인근에 위치한 절 뒤뜰에는 높이 3m 이상의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상단이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 얇고 높은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도쿄의 아오야마 공원묘지에도 김옥균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비상한 능력을 갖고, 비상한 시기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었던 사람)’이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에 있는 무덤은 김옥균의 양자 김영진[24]이 머리에서 머리카락만 가지고 와서 따로 묻은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복권되나 아관파천 후 다시 취소되었다. 1910년 6월 경술국치로 인해 순종황제가 망국 후 이왕으로 격하되기 직전에 다시 복권되어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로 충달(忠達)이 내려졌다.[25]

3. 평가

김옥균에 관한 평가에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당시 조선 정국에 비추어 선구자적으로 시세를 파악했던 개화사상가로서의 면모, 청의 내정 간섭을 배제하고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자 했던 갑신정변의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으며, 일본을 맹신하고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나, 민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일본의 지원이 떨어지자 청나라의 반격으로 정변을 실패했다는 점 등에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26]

그가 일본에 있을 당시, 그는 후견인으로 탈아론과 제국주의를 설파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극우파의 원조인 도야마 미쓰루( 정한론의 지지자로, 한자를 그대로 읽은 '두산 만'으로 흔히 알려졌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27][28] 김옥균 본인의 도의성을 떠나서 일본의 지원이 없어지면서 금방 몰락해버린 김옥균의 행보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일본의 장기말로 이용당했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다. 갑신정변 이후 한성 조약 톈진 조약 등 조선이 외교적 고초를 겪게 된 것은 문제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극우적 태도가 갑신정변의 실패를 계기로 나타났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적어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나 정한론의 경우 갑신정변 실패 후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더라도 김옥균이 생전이나 갑신정변 당시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그런 태도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29]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독립협회에서 친일반민족적인 인사가 나온 점, 백성의 지지가 없는 그들만의 개혁 때문에 여러가지로 한계를 가진 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한 때 본인이 원수처럼 여겼던 청나라 이홍장을 만나 복권을 꾀하자는 말에 낚인 것도 그를 평가절하하는 요소로 꼽고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인사들 중 이상재, 남궁억처럼 독립운동가가 된 사례로 있는 만큼 일부 인사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고 독립협회와 개화파를 무조건 친일파로 규정하는 건 부당하고 독립협회와 대립한 황국협회에서도 민영기 같은 친일파가 나왔기 때문에 단순히 평가절하하긴 어렵다.

한편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처치하기 곤란한 인물이라 언제 조선에 넘겨질지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김옥균이 청나라를 통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위험 가능성이 있으니 안전이 확실한 지대로 피신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일 따름이다.[30] 오히려 김옥균이 일본을 떠나 청나라와 교섭을 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김옥균에게 일본은 그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이용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언제든지 손잡을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여하튼 넓은 의미의 친일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이상할 게 없지만 한국에서는 친일파= 매국노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일본에게 이용당했지만 매국을 했다고 단정하기 곤란해서[31]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일본에서는 '근대 조선의 혁명가'로 평가받는다. 김옥균을 일본에서 보호했던 자가 일본 개화의 아버지이자 현재도 일본 역사상 손꼽히는 위인으로 꼽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이며 김옥균의 조국을 위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당대 일본에도 득이 되었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나쁘게 평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강력하게 김옥균 미화 사업을 추진했으며, 몰락한 김옥균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조선총독과 오찬을 가지거나 김옥균 처의 수기가 연재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 진상 규명 등의 활동을 펼친 재일 한국인 금병동 교수에 의하면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부터 일본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일본인들 반응으로 김옥균이라는 인물은 '매우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물'로 그렸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호평이 남아 있어 '김옥균 연구 모임'이라는 일종의 팬클럽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김옥균을 조선의 사이고 다카모리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의 김옥균 무덤보다 일본의 김옥균 무덤이 정비가 잘 되어 있다.[32] 구글 재팬 등지 일본어 웹사이트에서 김옥균을 검색하면 김옥균을 높이 쳐주는 포스팅이나 게시글 등도 종종 발견된다. 그런 곳에서 그에게 혁명가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이란 칭호가 붙는다.[33] 다만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고평가 중 어떤 부류는 "그가 일본을 모범으로 삼고 일본식 개화를 통해 한국을 개혁하려고 했었으며 일본의 힘을 빌려서 이를 성공하려 했던 인물이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잘 나가는 일본을 따르려고 한 그를 혜안이 있는 자로서 칭송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를 후원했으니 당대에도 비슷한 평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의 김옥균에 대한 높은 평가는 부분적으로 신중하게 고찰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일본과 가까웠던 개화사상가라는 점을 들어 김옥균의 업적을 부각시킨 적도 있기 때문이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0년에 낸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2탄에서 김옥균의 망명 동기에 대해 "후쿠자와의 진심을 알고도 망명을 한 건지, 후쿠자와가 근대 일본의 개혁가라서 존경해서 그랬는지 모르나 어찌 됐건 잘못된 선택이다"라는 식으로 딱 잘라 비판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빠르게 이뤄버리려던 그의 뜻은 갑신정변 이후, 당시에 존재했던 개혁의 흐름을 절단내고 한시라도 빨리 개혁을 해야할 시기에 더욱 후퇴하게 만들었다. 온갖 사건에 휘둘렸던 고종과 급진 개화파에게 당한 온 건 개화파가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더욱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3.1. 북한에서의 평가

