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1-09 16:03:47

중국 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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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대만) 정당 (2018년 기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범록연맹 민주진보당 대만단결연맹 시대역량
범람
연맹
(좁은 의미) 국민당 신당
범귤연맹* 친민당 민국당
(사실상) 무당단결연맹
* 친민당과 민국당은 따로 범귤 연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 무당단결연맹은 사실상 범람연맹으로 간주된다.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3px-ROC_Legislative_Yuan_Seal.svg.png 중화민국의 원내정당
여당 민주진보당
(68석)
시대역량
(5석)
야당 중국국민당
(35석)
친민당
(3석)
무당단결연맹 (1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Emblem_of_the_Kuomintang.svg.png
中國國民黨
한글명칭 중국국민당
영문명칭 Kuomintang of China: KMT[1]
또는 Chinese Nationalist Party[2]
설립일 1919년 10월 10일
국제조직 국제민주연합
주석 우둔이
이념 보수주의, 중국 민족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 우파
의석 수( 입법원) 35석 / 113석
웹사이트 홈페이지 페이스북

1. 개요2. 역사3. 역대 선거결과
3.1. 총통 선거
3.1.1. 국민대회 간선제 시기3.1.2. 국민 직선제 시기
3.2. 입법위원-국민대회 선거
4. 중국 본토의 중국 국민당

1. 개요

중화민국의 제1야당. 현존하는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정당이다.

중국 국민당은 1911년 창설된 국민당을 자신들의 전신으로 간주한다. 흥중회도 국민당의 전신으로 간주하면 122년의 역사를 자랑하게 된다. 두번째로 오래된 정당은 1920년 6월에 창설된 몽골 인민당이다.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세계 보수우파 정당의 단체인 ' 국제민주연합(國際民主聯合, International Democrat Union)'의 멤버다. 참고로 이 단체는 중화민국이 정식 국명으로 활동하는 몇 안되는 단체 중 하나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보수우파정당이 없기 때문. 또한 대륙 출신 외성인계 재벌들과 많이 얽혀있다. 대륙 출신( 외성인)이 이 정당을 많이 지지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점진적인 통일에 호의적인 것도 특징. 그러나 통일의 주체는 "정통 중국"인 중화민국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절대 고수하고 있다. 즉 말이 호의적이라는거지 실질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통일 정책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이에 맞서는 타이완 섬 본토 출신( 본성인)이 많은 민진당은 통일에 반대하고 각자 제갈길 가자는 독립 스탠스에 서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민당은 다른 정당에 비해 외성인과 본성인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원주민과 객가인 중에도 국민당 지지자가 꽤 된다. 2012년 총통선거 지도를 보면 객가인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주변 지역에 비해 시퍼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친민당이나 신당은 외성인이 압도적이며, 앞서 언급한 대로 민진당은 본성인이 압도적이고 대만 제1민족당은 원주민 위주의 정당이다.

창당 당시에 초대 당대표 명칭은 총리였으나 쑨원 사후로 이 명칭을 폐지하고 총재로 전환하였으나 다시 랴오중카이, 후한민 등을 거쳐 장제스 사후 다시 총재 명칭을 폐지하고 주석으로 전환하였다. 해당 인물들이 국민당에 끼친 영향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변화해가는 시대환경을 나름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봐야할듯하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당의 정식 당명이 중국 국민당이지 대만 국민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언론에서 '대만 국민당'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이 있긴 하지만 이건 대만 (중국) 국민당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아니면 기자가 기레기라서 대만 국민당이 정식 당명이라고 착각한 상태로 기사를 썼을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조선로동당'을 '북한 노동당'이라고 하는 것이나 똑같다. 중화민국을 정통 중국으로 간주하며 본래 중국 대륙(본토)에서 창립된 정당이라 그렇다. 다만 지금 국민당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구분되는) 중화민국의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젊은 당원들을 중심으로 의미가 없어진 '중국'을 떼버리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쑨원이나 장제스, 쑹메이링 등 기독교인들이 만든 정당이다. 장제스 부자는 물론 심지어 본성인인 리덩후이도 본인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민당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대만 독립이라는 본색을 드러내 제적당하여 범록연맹으로 합류한다. 마잉주 전 총통도 가톨릭 신자이다. 홍콩의 범람연맹 지지자들도 기독교인이 대부분이다.[3]

