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국민정부 소공군 제5종대 지휘관 중화민국 9전구 사령장관 중화민국 광동성 정부주석 쉐웨 薛岳(설악) | Xue Y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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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 薛岳 |
한국식 독음 | 설악 |
영문 | Xue Yue |
자 | 백릉(伯陵) |
출생 | 1896년 12월 26일 |
청나라
광동성 악창현 (現 중국 광둥성 사오관시 러창시[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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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8년 5월 3일 (향년 101세)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학력 | 바오딩 군관학교 |
직업 | 군인, 정치가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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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 초공작전과 중일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일본군을 가장 많이 죽인 중국 군인이라고 일컬어졌다.쑨원의 동향인으로써, 초년부터 쑨원의 진영과 국민당에 가담해 그에게만 절대적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에게는 초기에 반목했다. 그리하여 그는 장제스 직계가 아니라 국민당내의 비장제스계 군벌로 간주된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퇴하자,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도피했으나, 대부분 대만으로 도피해온 군벌들이 그렇듯이 철저히 실권에서 배제되었고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별명은 아시아의 조지 패튼.
20세기 초반을 주름잡던 중국의 역사인물 중에서 장쉐량과 함께 100세 이상 장수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6년 12월 26일 청나라 광동성 악창현(현 중국 광둥성 사오관시 러창(乐昌)시)의 객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악비(岳飛:웨페이)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을 岳이라고 지었다고 한다.어렸을 때부터 애국심에 불타서 13세에 이미 쑨원이 지도하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황포육군소학교[2]를 거쳐 1917년 바오딩 육군 군관학교에 진학했다. 훗날 국민당의 적인 공산당에 가담해 적이 되는 예팅과 황포초등학교부터 바오딩 군관학교까지 같이 공부했고, 동갑, 동기, 동향인으로 매우 친했다고 한다.[3] 군관학교 졸업후 쑨원이 조직한 민오군(푸젠-광둥군)에 입대하였고, 쑨원의 경호대를 맡았다.
2.2. 북벌 및 중원대전
1922년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쉐웨는 쑨원을 먼저 탈출시킨 다음에 총통부를 근거지로 천중밍 군대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를 경호하여 탈출했다. 쑨원 사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사단장으로 참여했으나,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공산당과 합작을 깨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데, 그들을 굳이 죽이는 것은 반대한다"며 우한 국민정부의 4집단군 2방면군 총사령관 장파쿠이 휘하에서 장제스측과 여러번 전투를 했다. 1927년 11월 17일 장파쿠이 밑에서 장황사변에 참여했으나 12월 11일 중국공산당이 광저우 폭동[4]을 일으키자 리지선 부대와 합세, 진압을 맡았다.중원대전이 발발하자 북평 국민정부 산하, 리쭝런과 바이충시, 황소횡이 지휘하는 제1방면군에 가담했으며 제1로군 총지휘 겸 4군 군장 장파쿠이 밑에서 12사단장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중원대전에서 반장진영은 참패했고, 이후 반장진영측 인물은 모두 장제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쉐웨도 장제스 측으로 귀순했고, 장제스는 쉐웨를 거두어서 제4군 군장으로 임명한다.