파일:사리원 민속촌 벽면 제너럴셔먼호 사건 모자이크.png
사리원시에 위치한 민속촌 내 역사 모자이크.
안중근, 홍범도, 전봉준과 함께 김옥균의 부조가 나열되어 있다.

북한에서 김옥균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보통 일본 제국에 관련되는 일은 북한 내에서 가장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우 '갑신정변의 주동자'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북한 사관에서 개화기 조선의 정국은 '착취적 노예제를 유지하려 했던 봉건 세력'과 '봉기를 일으켰던 민중 세력(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배경)'의 대립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 일색인 것은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에서 그를 높이 산 영향이 크며, 김일성은 이 회고록에서 몇 문단을 할애하여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뿐만 아니라, 김옥균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역사학자들이 잘못되었다고 훈시까지 내린다.
우리에게 조선력사를 배워주던 선생들은 대체로 김옥균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 학계에서도 오래동안 김옥균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였다. 그가 정변준비과정에 일본사람들의 도움을 받은것이 친일의 표적으로 되였다. 우리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력사학자들에게 김옥균의 개혁운동에서 인민대중과의 결합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힘에 의거하였다고 그것을 친일로 평가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진다. 그가 일본의 힘을 리용한것은 친일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데 목적이 있은것이 아니고 당시의 력량관계를 면밀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개화당의 편에 유리하게 전환시키자는데 있은것이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전술이였다고 말해주었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中

김일성의 후계자인 김정일 역시 1963년 5월 6일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열린 한 담화에서 '갑신정변을 옳게 평가할 데 대하여'라는 내용의 교시를 내린 바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북한의 역사학계는 김옥균을 '외래자본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항한 민족의 첫 번째 부르주아 개혁운동가'로 평가하고, 갑신정변을 '조선 역사상 최초의 부르주아 개혁 운동'으로 평가한다. 사회주의사관에서 이러한 평가는 단순한 업적 이상의 사상적 의의를 지닌다.