리즈시절에는 티베트 혁명당 베트남 국민당의 형성에 모티브를 주었으나, 티베트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주하면서 티베트 혁명당은 해체되었고, 베트남 국민당은 베트남 공산화와 함께 망명정당 신세이다.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일제시대 당시에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대 물주였다. 사실상 2위격 이라고 볼 수 있는 중국 공산당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당연히 중화민국이 본토에 있었을 시절에는 공산당은 야당이었으니,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을 지원해준 인물이 쑨원 장제스였고, 김구, 김원봉, 김규식, 이시영. 김규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한국 독립의 최대 은인인 정당인 셈.

2. 역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국 국민당/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형식적인 연립 여당이자 실질적인 독재 정당이었다.[4] 그러나 1980년대부터 점차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1988년 장징궈 총통이 서거하자, 대만 출신의 리덩후이(이등휘/李登輝)가 2000년까지 총통을 재임했다.[5]

이 양반은 총통에 취임한 직후에 언론통제 폐지를 단행하였고 보수파의 반발을 제압하여 국민대회와 입법위원의 총선거도 시행하였으며 1996년에 총통 직선제도 시행하면서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대만 출신들을 대거 기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국민당 출당이후로 친일본적인 성향도 드러내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기도 하고 망언도 자주 뱉는다.[6] 국민당이지만 대만 출신이기 때문에 "타이완은 중국과 별개의 국가"라면서 중국과의 대립각을 많이 세웠고, 그래서 1993년 국민당 내의 외성인출신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당으로 분당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어쨋거나 지속적으로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중국이 96년 선거에서는 무력시위까지 하면서 리덩후이의 3선을 막으려고 했지만 되려 대만 독립파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7]

이전부터 대륙 출신들에게 비판을 많이 샀지만, 끝내 2000년 선거에서는 독립주의자란 이유로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진수편/陳水扁)을 실질적으로 지원하여 당에서 쫓겨났고, 이후 대만단결연맹을 만들어 범록연맹에 합류하였다. 거기에다가 국민당에서 탈당한 쑹추위가 천수이볜과 선두자리를 다투면서 렌잔 후보는 3위에 머물렀고 그렇게 총통선거에서 참패하면서 국민당은 정권을 민진당에게 넘겨준다. 이후에 2001년 총선에서도 국민당은 개헌저지선 확보에 실패하며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러나 천수이볜 정부가 난맥상을 보이고 대립각을 세웠던 렌잔과 쑹추위가 서로 화해를 하며 단일화를 결의하여 2004년 총통선거에서 우세를 보일듯했으나 전날 일어난 석연찮은 천수이볜 암살미수 사건으로 정권 탈환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했고 뒤를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기여코 압승을 거두며 천수이볜을 궁지에 몰아놓았다. 그리고 2008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고 그 뒤를 이은 총통선거에서도 마잉주 후보가 당선되어 기어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다. 주요 이유는 천수이볜의 부패 의혹 때문으로, 2009년에 기어이 천수이볜을 구치소에 보내버린다.[8] 이후 중국 대륙( 중화인민공화국)에 경제 협력에 한해 우호적인 성향[9]을 보이고 있었는데, 09년 12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이전보다 부진하면서 다시 흔들리는 형국.[10]

이어서 벌어진 2010년 1월의 입법위원(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3:0으로 전패, 민진당이 30석을 차지하면서 개헌안과 총통 파면안 제출에 필요한 총의석(113석)의 1/4(29석)을 넘어섰다. 이어진 2월 말의 보궐에서도 4석 가운데 3석을 내주었다. 이를 돌파하고자 했는지, 아니면 무릅쓰고 했는지 마잉주 정권은 같은 해 7월 중국과의 ECFA( 경제협력기본협정)까지 체결시키면서 대외적으로는 "차이완(Chiwan) 시대"를 열었다고 홍보했으나 국내 반응은 냉담…. 의회에선 난투극이 벌어졌고, 수만명의 시위가 빗발쳤다(리덩후이도 함께 참여했다). 11월로 예정된 5대 시장선거에서도 참패할 전망이었으나 의외로 선거 결과는 국민당의 승리. 선거 막판에 국민당 중앙위원이 총에 맞아 다치는 사고로 국민당 표가 집결하면서 다섯 곳 중에 세 곳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겉으로만 보면 국민당의 승리이기는 하지만 전체 득표에서는 민진당이 49.9%(377만2000여표)를 차지해 국민당의 44.5%(337만9000여표)를 5.4%포인트 앞섰다. 이건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여