2.3. 초공작전
초공작전때 쉐웨는 용맹을 떨쳤다. 결국 홍군이 제5차 초공작전에서 패퇴하고 대장정을 떠나자 쉐웨는 마오쩌둥의 홍군 제1방면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홍군은 쉐웨를 "장정 최대의 적(長征頭號敵人)"이라고 무서워했으며, 마오쩌둥도 부하들에게 "쉐웨의 부대를 만나면 특히 조심해라"고 경고했을 정도. 1934년 11월 후난성을 지나는 홍군 제1방면군을 6일 동안 포위하여 맹공을 가해 대장정 출발시 8만 6천이던 홍군 제1방면군을 3만으로 감소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도하작전 때마다 중공측은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후에 사도적수(四渡赤水:네번 핏물을 건너다)라고 장정중 가장 큰 시련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홍군이 도하작전 중 수많은 피해를 낸 상강에는 워낙 시체가 쌓여서 며칠동안 핏물이 흘렀으며, 그 지역 사람들은 몇년간 그곳에서 물이나 생선을 안먹을 정도였다고 한다.하지만,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부는 이런 손실에도 포위망을 뚫고 쓰촨으로 대장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는 쉐웨의 실책이 아니라, 쓰촨성과 구이저우성 군벌들이 기본적으로 공산군보다는 쉐웨군(장제스의 중앙군)을 더 불신했기 때문에, 초공작전에서 태업을 벌이거나 오히려 홍군의 도피를 도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의 우려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 명목으로 구이저우성까지 들어온 중앙군을 지휘한 쉐웨를 그곳의 주석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난징 정부의 행정력이 서남부까지 확대되었고, 주변에 있던 군벌들과 중앙정부의 알력은 심화되었다.[5]
2.4. 중일전쟁
1937년 구이저우성 주석으로 임명되어 정치가로 변신했지만, 곧 중일전쟁이 터졌다. 쉐웨는 천청이 지휘하는 좌익의 한 부대를 맡아 제2차 상하이 사변에 참전했지만, 일본군은 강력했고 결국 중국군은 참패했다. 이어 쉐웨는 우한 전투, 쉬저우 전투, 창사 전투에 계속 참전했다. 1938년 벌어진 우한 전투에서 중국군이 패하기는 했지만, 9전구 사령관을 맡았던 쉐웨는 우한 남쪽의 장시성 완자링에서 일본군 106사단을 포위 섬멸[6]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1941년에는 후난성 주석이 되었고, 창사 전투에서 충칭을 노리고 진격하는 일본군을 격퇴해서 충칭을 방어했다. 하지만 1944년 대륙타통작전에서는 일본군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일단 창사와 헝양을 내주고 내륙으로 후퇴했다. 이어 난창을 방어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한편, 그는 1945년 7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서 부대 활동 경비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여 자금을 대주었고, 특히 1944년부터 1945년 종전 시까지 적잖은 조선 출신 학병들이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일부는 국민당 중앙군, 일부는 공산당 팔로군 측에 인계되었는데, 쉐웨는 국민당 중앙군 측에 수렴된 인원들의 한국광복군 편입을 장려하여 그 수가 120명에 달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과 자주 회합하여 미국 OSS와의 공동작전 투입 여부 등을 논의하기도 했고, 이에 필요한 훈련 및 이동 등 제반 사항을 지원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의 지원 공적으로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2.5. 제2차 국공내전
1946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쉐웨는 쉬저우 수정공서(綏靖公署)[7] 주임으로 임명했고 100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화동( 산둥성에서부터 푸젠성까지의 중국 동부)의 공산군을 소탕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1947년 1월 천이(陈毅)와 쑤위(粟裕)가 거느린 인민해방군 화동야전군에 참패했고, 이때 장제스가 아끼던 기계화부대를 대거 상실해 장제스의 격노를 사서 해임되었다. 그의 부대는 총참모장을 맡고 있던 천청이 겸임하게 되었고, 쉐웨는 산둥성 라이우(莱芜)에서 쑤위군과 다시 회전을 벌였지만 다시 참패하였다. 장제스는 이 참패에 다시 쉐웨를 해임했다. 쉐웨는 이후 야전직에 나서지 못하고 후방으로 가서 총통부 참군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거듭되는 참패 때문에 장제스가 총통에서 사임하고 1949년 1월 부총통 리쭝런이 총통 자리를 인계하자, 리쭝런은 친분이 깊었던 쉐웨[8]를 광둥성 주석에 임명했다. 하지만 쉐웨가 광둥성을 다스릴 기회도 없이 전황은 더욱 악화되어 공산군은 4월 난징을 함락시키고, 10월에는 광저우를 함락시켰다. 쉐웨는 하이난도로 피신했으나, 하이난도도 1950년 4월 함락되었다.
2.6. 국부천대 후
1950년 4월 쉐웨는 대만으로 도피했고, 이후 장제스는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혹은 리쭝런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을 따라온 것을 고맙게 여겼는지 국공내전에서 참패를 거듭한 쉐웨를 대장(1급상장)으로 승진시켰다. 하지만 대만에서 실권은 없었고, 그저 총통부 전략고문, 행정원 정무위원이라는 유명무실한 직책만 맡았다. 이어 별다른 활동없이 지내다가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자 장례위원장을 맡았다.1998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대만의 리덩후이 총통은 쉐웨를 위해 추도사를 발표했다.