4. 기타

  • 바둑을 좋아하고 잘 두었다고 하며 그가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당시 일본의 17대 혼인보였던 혼인보 슈에이가 김옥균과 함께 3개월간 바둑을 두며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혼인보 슈에이와 6점 접바둑을 두어 김옥균이 이긴 기보가 존재하는데 기보로 추정하는 김옥균의 기력은 바둑 아마추어 3단~4단 정도라고 한다. 관련칼럼1 관련 칼럼2 김옥균은 귀족계급으로 하인을 수십 명 보유했는데 하인들이 진주를 깎아서 바둑알을 만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 도박 실력도 상당했던 것 같다. 과거보러 가던 중 하인 투전으로 날린 돈을 그날 밤 노름꾼들에게 달려가 투전판을 휩쓸어 되찾아왔다는 얘기도 있다.
  • 의외로 고래잡이와도 인연이 있는 위인이다. 1883년 고종으로부터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겸 '포경사(捕鯨使)'로 임명받아 울릉도 개척 겸 포경 산업 전반을 관할했기 때문이다. 다만 갑신정변으로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포경과 관련된 이권은 열강들에게 넘어갔지만 말이다.
  • 조선에서 최초로 영어를 접하고 배웠던 몇 안 되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34] 젊은 시절 윤치호에게도 영어를 열심히 배우라고 권했던 것도 김옥균이었다.
  • 본래 성리학을 깊이 있게 배우던 사대부였으나 이동인 유대치의 영향으로 불교에 매우 심취하게 되었다. 불교와 관련된 별호를 여럿 가지고 있었고, 형식주의를 타파하는 선불교에 크게 경도되어 일본 체류 중에는 참선도 자주 했다.
  • 일본에서 세계사 수업 시간에 김옥균의 이름이 나오면 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름이 金玉[35] 것이다.
  • 옛날 전제정치(專制政治) 아래서는 자칫 잘못하면 역적(逆賊)으로 몰리기도 일쑤였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族譜)에서 빼버리기도 했고 또 항렬자도 바꾸기도 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주동자들의 경우가 그랬는데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泳植),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開化黨)의 혁명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옥균( 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 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 박영효( 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36], 서광범( 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 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
  • 한때 자신을 '김옥균의 친손자'라고 사칭하는 남자가 나타난 적이 있다. 1934년 2월 18세의 한 소년이 자살극을 벌이다가 종로경찰서로 오게 된다. 어눌한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김옥균의 손자인 '김원세'라고 설명하는데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한국어를 배웠지만 어눌하다는 것. 할아버지가 김옥균이라는 사실을 듣고 조선 땅에 오게 되었는데 돈이 떨어져서 상하이 조계촌의 조선인과 상하이 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김옥균의 친척들이 직접 와서 확인하였고 김옥균과 관련하여 상당히 자세하고 정확한 내용을 진술해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윤심덕 김우진 로마에서 악기점을 하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로써 전 언론의 집중을 받았는데 이에 종로경찰서는 이탈리아와 상하이에 신원 조회를 요청하자 그의 행방이 갑자기 묘연해진다. 며칠 뒤 또 자살 소동을 벌이는 소년이 발견되는데 이 소년은 자신을 상하이 출신의 '이영태'라고 소개하며 고국이 그리워 누이와 함께 조선으로 오던 중 만주에서 마적들에게 가족을 잃고 흘러흘러 조선에 왔다고 진술한다. 신원 조회 과정에서 이 소년이 앞서 '김원세'라고 자칭한 인물과 동일인임이 확인되고 그의 거짓말이 들통난다. 사실은 강원도 암자의 중으로 산사 생활이 지겨워서 이와 같은 행동을 저질렀다고 한다.
  • 흔히 개혁 동지인 박영효와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우로 오인되지만 사실은 정변 실패 이후 둘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졌고 김옥균이 일본 망명 생활 중 주색잡기로 소일하는 자세를 보는 박영효는 그를 무척 싫어했다. 김옥균이 홍종우와 함께 청나라로 건너갈 때 박영효가 "홍종우는 위험하다"면서 말리기도 했지만 김옥균은 박영효의 말을 듣지 않았다. 훗날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해 아래처럼 회고했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적이다. 외교술뿐만 아니라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이 없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다."[37]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거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 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 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
  • 일본은 1894년에 이르러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반청 감정의 고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 이후부터 김옥균은 일본에서 매우 유명하였는데 사건이 일어난 호텔도 일본인 소유였다는 점을 들어 김옥균 암살 사건을 일본 주권의 침해로 받아들였으며 조선 조정에서 김옥균의 시신을 야만스럽게 처리한 것을 보고 조선과 청나라를 상종할 수 없는 국가라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고조된 반청 감정은 청일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38]
  •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한동훈을, 어차피 당대표가 되어도 3일 천하라며, 친윤 세력에 의해 끌어내리는 '김옥균 프로젝트' 계획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사

