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점령하 일본 최고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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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더글러스 맥아더 | 매튜 B. 리지웨이 | }}}}}}}}} |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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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 1777년 | 1779년 | 1781년 | |
조지 워싱턴 |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 소장 앤서니 웨인 | 사령관 헨리 리 3세 | 준장 대니얼 모건 | |
1781년 | 1787년 | 1800년 | 1805년 | 1813년 | |
소장 너새니얼 그린 | 존 폴 존스 |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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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 1814년 | ||||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
대령 제임스 로렌스 |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
|
1814년 | 1814년, 1848년 | 1814년 | |||
대령 루이스 워링턴 |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 소장 제이콥 브라운 | 소장 윈필드 스콧 |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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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 1815년 | 1816년 | |||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 소장 알렉산더 마콤 | 소장 앤드루 잭슨 | 대령 찰스 스튜어트 | 대령 제임스 비들 | |
1818년 | 1835년 | 1846년, 1847년, 1848년 | 1847년 | 1854년 | |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
대령 조지 크로간 | 소장 재커리 테일러 |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
중령 덩컨 잉그함 | |
1858년 | 1863년 | 1864년 | 1866년 | 1867년 | |
프레더릭 로즈 |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 |
1867년 | 1871년 | 1873년 | 1874년, 1904년 | 1883년 | |
조지 피바디 | 조지 F. 로빈슨 |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 존 혼 주니어 | 존 폭스 슬레이터 | |
1888년 | 1890년 | 1900년 | 1902년 | 1909년 | |
조셉 프랜시스 |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 중위 프랭크 H. 뉴컴 |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
라이트 형제 | |
1912년 | 1914년 | 1915년 | 1928년 | ||
선장 아서 로스트론 | 폴 H. 크라이봄 그 외 |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
찰스 린드버그 |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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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6년 | ||
토머스 에디슨 |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 소령 월터 리드 |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 링컨 엘즈워스 | |
1936년 | 1938년 | 1939년 | 1940년 | ||
조지 M. 코핸 |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
하워드 휴즈 | 목사 프랜시스 퀸 | 윌리엄 시넛 | |
1942년 | 1945년 | 1946년 | |||
롤런드 바우처 |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 준장 빌리 미첼 | |
1949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8년 | |
앨번 W. 바클리 | 어빙 벌린 | 조너스 소크 박사 |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 준장 하이먼 리코버 |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
로버트 고다드 | 로버트 프로스트 |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 밥 호프 | 샘 레이번 | |
1962년 | 1968년 | 1969년 | 1973년 | 1977년 | |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 월트 디즈니 | 윈스턴 처칠 | 로베르토 클레멘테 | 매리언 앤더슨 | |
1978년 | 1979년 | ||||
중장 아이라 이커 | 로버트 F. 케네디 | 존 웨인 |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
휴버트 험프리 | |
1979년 | 1980년 | 1982년 | |||
미국 적십자사 | 케네스 테일러 |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 베아트릭스 여왕 | 대장 하이먼 리코버 | |
1982년 | 1983년 | ||||
프레드 워링 | 조 루이스 | 루이스 라머 | 레오 라이언 | 대니 토머스 | |
1984년 | 1985년 | ||||
해리 S. 트루먼 | 레이디 버드 존슨 | 엘리 비젤 | 로이 윌킨스 |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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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87년 | 1988년 | |||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
해리 차핀 | 에런 코플런드 | 메리 래스커 | 제시 오언스 | |
1988년 | 1990년 | 1991년 | |||
앤드루 와이어스 | 로런스 록펠러 |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 대장 콜린 파월 | |
1994년 | 1996년 | 1997년 | |||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더 테레사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
1998년 | 1999년 | ||||
넬슨 만델라 | 리틀록 9인 |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
로자 파크스 | 시어도어 헤스버그 | |
2000년 | |||||
존 오코너 | 찰스 M. 슐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
나바호족 코드 토커 | |
2002년 | 2003년 | ||||
대장 휴 셸턴 | 토니 블레어 | 재키 로빈슨 | 도러시 하이트 박사 |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
|
2004년 | 2006년 | ||||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
터스키기 에어맨 | 달라이 라마 14세 | 바이런 넬슨 | 노먼 볼로그 박사 | |
2007년 | 2008년 | ||||
마이클 데바키 박사 | 아웅 산 수 치 |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 |
2009년 | 2010년 | ||||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
아널드 파머 | 무함마드 유누스 |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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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 2012년 | 2013년 | |||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 9.11 테러 참사 사망자 | 라울 발렌베리 |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
제1 특수임무단 | |
2014년 | |||||
둘리틀 특공대 멤버 | 미국의 공군 에이스 |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
시몬 페레스 | 모뉴먼츠 맨 |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제65 보병연대 | 잭 니클라우스 | 셀마 몽고메리 행진 |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 OSS | |
2017년 | 2018년 | ||||
밥 돌 | 래리 도비 |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 안와르 사다트 | |
2019년 | |||||
스티브 글리슨 | 캐서린 존슨 | 크리스틴 다든 | 도로시 본 | 메리 잭슨 |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무명의 수여자들 | 그렉 르몬드 |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
제369 보병연대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 |
2022년 | 2023년 | ||||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
제6888 중앙우편대대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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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와 라이트 형제뿐이다. | ||||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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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
조지 발란신 <안무가> |
존 바딘 <물리학자> |
어빙 벌린 <작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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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
말론 브란도 <배우> |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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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 <작가> |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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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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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 <철학자> |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
W. E. B. 듀보이스 < NAACP 설립자> |
앨런 덜레스 < CIA 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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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포크 뮤지션>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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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
헨리 포드 <기업가> |
존 포드 <영화감독> |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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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
빌리 그레이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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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
조이스 홀 <사업가> |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
||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
존 에드거 후버 < FBI 초대 국장> |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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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케루악 <시인, 작가> |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
||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
레이 크록 < 맥도날드 창업자> |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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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
헨리 루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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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
||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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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
로버트 모세 <공무원> |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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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
||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
잭슨 폴록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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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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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저스 (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
윌 로저스 <배우, 작가> |
엘리너 루스벨트 <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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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스 소크 <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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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
빌 윌슨 < AA 창립자> |
앤디 워홀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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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워런 <대법원장> |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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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윈첼 <신문기자>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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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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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승만 |
1949 이시영 |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
1953 장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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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하일레 셀라시에 |
1957 응오딘지엠 |
1958 아드난 멘데레스 |
1962 허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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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좌진 |
1962 오동진 |
1962 조병세 |
1962 안중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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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윤봉길 |
1962 이준 |
1962 강우규 |
1962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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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창호 |
1962 신익희 |
1962 김창숙 |
1962 손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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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승훈 |
1962 한용운 |
1962 최익현 |
1962 이강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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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민영환 |
1964 더글러스 맥아더 |
1964 해리 S. 트루먼 |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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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
1965 다비드 다코 |
1965 수루-미강 아피디 |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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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
1965 레옹 음바 |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