3. 가족
- 일부다처와 첫째 부인이 아이를 못낳으면 둘째부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20세기 초반의 중국의 관습에 따라서 아내가 둘이었다. 첫번째 아내가 아이가 없어서 비서였던 여자를 둘째 아내로 삼았다. 둘째 아내가 사망한 후 나중에 다시 세번째 아내를 두었는데, 나이 차이가 30세(...)였다. 둘째부인과 5명, 셋째부인과 4명, 총 9명의 자녀를 두었다.
- 딸 스징핑(蒒敬平)은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유일한 박사의 장남 유일선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 낳은 딸이 유은영(柳恩令, 류언링)으로 유일한 박사가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 학자금 명목으로 1만달러를 유산으로 남긴 손녀로 유명하다. #
4. 기타
-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국민당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948년 장징궈의 주도로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라 불리는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모든 시민은 금은이나 귀금속을 신권화폐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인플레이션은 국민당의 과도한 전비지출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전비지출을 줄이지 않으면 설령 화폐개혁을 하더라도 금세 인플레이션이 재발할 것이 분명했다. 광서군벌의 한명이었던 황샤오훙은 쉐웨에게 보유하고 있던 금을 모두 신권으로 안바꾸면 법에 저촉된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쉐웨는 "이 돈은 나와 내 부대가 피로 번 돈이다. 절대로 못바꾼다"고 버텼다. 과연 1년안에 신권은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었다.
-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의 조지프 스틸웰 대장은 쉐웨를 무능하고 부패한 전형적인 중국 장성으로 봐서 특히 쉐웨와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플라잉 타이거즈를 지휘하던 다른 미국 장성인 클레어 셰놀트 소장은 쉐웨를 높이 평가했고 사이가 좋았다. 1938년 일본군을 전멸시킨 완자링 전투는 셰놀트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만 시절에도 셰놀트는 쉐웨를 만나러 개인적으로 대만을 방문했을 정도였다.
- 조지 패튼이라는 별명이 붙기는 했지만, 쉐웨는 돌격형 맹장이라기보다는 전술형 지장에 가까웠다. 항일전쟁 당시 어려가지 전법을 사용해서 일본군을 골탕먹였는데, "천로전법(天爐戰法)"[9]과 "8자구대전법(八字口袋戰法)"[10]과 같은 전법은 나중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도 사용하여 크게 효과를 보았다.
5. 매체에서
호이4에서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오기 이전까지 등장한 거의 유일한 국민혁명군 장성이었으나[11] 웬 듣보잡 사진을 쓰고 있었다. Waking the Tiger가 발매된 이후로는 실제 고증에 맞춘 초상화를 가지게 되었다.
[1]
乐昌市.
[2]
황포군관학교와는 다른 곳이다.
[3]
예팅(1896-1946)은 홍군의 거두로서 1946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인민해방군 원수가 되었을 것이 확실했던 인물이다. 홍군에서 펑더화이, 린뱌오, 류보청 다음의 서열을 가진 인물이었다.
[4]
한국인 독립운동가인
김산도 이 봉기에 참가했다.
[5]
결국 국공내전 말기 이곳의 군벌들은 대부분 인민해방군 편을 들어 공산당에 투항한다.
[6]
12000명의 사단 정원중에서 사상자 11000명.
[7]
수정공서란 국공내전 당시의 국민당이 임시로 설치한 행정조직으로, 여기 책임자는 군권와 행정권을 동시에 행사했다.
[8]
하지만 1947년 선거에서 쉐웨는 부총통 자리에 리쭝런이 아니라 쑨원의 아들인
쑨커를 지원했다.
[9]
적을 화망으로 유인해서 포위 섬멸하는 방법.
[10]
八자형으로 된 포위망을 적에게 벌린 후에 적이 포위망에 들어오면 닫아버려 섬멸하는 방법.
[11]
두위밍, 다이안란 등이 나오긴 했는데 전부 버마 방어전에 참가하여 서양에 이름이 알려졌다 뿐이지 실제 국민혁명군 내부에선 큰 비중이 없던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