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N. 하먼 Ernest N. Harm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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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어니스트 네이슨 하먼 Ernest Nason Harmon |
출생 | 1894년 2월 26일 |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 | |
사망 | 1979년 11월 13일 (향년 85세) |
미국 버몬트주 화이트리버정션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913~1948 |
학력 |
브래드퍼드 군사학교 노리치 대학교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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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매사추세츠주 로웰에서 태어나 버몬트주 웨스트뉴베리에서 성장했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노리치 대학교에서 1년을 다니다가 중퇴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생도시절 하키, 미식축구, 복싱부 소속이였고 1913년 졸업하고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1] 제2기병연대에서 복무하다가 1차 대전 당시 미국 원정군 F군단 소속으로 프랑스 서부전선으로 건너가 생미이헬, 뫼즈-아르곤 공세에 참가했다. 전후에도 프랑스, 벨기에에서 복무하다가 귀국했다.1921년 사관학교에서 훈육관, 미식축구부 코치, 새로 신설된 라크로스부의 코치도 역임했다. 1924 파리 올림픽당시 근대 5종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이후 지휘참모학교,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하고 8기병연대장, 전쟁기획부 참모로 복무했다. 1930년 후반 기병의 기갑화로 인한 논쟁이 있었는데 당시 하먼은 애드너 채피 주니어로 대표되는 기갑파의 지지자였다.
제1기갑군단 참모장으로 기갑화를 체계화시켰고 1940년 공식적으로 기병병과가 폐지되었고 기존의 기병들은 기갑부대로 전환되었다. 1941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세계 대전에 개입하면서 제2기갑사단장이 되었고 대령에서 소장으로 2단계 진급했다. 휏불 작전으로 미국이 알제리에 상륙했고 내륙으로 이동해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 경험부족으로 패배했다.
이후 영국의 캐머런 니콜슨의 조언을 받아들여 제병합동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후 전투에서 포병지휘관인 스태퍼드 리로이 어윈의 포병 화력지원을 받고 돌격해 독일군에게 승리를 거뒀다. 다만 카세린 협곡의 책임이 있는 로이드 프레덴달의 해임에 반대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마무리되고 시칠리아 전역에 참가하진 않았고 2기갑사단을 휴 개피에게 이어주고 올랜도 워드의 후임으로 제1기갑사단장에 부임해 안치오 상륙작전에서 추축국과 맞서싸웠다. 이후 에드워드 H. 브룩스가 6군단장으로 영전하며 다시 2기갑사단장이 되었다. 벌지 전투당시 독일군 제2기갑사단을 고립시키고 이에 독일군 제47기갑군단이 뫼즈강에서 맹공세를 가하자 예비대까지 투입시켜 모든 공세를 격파했다. 이 공세로 인해 전차를 많이 잃어 전역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전투 후 제22군단장이 되었고 전후 대령으로 환원되었으나 이후 6군단장이 되었고 1948년 소장으로 퇴역했다. 1979년 사망했다.
[1]
당시 동기론
매튜 B. 리지웨이,
J. 로턴 콜린스,
마크 클라크,
노먼 코타,
찰스 H. 게르하르트,
로버트 W. 해즈브룩,
윌리엄 W. 이글스등이 있었고 여러 장성들을 배출한 기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