1965 하마니 디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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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조모 케냐타 |
1965 무테사 2세 |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
1965 툰쿠 압둘 라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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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타놈 키티카초른 |
1966 쑹메이링 |
1966 천궈푸 |
1968 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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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천치메이 |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
1970 조만식 |
1976 임병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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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
1979 박정희 |
1980 최규하 |
1981 시리낏 끼띠야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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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푸미폰 아둔야뎃 |
1983 |
1989 김규식 |
1989 조소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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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장면 |
2008 여운형 |
2019 유관순 |
2021 홍범도 |
}}}■ : 독립유공자 ■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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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02E3A, #D02E3A 20%, #D02E3A 80%, #D02E3A); color: #fff"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
1951 김용식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김용배 육군준장 |
1951 박노규 육군준장 |
1951 김백일 육군중장 |
1951 김홍일 육군중장 |
1951 함준호 육군중장 |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
1951 최용남 해병소장 |
1951 김성은 해병중장 |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
1952 이형근 육군대장 |
1951 권동찬 육군준장 |
1952 김종오 육군중장 |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
1953 장덕창 공군중장 |
1953 최용덕 공군중장 |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
1953 김교수 육군대위 |
1953 김한준 육군대위 |
1953 김용배 육군대장 |
1953 민기식 육군대장 |
1953 임충식 육군대장 |
1953 한신 육군대장 |
1953 김점곤 육군소장 |
1953 이성가 육군소장 |
1953 이용문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
1953 김동빈 육군중장 |
1953 김종갑 육군중장 |
1953 백인엽 육군중장 |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
1953 유재흥 육군중장 |
1953 최영희 육군중장 |
1953 함병선 육군중장 |
1953 최치환 총경 |
1954 김만술 육군대위 |
1954 허봉익 육군대위 |
1954 김경진 육군소령 |
1954 김웅수 육군소장 |
1954 송석하 육군소장 |
1954 엄홍섭 육군소장 |
1954 임선하 육군소장 |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
1954 김옥상 육군일병 |
1954 조재미 육군준장 |
1954 안낙규 육군중사 |
1954 박병권 육군중장 |
1954 이응준 육군중장 |
1954 이준식 육군중장 |
1954 장도영 육군중장 |
1954 최석 육군중장 |
1954 최창언 육군중장 |
1954 박옥규 해군중장 |
1954 김석범 해병중장 |
1955 김창룡 육군소장 |
1955 정긍모 해군중장 |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
1960 미군무명용사 -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
1961 국군무명용사 - |
1964 박정희 대통령 |
1966 이종세 육군상사 |
1966 강재구 육군소령 |
1966 이인호 해병소령 |
1967 송서규 육군대령 |
1967 채명신 육군중장 |
1967 지덕칠 해군중사 |
1967 정경진 해병대위 |
1967 신원배 해병소위 |
1968 최규식 경무관 |
1968 이익수 육군준장 |
1968 최범섭 육군중령 |
1970 이세호 육군중장 |
1972 이무표 육군대위 |
1972 임동춘 육군대위 |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
1980 육군대장 |
2002 장철부 육군중령 |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
2011 조달진 육군소위 |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1983년 국방부 선정 6.25 전쟁 4대 영웅 | ||||
월튼 워커 | 더글라스 맥아더 | 김홍일 | 김종오 | }}} |
<colbgcolor=#002868><colcolor=#fff>
연합군 점령하 일본 초대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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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더글러스 매카서[1] Douglas MacArthu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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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0년 1월 26일 | ||
아칸소 리틀록 | |||
사망 | 1964년 4월 5일 (향년 84세) | ||
워싱턴 D.C. | |||
묘소 | 노퍽 맥아더 기념관 | ||
재임기간 | 초대 최고사령관 | ||
1950년 12월 15일 ~ 1951년 4월 11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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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868><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2]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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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큰형
아서 맥아더 3세[3] 작은형 말콤 맥아더[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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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헨리에타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 맥아더 애트윌 하이버그 (이혼)[5] 진 마리 페어클로스 맥아더[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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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아들 아서 더글러스 맥아더[7] | ||
신체 | 183cm, O형 |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학사)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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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장로회)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필리핀 자치령 육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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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
1937년 1941년 ~ 1964년[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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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 | 공병 → 보병 | ||
최종 계급 |
원수 (미합중국 육군) 원수 (필리핀 자치령 육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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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보직 |
제13대 육군참모총장 초대 연합국 최고사령관 초대 국방부 직할 극동사령관 초대 유엔군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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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멕시코 혁명(1914[9]) 제1차 세계 대전(1917 ~ 1918) 제2차 세계 대전(1941 ~ 1945) 6.25 전쟁(1950 ~ 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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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명예 훈장, 수훈 십자 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해군 수훈 복무 훈장, 공군(전) 수훈 십자 훈장, 은성 훈장, 청동성장, 공군 수훈장, 퍼플 하트 훈장[10] 훈장 내역 정리 (영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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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한국 통칭 맥아더 장군.[11] 미국 역사상 매우 유명한 장성 중 한 명이다.일찍이 군인이 되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용장, 제2차 세계 대전의 명장 등 20세기에 벌어진 주요한 전쟁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집안 역시 명문 군인 가문이어서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육군 장성으로서 필리핀의 군정 총독이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미 1910년~1920년대에 국가적 영웅이었는데,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육군 사관학교 교장,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 대장이자 육군 참모총장, 육군 원수까지 군의 주요지위를 거쳤으며,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전후처리에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였다. 또한, 한국의 6.25 전쟁에서도 인천 상륙 작전을 세우고, 총지휘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에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지휘[12]했으며, 우스갯소리기는 하지만 푸른 눈의 쇼군 내지는 백인 천황, 일본 대통령으로 불렸을 정도로 종전 이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13] 그렇기에 전후 일본 사회의 구조에는 그의 입김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때문인지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60년 동안의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하였다.[14][15]
6.25 전쟁에서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북한군이 우세한 상황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성공적으로 반격하였으며, 한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도 맥아더를 고평가하는데, 점령군의 사령관인데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에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고 최대한 선처해주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을 "잔인했다"며 간접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16][17]
수여받은 약장은 매우 비범하다. 약장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명예 훈장부터 시작해서 하나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 수훈십자장 3회 수훈[18], 하나 받아도 베테랑 병사 취급받는 은성훈장 6회 수훈, V기장[19]이 달린 동성훈장 수훈, 육군 수훈복무훈장 4회 수훈, 대통령 부대 표창 6회 수훈, 대한민국 정부의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훈[20], 그 외에도 육군항공 조종사 마스터 기장, 소총, 권총 특등 사격기장까지 약장만 봐도 어마어마한 명장(名將)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있기도 하였다. 현역군인이 퇴역군인을 쏴죽인 보너스 군대 사건으로 엄청난 오명을 얻었으며, 6.25 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과 중국으로의 확전(擴戰)을 반대한 군 통수권자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해임되는 등, 미군 역사에서 문민통제(文民統制)에 역행했던 대표적 장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기에 미국 본토에서는 맥아더를 비판하는 다양한 의견 역시 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어록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의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21]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22]
나는 항상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옵니다. 의무(Duty), 명예(Honor), 국가(Country)[23]가 항상 울려 퍼집니다. 오늘은 당신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합니다. 강을 건널 때 마지막으로 남은 인식 있는 생각은
생도대, 생도대, 그리고 생도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24]
마지막까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용기, 확신을 갖는 용기, 꿰뚫어 보는 용기이고, 세상은 항상 용기있는 사람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의 고함에 맞서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만큼 오랜 싸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실제로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성경을 읽지 않고 밤을 보내거나 잠을 잔 적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In war,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25]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26]
나는 돌아올 것이다. (I shall return.)[27]
자유의 목소리인, 맥아더 장군이 말합니다. 필리핀의 국민들께: 제가 돌아왔습니다. (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28]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29]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30]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30]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는다.[31]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32]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마 자동화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Whoever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obviously never encountered automatic weapons.)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는 철학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등한히 여기며 미학을 멀리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5000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강도짓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기업을 만들고 기업을 운영해서 이윤을 남기고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전제군주제의 세습 신분인 거마냥 선동해서 그들의 사유 재산을 강탈해서 공유하자고 하는 강도질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은 칼 마르크스 라는 악마가 만든 공산주의에 맞서 신성한 사유재산을 수호해야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켜야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춘보다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아이러니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33]
나는 조국의 안녕에 대해 걱정을 금할 수가 없다.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끊임없이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내부의 적이다.
러시아군의 노력은 규모나 장엄함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34]
미국인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Americans never quit.)
군인들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평화를 바란다. 전쟁에서 고통받고 가장 아픈 상처까지 견뎌내야 하는 사람이 군인이기 때문이다. (The soldier above all others prays for peace, for it is the soldier who must suffer and bear the deepest wounds and scars of war.)
