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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Paul Georg von Möllendorf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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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출생 | 1848년 2월 17일 |
프로이센 왕국 체데니크 (現 독일 브란덴부르크 체데니크) |
|
사망 | 1901년 4월 20일 (향년 53세) |
청나라
영파 (現 중국 저장성 닝보시) |
|
학력 | 할레 대학 |
[clearfix]
1. 개요
프로이센 사람[2]으로 젊은 시절에는 이홍장에 의하여 청나라에서 하급 외교관으로 발탁되었던 사람이었으나 전통적 조공 책봉관계에서 서구식 제국주의 국가와 보호국관계로 바꾸려고 했던 이홍장에 의해서 조선에 감독관 겸 고문으로 파견되었고 청나라 소속 조선관리[3]라는 애매한 지위로 조선의 관리가 되었다. 막상 조선에 도착하여 조선의 관복을 입자 '목인덕(穆麟德)'이라는 조선식 이름을 짓고 조선의 국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을 했다.[4] 조선에서의 지위는 당시 서양의 지위로 치면 차관급이었다. 문제는 청나라에서 복무하던 시절 자신의 상관이었던 영국인 로버트 하트는 자신 아래의 하급 관리였던 묄렌도르프가 조선에서 차관급 관료가 되자 그를 계속 방해했다. 맨 처음에는 조선의 관세 체계를 만들고 조폐소에 해당하는 전환국을 만드는 등 경제 분야에서 일했지만 고종의 신뢰를 얻은 뒤에는 본업이었던 외교관으로써의 업무까지 영역을 확대했다.2. 생애
2.1. 조선으로 오기까지
파울 폰 묄렌도르프는 체데니크(Zedenik) 지방[5]의 귀족 후예로 태어나 할레 대학에서 언어학과 동양학을 전공하였다. 일찍이 외교관이 되고자 1869년 현지 경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에 임용되는 꿈을 품고 청나라로 이주했다. 그는 청에서 해관에 취직하여, 5년간 지방 파견 근무를 돌아다녔다. 그동안 중국어를 익혔다.당시 청국 해관(세관)은 로버트 하트가 세운 소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청국 해관의 수장, 하트는 해관 내 전권을 휘두르고 무려 50년간 해관장의 자리를 지켰으며, 부하 직원들 위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때문에 묄렌도르프가 말단을 떠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874년 베이징 주재 독일 영사관 통역관이 휴가를 떠나자 이 자리를 노리고 해관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통역관은 휴가를 떠나지 않았고, 묄렌도르프는 별정 직원으로 채용되어 땜빵 통역관으로 또 파견근무를 다니게 된다. 당시 독일은 외교관을 본국에서 파견하였기 때문에, 현지 채용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묄렌도르프에도 기회가 왔으니 1879년 묄렌도르프는 톈진의 독일 영사관 영사 대리로 전근 명령을 받는다. 당시 톈진은 북양 아문의 본거지로 청국 최고의 실권자 북양 대신 이홍장이 있는 곳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이홍장과 친분을 쌓게 되고, 이홍장도 묄렌도르프를 친구라 부르며 신뢰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독일 본국에서는 톈진 정식 영사를 파견, 묄렌도르프는 또 다시 통역관으로 좌천되었다(1881년). 이에 묄렌도르프는 사표를 던지고 이홍장의 밑으로 들어갔지만 사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본디 10년 계약직이었다고 한다.)
1881년 당시 조선은 해관을 설립하고자 하고 청에 청인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청국인보다 서양인이 나을 것이라 하여 서양인 고문 고용을 권고하였다. 물론 개항(2차)도 하지 않고 있던 조선이 이를 받아 들일 리가 없었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북양 아문은 새로 들어온 서양인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준비시켰다. 조선이 서양인 파견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그 달포가 지난 1882년 8월의 일이었다.
2.2. 조선으로
묄렌도르프는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해관 설립을 위해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1882년 12월, 사표가 수리되고 묄렌도르프는 탕사오이 등을 수행원으로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하였다. 묄렌도르프를 맞이하기 위해 현직 병조 판서[6]가 톈진으로 갔을 정도이니 조선이 묄렌도르프에 건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일도 일이었으나 이홍장의 부하로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유지하는 임무 또한 띠고 있었다.출발 전 이홍장이 "조선에서 국왕에게 무릎을 꿇겠느냐"고 하자 묄렌도르프는 "대인 앞도 아닌데 그렇겠습니까"고 답했다. 물론 고종을 알현하자 묄렌도르프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묄렌도르프는 고종을 만나 이야기하고는 각종 특권을 부여받고 통리 아문 참의[7], 조선 해관 총세무사[8]에 임명되고, '목인덕(穆麟德)'이란 이름을 썼다. 협판은 곧 참판급이었기에 조선에서 묄렌도르프는 목 참판으로 통했다. 이후 3년간의 조선 생활에서 많은 일을 하게 된다.