이러한 위기감 속에 실시된 2012년 총통선거와 입법위원선거에서 국민당은 선거 레이스 내내 근소한 차이의 우세를 보여왔으나, 언제든지 역전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표출되었다. 하지만 독립 노선을 지향하는 민진당의 집권을 원치 않았던 중국의 지지와 대만해협에서의 대립관계를 원치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로 인해 예상보다 손쉽게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마잉주 지지율이 20~30%대에 머무는 등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난맥상이 이어지면서 지지율이 계속해서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거기에다가 홍콩 민주화 시위가 좌절되면서 자칫했다가 중국에게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도 겹쳐 결국 지방선거에세 대패하고 말았다. 타이베이 시장을 친 민진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에게 내줬고, 거기에다가 당초 국민당 후보가 승리할 걸로 보였던 타오위안 시장도 민진당이 가져간데다가 역시 국민당이 여유있게 승리할걸로 보였던 신베이 시장도 접전끝에 겨우 승리할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우리나라로 치면 옹진군에 해당하는 진먼을 아예 무소속에게 내주었으며 펑후도 민진당이 가져갔다. 전체적인 판세를 본다면 국민당은 6개 시장 선거가운데 딱 한 곳만 건졌고, 현장과 현급 시장은 그나마 사정이 났다고는 하지만 5곳만 건졌다.

2014년 12월 3일 마잉주 총통이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국민당 주석직을 사퇴했다. 2015년 1월 18일에 주리룬 신베이 시장이 당 주석에 당선됐다.

2015년 7월 19일 총통선거 후보로 훙슈주(洪秀柱) 중화민국 입법원 부원장(국회부의장)[11]을 지명하여 선거 태세에 돌입했다. 이 사람이 여성이고 야당인 민주진보당도 여성인 차이잉원 주석을 총통 후보로 지명했기에 차기 대만 총통은 여성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다만 훙슈주가 차이잉원에 비해 여론조사 등에서 조사한 지지율이 10~20% 정도 밀리고 있어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이다. 게다가 한국에 알려진 것과 달리 7월 현재 훙 후보는 지지율이 쑹추위에게도 밀리는 3위인 것도 걸림돌이다.

2015년 10월 17일 초유의 후보 교체가 이루어졌다. 현 주리룬 주석을 후보로 교체한 것이다. 결국 국민당이 최후의 수를 두었다는 평가가 많다. 현 홍슈주 후보가 워냑 인기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 2위자리까지 위태롭게 되자 내린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리룬 주석의 출마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쑹추위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도 급물살을 살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쑹추위는 단일화를 거부했다.


중국 국민당 홍보 광고.

결국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과반수를 넘긴 민주진보당은 9천억 원에 달하는 중국 국민당의 재산의 국유화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민진당 주석이자 차기 총통인 차이잉원까지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상황. 이에 국민당측은 모든 재산은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1 기사2

중화민국은 상당기간 중국 국민당이 좌지우지하는 독재국가였고,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 언론계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도 해서 장제스 독재정권 시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지상파 방송사인 CTV와 관영지인 중앙일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CTV는 2000년대 초 이후에 케이블 방송에게 발리면서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중앙일보는 1966년 복간[12] 이후에 1980년대까지 대만 제1신문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역시 1990년대 민주화 바람으로 여타 신문사에게 밀리면서 재정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2000년대 중반에 죄다 처분한 상태다.