이 나라가 다시 재건하는데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 하지만, 맥아더의 예상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해내면서 세계적인 부국으로 도약했다. 한국의 수호를 위해 누구보다도 분투했을 맥아더 본인이 알았다면 매우 기뻐했을 일이다.[35]
― 하지만, 맥아더의 예상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해내면서 세계적인 부국으로 도약했다. 한국의 수호를 위해 누구보다도 분투했을 맥아더 본인이 알았다면 매우 기뻐했을 일이다.[35]
달변가답게 유명한 어록들을 많이 남겼지만 잘못 알려진 부분들도 있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이 문장은 맥아더가 했던 말로 국군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맥아더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영어권의 어떤 자료에도 비슷한 문구가 검색되지 않고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도 유사 문구조차 찾을 수 없다. 오로지 한국에서만 맥아더의 어록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맥아더는 이런 말을 할 처지도 못된다는게 해당 어록이 허위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나온 공통된 의견으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필리핀 공격에서의 경계작전 실패, 6.25 전쟁 당시 중국군의 개입도 무시하다 1개 대대가 전멸하는 치욕[36]을 경험했고 1.4후퇴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
이처럼 해당 어록 자체가 본인의 과오를 돌출하는 내용이기에 본인의 군생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앞뒤가 안맞는 발언이 된다. #
육군의 한 장교가 일전에 미국의 맥아더 기념관에 이메일을 보내 맥아더 장군이 언제 어떤 맥락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보자, 맥아더 기념관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맥아더 장군이 그런 발언을 한 기록은 없다 였다. #
오히려 저 경계의 실패한 군인 예를 들수 있는 것은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이다. 아이젠하워 역시도 미군 원수이자 2차세계대전과 6.25 전쟁의 영웅이며, 오히려 이쪽이 더 경계에 신경을 썼다.
오마 브래들리 항목에도 나온 당시 아이젠하워 원수 시절 미군 경계 암구호 일화를 보면 더 확실하다.
아르덴 대공세 당시 브래들리의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 당시 독일의 오토 스코르체니 SS대령의 특수부대가 미군으로 위장해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이 발각되자, 미군은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검문을 하면서 미국인만 알 법한 질문, 예를 들자면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는 누구냐?", "시카고에 있는 야구팀은 어느 리그 소속이냐"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브래들리는 전선 이동 중에 헌병의 검문에 걸렸는데 일리노이의 주도가 어디냐는 헌병의 질문에 브래들리는 자기 살던 미주리 근처라서 그런지 스프링필드라고 정확히 대답했다. 문제는 미국에서도 시카고의 인지도 때문에 '일리노이의 주도는 시카고'라고 알려졌다는 것. 결국 이 무식한 헌병은 "아니야! 이 멍청아! 정답은 시카고야!" 라면서 브래들리를 즉시 체포했다. 브래들리 말고도 상식이 부족한 병사들끼리 서로서로 많이 체포되어서 애를 먹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위의 시카고 컵스 문제를 못맞춰서 잡혀온 장군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몽고메리는 운전병에게 미국놈들의 바보짓은 무시하고 지나가라고 지시했다가, 열받은 미군 헌병들이 타이어를 사격해 터뜨리고 그를 끌어내려 몇 시간 동안 구금한 흑역사가 있다. 몽고메리는 네놈들을 모두 군법회의에 세우겠다고 펄펄 날뛰었지만, 아이젠하워는 슈코르체니가 최고의 선물을 줬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몽고메리가 아무리 원수인들 올바른 행동을 한 동맹군 병사를 징계할 근거는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이걸 보면 경계의 중요성을 말한 장군은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가 더 가깝다.
5. 후손
명성과 경력을 비롯한 스케일에 비해 의외로 자녀는 아들인 아서 더글러스 맥아더 4세 외에는 없었다. 맥아더가 지은 시인 " 아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아서는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아예 자신의 성까지 바꾸며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 잠적했다.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을 하고 있고, 뉴욕시에 거주한다는 것 외의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2000년에 어머니인 진이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햄버거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허구이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중반쯤에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하지만 연락 하고 있는 친척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세간의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다. 아버지가 원수 계급장을 달 정도가 되면 대개 그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있지만[37], 그는 맥아더가 58세가 되어서야 본 늦둥이라 태어났을 때 이미 맥아더는 미군 최고위 장성이었고,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고작 7살 소년에 불과했다. 맥아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세간의 관심도 높아져서 어렸을 때부터 라이프 지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커가며 이런 관심을 점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자 성을 바꾸고 은거하게 된다. 친척들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형인 아서 맥아더 3세와 사이가 매우 좋았는지, 아들에게 서로의 이름을 붙여줬다. 그래서 미국의 외교관으로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더글러스 맥아더 2세(1909~1997)는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이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들 이름은 개명 전까지 아서 맥아더 4세였다.
6. 기타
- 그의 성씨를 '맥아더'로 표기하지만 실제 발음은 [mək 'ɑːrθər]로, '머카서' 혹은 '매카서'에 가깝다. '맥아더'라는 표기는 영어 철자 'th'를 [θ]와 [ð] 발음 구분없이 "ㄷ"으로 옮기고[38], 연음에 대한 고려 없이 앞말 '맥'과 뒷말 '아더'를 따로따로 표기한 뒤 그대로 붙여 놓았던, 실제 발음과는 동떨어진 과거의 표기 관행에 따른 것이다. 한국식으로 '맥아더'로 쓰고 [매가더]라고 발음하면 영어 원어민은 'MacArthur'라고 알아들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일본에서는 'マッカーサー(맛카사)'라고 표기하는데, '맥아더'보다 오히려 실제 영어 발음에 훨씬 가깝다.[39]
- 그는 적군의 포화 속에서도 느긋한 사람이었으나 자식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어머니 밑에서 성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 첫 번째 아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성적으로 무능한 남편이었단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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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차림새가 대단히 특이하다. 필리핀 육군 원수 정모에 짙은 레이밴 선글라스,[40] 수제 콘파이프 담배인 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 트레이드 마크. 필리핀 원수 정모,[41] 선글라스와 함께 맥아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콘파이프지만 사실 그는 싸구려 콘파이프를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브뤼에르 나무로 만든 고급 수제품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검소한 이미지로 보이려고 콘파이프를 쓴 건 아니고 바빠서 고급 파이프를 챙기지 못해 여벌로 준비해놓은 콘파이프를 물고 있을 때 사진을 찍혔는데 하필 이 때의 사진이 대단히 유명해져서 콘파이프가 그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맥아더 자신이 이런 이미지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서 그 뒤로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콘파이프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들조차 대부분 이런 식의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시대를 앞서 이미지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42][43] 콘콥은 가격이 저렴하기는 하지만 내구성(특히 내열성)이 별로라 오래 쓸 수가 없다. 애초에 콘콥은 소모품이고, 2020년 한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저렴한 것은 만원 대 가격이다. 저렴한 것은 6만원 정도로 구입할 수 있는 브라이어(브뤼에르) 목재 파이프는 저가 보급형이라도 관리만 적당히 해주면 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비해 콘콥은 가격은 만원 대지만 잘 써도 1년을 쓰기가 어려우니 싸지만 오래 쓸 수 없어서 오히려 비 경제적인 것. 따라서 보급형에 가까운 콘콥을 쓰는 사람들은 주로 애용하는 파이프는 따로 있지만 파이프 관리가 힘든 상황에서 막 쓰는 용도로 쓰거나 굳이 돈을 주고 파이프를 사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는 경우였다.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 미국 농촌에서는 직접 농사를 짓거나 이웃집 옥수수대를 얻어서 햇볕에 말려뒀다가 직접 속을 파내서 파이프로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즉, 맥아더의 아이콘인 콘콥은 여기저기 전쟁터로 다닐 일이 많은 맥아더가 예비용 파이프로 가지고 있던 것을 들고 있다가 우연히 사진이 찍혔고[44] 이후 대중적 이미지 조성과 득표를 위해[45]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로 사진에 나오는 콘콥은 실제로 물어보면 더럽게 크고 무겁다. 요즘에도 '맥아더 콘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되고 있는데 일반적인 파이프보다 거의 3배는 무겁고, 일반적인 파이프로 1시간 정도 피울 수 있는 담배를 3배는 오래 피울 수 있다. 그러니 맥아더가 콘콥을 떡하니 물고 사진은 맥아더다운 멋부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미군은 6.25 전쟁 시기까지 전투식량을 통해 담배를 보급했으며, 궐련 뿐 아니라 파이프 연초와 곰방대도[46] 지급하였다.[47]
- 그의 화려한 사관학교 시절 성적이 증명하듯 매우 유능한 군인이었고, 교양과 학식 또한 높았다. 그가 남긴 많은 명언이 그렇듯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도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외모 또한 큰 키에 귀족적인 풍모가 있어서 정말 누가 보아도 엘리트 군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이승만과는 자신이 소령일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며 두 사람은 돈독한 사이였다. 말년에 그에 대해 “평생을 조국을 위해서 싸웠으며 정치를 할 때 다소 잘못이 있었더라도 고국에 들어가서 명예로운 최후를 마쳤으면 좋겠다”고 하였다.[48] 여담이지만 맥아더와 이승만은 1년 차이로 사망했으며, 둘 다 미국에서 죽었다.[49]
- 맥아더는 연설 마지막에 자주 주기도문으로 끝마치는 버릇이 있어 주기도문 맨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 연설에서, 그리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 연설에서도 그는 주기도문으로 연설을 마무리 하였다.
