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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절전쟁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참고 문헌6. 관련 문서

1. 개요

안휘군벌인 절강독군 루융샹 직예군벌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말한다. 1924년 9월 3일부터 1924년 10월 13일까지 지속되었으며 직예군벌이 승리하였지만 이 전쟁 때문에 일어난 2차 직봉전쟁에서 패배하여 천하의 패권을 상실한다. 루융샹 치셰위안 사이에서 주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의 성을 따서 1차 제노전쟁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920년 안직전쟁 이후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하야하고 쉬수정 등 안휘파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는 등 환계는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잃고 몰락했다. 하지만 절강성과 상하이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환계 세력들이 지배하는 세력들이 있어 환계가 그 힘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루융샹은 1915년 10사단장 겸 송호순열부사가 된 이래 1917년 송호순열사로 승진했고 1920년 절강독군에 임명되어 부유한 절강, 항저우, 상하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다시 직예군벌이 승리하고 대총통 쉬스창이 축출되고 구국회가 복구되면서 리위안훙이 다시 대총통에 취임했지만 직계가 국회를 복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직계의 수령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추대하기 위한 중간단계에 불과했다. 1923년 6월, 직예군벌은 군비 등을 이유로 리위안훙을 압박하며 하야를 강요했고 분노한 리위안훙은 6월에 하야했다. 1923년 10월, 직예군벌은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 선거를 통해 차오쿤을 6대 대총통에 당선시켰다. 이에 절강독군 루융샹은 1923년 10월 12일, 뇌물 선거로 당선된 총통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중앙과의 공문서 왕래를 정지시켰다. 이 소식을 듣고 쉬수정을 비롯한 환계의 잔여세력과 반직 세력들, 회선에 반대한 국회의원들이 항저우, 상하이에 집결하여 반직의 중심지가 되었고 봉천군벌, 중국국민당, 안휘군벌 사이의 반직삼각동맹을 형성하기 위한 중계지가 되었다.

직예군벌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위협 때문에 절강성을 놔둘 수 없을 뿐더러 직예군벌인 강소도독 치셰위안은 상하이가 강소성에 속함에도 루융샹이 절강독군으로 상하이를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부유한 상하이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루융샹과 직예군벌의 충돌은 사실상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3. 전개

그러던 중 1924년, 리허우지의 부하였던 복건의 장치평과 양화소가 직예군벌에 의해 복건에서 축출되자 강서성을 거쳐 루융샹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루융샹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 휘하 병력을 절강 변방군 4혼성여단으로 편제했는데 그 수가 1만에 이르렀다. 절강성의 병력이 확충되자 직예군벌은 큰 불안을 느끼고 절강성을 제압해야 한다고 여겨 강소, 안휘, 복건, 강서를 연계하여 절강성을 치고자 했다.

우선 복건독군 쑨촨팡이 민월변방독판에 임명되어 절강과 광동의 연계를 막았고 주음인이 복건독군으로 임명되어 절강성을 압박하게 했다. 치셰위안이 4성 연군 사령관에 취임, 마침내 4개 성 방면으로 일제히 절강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면서 1924년 9월 3일 강절전쟁이 시작되었다. 루융샹은 송호연군총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상하이 용화에 연합군 총사령부를 설치, 허펑린을 1군 총사령관에, 진락산을 2군 총사령관에, 장재양을 3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치셰위안, 쑨촨팡의 병력에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장쭤린은 크게 반발하여 9월 4일 여단장 이상 고급장령들을 소집하여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출병을 위한 진위군을 편성하고 차오쿤 앞으로 전문을 보내 직계를 비난하고 루융샹을 옹호했다.
금년에는 천재지변이 많아 기아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이 들판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찍이 절강 토벌은 불가하다고 전언하여 평화에 주력하겠다는 답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전쟁 개시 명령이 나갔습니다. 동시에 또 봉천으로 들어오려는 산해관 열차를 억류하여 교통을 두절시킨 것은 과연 무슨 뜻이온지요? 귀하께서 근년에 우페이푸 괴뢰를 위해 많은 민원을 야기시키고 (...) 그래서 비행기를 귀하의 처소에 보내 문의하려고 하며 전투 태세를 갖추고 최후의 회답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3군 동원령을 선포하여 백성들의 적을 쓰러트리고 전국 평화의 장애물을 제거할 것입니다.

또한 루융샹이 있는 항저우에 사람을 보내 자신이 관내에 진출하여 응전할 것이라며 300만원의 군비를 지원했다. 광저우의 쑨원도 대본영에서 회의를 열고 북벌을 결의하여 소관으로 대본영을 옮기고 탄옌카이를 북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절강을 돕고 광동을 지키자"라고 구호를 내걸어 북벌을 선포했다. 9월 5일에는 "차오쿤과 우페이푸 토벌"을 선언하고 북상했지만 광저우 상단 사건 등이 터지면서 북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한편 열강은 교민 보호를 이유로 상하이에 27척이나 되는 군함을 진주시켰다. 이때 쉬수정이 상하이에서 강소-절강 연합사령관에 취임하여 환계의 재기를 도모했으나 열강이 상하이에서의 군사행동을 금지하며 개입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외유를 떠나야 했다.

루융샹은 초기에는 치셰위안의 공격에 맞서 분전했으나 차오쿤이 9월 7일 우페이푸의 청에 따라 루융샹 토벌령을 하달, 쑨촨팡이 9월 8일 남방에서 가세하면서 전황은 루융샹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9월 9일 돤치루이가 루융샹을 옹호하며 장쭤린에게 차오쿤이 4개 성을 끌여들어 절강성을 공격함으로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전문을 보냈다. 9월 중순, 쑨촨팡이 절강성으로 진격하여 구주를 점령하고 9월 20일 절강독군 겸 민절순열사에 임명되었다. 9월 18일에 항저우가 포위되어 9월 23일에 함락되었고 루융샹은 긴급히 서양제 장갑차를 수입하여 전선에 투입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으며, 치셰위안의 사령부가 위치한 곤산을 공격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곤산 점령에 실패했다. 결국 절강군 제1혼성여단이 직예군벌에 투항하면서 10월 9일 상하이 남부의 송강이 함락당하자 절강군은 당황하여 붕괴되기 시작했다. 루융샹은 패전하여 10월 13일 하야를 통전하고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 10월 23일 치셰위안이 상하이에 입성하면서 강절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4. 결과

하지만 9월 13일 장쭤린은 경봉선 열차 운행을 중단시키고 동맹인 절강을 돕겠다는 이유로 9월 15일에 산해관과 열하로 6개군, 25만 대군을 출병시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차오쿤은 9월 10일 우페이푸를 베이징에 불러들인 후, 9월 17일 우페이푸를 토역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장쭤린 토벌령을 내림으로 2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다. 허나 직예군벌은 와신상담하며 군대를 조련시킨 봉천군벌을 상대로 고전했으며 그동안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펑위샹이 장쭤린과 내통하여 북경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2달 만에 패배하고 천하의 패권을 내주어야 했다.

루융샹은 북경정변 이후, 1924년 10월 29일 봉천을 통해 귀국하여 12월 임시집정 돤치루이로부터 직예군무선후독판, 소환선무사(蘇晥宣撫使)에 임명되었고 돤치루이는 치셰위안을 면직, 강소성장 한국균이 겸직하게 했다. 1924년 12월, 루융샹은 선무군을 조직하여 강소군무독판에 스스로 취임하여 2차 제노전쟁을 통해 치셰위안을 축출하고 4월에 강소독판이 되었으나 8월에 남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봉천파의 압력으로 하야해야 하고 양위팅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5. 참고 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