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찰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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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대 내무부 치안국장 서정학 徐廷學 | Seo Jeong-h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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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ffff> 출생 | 1917년 3월 26일 | ||
경기도 연천군 | |||
사망 | 2005년 7월 2일 (향년 89세) | ||
호 | 창암(暢巖) | ||
재임기간 | 제12대 내무부 치안국장 | ||
1957년 3월 11일 ~ 1958년 9월 2일 | |||
제6대 강원도지사 | |||
1958년 9월 2일 ~ 1959년 5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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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ffff> 자녀 | 아들 서민석 | |
학력 |
간사이대학 (법학부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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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국회특별경비대장 경무대 경찰서장 치안국 경무과장 서울시경찰국장 치안국장 제 6대 강원도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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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검도인. 전 대한검도회 회장. 검선도(劍禪道) 창립자.[1]일본 간사이대학의 법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 시청 검도 사범으로 근무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경무대 경찰서장을 재임하고 서울특별시청의 경찰국장[2]으로 승진하여 내무부의 치안국장(1950년대~1960년대 경찰총수)으로 근무하다가 강원도지사를 역임하였다.
한병철 저서 ≪ 고수를 찾아서≫에도 세밀한 에피소드들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 고수를 찾아서≫에 수록된 서정학 관련 에피소드는 실제와 전후맥락이 다르니 걸러 읽도록 하자.
2. 생애
2.1. 유년기
어린 시절 10살 때 작은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 구루마 뒤에서 끌기, 신문배달로 지내던 시절 동급 일본학생들이 “조센진"이라며 때리고, 당시 어린 마음에 검도로 성공하여 일본인들을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에 검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돈 5전이 없어 목욕탕에 갈 수 없었기에 강가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2.2. 검도 입문
13살에 일본 오사카 호쿠요 상업학교(日本大板北洋商業學校)에 입학하여 검도를 시작하였다. 4학년 초[3]에 2단을 받았는데, 당시 동급 학생 사이에선 일본 학생 한 명과 서정학 단 2명 뿐이었다고 전해진다.관서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1학년부터 오사카대표 선수로 출전하였으며, 3학년 때 조선인으로서는 일본 전체 대학교 검도국 처음으로 검도국장이 되었다.[4] 당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대학교에서 조선인으로서 검도국장은 파격적이었다.
캐나다 세계검도선수권대회(1992.6.29)를 대비하기 위하여 이종림 전무가 이끄는 한국 검도 선수단과 같이 일본 시코쿠 지방을 전지훈련차 일주(一周)하였을 시, 마침 도쿠시마현 검도연맹(德島懸 劍道聯盟)을 방문, 시합과 합동연습을 가지게 되었다. 일정이 끝난 후 만찬회석상에서 였다.
도쿠시마 연맹 회장인 범사 8단 호리에 유키오(堀江幸夫)씨가 나에게 술 한 잔을 권하면서 "이선생, 서정학 선생님을 아십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왜요?"하면서 의아해 하는 마음으로 반문하였다.
"서정학 선생은 나를 모르실 것 이오만, 나는 그분을 대학시절부터 잘 알고 있지요. 비록 같은 대학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서선생은 칸사이 지방의 대학생 검도계에서는 유명한 명장(名將)이었으며 대학생들 간에서는 "동경의 대상" 이었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서선생님의 대학시절의 검도 모습을 나에게 들려주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선생님은 오늘날 한국 검도계의 대지주로서 존경의 대상이지만, 50년 전에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들로 부터 그와 같은 인식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한국검도논집(韓國劍道論集)(1995, 이호암) - ["검도인생" 서정학 선생님을 찾아서]
도쿠시마 연맹 회장인 범사 8단 호리에 유키오(堀江幸夫)씨가 나에게 술 한 잔을 권하면서 "이선생, 서정학 선생님을 아십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왜요?"하면서 의아해 하는 마음으로 반문하였다.
"서정학 선생은 나를 모르실 것 이오만, 나는 그분을 대학시절부터 잘 알고 있지요. 비록 같은 대학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서선생은 칸사이 지방의 대학생 검도계에서는 유명한 명장(名將)이었으며 대학생들 간에서는 "동경의 대상" 이었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서선생님의 대학시절의 검도 모습을 나에게 들려주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선생님은 오늘날 한국 검도계의 대지주로서 존경의 대상이지만, 50년 전에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들로 부터 그와 같은 인식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한국검도논집(韓國劍道論集)(1995, 이호암) - ["검도인생" 서정학 선생님을 찾아서]
3학년 때 4단에 승단, 대학생 시절 단체전에서 7번을 우승했다. 합동훈련이 끝난 후 개인연습 한 시간씩을 더 했다고 전해진다. 대학을 졸업한 후 오사카 부청(大板府廳) 검도팀에 채용되었고[5], 1939년에 연사호(鍊士號)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관문을 통과했다.[6]
조선인 최초로 5단을 수여받았다.[7] 오사카부청 검도팀으로 출전하여 ‘전일본관공서무도대회(全日本官公署武道大會)’ 단체전 우승에 공적을 크게 인정받아, 그 후 그 공로로 “오사카 부립 체육관” 설립과 동시에 초대 검도사범으로 임명되었다.[8]
2.3. 귀국 이후
일본 선생님이 일본여자와 결혼 하라고 하시는 걸 “저는 한국여자와 결혼 할 겁니다.”라며 한국에 오셔서 목사님 소개로 한국여성과 결혼하셨고, 일본에 계실 때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추천해 주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정중히 거절하셨다. 그 후 한국에 너무나 오고 싶어 검도선생님께 여러 번 부탁하여, 그 후 일본의 원로 검도인 나카노 소스케의 초청을 받아 한국으로 귀국. 경기도 경찰국 검도조교로서 3개월 후에 8.15 해방을 맞이하셨다.
