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1b> 건국월군 총사령관 | ||
정체 | 楊希閔 | |
간체 | 杨希闵 | |
한국식 독음 | 양희민 | |
영문 | Yang Ximin | |
자 | 소기(紹基) | |
출생 | 1886년 | |
청나라 운남성 빈천현 | ||
사망 | 1967년 1월 30일 (향년 80세) | |
중화인민공화국 윈난성 쿤밍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강서강무당 | |
직업 | 정치가, 군인 |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전계군벌의 일원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으나 국민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2. 생애
1886년 운남성 빈천현에서 태어났다. 1909년 운남육군강무당에 입학했으며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생도의 신분으로 쿤밍에서 차이어가 일으킨 중구봉기에 참여했다. 이후 전군 제1단에 편성되어 사천성에서 청군과 교전하였다. 중화민국 성립 후인 1912년, 강서 강무당으로 진학하여 1913년 졸업했다. 이후 강서 보병 제3여단에 배속되었으며 이때는 쑨원을 열렬히 숭배했다. 리례쥔 휘하에서 계축전쟁에 가담했으나 강서성 호구에서 펑궈장의 군대와 싸우다 참패하고 운남성으로 도주하여 전군에 입대했다.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나자 탕지야오의 부하 나패금 밑에서 참전하여 사천성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며 호법전쟁 이후 사천성에 주둔한 전계군벌인 주천전군에 배속되었다. 1921년, 사천군벌들이 주천전군을 요격하면서 주천전군은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주천전군 1군 군장 구핀전은 병력을 이끌고 운남성으로 회군하여 탕지야오를 축출하고 운남성의 대권을 차지하였다. 양시민은 휘하에서 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탕지야오의 반격으로 구핀전이 사망하면서 양시민은 잠시 탕지야오의 휘하에 남았으나 탕지야오가 쑨원과의 화해를 추구하면서 1922년, 주천전군 부군장 장개유와 2여단장 김한정의 통솔 하에 운남성을 빠져나가 광서성으로 향했다. 이들은 광동의 쑨원에게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1923년, 양시민은 다른 여단장들을 포섭하여 장개유를 축출하고 주천전군의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광동에서는 1922년,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축출하였는데 쑨원은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며 천중밍을 광저우에서 몰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양시민은 부유한 광동의 재물을 노리고 쑨원에게 호응하여 서로토적군 사령관에 취임, 계계군벌 유진환과 연합하여 병력을 이끌고 천중밍을 요격하여 오주에서 천중밍 부대를 격파하고 동로토적군 사령관 쉬충즈와 함께 광저우를 장악하였다. 천중밍 토벌 후, 이들은 각 기관을 점령하고 대민범죄를 저지르는 등 행패가 극심하였는데 중국국민당은 1923년 3월 29일, 양시민을 중앙직할 진군총사령관에 임명하여 군정부의 지휘 아래에 두었다. 이어 쑨원은 광동에 주둔한 전계군벌들에 대한 개편을 지시하여 1923년 7월 16일 양시민과 주페이더가 지휘하는 주월전군을 4개군으로 개편하여 양시민을 주월전군 1군 사령관에 임명, 대본영의 지휘를 받게 하였는데 양시민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황포군관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반대했다. 이후 1924년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10월, 주월전군은 건국전군으로 개편되었고 양시민은 건국전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의 전야에 쑨원은 양시민에게 광저우 상단의 무기 밀매에 대해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양시민은 이에 불복종하였다.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이 행해졌을때 양시민은 좌로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천중밍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중로군 사령관 유진환과 함께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진군을 멈춰버렸다. 양시민은 이때 천중밍과 영국령 홍콩과 접촉하여 쑨원을 타도하고 북양정부로부터 광독독리에 임명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천중밍의 사령부에서 양시민과 우페이푸가 내통한 문서가 발견되자 장제스는 이를 공개하면서 양시민과 유진환을 비난했다. 1925년 3월 27일, 대원수 대리 후한민은 군민재정통일선언을 발표하여 양시민과 유진환에게 정부에 복종하고 무단으로 점령한 재정기관과 영토를 반환하라고 지시했으나 양시민은 이를 거절하고 4월 28일, 휘하의 증만종 사단과 4개 여단을 불러들여 전계연군 총사령관에 취임,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장제스와 쉬충즈의 빠른 개입에 박살이 나서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국민당에서 제명되었고 모든 세력을 잃은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절강성 소흥에 은거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운남성으로 피난을 떠났고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투항하여 운남성 정협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에 합류하였다. 1967년 1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