사실 중국 국민당은 일개 정당이라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13] 공식 발표만 해도 역대 최고액이 918억 위안(2016년 기준으로 계산해도 3조 3400억 하물며 1990년대 기준이었다면;;;)이고 2015년 기준 7억6천만 달러(약 9천169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14]

이것은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이 분리된 것은 1991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혁파 때이기 때문이다. 2016년 현재 중국 국민당이 보유한 자산은 대만에 대한 일제강점기가 끝나면서 1945년 대만총독부에서 중국 국민당이 넘겨받은 자산[15][16]을 기초로 하고 있다. 1946년 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당이 잠시 분리되나 얼마 안 가 국공내전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입법하면서 헌정을 변칙으로 유지하다가 전황이 나빠지면서 중단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국부천대가 일어나면서 중국 대륙의 재벌이나 상류층들이 보유한 자산을 국민당한테 넘겼고[17] 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체제에서는 당정군의 일체화(중화민국 정부+중화민국 국군+중국 국민당)가 더욱 심해져서 국민당의 자산을 중앙정부에 넘기지 않게 되었다. 1991년 동원체제 혁파 당시 총통은 국민당 소속 리덩후이였고 결국 국민당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정부에 넘기는 것은 아예 밀려버리고 만다. 국민당 정권이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이 부분은 은근슬쩍 넘어간 것이다. 2016년 들어서 차이잉원 차기 총통과 민주진보당 측에서 국민당 자산의 국고 환수를 주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2000년대 천수이볜 민주진보당 정권에서 한 차례 환수 논의가 있었으나 민진당이 입법원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법안 성립은 불발됐고 대신 국민당이 CTV와 중앙일보, 몇몇 호텔들을 처분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지고, 2008년 마잉주 정부에서도 일정 부분 국민당 재산이 처분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국민당 재산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국민당이 소유한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만 해도 민주진보당, 친민당, 대만단결연맹, 시대역량 등 다른 정당들의 총 수입을 합친 것을 가볍게 능가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이후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자산 상당수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더군다나 의회도 민진당이 압도적으로 과반을 차지하고 있기에 실현 가능성도 큰 편. 기사 국민당 내부에서도 자산을 정리하자는 개혁 목소리가 있긴 하다. 결국 3월 14일부터 입법원에서 국민당 자산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다. 망했어요.

당연히 국민당 내부에선 이건 정치 보복이라면서 결사반대하고 있지만, 몇몇 원로들은 이 기회에 당 자산을 깔끔하게 국가에 헌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당의 차세대 주자였던 주리룬 신베이 시장(2016년 총통 후보) 역시 대선 유세전 당시 국민당 자산의 처분과 국민당의 회계감사를 통한 투명한 재정구조 확보, 문제 자산은 국고 환수 또는 원주인 반환 공약한 바 있다. 이 와중에 리덩후이 총통 시절 당 자산의 일부가 헐값에 매각되면서 거액이 사라졌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관련기사

3월 26일, 훙슈주가 신임 주석에 취임했다. 이는 국민당 역사상 최초로 여성 당수가 취임한 것이다.



2016년 7월 26일 중화민국 입법원에서 기어이 민주진보당 시대역량의 전원 찬성으로 국민당의 당 재산을 중화민국 국고로 강제 귀속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사 국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원내 시위까지 했으나 법안 통과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민진당과 시대역량을 합쳐서 74명이고 여기서 쑤자취안 입법원장 한명 뺀 73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으니... 친민당은 기권했다.

2016년 8월 27일 화롄 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2010년 이후로 지방선거에 승리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라 국민당 내부에서는 2018년 지방 총선도 노릴 만 하다는 분위기도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2017년 5월 20일. 주석 대표 선거에서 홍슈주를 꺾고 우둔이 전 부총통이 당선되었다. 관련기사

3. 역대 선거결과

3.1. 총통 선거

3.1.1. 국민대회 간선제 시기

1948년 총통 선거 장제스 90.03% 당선[18]
1954년 총통 선거 장제스 96.91% 당선[19]
1960년 총통 선거 장제스 93.97% 당선[20]
1966년 총통 선거 장제스 98.60% 당선
1972년 총통 선거 장제스 99.39% 당선[21]
1978년 총통 선거 장징궈 98.34% 당선[22]
1984년 총통 선거 장징궈 95.11% 당선[23]
1990년 총통 선거 리덩후이 85.24% 당선[24]

3.1.2. 국민 직선제 시기

1996년 총통 선거 리덩후이- 롄잔 54.0% 당선[25]
2000년 총통 선거 롄잔- 샤오완창 23.1% 낙선[26]
2004년 총통 선거 롄잔- 쑹추위 49.89% 낙선
2008년 총통 선거 마잉주- 샤오완창 58.45% 당선
2012년 총통 선거 마잉주- 우둔이 51.60% 당선
2016년 총통 선거 훙슈주 주리룬- 왕루쉬안 31.04% 낙선