5. 대중매체에서

5.1. 소설/만화

  • 사실 김옥균과 관련한 문학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곳은 일본으로 1890년대부터 김옥균과 관련한 창작이 활발하였다. 이는 김옥균이 일본에 처음으로 온 정치 망명객 제1호인 점, 상하이에서 맞이한 비극적인 죽음, 일본 제국의 팽창과 아시아주의와 관련한 일본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경향과 다른 특이한 작품을 꼽자면 아키타 우자쿠가 발표한 희곡 <김옥균의 죽음(金玉均の死)>(1920년)이 있다. 이는 1920년 7월 김동환 번역하여 『창조』지에 게재되었는데 김옥균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범부로 그려지고 정치적인 허무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일본 신극 운동을 주도하던 오사나이 가오루의 희곡 <김옥균(金玉均)>(1926년)도 있는데 이는 김옥균의 <갑신일록>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며 김옥균을 시대에 맞서는 개혁자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 정부 근대화를 막는 전통과 관습을 비판했다.[39]
  • 한국의 경우에는 1928년 김진구[40]의 희곡 <대무대의 붕괴>[41]가 사실상 처음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작가의 성향상[42] 아시아주의에 동조하는 친일적인 색채가 엿보인다. 이후 1930년대에는 주로 민족 수난사의 하나로 김옥균이 다루어졌으며 대체적으로 비운의 인물로 그려진다. 카프(KAPF) 멤버였던 김기진은 <심야의 태양>(1934년 이후 <청년 김옥균>으로 이름 변경)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 소설에서 김옥균을 실패한 혁명가로 묘사하며 혁명은 민심을 읽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1940년대에는 주로 친일적인 작품 속에서 오족협화나 대동아공영권의 '선구자'로 자주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박영효의 친일극 <김옥균의 죽음>(1944년).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역사만화 < 왕도의 개>에서는 김옥균을 존경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혁명 실패와 몰락의 과정에서 주인공의 처지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김옥균 본인도 비중있는 인물로 나오며 조선의 혁명가로 일부 고관들은 이제 한물 간 인물로 보고 있지만 민중들에게는 인기가 있으며 사람은 괜찮은 인물로 묘사된다. 글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일본 기생집에서 이름을 대면 공짜로 해주려 하는 묘사가 있으며 카츠 카이슈는 "인물은 인물이지만 솔직해서 일을 그르칠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박영효 고종이 좀 없어보이게 나오고 명성황후가 대놓고 흑막처럼 나온 것과는 대조적. 해당 작에서는 지나가는 언급으로 흥선대원군 역시 뛰어나다고 언급된다.
  •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이야기>에서도 등장하는데 만화에 등장하는 조선 측 인물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다.
  • 망명하려는 김옥균이 조선 관헌에게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일본 선장이 나와서 총을 들이대면서 묄렌도르프 일당에게 호통쳐서 위기를 넘기는 단편도 있다.[43]
  • 프레시안에서 박은숙 씨가 저술한 김옥균 평전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를 두고 김기협 씨와 박은숙 씨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김기협의 서평 박은숙의 반론) 격렬한 김옥균까인 김기협도 문제지만 박은숙도 지나치게 김옥균을 고평가하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그녀는 김홍집을 지나치게 까면서 김옥균을 견줘 찬양하고 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대한제국의 3대 총리이자 역사의 변화로 황제가 된 완화군 이선의 가장 충실한 신하이자 셋 뿐인[44] 친구로 나온다. 다른 개화당원들과 달리 스승 유홍기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일본, 프로이센을 선망하는 다른 개화당 인사들과 달리 이선의 민주주의 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인물, 나중에는 이선이 미래를 보고 온 인물임을 유홍기의 유언을 통해 깨닫고 죽기 전에 이선에게 물어보며 자신의 원래 운명과 대한제국이 일본에 멸망하는 운명을 듣고는[45] 이선에게 한 사람의 조선인으로서 조선을 구한 것에 감사를 표한다.[46]
    그런 만큼 주인공인 이선에게 김옥균은 고굉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이는 팔과 다리라는 표현인 만큼 얼마나 주인공에게 중요한 인물인지 나타나는 부분.