- 맥아더가 한국에게 선사해준 공로는 이 두 가지로 설명 가능하다. "일제로부터 한국 해방",[50] "공산화 저지".
-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도착해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후퇴하지 않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어느 한국군 병사에게 맥아더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고 묻자, 그 병사는 "상관의 후퇴 명령이 없습니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이 참호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탄복한 맥아더가 무슨 소원이 없냐고 묻자, 병사는 "국군에는 소총밖에 지급되어있지 않고 그나마도 탄약이 부족합니다! 적들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51] 이에 감격한 맥아더는 바로 지원군 파견을 결심했다는 일화가 있지만 이 일화는 6.25 전쟁 참전 국군 장성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퍼진 일화로 미국 맥아더 기념관에 문의한 결과 맥아더 장군과 국군 병사의 일화는 맥아더 회고록과 미국의 6.25 전쟁 전사 등 맥아더 개인 및 미국 공식 기록과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다시 말해 진실임을 입증할 명백한 근거가 부족한 일화로 신빙성 논란이 존재한다.[52] 참고로 이때 맥아더의 시찰 비행 기록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 한편 조선일보에서는 맥아더와 만났던 국군 병사의 주인공이 2013년에 작고한 신동수 일병이라고 보도하였는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당시 신동수 일병의 소속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18보병연대가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영등포지구 시찰 이후 배치되었기 때문에 신동수 일병은 맥아더를 시간순서상 만날 수가 없다고 발표하였고 이에따라 조선일보에서도 정정보도 기사를 발행하였다.( 정정보도 기사 원문)[53]
- 6.25 전쟁에 참전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 이 나라가 재건되는데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하고 휴전으로부터 반 세기도 안 되어[54]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55][56] 심지어 맥아더의 외동아들 아서 맥아더는 휴전 협정이 맺어진 1953년에는 고작 15세의 청소년이었으나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한 2002년에는 64세로 노인이 되기 직전이었다.
- 한국에서의 임팩트는 정말 커서 일부 무속 신앙에서 신앙의 주체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한강일대 지역은 부군신이라고 해서, 현세에 살았던 인물중 곡절이 있고 한이 있는 삶을 산 유명인이 죽은뒤[57] 부군신으로 모시고 그 제사를 부군당에서 지내는 무속신앙이 널리 존재했는데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북진통일까지 가다 중공군의 반격을 받고, 트루먼 정부와의 갈등으로 해임되면서 한국을 떠나는 그 스토리가[58] 부군으로 모시기에 적절해서 6~70년대 신격화가 되어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인천 지역 몇몇 무속인이 주도해 맥아더 부군당이 생기고 이를 숭배하는 무당이 생겼다. 1970년대에는 외국 담배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시절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양담배를 불법으로 입수하여 제물로 써서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남아 있다. 실제로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현재도 인천광역시에는 다수 있다. 사례 1 사례 2 웹툰 와탕카에도 등장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맥아더 본인의 종교는 개신교였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개신교를 믿는 맥아더 본인과 가족들이 이 모습을 보면 황당해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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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에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맥아더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러나 2005년에 NL성향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이 동상의 철거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시민의 성금으로 세운 기념물의 주인공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든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관철되어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서울 자하문 터널 옆에도 동상이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자하문 고개에 있는 동상은 김신조 외 20여명이 박정희를 암살하러 왔던 1.21 사태 당시 현장에서 순직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다. 그외 맥아더 장군 동상은 경복궁 경내와 반공회관(현 광화문 KT 사옥) 앞에도 1960년대 말까지 있었다.
- 호주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호주는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주력 사단이 대부분 북아프리카 등 유럽 전선에 파병나간 상황이라서, 예상되는 일본의 공격에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미국의 급조된 2선급 사단과 준정규군인 호주 민병대를 이끌고 뉴기니 전선에서 악전고투,[59] 일본군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으면서 버텨내고,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함대가 극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내면서 호주는 일본의 위협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이후 뉴기니 전선에서, 그리고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 이후 과달카날에서 일본군 지상 전력이 급격히 소모되면서, 호주에 대한 일본군의 위협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소규모 일본군 병력이 호주 서부에 상륙했다는 떡밥이 있긴 한데, 어차피 전황에 손톱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은 관계로 무시당했다. 이렇게 보면 호주에서 맥아더를 높이 평가해야 맞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평가는 높지만, 막상 미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공세로 돌아선 이후로는 맥아더는 호주군의 주 업무를 전략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미군이 지나친 섬들에 대한 토벌전 정도로 한정지었다. 개전 초기, 가장 어려운 전선에서 열악한 여건에도 용감히 싸웠던 호주 사람들은 당연히 격분했다. 다만 이것은 맥아더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한숨 돌린 1943년 후반 이후 미국은 전후 국제정치 판도를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호주군이 필리핀 상륙까지 동행하면서 남서태평양 일대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호주가 그럴 수 있었다면 전후의 인도네시아 독립과 엮여 어쩌면 태평양권의 군도 몇 군데를 확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60]
- 일본에서는 별명이 정이대장군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일본에서 한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렀다는 것이 이 별명이 붙은 이유이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 GHQ 막부 정이대장군 더글러스 맥아더'라 불렸다.
- 3인칭화로 자신을 지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화법은 전근대 유럽 군주들의 화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도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의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자신을 3인칭으로 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61] 이건 맥아더가 스스로 황제나 대통령으로 인식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부하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대통령 특사나 장차관들 앞에서도 종종 이런 말투를 썼다고 한다.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다들 기겁했다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맥아더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식으로 말한 꼴이다. 트루먼을 무시하고 문민통제에 반하는 행적을 보였던 사람임을 생각하면 이걸 확대해석이라고 볼 여지가 줄어든다. 최대한 축소해서 봐도, '내가 나인데' 급의 권위주의자였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런 3인칭 화법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면 나오는 것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런 3인칭 화법을 썼던 것으로 유명하다.[62] 소문으로는 맥아더 본인도 자신을 카이사르의 환생으로 생각했다고 하나 실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전기작가 중에도 이런 떡밥을 문 사람이 있는지 자신의 맥아더 전기 제목을 'An American Caesar(미국의 카이사르)'라고 지었다.
- 맥아더는 군생활을 공병 장교로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서는 엘리트 코스가 공병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종찬과 비교되는 점이라는 말이 있다.
- 맥아더는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6개의 펜을 사용했다. 평소에 쓰던 만년필 외에 5개의 펜을 더 썼는데, 이는 종전 문서에 서명한 펜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5개를 더 만든 것이다. 이 중 2개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조인식에 초대된 조나단 웨인라이트 미 육군 중장과 아서 퍼시벌 영국 육군 중장[63]에게 각각 1개씩 선물로 주어졌다. 1개는 아들에게 물려줬고, 1개는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보냈고, 마지막 1개는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에 보냈다. 맥아더라는 인물의 치밀함과 동시에 정치적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다.[64] 여담의 여담으로 이 만년필은 모두 Parker사의 듀오폴드 만년필로, 이 때문에 파커 사는 맥아더를 기리는 한정판을 발매하기도 했다.
- 1890년대 아버지 맥아더가 조선을 방문했었고 고종으로부터 향로를 하사받았고 이를 가보처럼 맥아더 역시 부대에도 가지고 와 전시하고 그러다 필리핀에서 퇴각할 때 분실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맥아더에게 똑같은 국보급 향로를 선물로 전달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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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 원수의 무공 훈장에 네 번째 백엽 장식을 서훈하는 트루먼 대통령. 사진 맨 오른편은 오마 브래들리 원수.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이다.