2.3. 조선 해관장으로서
묄렌도르프는 청국 해관을 본떠 조선 해관을 만들었다. 상하이에서 서양인들을 끌어 모으고[9] 제물포( 인천), 원산에 해관을 설립해 조선 해관의 기틀을 갖추었다.해관장으로서 묄렌도르프의 롤 모델은 상술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외교관 로버트 하트였으며, 그를 본떠 직위도 I.G.(Inspector General)로 칭하였다. 물론 하트는 청국 속방의 해관장 따위가 본인과 동급이 되려 한다고 분노하였고[10] 이후 묄렌도르프가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여튼 해관에서 발생한 관세 수입은 조선 총 수입의 1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2.4. 전환국 총판[11]으로서
그 외 묄렌도르프가 조선에서 얻은 주요 직위로 전환국 총판이 있다.1883년 당시 조선은 잇다른 개화 정책의 시행으로 극도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두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1. 당오전을 제조한다. (친청파)
2. 차관을 얻어서 금본위제도로 전환한다. (친일파)
당연히 이홍장의 앞잡이였던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본위제로 전환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여서, 그 필요성은 이해했지만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한 고종의 결단은 둘 다 한다. 따라서 300만 엔 차관 얻어오라고 김옥균을 일본으로 보내는 한편[12], 당오전도 만들었다.[13] 그리고 금본위제 전환을 위해 신식 화폐 제조국을 만드니 그것이 전환국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세창양행[14]을 통해 화폐 주조기를 사오고, 서양인 기술공을 고용하여 1884년에는 시범으로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환국은 묄렌도르프 실각 후 위태위태하다가 금본위제에 기반한 근대적 화폐 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는 뒤로 하고 악화인 백동화를 발행하게 되었고, 이후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회수된다. 사실 화폐 정리 사업 문서의 배경에도 적혀있지만, 조선과 이어진 대한 제국의 경제력으로는 금본위 제도나 은본위 제도를 지탱하는데 필수적인 귀금속의 양이 태부족이었다.
2.5. 교섭 통상 사무 아문 참판으로서
묄렌도르프는 새로 부임한 미국 영사를 맞이하고, 영국, 독일과의 재협상[15]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고 프랑스, 오스트리아와도 조약 체결을 준비하였다.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묄렌도르프는 본인 커리어에 치명타가 될 조약을 준비하였다. 고종의 인아거청책[16]의 시행자가 되어, 갑신정변의 수습을 위해 일본에 갔다가 러시아와 밀약을 맺으려 시도했던 것. 이것이 제1차 조러 밀약설이다.(사실 묄렌도르프의 생각이기 이전에 고종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 밀약에는 조선은 러시아에 영흥 만(곧 원산)을 조차하고, 러시아는 조선에 장교와 부사관을 파견해 조선군 육성을 돕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에 영국이 강하게 반발하여 거문도 사건[17]을 일으키고, 이홍장도 격분하였으며 일본도 반발하였다. 결국 이 조약으로 묄렌도르프는 청국에 소환당하게 된다.
2.6. 실각 그 후
묄렌도르프가 비밀리에 체결한 조러 밀약이 알려지고 나자 국제 정세가 요동쳤다. 특히 청의 분노는 격렬하였다. 고종은 청에 묄렌도르프가 시켜서 이렇게 됐다고 변명하고 그의 소환을 요청하여 묄렌도르프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이후 그가 맡았던 직위(외교부 차관, 해관 총세무관, 전환국 총판)는 세명의 다른 외국인에게 나누어진다. 다음과 같다.
- 외교부 차관 - 미국인 고문 데니[18]에게 주어졌다.
- 해관 총세무관 - 당장은 영국인 메릴이 임명되었으나, 사실상 조선 해관 자체가 청국 해관의 산하로 편입되었다.
- 전환국 총판 - 묄렌도르프가 고용했던 주조 기술자 클라우스에게 주어졌다.
청에 돌아간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의 막료로 일하였다. 이후 데니가 제 2차 조러 밀약[19]으로 위기에 몰리면서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다시 보내려고 했는데 하트가 반대하고 그 와중에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가 고종을 설득하여 데니가 유임되면서 무산되었다.[20]
그 후 말년은 청의 저장성 닝보시에서 보냈다. 1898년부터 닝보 공공시정위원회의 주석을 맡으며 강변을 개발했는데, 오늘날 라오와이탄(老外灘)이라고 부르는 그 곳이다. 1901년 조선에 돌아갈 기회가 생겼으나, 닝보에서 위경련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상하이의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21]
3. 여담
-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안경을 썼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국왕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묄렌도프프가 안경이 없어서 매우 불편해하는 것을 본 고종은 자신 앞에서도 특별히 안경을 쓸 수 있도록 허가했다.
- 독일 라이프치히 민속박물관에는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머물던 시절 수집한 조선 유물들이 상당수 소장되어 있다.
