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9:51:33

삼학사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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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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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충렬각

1. 개요2. 배경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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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익한: 신이 들으니, 지금 용호(龍胡)가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중략) 우리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소문이 나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를 섬기며 편안함을 취해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을 연장해 가고 있으나, 조종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천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후세에 대해서는 어쩌겠습니까.

(중략) 그들이 맹약을 변경하고 흔단을 연 것은, 우리를 호통하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리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장차 천하에 일컫기를 ‘조선이 우리를 높여 천자로 삼았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그 국서를 취하여 사신의 머리를 함에 담아 명나라 조정에 주문한 다음 형제의 약속을 배신한 것과 참람하게 천자의 호를 일컫는 것을 책하면서 예의의 중대함을 분명히 말하고 이웃 나라의 도리를 상세히 진술한다면, 우리의 설명이 더욱 펴지고 우리의 형세가 더욱 확장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힘써 분발하고 큰 용기를 더욱 떨쳐서 빨리 관(館)에 있는 노사(虜使)를 잡아다 큰길에 늘어 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를 가하소서. 만일 신의 말을 망령되어 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신의 머리를 참하여 오랑캐에게 사과하소서.
인조실록 인조 14년(1636) 2월 21일 기사 #

三學士

조선 병자호란 시기에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 뒤 중국 선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윤집(尹集 1606~1637), 오달제(吳達濟 1609~1637), 홍익한(洪翼漢, 1586. 11. 22 ~ 1637. 3. 5)[1] 등 학사 3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수록되었는데, 이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2. 배경

1636년 12월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을 때 최명길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한 주화파와, 김상헌을 중심으로 결사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와의 의견이 서로 대립하여 충돌하였는데, 결국 주화파의 주장이 승리하였다. 솔직히 대포알이 남한산성 안으로 날아들고 장수들은 척화파 놈들 죽이라고 시위를 해대고 식량도 떨어져가고 근왕병들은 모조리 패퇴하고 강화도까지 함락당한 마당에 척화파가 승리할 수도 승리해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그 후의 일은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결국 척화론의 주모자로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 사람이 끌려나왔는데, 선양에서의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1637년 2월 선양으로 끌려온 홍익한은 용골대가 "너의 나라 신료들 가운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퍽 많은데 어찌 유독 너만 끌려왔는가?"라고 묻자,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라고 응수했다. 이에 용골대는 웃으며 가버렸다. 청태종은 홍익한을 회유하려고 했는데 과거 수많은 명나라 유신들을 받아들였고 조선의 척화파까지도 은덕으로 감화시켰다는 소문은 향후 조선을 제어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익한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청태종은 곧바로 그를 처형했다. 윤집, 오달제는 후발대로 그해 4월 선양에 끌려왔는데 청태종이 용골대에게 이들을 회유시키라고 지시했다.

용골대는 이들에게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너희들의 충성이 가상하니 조선의 가족들을 불러와 선양에서 사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우리가 예까지 끌려와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은 다시 고향 산천에 돌아가 주상과 노모를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뿐이었으며 이것이 안된다면 죽느니만 못하니 얼른 죽이라고 용골대에게 호령했다. 이에 용골대는 '정히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라고 안타까워 하면서 선양 서문에서 그들을 참수한다. 하지만 청나라에서는 반청의 상징인 이 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뼈들이 쌓여 있는 선양 형장에서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서, 집안에서는 집안의 종들을 시켜 초혼하여 온 다음 유품들을 묻어 가묘를 만들었다.

이들이 남한산성 밖으로 나오는 과정은 사뭇 감동스럽기까지한데 청에서 강화 조건으로 척화신들을 내보내라고 하자 이들은 즉시 앞으로 나서서 자신들이 지난날에 최명길의 주장을 비판했으니 "신들을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내 한번 칼날을 받게 하소서"라며 죽음을 자청했다. 이조참판 정온, 예조판서 김상헌 등도 자신들을 청나라에 보내 죽게 할 것을 청했고 소현세자도 설사 일이 잘못되어 자신이 죽는다하더라도 자신에겐 아들도 있고 동생들도 있으니 걱정이 없을 것이라며 자신을 청에 보낼 것을 묘당에 요구했다.

이에 조정은 소현세자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충신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 수는 없다며 청의 요구를 거부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여 이들이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전황이 날이 갈수록 불리해지고 식량도 바닥을 보이자 수원부, 훈련도감, 어영청의 장수들이 대전을 포위하고 척화신을 내보낼 것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윤집과 오달제가 청나라에 보내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와중에도 세자를 청에 보내면 안된다고 간하며 감동을 먹은 인조가 "죽으러 가는 와중에도 나라를 걱정하는가? 그대들의 처자는 기필코 잘 돌봐줄 것이니 걱정 말라" 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당대 척화파라는 인간들은 정온 같은 인물 정도를 제외하면 전쟁 준비도 제대로 해 놓을 생각이 없던 주제에 대청 강경론만 고집스럽게 외치다가 참패를 불러온 한심한 인간들이 대부분이었고, 사실 삼학사 역시 행적으로 볼 때 대다수의 척화신들보다 딱히 식견이 밝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바치던 최명길을 공격해서 정치적 운신폭을 좁힌 자들인 만큼 패전의 책임이 다른 척화신들보다 적다고 보기도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이들이 다른 척화신들보다 좋게 평가받을 여지가 있는 것은, 최소한 이 셋은 패전 이후로는 최명길이 옳았고 자신들이 틀렸음을 깨닫고 스스로 압송을 자처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이들을 비롯한 척화신들의 트롤짓으로 나라가 망할 뻔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니만큼 스스로의 목숨값 정도로 죄를 청산했다고는 절대로 볼 수 없지만, 당대 조정에는 딱히 잘한 것도 없는 주제에 이 정도 책임을 지려는 행동조차 보이지 않는 자들이 비일비재했다. 즉 능력도 책임의식도 수준 이하였던 자들이 대부분이던 당대 척화신들 중 그나마 책임의식만이라도 모범이 될 만한 이들이 이 삼학사였던 것이다.

3. 여담

  • 이들은 죽고나서 충절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내내 숭앙되었다. 위패가 여러 사원에 제향되었으며 그 유족과 후손들도 모두 우대 받았다. 국립부여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의 관장을 역임한 홍사준은 홍익한의 11대손이다.
  • 오달제가 처형되기 전에 시를 써서 노모와 형에게 부쳤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하였다. 이 글을 듣고 조선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실록

4. 관련 문서



[1] 초명 홍습(洪霫). [2] 1980년 3월 10일 홍사구와 18촌 지간의 족손(族孫) 홍승원(洪承遠, 1950. 12. 21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08년 5월 30일 홍승원의 첫째 남동생 홍승호(洪承鎬, 1952. 4. 3 ~ )의 장남 홍성화(洪聖和, 1982. 2. 28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