3.2. 입법위원-국민대회 선거

1969년 입법원 선거 15/15[27]
1972년 입법원 선거 41/51
1975년 입법원 선거 42/52
1980년 입법원 선거 79/97
1983년 입법원 선거 83/98
1986년 입법원 선거 59/73[28]
1989년 입법원 선거 72/101 60.1%
1991년 국민대회 선거 254/300 69.1%
1992년 입법위원 선거 102/161 53.02%[29]
1995년 입법위원 선거 85/164 46.1%
1996년 국민대회 선거 183/300 49.7%
1998년 입법위원 선거 123/225 46.43%
2001년 입법위원 선거 68/225 31.3%
2004년 입법위원 선거 79/225 32.83%
2005년 국민대회 선거 117/300 38.9%[30]
2008년 입법위원 선거 81/113 71.6%
2012년 입법위원 선거 64/113 56.6%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35/113 31.0%아, 망했어요

4. 중국 본토의 중국 국민당

정식 명칭은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약칭 민혁)로 중국 공산당의 합법 구색정당(위성정당) 중 하나가 돼 있다. 약칭 민혁. 그러나 이쪽은 중국 국민당의 일원임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1] Kuomintang은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른 표기(Kuo²-min² Tang³)에서 하이픈(-)과 성조 번호를 삭제한 표기이다. [2] 그래서 중국 분단 이후 정식 명칭이 아닌 통칭으로 두 중국을 가리킬 때는 집권당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중화민국을 가리키는 영어 표현으로는 Nationalist China라는 말이 있다. 대륙은 Communist China. 차이잉원 취임 뒤 Democratic Progressive China라고 쓰기는 뭐하다. 본인들도 안 원할 거고 한국이나 독일은 '방위'로 통칭을 썼는데, 중국은 한쪽이 너무 크다 보니 그게 안 된 듯. 물론 중화민국의 경우 가장 큰 섬 이름인 Taiwan이나 Formosa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많이 쓰는 통칭이다. 한편 냉전이 심할 때는 Free China, Red China도 쓰였다. 우리나라에서 한중 수교 전에 중화민국에 대해 '자유 중국'이라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 [3] 홍콩인 홍콩 독립운동 내진 민주화와 자치 확대운동은 대게 개신교 및 가톨릭 신자이 주동했다. 조슈아 웡 등의 우산 혁명 지도부는 전부 기독교인들이고 여기에 가톨릭 주교인 조셉 찬 주교도 은근히 동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홍콩 기독교는 중국대륙의 수억의 인구를 보유한 지하교회와 파룬궁과도 연합하고 서로 도와준다. 당연히 홍콩 기독교인 중에 내륙여행 허가가 안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선교사로 의심받거나 중국 민주화 운동 내진 파룬궁 지원 의혹이 있을 경우다. 물론 맨 처음 중국이 개방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것도 홍콩 기독교인들이었다. [4]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3당 훈정의 여당이다. [5] 장징궈는 비록 중국 대륙인 저장 출신인 자신이 통치를 하지만 언젠가는 대만 출신들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대만 출신인 리덩후이를 후계자로 생각했던 듯. 그리고 죽기 몇 달 전 '내가 대만에서 40년을 살았으니 나도 이제 대만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요지의 발언도 했다 한다. [6] 리덩후이의 경우엔 실제로 일제 때 창씨개명까지 했다. 뭐, 당시에는 좌파성향이 강했던 학생이라는 증언도 있고 공산당에 잠시 가담했던적도 있던만큼 당시에 창씨개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대만 출신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섬나라로 규정하기에 친일적인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일본이 조선과 달리 대만에는 호의적인 식민통치를 했던 과거도 영향을 미쳤다. 대만 항목 참조. [7] 당시 국민대회 선거결과를 보면 국민당이 49.7%, 민진당이 29.9%의 득표를 보였는데 총통 선거에서 리덩후이가 54.0%, 펑밍민 후보가 21.1%의 득표율을 얻었다. 결국 신당이나 무소속을 지지한 후보가 총통선거에서 25%, 국민대회 선거에서 5%의 득표를 얻었으니 갭이 좀 있다하더라도 약 8%의 민진당 지지표가 리덩후이로 날아간 셈이 된다. [8] 이런 비슷한 모습 때문에 대만 정치에서 한국은 자주 비교되는 모델이다. 한국의 07년 대선 직후에 있었던 08년 총통 선거에서 양당 후보 모두 "누가 누가 이명박을 닮았나"(...)를 시전한다거나, 대만 언론이 천수이볜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해 줄 사람은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뿐(...)이라고 언급한다거나...