- 웨이크 섬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마중하려고 몇 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한 게[65]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수하들이 감히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트루먼이 도착해서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미처 마중 나가지 못하고 트루먼은 비행기 문에 서서 마중나오는 그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그 뒤에 트루먼의 표현을 빌자면 "70살 처먹은, 그것도 원수라는 인간이 19살 소위처럼 빌어먹을 선글라스와 채우지도 않은 상의와 부착물이 잔뜩 달린 모자를 쓰고 나온" 맥아더를 접견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트루먼이 "난 당신을 만나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왔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따위 것이 아니오. 당신이 해리 트루먼이란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신경 안 쓰지만 다시는 군 통수권자를 기다리게 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알아들었소?"라고 말하며 무안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66]
- 제46대 미합중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 토론 중 맥아더를 언급하여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맥아더 원수를 가장 좋아하는 장군으로 언급하며, 반대로 제임스 매티스 장군은 가장 과대 평가된 장군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 2017년 12월 17일, 6.25 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라우니가 별세했다. 최종 계급은 예비역 중장으로 향년 100세.
- 여러 모로 맥아더의 파면은 이승만 입장에선 상당히 아쉬운 일이었다. 1951년 당시엔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 앞에서 통일을 놓치게 된 상황에서 휴전에 대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염원하였으나, 미국 정부의 상당수 요인들은 제3차 세계 대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북진통일을 할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기존의 남한 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고 나면 바로 휴전을 할 생각이었다.[67] 맥아더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여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는데 맥아더가 파면되었으니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후원자를 놓친 셈이었다.
- 맥아더의 시계는 예거 르쿨트르의 리베르소 모델이다.
-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롱아일랜드 맥아더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헌데 맥아더는 이곳 출신도 아니고 공항을 방문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의 필리핀 탈출 무용담이 전해지자 지역 주민들이 그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서울 워커힐호텔의 더글라스 하우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헌데 이곳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워커힐호텔은 1963년 미군 휴양지로 개관을 한 까닭에 호텔 내 건물 모두 참전 미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 패전 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숭배한 바 있다. 우상숭배 항목에도 언급될 정도로 강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재임시절 일본인들의 편지가 44만여 통이나 왔고 대부분 맥아더를 구세주, 신과 같은 자비 등으로 표현하고 심지어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내용까지 있어 담당관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
- 신체 스펙을 보자면 당대 한국인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은 160~165cm 사이에 미국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이 175cm 안팎이었는데 맥아더는 이렇게 따진다 하더라도 덩치가 큰 편에 속했다. 그래서 6.25 전쟁을 묘사한 창작물에서는 기본적으로 한국인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큰 거인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히로히토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면 키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심한데, 이건 당대 기준으로 보면 히로히토가 평범한 신장이고 맥아더가 거인인 것이다.
-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당시 실물 훈장이 없어서 '건국공로훈장'을 대체했고, 훈장 증서를 수여한 것으로 대체했다가 74년이 지난 2024년 1월 26일에 태극무공훈장 실물을 수여했다.
7.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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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독특한 인상 덕에
조지 S. 패튼과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
디젤펑크 당시 미군 장군이나
미국을 모티브로 한 세력의 장교,
장성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다. 괄괄한 성격에
ㅗ자별단 철모 쓴 양반이 패튼이라면 정모 쓰고 담배 물고 선글라스 썼다면 이 사람 패러디. - 닐 스티븐슨의 소설 <크립토노미콘>에 보면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동시에 은근 웃기게 나온다.
- 웹툰 도사랜드에서 주인공 엄마인 여자무당이 모시는 신으로 등장한다. 통칭 제너럴 보살. 이게 꽤 유명해서 TV Tropes 같은 서양쪽에서도 한국이 맥아더를 신으로 모신다는게 많이 알려져있다.
- 일본 우익 만화나 가공전기에선 포로로 잡혀 참수당하기도 한다. 과거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지배받던 시절의 열등감 때문인지 열에 아홉은 맥아더의 상징인 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물려놓고 참수한다.
- 일본 작가 모토 라이치의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주적으로 등장. 다만 육군이라 주인공인 쿠루스와 별 접점이 없어서 비중은 낮다. 어째서인지 실제보다 젊은 모습으로 나오며 상당히 경박한 모습이다. 작가인 모토 라이치는 후에 아사히 신문사에서 출간한 주간 망가 일본사에서 맥아더의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본 점령 통치기를 그렸다. 여기서 맥아더는 일본인을 사랑한 푸른 눈의 쇼군으로 군국주의 일본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국가로 만들었다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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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영화로도 나왔다. 1977년 영화 맥아더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펙을 캐스팅한 이유는 실제 맥아더와 닮아서라고. 하지만 연기 자체는 별로였는지 그레고리 팩은 이 영화로
골든 라즈베리상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다는 루머까지 돌고 있다. 하지만 실제 골든 라즈베리는 1980년부터 시상을 시작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이야기. 아래의 '오! 인천'의
로렌스 올리비에와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62년 5월 맥아더가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고별 연설을 하는 장면을 시작과 마지막에 넣고, 그 사이에 2차대전과 6.25 전쟁 시절을 회상 방식으로 보여주는 구성이다. 흥행이나 평가는 그다지 안 좋은데 감독은 바로 죠스 시리즈를 끝장낸
죠스: 더 리벤지 감독인 조셉 사전트(1925~2014)이다.
2차대전 장면은 적절한 고증을 보여 주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한참 후에야 개발되어 1958년에 첫 시험 비행을 시작한 F-4가 나오는 고증 오류가 있다. 맥아더 미화 때문에 트루먼이나 루스벨트가 약간 찌질이로 나오지만 의외로 맥아더에 대한 연대기 서술이나 보통은 잘 잊어버리는 일본 군정 시기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KBS 방영판에서 맥아더 성우는 유강진.
- 전설의 망작 오! 인천에도 당연히(?) 나온다. 당연히 그레고리 펙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통일교 문제로 시끄러워서 본인이 거부하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캐스팅되었다. 상당히 망작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변명하자면 이 영화 촬영 전에 그가 사경을 해맬 정도로 힘든 수술을 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나름 싸게 먹혔고 본인도 돈이 궁했다는 게 정설. 그 자신도 이 영화를 흑역사로 생각해서 언급을 안한다. 그나마 로렌스에게 긍정적인 것은 수술비와 재정 문제를 개런티로 잘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
- 한국 드라마에서는 주한미군이나 외국어 강사 등을 섭외해서[68] 지나가는 역이나 공기급 캐릭터로 묘사했다. KBS1에서 1984년에 방영한 2부작 다큐드라마 <전쟁 6.25>와 <휴전 6.25> 연작에서는 당시 유명한 외국인 배우 데니스 크리스틴이 열연했다. 그는 미국 유타 주에서 태어난 백인-원주민 혼혈로, 1966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 재학 도중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교환학생으로 유학하여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귀국 후 1972년부터 배우가 되어 <스타스키와 허치> 등지에서 조연과 단역을 넘나들다가 1981년 2월 19일 한국으로 또 오면서 정착하여 KBS1 특집극 <코리아환상곡>으로 국내 데뷔했고, 대하드라마 <풍운>과 한미수교 백년 특집극 <맥토>, <현대입지전> '북청 물장수', <고교생 일기>, <함 사세요> 등지에 나오며 여느 외국인 배우들보다 활발히 활동했으며, 영화 <경의선>과 <서울이여 영원하라> 등지에도 나왔다. 망작인 <죄 없는 병사들>의 주연 겸 감독이기도 했고 MBC 특별기획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장하림의 상관으로 나왔다. 연기생활 와중인 1984년부터 1년여 간 <TV가이드>에 '여의도에 살며' 칼럼을 연재한 바 있으며 1986년에 탤런트 서은경과 결혼해 아들을 뒀다.( 1982년 동아일보 기사, <TV가이드> 1987년 7권 43호 p51) 반면 1985년작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더글러스 혼이 연기했다. 2020년 JTBC 수목드라마 < 쌍갑포차>에서 제임스 니프시가 특별출연해서 연기했다.
