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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더글라스 맥아더 |
제2대 매튜 B. 리지웨이 |
제3대 마크 클라크 |
제4대 존 헐 |
제5대 맥스웰 테일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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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리먼 렘니처 |
제7대 조지 데커 |
제8대 카터 매그루더 |
제9대 가이 S. 멜로이 |
제10대 해밀턴 하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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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드와이트 E. 비치 |
제12대 찰스 H. 본스틸 3세 |
제13대 존 H. 마이켈리스 |
제14대 도널드 V. 베넷 |
제15대 리처드 G. 스틸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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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존 베시 |
제17대 존 위컴 |
제18대 로버트 W. 세네월드 |
제19대 윌리엄 J. 리브시 |
제20대 루이스 C. 메네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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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로버트 W. 리스카시 |
제22대 게리 E. 럭 |
제23대 존 H. 틸럴리 |
제24대 토머스 A. 슈워츠 |
제25대 리언 러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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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버웰 B. 벨 3세 |
제27대 월터 L. 샤프 |
제28대 제임스 서먼 |
제29대 커티스 스캐퍼로티 |
제30대 빈센트 브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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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로버트 에이브럼스 |
제32대 폴 라캐머라 |
제33대 제이비어 T. 브런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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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연합국 최고사령관 | |||
<colbgcolor=#4b92db><colcolor=#fff> 제3대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Mark Cl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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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크 웨인 클라크 Mark Wayne Cl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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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5월 1일 | ||
뉴욕주 사케츠 하버 | |||
사망 | 1984년 4월 17일 (향년 87세) | ||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 |||
묘소 |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시타델 | ||
재임기간 | 제3대 연합국 최고 사령관, 유엔군사령관 | ||
1952년 5월 12일 ~ 1953년 10월 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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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b92db><colcolor=#fff> 종교 | 성공회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17년 ~ 1953년 |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보직 |
미 제5군 사령관 영-미 제15군집단 사령관 유엔군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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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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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수훈십자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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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 육군의 장군.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 참전했다.2. 생애
아버지가 육군 장교여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을 동경하게 되었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생도 시절 그리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강이 안 좋아서 자주 쉬었고, 음식물 밀반입을 자주 해서 별명이 '밀수꾼'이었다. 졸업 성적은 139명 중 110등으로 최하위권이었지만,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장교들이 매우 부족해졌다. 따라서 사관학교들은 졸업식을 조금 앞당겨 장교를 전장으로 보냈으며, 이로 인해 임관 후 한 달 만에 중위, 석 달 만에 대위로 고속진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급 후 얼마 되지 않아 독일군의 포격으로 큰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일선지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이후로 후방 참모직을 맡다가 종전을 맞이했다.전간기에는 주로 참모직과 신병교육직에 복무했다. 이 기간에는 인사가 적체되어 대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는 데에는 15년이 걸렸다. 하지만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중령으로 진급하고 레슬리 맥네어의 참모가 되어 군대를 증강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이 시작될 무렵에는 다시 두계급을 바로 진급하여 장군으로 승진하며 미 육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장 계급으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는데 사실 처음부터 해당 전선을 지휘했던 게 아니라 도중에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옮겨가자 임시중장으로 진급하며 대타로 연합군본부 제15집단군 지휘를 이어가게 되었다.