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당의 이합집산이 자주 일어나는데 비해 대만에서는 양당체제가 자리를 잡고 있고, 대만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대야소가 일반적인 등 차이점도 많다. [9] 단 정통 중국이 어디냐 하는 문제에서는 중화민국=정통 중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일국양제로 대만을 복속시켜 통일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실제 마잉주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정권은 이와 관련해 2014년 홍콩 시위에 분명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10] 17개 선거구 가운데 국민:민진이 14:3이었던 것이 12:4가 되었다. (한 석은 무소속) 민진당의 득표율이 45.32%로 국민당(47.88%)이 우세지만 2005년의 선거(민진당 38.2%)에 비하면 대단한 약진이라서 패배로 받아들여진다고. 재밌는 것이 지지율 하락 원인이 부패와 경기 침체, 그리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제한 완화라고 한다. [11] 국회의장 왕진핑이다. [12] 창간은 1928년이었으나 국부천대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13] 사실 이건 한국의 새누리당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다만 여기서 약간 다른 점이라면 새누리당은 기존의 재산에서 YS계와 DJ계(1997년에 민주당 잔류파가 새누리당과 합당한 영향) 재산도 일부 흡수한 영향도 있기는 하다. [14] 그러나 범록연맹에서는 국민당의 보유 자산이 실제로는 3~4조원대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6년 초 중화민국 내정부(내무부)는 국민당 재산이 2조 8천억 원 정도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5] 당시는 아직 훈정시기라서 중국 국민당이 중화민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헌법 제정 전이므로 국민당이 당 자격으로 대만총독부의 자산을 압류한 것. [16]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은 사실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별개의 채제다. 예를 들어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특무조직은 중국 국민당이 직접 다스리는 기관이라서 중화민국 정부가 개입할 수가 없었다. [17] 1949년 중순 난징이 함락당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무력화되었고, 타이베이에 들어온 중앙정부가 기능하기 전까지 역시나 대만총독부 반환 직후처럼 중국 국민당이 중앙정부의 기능을 임시로 대행했다. [18] 애초에 장제스 외에 현실적인 대안도 없었고, 중일전쟁의 승전이 매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도 여당이든 야당이든 여러 명의 후보들이 출마했다. 국공내전 때문에 장제스를 불신임하는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 본토를 수복할 때까지 기존의 국회의원들은 종신직으로 재임했고, 날이 갈수록 지지율이 높아져갔다. 그래도 여당이든 야당이든 여러 명의 후보들이 출마했다. 국공내전 때문에 장제스를 불신임하는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0]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부총통 천청이 장제스의 후계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천청이 장제스보다 일찍 죽었다. [21]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부총통 옌자간이 장제스의 후계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22]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부총통 셰둥민은 본성인이다. [23]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부총통 리덩후이는 본성인이다. [24]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리덩후이에 반발하는 외성인 당원들이 복수 후보로 출마를 고려했다. [25] 이 시기부터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전환되었다. [26] 당시 무소속으로 나왔던 쑹추위에게 팀킬당했다. 쑹추위에게 간 표를 합하면 59.93%. [27] 이 때부터 보궐선거였다. 중국 국민당/중국 청년당/중국 민주 사회당/무소속만 후보로 출마할 수가 있었다. [28] 이 때부터 민주진보당을 포함한 야당들의 참정을 허용했다. [29] 이 때부터 보궐선거에서 총선으로 변경했다. 1991년까지는 1940년대에 중국대륙에서 뽑은 국회의원들 가운데 타이완에 대피하여 종신직으로 재임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모자라게 된 인원을 충원하는 식이었다. [30] 이 때를 마지막으로 국민대회의 기능을 동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