- 중국 닝보시의 라오와이탄 역사전시관은 묄렌도르프를 라오와이탄의 설계자로 기리고 있다. 깨알 같은 점은 그의 조선 경력을 언급하진 않지만 이름을 목인덕(穆麟德/무린더)으로 표기함은 물론 서양 복식도, 청의 복식도 아닌 아닌 조선 관복을 입고 있는 이 문서의 대표 사진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22] 큰 규모의 전시관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유흥상권인 라오와이탄에서 유독 눈에 띄긴 한다. 천주교 성당과 상권 사이 고가도로 밑에 있어서 눈에 바로 띄진 않는다.
- 만주어 연구에 엄청난 공을 세웠으며 만주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법도 그가 만들었다. 그가 모은 중국과 조선 관련 서적들은 근래에야 드러났는데 이런 것들로 볼 때 그의 적성은 외교나 정치보다는 학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어 이야기처럼 언어에 굉장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한양까지 내려올 때 거쳐온 지역의 사투리를 모두 익혔다는 야사도 있다.
-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앨버트 테일러, 호머 헐버트 등 서양인으로써 조선을 위해 일한 사람 중 1명이며 조선의 국익을 위해 일한 서양인 중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만 조선인들을 사랑해서 한 행위거나 도덕적 신념에 의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보이며 단지 자신에게 부와 권력을 준 조선에 대한 쌍무적 계약 관계 느낌의 충성이었다고 보인다. 다만 데니와 달리 청조로부터의 독립은 조선의 멸망을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는데, 그를 그 자리에 앉혀준 것이 청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청일전쟁 이후를 보면 완전히 틀린 판단도 아니긴 했다.[24]
4. 대중매체에서
- 2001년 KBS 드라마 < 명성황후>에서는 독일에서 귀화한 인물인 이참이 연기하였다.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른 선역으로 둔갑하여 끝까지 조선의 편에서 일하다가 일본 정부가 파견한 자객에 암살당하는 비운으로 생을 마감한다.
- 대체역사소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청나라를 위해 일했지만 조선에서 봉급을 받자 조선을 위해 일하는 유능한 관료의 모습을 보여준다. 프로이센식 개혁안을 조선에 접목시키려고 하며 완화군과 함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5. 관련 문서
[1]
이 사진은 조선으로 파견되기 전,
톈진에서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당시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겨울 관복을 입고 관모 밑에
이엄을 쓰고 있다.
[2]
독일 통일 전에 태어난 사람이다.
[3]
이런 신분 때문에 훗날 조선의 친러 정책의 질책으로 청나라에 소환당하게 된다.
[4]
청나라에서는 고작 하급에서 중급 관리로 써준 것에 비하여 조선에서는 실권을 몰아주고
당상관으로 높이 써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5]
현대의
독일
브란덴부르크 주에 속한다.
[6]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
[7]
곧 협판으로 승진. 외교부 차관.
[8]
관세청장. 물론 해관은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9]
여기에 끼어 있던 인물로
아파나시 세레진사바친이 있다. 본디 러시아 공병 부사관 출신인 사바친은 국내에 들어와 건축가로 대활약하였다.
[10]
하트는 조선 해관이 당연히 청국 해관 산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묄렌도르프는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
[11]
오늘날로 따지면
조폐공사 사장
[12]
그러나 차관은 못 받아왔다. 300만 엔은 당시 일본 기준으로도 워낙 거금이라 애초에 무리한 계획이었다.
[13]
이쪽도 대원군의
당백전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발상이므로 당연히 폐해가 컸다.
[14]
이름은 조선회사 같지만 독일 회사다. 묄렌도르프의 후원으로 제물포에 진출하였고, 이후 각종 근대 문물(
군함도!)을 수입하는 창구가 되었다.
[15]
양국은 청이 맺어준 조약이
일본의 조약에 비해 불리하다고 불만을 표하였다.
[16]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한다는 계책.
[17]
당시
거문도는 동양의 유용한 항구 입지로 주목받는 곳이었다.
[18]
데니 태극기의 그 데니 맞다.
[19]
사람 바꿔서 두 번이나 이런 걸 보니 인아책이 고종의 의중이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20]
이는 묄렌도르프가 실각한 후
비스마르크 체제가 무너지면서 러시아가 더이상 독일인을 믿지 못하게 된 것도 한 몫 했다. 일본은 애초부터 묄렌도르프를 싫어하는 입장이었고.
[21]
독일에 있던 아내에게 전보를 보내고, 외교 클럽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위경련이 발병하여 숨을 거뒀다.
[22]
사실 당대 청은 그를 "莫勒德夫(막륵덕부/모레더푸)"라고 좀더 원어에 가깝게 표기했다. 목인덕이란 이름을 쓴다는 자체가 그의 조선 경력의 산물이다.
[23]
폴 조지를 독일식으로 읽으면 파울 게오르크가 된다.
[24]
다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조선의 국익을 위해 일한 것을 보면 조선의 고관으로써의 책임감은 진정성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