5.2. 영화

  • 1932년 배우 겸 감독 나운규가 김옥균의 일대기를 다룬 <개화당이문>을 만든 바 있는데, 당시 김옥균 역은 윤봉춘이 맡았다.

5.3. 연극

  • 1973년작 <동천홍>에서는 배우 이정길이 연기했고, 2004년 리메이크 당시 김도현(1977)이 연기했다.

5.4. 드라마

  • 1970~1971년까지 KBS-TV를 통해 목요 연속사극 < 김옥균>이 방영된 바 있으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주연 배우는 불명이다.
  • 1982년 MBC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특집드라마 <한미백년> - 오지명.
  • 1994년 MBC 3.1절 특집드라마 <맞수> - 한진희.
  • 1995년 3월 4일 KBS1 <역사의 라이벌> - 차기환.

6. 관련 문서


[1] 위 사진은 1882년 3차 수신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김옥균이 일본 스즈키 사진관에서 촬영한 모습이다. [2] 일설에 의하면 외가가 있는 충청도 공주목 산내면 상사한리(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에서 태어났다고 주장되나 이를 뒷받침할 다른 근거는 없다. [3] 문충공파 25세손 ○균(○均) 항렬.( 족보) [4] 출처 상하이에서 김옥균의 사체를 검사한 보고서에서 김옥균의 키는 155cm라고 적었다. [5] 일본 망명 시절에 스스로 작명해 사용한 일본식 이름 [6] 족보에 왜 이렇게 시호를 정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집안보다 나라를 먼저 걱정하였기에 '충'이라 하였고, 이치에 밝았기 때문에 '달'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7] "일본식 한문체" 등이 섞여있어 위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8]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 삼림 및 광산 개발을 위해 신설한 관직 [9] 갑신정변 정부에서의 직책으로, 호조판서를 공석으로 두고 자신이 참판이 되어 호조를 장악했다. 현대의 장관 직무대행 격. 마지막 공직이다. [10] Terry Bennett Collection - Royal Kim Ok-kyun [11] 유해가 묻힌 무덤은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에 있다. [12] 박영효 혹은 유길준이 썼다고 한다. [13] 안동 김씨의 세도가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金炳)와는 다른 인물이다. 김옥균의 양부는 김병기(金炳)로 김상용의 현손이며 김좌근과는 촌수가 까마득하게 멀다. [14] 이는 1776년 정조가 선포한 ‘노적(孥籍) 추시 금지’ (연좌처벌 금지)에 위반되는 불법 처형이었다. # [15] 김균의 남편 송병의가 거짓 장례까지 치러 아내가 죽은 척한 뒤 부부가 함께 지방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균이 어머니와 동반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고, 나무위키 해당 문서에도 그 잘못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16]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긴 하지만 1895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 자체가 혁파되었으므로 그때까지 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신원되었을 것이다. [17] 구스 겐타쿠, ‘김옥균’, 윤상현 역, 인문사, 2014, p77 [18]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 파일:external/t1.daumcdn.net/daggbz1zzMPkZNtA32qDEg_Of8k.jpg [19] 조선에서 청국에 엄청난 뇌물을 썼다. [20] 아래 사진의 나무 삼각대 뒤에 보이는 것이 시신과 운반용 관이다. [21] 김옥균을 홀대하고 추방하자고 말한 일본인들조차 지나쳤다고 비난했다. [22] 이 사건 이후로도 김홍륙 독다 사건의 범인 가족을 고문하고 시신을 민중들이 갈갈이 찢도록 방치했다. [23] 이 사진은 KBS2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김옥균 사망 직후의 해설 장면에서 쓰였다. [24] 일본인 여자 사이에서 낳은 친자라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25] 아이러니하게도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규장각을 철폐하고자 했다. [26]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갑신정변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개화 사상이 국민 속에 퍼지지 못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개혁이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의 방식으로 추진됨으로써 국민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이 개입한 것도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참조. [27] 말년에 갈 수록 사치로 생활고에 시달려 '조선의 이권을 팔겠다'라는 허풍까지 서슴치 않았다. 일인들의 그걸 어떻게 장담하냐고 물으면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면 되지 않느냐(...)라고 답했다고. 김구, 장면 계열로 1공화국 시절 망명한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이 기록을 보고 김옥균에 대한 애정이 식어 버려 안중근으로 전문분야를 바꿔버렸다고 회고했다. 일인들이 남긴 구술로 김옥균의 완전한 본심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김옥균이 살아남아 귀국했다면 박영효나 다른 친일파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28] 도야마 미쓰루에게 발탁된 다른 조선인 중 1명이 < 야인시대>에 나오는 하야시( 선우영빈)이다. [29]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 왕도의 개>에서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머물던 김옥균이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대화 후 "저 분이 저렇게 변하다니."