비록 연합군에 있어 유럽전선이 태평양보다는 우선 순위가 높았지만, 처칠은 유럽본토 상륙을 극단적으로 꺼렸으며, 스탈린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태평양에서 써야 할 물자들이 대서양으로 간다고 분개하는 미군 제독들에 의해 이탈리아 전선은 한때 몬테카시노 전투와 같은 격전을 치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이탈리아 전선은 우선순위가 낮아 적극적인 작전이 벌어지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살레르노 상륙작전은, 상륙자체는 대성공해 이탈리아의 항복까지 받아놓고도 이후 우물쭈물하다 주도권을 독일에 내주는 바람에 무솔리니의 몰락을 1년 이상 늦춰버렸고, 시간을 번 독일군이 아펜니노산맥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치는 바람에 몬테카시노 등지에서 엄청난 피해를 냈는데다가, 자신들이 로마에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는 목적으로 후퇴하는 독일군을 방치해서 그들이 다시 북이탈리아에 방어선을 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클라크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로마로의 경주(race to Rome)'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이것이 고의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이로 인해 연합국 내 수뇌부조차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등 연합군 내에서 평판은 매우 좋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그의 선배였다가 부하로 들어가게 된 패튼은 그를 매우 싫어했다고.[1] 하지만 처칠이나 아이젠하워[2]는 그를 신뢰했고, 특히 처칠은 그를 '미국 독수리'라고 불렀다. 그는 1945년 3월 부로 미국 육군 대장에 임명되어 맥아더와 함께 미국 최연소 대장이 되었다.[3] 이후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 오스트리아 점령군 사령관등을 지냈고, 종전후 미 6군 사령관등을 역임했다. 이때 몬테카지노 전투 초반에 라피도강에서 벌어진 미군의 막대한 손실[4]에 대한 클라크의 책임을 묻는 조사가 진행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거대한 실수 중 하나'이며, '(클라크를 비롯한 지휘부가) 작전이 실패할 것을 모두 알았면서도 이를 진행했다'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클라크에게 직접 처벌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후에 6.25 전쟁에서 1952년 8월 15일 나토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B. 리지웨이를 대신해 3대 유엔군 총사령관을 맡아 전선을 지휘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당시 유엔군 대표로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다만 클라크 또한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클라크는 휴전협정 막바지에 J.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대규모 공세를 위해 원산 지역에 기습 상륙작전을 펴겠다고 건의하였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당시, 서울 동숭동 미8군 사령부에서 재차 상륙 작전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휴전협정에 조인하였다.
휴전협정 직후에 그는 군에서 퇴역했고, 1954년부터 1965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 군사대학, 통칭 시타델의 총장을 역임하다가 모든 공직생활에서 은퇴했고, 1984년 찰스턴에서 사망한 후 시타델에 묻혔다.
3. 진급 이력
- 1941년 8월 4일: 전시 준장
- 1942년 4월 17일: 전시 소장
- 1942년 11월 11일: 전시 중장
- 1943년 9월 14일: 정규군 준장
- 1944년 10월 7일: 정규군 소장
- 1945년 3월 10일: 전시 대장
- 1953년 10월 31일: 대장 (은퇴 계급)
4. 저서
-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5. 여담
- 6.25 전쟁 때 휴전 회담장에 가기 직전 클라크는 이승만을 예방했는데 이승만이 견장에 달린 별 4개 계급장을 보면서 "이건 적에게 항복하라고 달아준 거냐?"며 비꼬았다고 한다.[5]
- 김영옥이 이탈리아 전선에 있었을 때 당시 이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는 로마 점령 이후 그를 보고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데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 김영옥은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클라크가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즉석 진급시켰다고 한다.
- 어머니는 유태인인데 본인은 성공회 신자면서 프리메이슨 단원이라는 다소 묘한 종교관을 가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래도 성공회가 카톨릭과 가깝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교황청 주재대사로 지명했으나, 라피도강 사건으로 인한 여론악화와 개신교 단체들의 반대로 인해 지명을 철회했다고 한다.
[1]
패튼은 겉으로는 그와 잘 지내는 척 했지만, 뒤에서는 클라크를 '겉만 번지르르하다'라거나, '
스컹크 같은 놈이라, 마찰을 일으키면 나한테 고약한 오줌을 쌀까봐 잘 대해주는 척하는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험담을 했다.
[2]
사실 아이젠하워는 사관학교 2년 선배로 생도시절부터 그와 절친한 관계였다.
[3]
그리고 90살 가까이 장수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대장 중 마지막 생존자(이자 사망자)가 되었다.
[4]
1944년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몬테카지노 부근에서 벌어진 미군의 도하작전으로, 첫날부터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독일군의 포격에 받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에도 정면으로 공격을 고집하다가 대패했는데, 독일군이 100명 미만의 전사자와 200명 미만의 부상자를 낸 것에 비해 미군은 1000명 이상이 사망,실종,포로가 되었고, 다른 1000명 이상은 부상을 당했다.
[5]
이승만은 휴전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