- 당연히 북한 영화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대전 전투를 다룬 북한 영화에서는 남조선군을 선발에 세우고 부상병을 대포밥으로 만들어라라고 킬킬대는 싸이코 기믹으로 나온다. 물론 따까리는 윌리엄 딘 소장, 결국 영화에서 맥아더는 발리고 딘은 찌질하게 손을 들고 투항한다. 외국인 연기자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인지라 딘이나 맥아더 모두 북한 배우들이 연기했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 한국 NL운동권 세력에게도 매우 부정적인 대상으로 간주되는데, 대표적으로 김남주 시인이 지은 시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있는 나라는>[69]과 2005년 강정구 교수의 칼럼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민중가수 박성환[70]의 <맥아더>가 있었다. 특히 박성환이 부른 해당 곡은 당시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과 맞물려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 소식은 2005년 9월 9일 < 데일리안>에 처음 보도된 뒤 연합뉴스 등지 여러 언론에 보도되어 파문이 커졌으며 박성환의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비난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해당 노래 가사에는 맥아더의 양민 학살 지시 여부,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발언 등 사실관계가 불분명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반면 박성환 측은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다른 입장을 보였다.
- 같은 시기에 가수 송만기[71]는 박성환의 곡에 응수해 <맥아더를 사랑하자>란 노래를 발표했으며, 2016년 5집 발매 시 <맥아더 장군을 아시나요>로 제목이 바뀌어 나왔다.
- 미군은 지금까지 그 어떤 무기에도 맥아더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다.[72] 같이 윗사람에게 대든 알레이 버크 제독의 이름이 이지스 구축함에 붙어있는 걸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정치가들에게 미움을 받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일반 시민들의 지지는 높아 맥아더의 이름을 딴 공공건물이나 도로, 거리 이름은 어지간한 대통령보다도 많다. 그 중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의 맥아더 공원.[73] 간헐천으로 유명하고 덕분에 영화 볼케이노에서는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도나 서머의 노래 'MacArthur Park' 로도 유명한데 디스코음악 전성기 시절 처음으로 빌보드 1위를 하게 해준 노래.
- 만화 보스의 두 얼굴에서는 성기 컴플렉스를 가진 FBI 수사관 맥더아로 패러디된다. 일본의 맥아더에 대한 열폭 때문인지 온갖 찌질한 짓을 하다가 결국 미쳐서 본국에 소환당했다가 나중에 총 맞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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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폭스가 출연했던 미일 합작 영화 <EMPEROR>에선
토미 리 존스가 분했다. 외모 면에서는 싱크로율이 아주 높지는 않으나 맥아더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나 오만에 가까운 행동거지를 매우 적절히 표현했다. 이 영화는 한국에는 <맥아더: 일본 침몰에 대한 불편한 해석>이란 괴이한 제목으로 개봉했다. 제목만 보면 맥아더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맥아더의 부관 정보장교였던 보너 펠러스(Bonner Fellers) 준장으로, 이 인물은 덴노의 전범 혐의 수사를 맡았던 일본에서의 행적 외에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행적 또한 논란의 대상이라 후세 전사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가공의
사랑타령 때문에 역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혹평을 들었지만 맥아더 캐릭터만큼은 좋게 평가받았다.
당당한 미국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트루먼 대통령과 일본 핵폭격 배틀
- 강해 설교자로 유명한 미국의 목사 존 맥아더가 더글라스 맥아더의 먼 친척이다.
- 2016년 개봉한 한국 영화 < 인천상륙작전>에서 리암 니슨이 맥아더 역을 맡았다. 근데 평가가 매우 안 좋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 2016년 9월 21일, 본격 시사인 만화의 한 편에 주인공으로 출연. #잘알려지지 않은 맥아더의 흑역사를 조명했다.
- 그보다 앞서 역시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가고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더글라스 맥아더도 카리스마와 권력 그리고 인정사정 없는 성격이 가고일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기에 말이 되기는 하지만... 사실 나중에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패러디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거기 써먹으려고 패러디한 것 같다. 참고로 네모 선장은 카를 되니츠다. 작중에는 만화가 유럽전선에 비해 태평양 전쟁은 대충 다루는 것에 불만이 엄청 많은 걸로 나온다. 대놓고 작가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육군 원수로 개근하고 있다. 3편, 4편 한정 미국 대선 이벤트에서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등장할 수 있다. 4편에서 Man the GUNS DLC를 구매하면 2차 남북 전쟁이 활성화되는데 파시스트로 가는 경로를 밟아 내전이 일어나면 비동맹주의와 파시즘 지도자로 등장한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1936년 미국 대선에서 미국 사회당 잭 리드나 미국 제일당 휴이 롱이 당선됐을 때 기존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도 사회당과 제일당이 지속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면 맥아더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통칭 "미국의 카이사르". 맥아더의 쿠데타 시 내전은 러스트 벨트 지방의 미노조연맹, 남부의 미연합국, 서부의 태평양 합중국의 4파전으로 일어나고, 맥아더의 미국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기 때문에 플레이 난이도가 높다. 내전에서 승리했다면 군정을 지속할 수도 있고 민정으로 이양할 수도 있다. 민정으로 이양할 시 공화당 대선 후보로 등장한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에서는 위대한 장군 위인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으로 등장한다.
- 세계 정복자에서는 뛰어난 보병장/전차장으로 나온다.
- 디스트로이 올 휴먼즈 시리즈에 나오는 암퀴스트 장군은 맥아더를 모티브로 했다. 반공주의 장군이지만 주인공에게 살해당한 뒤 거꾸로 용공분자로 쿠데타를 획책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navertv(33507586)]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3부 - 전장의 묵시록中[74][75][76] |
- 대체역사물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한국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주로 미국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정의로운 전쟁 영웅인 일명 '맥황상', 혹은 흑화해서 독재자가 되는 일명 '맥가놈' 둘 중 하나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북부의 명장이자 맥클레런을 존경하는 다니엘 맥아더로 나온다. 웃긴 것은 실제의 맥아더는 스톤월 잭슨을 존경했다. 다만 이 작품의 시대는 남과 북이 갈려 있으니 이야기가 다르다. 1차 대전 당시 최연소 사단장으로 출연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의 경쟁자 겸 수제자로 나온다. 둘이 최초로 조우하는 부분은 명장면.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는 필요하다면 남부연합을 독가스로 선제공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남부연합 후방 지역에 대한 기습 상륙을 입안하는데... 뒤의 비중은 거의 공기 수준. 다만 등장인물의 언급으로 2차 대전 내내 리치먼드 북방에서 남부연합의 방어망에 걸려서 고전하는 것으로 나오긴 한다.
- Steele에서는 1942년 필리핀에서 탈출할 무렵에 강철의 대통령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한다.
-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소련이 대화상대로 맥아더를 점찍으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국방장관까지 오르며 미국과 소련의 비밀 거래로 중국과 북한 전체에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면서 6.25 전쟁이 동북아전쟁으로 확대되며, 한미연합군의 승리로 종전한다. 이로써 맥아더는 미국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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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주인공의 조력자로 등장.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다.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루스벨트가 당선에 실패하고 뉴딜이 없어서 대공황으로 막장이 되어버린 미국에 계엄령이 떨어지자 계엄 사령관으로 미국을 통치하는데 빨갱이, 노조, KKK, 우익 민병대, 마피아, 흑인민권론자, 대기업 트러스트, 마약사범들을 좌우 안 가리고 평등하게 조져버린 덕에[77] 워낙 막장인 미국을 강하게 때려잡아서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지만 역시나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 미국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 우익이지만 아버지가 흑인 해방을 위해 싸웠다는 것 때문에 흑인 민권론자를 때려잡으면서도 흑인들을 차별하지는 않는다. 막장인 미국을 계엄령을 유지하여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의회의 압박에 궁지가 몰려 노스우즈 작전과 9.11 테러를 섞은 자작극을 꾸미다가 후버에 의해 음모가 폭로되어 퇴진한다.
- 세계대전 참전군인으로 살아남기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현대 한국인이 맥아더에 빙의했다는 설정이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도 등장. 한국군이 활약하자 미군도 활약해야 한다며 손수돌격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유진 킴이랑 친하게 지내는 듯.