하고 그의 변화를 한탄하는 연출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30] 김옥균이 일신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일단 미국처럼 조선 정부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망명을 떠났을 것이다. 서광범이 그러했듯 말이다. [31] 김옥균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막상 이용당한 건 본인이고 실패한데다 그 실패로 인해 조선에 해를 끼쳤다는 게 문제지만. [32] 도쿄의 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그런데 묘소 관리비를 몇 년 째 아무도 내지 않아서 철거될 뻔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황급히 체납분을 내서 철거되는 일을 막았다고 한다. [33] 애매한 '풍운아'라는 표현을 즐겨쓰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34] 일본에서 알파벳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5] 일본에서 20세기 이전의 한국사 관련 인물들의 인명은 한자로 표기하고 이후에 출생한 인물들은 가타카나로 쓴다.(예: キム・ヨナ) 한국에서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중국인의 인명을 한국식 독음과 중국식 원음의 표기로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36] 갑신정변에 가담한 박영효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영(泳)자가 승(勝)자로 바뀌었다는 일부 근거없는 풍문이 나도는데 반남 박씨 족보 乙酉譜(1825년 발행)에는 이 때 이미 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다. 즉,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근 60년 전에 이미 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미(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37] 사실 박영효가 이런 말 한게 김옥균과는 달리 본인은 조선으로의 복귀를 위한 노력을 했다. 개화 상소를 올린다든가 일본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어떻게 보면 합법적으로 복귀해서 개화 정책을 펴나갈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결과 김옥균이 죽은 해 8월 본인은 조선으로 돌아와 사면되었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다. [38] 이를 보고 < 왕도의 개>에서는 '정작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이 도움을 구할 때는 아무도 없다가 그가 죽자 일본이 태도를 정반대로 바꿔 죽음을 이용하고 배신하였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제도에 오랫동안 귀양보내는 등(조선에서 자객이 하도 온다는 이유였기는 했다.) [39] 정확하게는 김옥균과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와서 당대 일본 정부와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40] 1896년생의 극작가, 야담가. 1930년대부터 노골적인 친일 성향을 보였으며 이 때문에 흑역사로 낙인찍혀 해방 후 철저히 잊혀진 탓에 언제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41] 대무대는 김옥균이 구상한 미래로 아시아주의에 맞닿아 있다. [42]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 우익 인사들과 친교를 쌓았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을 반죽하여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3]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 작품이지만 한국 위키 등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츠치 선장이 김옥균의 망명을 도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쪽을 보면 그냥 내려주면 죽으니 인도적인 측면에서 숨기고 거짓말을 한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는 그가 망명 후 저술한 <갑신일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제로 인도적인 차원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며 이 일화는 < 왕도의 개>에서는 김옥균이 일본인을 믿지 못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 한국인은 친일 문학으로 일본인은 당시의 일본을 비판하는데 쓴 소재라는 걸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44] 나머지 하나는 에밀리 브라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폴란드 여의사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 나머지 하나는 니콜라이 2세. [45] 미래 서울에는 마천루가 가득하며 손안의 작은 기계 소통하고 다닌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46]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소설의 원래 주인공은 완화군 이선이 아니라 김옥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옥균으로는 조선을 바꾸는데 한계가 있어서 불가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