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0-10 14:53:22

청불전쟁

파일:청불전쟁1.jpg
교전국
청나라 프랑스 제3공화국
지휘관
이홍장 네그리에
유영복 아메디 쿠르베
장지동 리비에르
풍자재
참여 병력
병력 2만 5천명 병력 2만 명
흑기군, 청나라, 베트남 프랑스군

1. 소개2.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3. 간명조약4. 프랑스의 통수5. 개전6. 종전7. 결과8. 여담9. 매체에서

1. 소개

베트남의 종주권을 두고 1884년 8월에서 1885년 4월까지 청나라 프랑스가 맞붙은 전쟁.국력 4위와 11위의 전쟁 이 전쟁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가 가속화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의 조선처럼

2.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

1858년, 프랑스는 인도에서 영국에게 밀려난 후 천주교 박해와 선교사 살해라는 구실로 베트남에 출병하였다. 프랑스군이 침범해 오자, 베트남 정부는 태평천국의 분파였던 유영복(劉永福)이라는 인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유영복이 이끄는 부대를 흑기군(黑旗軍)이라고 했는데 흑기군은 1873년 12월 무렵, 600명의 병력으로 하노이에서 18명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는 550명의 해군수병과 해병대를 파견했고 이듬해 5월 하노이 서쪽 외곽에서 3천명의 베트남 ─ 흑기군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다. 프랑스는 수에 밀려 패배했고(프랑스군 35명 전사 52명 부상, 흑기군 50명 전사 56명 부상) 당시 사령관이었던 리비에르는 전사했다.

3. 간명조약

12월, 프랑스 의회는 군비 추가와 함께 1만 5천여명의 증원군 파병을 승인했고.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메디 쿠르베는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아 등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손코이 강 삼각주를 제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베트남 쪽에서도 별 수 없이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고, 청나라는 이 제안을 받고 군대를 출병시켰다. [1] 이 무렵 청나라는 신강에서의 전쟁이 끝난 시점이기도 했고, 이홍장은 힘을 쏟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되도록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를 원했기에 1884년 4월,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함께 천진에서 만나, 이른바 간명(簡明) 조약을 체결했다.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의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4. 프랑스의 통수

파일:복건.jpg

그런데 이홍장은 서양인들의 수법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간명조약에 조인하고 난 뒤, 실제로는 바로 청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국경선까지 철수한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조약에서는 분명히 철수를 약속했지만 기한에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즉,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 만일 청군이 언제까지 철수한다고 통보했다면 그전에 공격한다고 해도 명분이 없지만, 지금의 조약에는 기한이 정해져있지 않으니 프랑스가 지금 청군을 공격한다고 쳐도, '왜 먼저 청군이 물러나지 않았느냐.'라고 억지를 부릴 명분을 어떻게든 만들 수 있는 셈이었다. 이에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는 전쟁 비용 2억 5천만 프랑의 배상과 청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1개월 이내에는 다 철수 시킬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그 사이에 푸저우(福州)의 마미군항(馬尾 軍港)을 공격했다. 당시 선정대신을 맡으며 복주에 체류 중이던 하여장(何如璋)은, 자신 나름대로는 사태를 더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덕분에 프랑스 함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유유히 공격을 가해 복건의 수군인 남양함대를 전멸시켰다(...). 무엇보다 마미 조선소는 무려 은 2천만냥을 들여 만든, 양무파의 기대 그 자체였지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5. 개전

파일:랑손전투.jpg
파일:박닌전투.jpg

이에 빡친 청나라 정부는 복건 함대가 전멸한지 3일 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해전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선 의외로 청군이 분전하여 전술에서 승리했지만 전략에서 유리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통킹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투에서 프랑스군 한명 당 청군 열명이 넘게 쓰러졌다. 다만 압도적인 인명피해에도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아 프랑스군 지휘관마저 역관광시키고 교착상태를 만든 점에선 청군의 성공이라고 볼수있다.

6. 종전

청 정부는 프랑스에게 타협하여 화친을 구하고 1885년 4월 7일 전선에 정전하고 철병하라는 윤지를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화의가 시작되었는데 유리한 쪽은 프랑스였다. 이전에 맺은 '간명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명조약을 맺을 당시의 프랑스는 중국에 대해 우위에 있던 입장인데, 정작 청나라가 프랑스를 상대로 여러차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조건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게 없었다는 것이었다.

7. 결과

거기다가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은 10억 냥 이상을 지출했고 2억 냥 가량의 빚을 지게 되었다. 반면에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쟁배상금을 뜯어내지는 못하였지만, 좋은 조건에서 조약을 체결했으니, 순리로 보자면 나쁠 것은 없었던 셈이다. 쑨원 같은 경우는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패한 거나 다름없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보고, 자신이 청나라 정부 전복에 뜻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청나라의 후진적인 체제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연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만주가 전략적인 요충지로 청불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의 쟁탈목표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청불전쟁과 비슷한 전쟁에서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이랑 복귀전을 치르게 된다. 시즌 2 캐발리는 쪽은 이번에도 청(...)

8. 여담

청불전쟁은 조선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갑신정변은 조선 주재 청군 병력의 절반인 1500여 명이 청불전쟁에 투입된 것을 기회로 발생했다. 그리고 청군이 돌아오자 3일천하

9. 매체에서

2017년, 중국에서 청불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용의 전쟁>이 개봉했다.


[1] 당시 베트남과 청나라의 관계는 과거 한반도의 국가와 중화제국이 맺었던 조공 책봉 관계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한 것과 같다고 볼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