아들 서민석 총사 인터뷰 中
아들 서민석 총사 인터뷰 中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치안의 필요성에 따라 미군정 하에 경찰이 탄생하였고, 서정학은 해방 후 처음으로 미군군사교육을 받은 후에 교육관으로 경찰을 시작했다. 후에 조병옥 미군정청 경무부장(현 경찰청장)에게 부탁하여 경찰 내에 검도 수련를 허락받았고, 경찰에 복무하면서 검도를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대한검도회의 전신인 대한검사회를 창립하였다.[9]
1947년에 서울시경찰관검도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고, 경찰 상무회 조직의 활성화에 노력을 기울인다.
6.25 전쟁에 ‘경찰 특공대장’을 맡아 1,200명의 대원과 함께 민간피난민 후송 및 전투에 참가하였다. 후에 그 공로로 경무대경찰서장에 임명되었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48년 6월 13일 창덕궁에서 모임을 가지고 ‘대한검사회가 조직되었고, 1953년 경무대 경찰서장 시절 대한검도회가 창립되어 대한체육회에 가입하였다. 치안국장에 취임 후 경찰에 각 시도에 체육관(사무관급) 제도를 신설하여, 당시 생활이 어려운 검도, 유도 고단자 선생들이 수련하고 보급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검도는 일본의 잔재이니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경무대경찰서장(현 경호실장) 재임 시 3번 진언하여 검도가 이어지게 된다.
강원도지사 시절 4.19혁명 11개월 전인 1959년 5월 13일부로 당시 부정선거를 지휘하던 이기붕 국회의장의 말을 거절하여 1959년 5월 13일부로 파직되었다.[10] 그리고 제 2공화국이 탄생하고서 전직 고위관료들에 대한 부정 감사에서 아무런 문제점도 없었고, 재산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았지만 어떠한 문제점도 없었다.
2.4. 공인에서 검도인으로
1957년 4월 1일부터 1973년 2월 1일 사이에 당시 어려웠던 대한검도회 발전을 위해 7번이나 회장직을 맡았다.1959년 5월 13일 공직에서 물러나고, 1960년부터 일본을 오가면서 검도수련을 하며 1964년 ‘국제사회인 검도구락부’의 한국회장을 맡고 국제적인 활동을 많이 했다.현재 ‘세계검도선수권대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사회인 검도세계대회'에 참가하였다.
일본 고단자들과 교류과정에서 1969년 대한검도회장 시절, 당시 일본검도연맹 키무라 도쿠다로 회장에게 ‘국제검도연맹’ 창립 제안을 먼저하여 1970년 4월에 국제검도연맹이 설립되어 초대 부회장에 취임되었다. 그 후 아시아, 미주, 유럽으로 돌아가며 3년마다 개최되는 세계검도선수권대회가 1970년 일본 도쿄 무도관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1988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7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인 고단자가 아닌 외국인 고단자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 심판장을 역임했다.
1997년 1월 20일 검선도를 창시하고 한국검선도원을 창립했다.
2005년 7월 2일 사망했다. 향년 89세.
3. 약력
- 국회특별경비대장 1952. 5. 22~1952. 10.
- 경무대 경찰서장 1952. 10.~1954. 7.
- 치안국 경무과장 1954. 07. 21~1956. 08. 18
- 서울시경찰국장 1956. 08. 19~1957. 03. 11
- 치안국장 1957. 03. 11~1958. 09. 02
- 강원도지사 1958. 09. 02~1959. 05. 13
- 검도 범사 9단.
- 대한검도회 창립 멤버
- 대한검도회장 역임 (7번)
- 국제사회인검도구락부 한국회장 역임
- 국제검도연맹 부회장 역임
- 대한검도회 고문 역임
- 대한검도회 심의위원장 역임
4. 훈장
- 1952년 은성 충무무공훈장
- 1953년 금성 화랑무공훈장
- 1953년 소성훈장
- 1954년 면공훈장
- 1955년 무성 을지무공훈장
- 1956년 홍조 소성훈장
- 1956년 무성 태극무공훈장
- 1959년 경찰무공기장 금색
- 1985년 국가유공자 증서 수여
[1]
호에서 따와 '창암류 검선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지금의
지방경찰청(
행정안전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은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의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
도지사/
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
국장/내무부
차관→
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
[3]
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
[4]
당시는 검도부가 아니라 검도국이라 칭했다 함.
[5]
오전에는 행정 서기 업무, 오후에는 검도수련.
[6]
지금의 교토 무덕전에서 3인 1조로 칭호 심사를 봤고, 시합형식이라 패하면 심사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7]
당시 단증과 칭호증의 발급은 일본과 조선이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에서의 공식 칭호증은 대일본무덕회에서 발급했고 증 가운데 워터마크 형태의 숨겨진 글자가 불빛에 비치게 되어있다.
[8]
오사카 경찰로 봉직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오사카부청에 검도선수 겸 공무원으로 입직했고 오전에는 행정업무를 봐야 했다. 요즘 일본의 실업검도팀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9]
당시 국내 유일이자 최고단인 5단.
[10]
부정선거를 반대하던 7명의 시도지사가 파직되었고 자유당 출신들로 그자리가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