-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맥가놈'의 클리셰를 따라가다 못해 폭주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윌슨의 음모가 폭로되면서 유럽 원정 미군이 온갖 조롱을 받게 된 현실에 분노하던 중, 전간기에 접한 라 로크의 ' 나의 조국'이란 책을 계기로 파시스트가 된다. 그러다 보너스 군대 사건이 일어나자 무력진압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되려 보너스 군대를 선동하여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리고 대통령을 축출하고 신정부를 세운 뒤 반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 편으로 참전하지만 갈수록 추태를 보이다 못해 겉모습마저 뱃살이 두툼하게 붙어서 스타워즈에 나오는 민달팽이 외계인 같은 몸매가 되었고, 결국 연합국의 병력이 본격적으로 미국에 도착하면서 연전연패를 당하자 도망치다 시카고 저항군에게 걸려 문자 그대로 복날 개 맞듯 맞아죽으며 고깃덩이가 되어버리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는 패배했으나 일본을 상대로는 승리한 덕분에 미국에 승리를 가져다준 전쟁 영웅이 되어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독식하다시피 한다. 미독 냉전기에 들어선 뒤 원 역사의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통해 본격적으로 독일에 대한 적대 기조를 드러낸 후 성조기 아래에서 하나된 미국을 주장하면서 매카시를 시작으로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들을 작정하고 때려잡고, 인종차별 성향이 강한 남부에서 일어난 반대 시위들도 때려잡고,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자 연합군을 소집해 아르헨티나도 때려잡고, 쿠바에서 쿠바 혁명이 일어나고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하자 쿠바까지 때려잡는 화끈한 모습을 보인다. 그 와중에 히틀러가 계속해서 보내는 화해 무드를 무시했지만, U-2 격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뜻밖에도 독일에게서 해당 문제의 해결과 양국의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해 정상회담을 제안받자 히틀러의 제안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응한다. 그리고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끝에 핫라인 설치와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하며 진정한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오는 업적을 세웠고, 루스벨트처럼 3선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후 4선 출마를 거절하고 백악관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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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외부 링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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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비역 미국 육군 중장 출신.
1845년
6월 2일 ~
1912년
9월 5일 (향년 67세)
[3]
1876년
6월 1일 ~
1923년
12월 2일 (향년 47세)
[4]
1878년 ~
1883년 (향년 5세)
[5]
1890년 ~
1965년
5월 30일 (향년 75세)
[6]
1898년
12월 ~
2000년
1월 (향년 101세)
[7]
1938년
2월 21일 ~ (85세)
[8]
원수는 정년 없이 종신 복무토록 규정되어 있어, 비록 은퇴하여 실제 근무는 안 하고 그냥 집에서 놀더라도 군에서 받은 의전 예우 그대로 받으면서 지내는 게 가능하다. 원수 개인이 "전역"을 희망하면 예비역으로 신분 전환되는데, 이를 이용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잠시 전역 신청한 뒤 대통령 임기 만료하고 나서 육군의 예비역 소집 명령을 받는 식으로 다시 육군 원수 자리를 유지했다.
[9]
베라크루즈 점령
[10]
후술하듯이 맥아더는 명예훈장을 비롯한 미군 소속 군인이 받을 수 있는 대부분의 훈장을 받았지만 그는 보통 Army Distinguished Service Medal(DSM, 수훈복무훈장)만을 근무복등에 정장으로 차고 다녔다. 후줄근한 근무복에 더 상위의 훈장을 많이 수훈받았음에도 약장을 니미츠처럼 줄여서 달고 다닌 것도 아니고 유독 수훈복무훈장만, 그것도 약장도 아닌 정장으로 차고 다닌 부분은 맥아더의 아이덴티티인 담배 파이프, 필리핀 원수모와 함께 그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11]
또는 맥아더
원수.
[12]
반대로 아이젠하워는 유럽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연합군을 지휘했다.
[13]
사실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 당시 맥아더의 권위와 권력은 쇼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쇼군은 최고 권력자였지만 천황의 신하인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맥아더는
쇼와 천황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이 천황 아래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당시 덴노건 쇼군이건 결국에는 일본 내에서 일본 내의 무언가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맥아더는 미국이라는 엄청난 대국을 뒤에 둔 미국의 고위인사인 데다가 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미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직접적 패전국인 일본에서 절대자일 수 밖에 없었다.
[1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사의 위대한 아시아인들을 선정한 것인데, 이 리스트에서 맥아더는
마하트마 간디,
덩샤오핑,
아웅 산 수 치,
리콴유,
코라손 아키노 등과 함께
정치인으로 분류되었으며 정작
일본 태생의 정치인은 리스트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15]
전후
일본의 경제적 재건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LA 타임즈가 선정한 '
20세기 경제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으며, 정치인 중에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다.
#
[16]
다만 이 비판이 무색하게 맥아더 본인도 6.25 전쟁 당시
만주 지역에 핵공격을 주장했다가 결국엔 해임당했다. 하지만 평가 항목의 핵공격 주장을 보면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보면 공개적으로 핵 얘기를 꺼내서 겁만 주는 것으로 끝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해임건도 이것만으로 해임사유는 아니지만 말기에 정치군인의 길을 걷다가 트루먼과 사이가 나빠져 이것으로 해임시킬 마지막 명분이 됐을 뿐이다.
[17]
애초에 중국의 기반을 박살내려면 만주보다는 충칭이나 상해에 핵공격을 하는게 적절했다. 인구밀도가 낮은 만주를 굳이 언급한건 전면전이 아니라 겁만 주려는 의도가 크다고 봐야한다.
[18]
천만에 가까운 미육군 누적 참전 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13,000명만 수훈받았다.
[19]
영웅적인 행동을 한 군인에게 수여
[20]
초대 수훈자
[21]
본래
옛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맥아더가 한 말로 기억되고 있다.
[22]
퇴역식의 연설 중 나온 어록이다.
[23]
위에 소개된 '노병은 죽지 않는다'와는 달리, 이 말은 맥아더의 오리지널 어록이다.
[24]
1962년 5월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군인이 명심해야 할 가치'로 역설한 말이다.
[25]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에도 쓰여 있는 말이다.
[26]
핵무기의 위력을 보고 한 말이다.
[27]
일본군의 침공으로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한 말로,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
[28]
위 연설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필리핀 수복 직후의 연설이다.
[29]
일본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한 말이다. 보통 일본을 놀릴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고 당시 일본인들도 격분했으나 전체적인 내용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독일이 45세의 지능범이라면 일본은 12세 소년이니 벌을 주기보다는 이끌어 줘야한다고 일본을 쉴드쳐준 것이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30]
전투기 1대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보다 비싼 돈을 쏟아부어 양성한 여러 엘리트 조종사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비인간적인 측면과, 정작 성공했다고 쳐도 카미카제에 당한 미군의 군함에는 별 피해가 없는, 그야말로 인명 경시와 전력 낭비의 끝판왕이기 때문.
[31]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 일본군이 반란을 하지 않겠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과연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종전 후 맥아더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울면서 환송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칼 맞아 죽은 쇼군들은 몇 명 있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요시테루 등이 있다.
[32]
혹은 "전쟁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33]
사무엘 울만(Samuel Ulman․1840~1924)의 시로 맥아더 장군이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 집무실 벽에 걸어 놓고 늘 읽었다.
[3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했던 말이다. 사실
독소전 초기 더글라스 맥아더 뿐만 아니라 니미츠와 아이젠하워를 포함하여 소련군의 군사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35]
한국은 맥아더의 늦둥이 아들이 노인이 되기도 전에 선진국에 진입했다.
[36]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대대급 부대를 버려둔 채 후퇴하며 버려진 8기병연대 3대대는 전멸하여 800명중 6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
[37]
체스터 니미츠 원수의 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는 일찍이
아버지와 같은 전장에서
잠수함 함장으로 활약했으며, 1957년에 해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Texas Instruments에 입사했다.
미 해군사관학교 엘머 B. 포터 교수의 저술로 1977년에 나온 니미츠 전기에 따르면, 니미츠 주니어는 부친의 후광과 그 자신이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써 충분히
4성 제독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해군 장교에 대한 가치관에 혼란이 생겨 결국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고 니미츠 원수는 아들이 해군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따뜻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38]
비슷한 예시: Thatcher (새처→
대처) , throw in (
스로인→드로인), Nathan (네이선→나단), Ethan (이선→
에단) Heathrow (
히스로→히드로)
[39]
영국식 영어 발음으로 'MacArthur'를 읽으면 'マッカーサー'와 거의 차이가 없다.
[40]
"애비에이터" 라고 부르는 모델로,
탑건의
매버릭이 썼던 모델이었다.
[41]
탈모가 있어서
전쟁 중에 사진에
모자를 벗은 것이 없다. 그나마 모자를 쓰지 않고 찍은 대표적인 것은
히로히토와 나란히 서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독일군 마냥 정모를 찌그려 놓은 게 특징인데 이런 정모를 크러셔 캡이라고 부른다.
[42]
비슷한 사례로
윈스턴 처칠이 있다.
괴벨스 때문에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마피아
두목과 같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으며 당사자는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정작
국민들은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나치를 정말
마피아 처럼 모조리 소탕해버릴 듯한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이 연상 되어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우연을 겪은 또 다른
주인공으로는
KFC의 창업자인
할랜드 샌더스를 꼽을 수 있다. 겨울용 검은
정장을 세탁한 바람에 여름용 흰색
양복밖에 고를 수 없는 상황에 별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입고 나갔었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아예 그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축구계에서도
체흐가 큰 부상을 입음으로 인해 헤드기어를 착용했지만, 오히려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은 바 있다.
[43]
참고로
인천 상륙 작전에서 맥아더가 직접 바닷물을 헤치며
육지로 걸어 올라오는 유명한 사진 역시,
미군의 강인함과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진이다. 심지어 이 사진의 원조는 2차대전 당시 맥아더가 일본군에게 빼앗긴 필리핀에 재상륙하면서 종군기자에게 찍혔던 사진으로, 인천에서는 대놓고 언론플레이를 하려고(북한도 결국 일본군 꼴이 날 것이란 심리전) 필리핀처럼 연출한 것이었으며 사진만 봐도 뒤에 병사들이 상륙정에서 편하게 쉬고 있는데 바다로 뛰어들어 걸어온 것이 연출임을 알 수 있다.
[44]
근데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맥아더가 콘콥을
호불호와는 별개로 실제로 자주 썼다는 뜻이다. 콘콥이 소모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젓가락으로 비유하자면 은젓가락이나 자개로 장식된 젓가락과 같은
명품을 애장품으로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바깥에서 식사할 일이 많으면 1회용
나무 젓가락을 자주 쓰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에도
여행이나
출장을 자주 다니는 파이프 흡연자라면 훼손되거나 분실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콘콥 1~2개를 가지고 다닌다. 맥아더는 아버지가
고종 황제에게
선물받은 향로를 전쟁터에까지 가지고 다니며 전시했다고 할 정도로 호사를 즐기는 성격이었지만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군인에게 파이프와 같은 쉽게 버릴 수 있는 사소한 소모품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45]
대통령 후보 출마 시에 맥아더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보수적인 농촌
주민들에게 콘콥은 몇 번씩 직접 만들어서 써 본 소박하고 익숙한 물건이다.
[46]
아직 파이프를 피우는 흡연자들이 많았기 때문도 있지만, 궐련의 경우 야간작전 때 담뱃불 때문에 적에게 위치를 노출당할 수 있어 파이프를 피우는 병사들이 많았다. 흡연자인 병사들은 이중으로 뚜껑을 달아 담뱃불이나 연기를 완전히 차단한 파이프를 주로 사용하였다.
[47]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만 해도 궐련이 대중화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담뱃잎만 제공했다.
[48]
林炳稷,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1964, 女苑社, p. 389
[49]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쫓겨난 뒤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가 현지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원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건강 문제와
박정희 정부의 귀국 반대로 끝내 국내에 못 돌아오고 현지에서 죽었다.
[50]
다만 맥아더는 종전 이후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에 가담한 전범 상당수를 기소하지 않고 사면시켜주었다.
[51]
이 일화는 1985년 KBS 드라마 -
오성장군 김홍일 3부 (1:40:28초 장면) 그리고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재현되었다.
[52]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국군 병사 일화가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맥아더 장군과 달리 다른 대부분의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의 군기와 전투력을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다. 문제는 미군 선발대로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군기와 전투력 역시 한국군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는 점.
[53]
원문에는
제8연대로 오타 실수가 있는데 신동수 일병의 소속부대는
제18보병연대가 정확하다.
[54]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한 시기는
2002년이며,
IMF 외환위기를 논외로 하면
1994년이다.
[55]
사실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10년도 되지않아 나라가 두동강난데 이어 전쟁으로 낙동강 바깥 지역의 국토는 모조리 황폐화되고 수십만의 청년들이 전투에서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 역시 폭격, 학살 등으로 엄청난 사상자들이 발생해서 국가 역량을 책임질 청년층의 감소까지 겪었으며 서독과 일본, 스페인마냥 전쟁 후 수월하게 경제를 복구할 수 있을 정도의 산업 인프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한미상호방위협정으로 어찌어찌 미국이 한국을 지킨다 하더라도 북한은 기본에 공산권 국가 중 큰형님들인 소련과 중국까지 근처에 있어 시시탐탐 한국의 안보를 위협했으니 일반적인 생각으론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걸 기적으로 여겨야할 판이었다.
[56]
"한국의 전후 발전상을 본다면 무덤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일어나 춤을 출겁니다.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맥아더 사령관이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자 한 자유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라는 맥아더재단 사무총장 윌리엄 데이비스의 언급이 전쟁기념관에 기록되어 있다.
[57]
최영장군이 대표적이다. 당대의 폭군인
연산군도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재평가되어 강화군 교동도에 부군으로 모신 신당이 있다.
[58]
실제로 맥아더 해임 당시 보수만이 아닌 다수 한국인들이 맥아더가 억울하게 해임되었다며 맥아더에 동정적이었다.
[59]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코코다 트랙 전투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맥아더는 트롤링만 일삼았고 제대로 싸운 이는 현지의 호주군 지휘관이었다.
[60]
동티모르 사태에서도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대립하는 관계였다.
[61]
물론 이 때는 아직 대통령이라는 직책 자체가 완전히 정의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탓이 컸다.
[62]
이와 동시에 카이사르처럼
공화
정부의 군대를 가지고 당시 정치체제가
자신에게 가하던
견제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인물이었단 조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와 맥아더의 차이는 이런 행보가 성공해서 임기 없는
독재관이 됐냐, 실패해서 정치적 입지와 군사적인 존경을 잃었느냐로 볼 수도 있다.
[63]
싱가포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64]
단 이는 의외로 흔한 사례로,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도 한 번의 서명에 20여 개에 달하는 만년필을 사용하기도 했다.
[65]
여기서도 맥아더는 잠시 눈을 붙였다고 하고, 트루먼 회고록에서는 쿨쿨 잤다고 깠다.
[66]
트루먼이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 회고록은 맥아더를 사정없이 까는 걸로 꽤 유명하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된 이후의 증언이라 좀 가려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70대의 원수가 19살 소위처럼 군다. 운운하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
[67]
미국 측도 휴전을 굉장히 하고 싶었다는 점은 여러 모로 알 수 있는데, 우선 회담장을 개성으로 정한 점, 전쟁 중이지만 개성만큼은 절대 점령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공산군 측에 말했었다.
[68]
대표적인 예로 MBC 주간드라마 <아버지와 아들>과 <야망의 25시> 등지에 나왔던 크리스티나 한과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 손탁 역을 맡았던 게일 제닝스 등이 있다.(
참고)
[69]
김남주 옥중시집 <저 창살에 햇살이(1992)> 2탄 수록.
[70]
부산예술고등학교 및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출신.
#
[71]
1979년 TBC 전국 대학가요 경연대회 출신이며, 양평군의원 재직 경력도 있다. 2017년 초에 박근혜 대통령 찬양가를 제작해
파문을 일으켰다.
[72]
육군 원수 아이젠하워의 이름은 니미츠급 항공모함 2번함(CVN-69)에 붙어있다.
[73]
LA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노숙자들의 천국으로 보통 사람들은 잘 찾지 않는다.
[74]
2019년 6월 22일 방송
[75]
13:00 쯤부터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맥아더와 시간 순서에 따라 한국 전쟁 당시의 모습까지 간략히 다루고 있다
[76]
역사를 움직인 운명의 순간과 전장의 삶과 죽음의 모습에서 펼쳐진 극한의 이야기를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전투로 바라본 다큐멘터리
[77]
추산치가 사망자 5만에 체포된 사람이 50만 명, 200만 명이 부상당했다. 물론 연방군이 직접 죽인 건 10분의 일이라서 그 정도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