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8 20:48:24

김백일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
金白一
파일:김백일.jpg
생애 1917년 1월 30일 ~ 1951년 3월 28일
출생지 중화민국 만주 지린성
국적 만주국 대한민국
본관 수안 김씨
별칭 개명 전 이름: 김찬규(金燦奎)
창씨개명: 金澤俊男(가네자와 도시미나미)
직업 군인
가족 김영학(조부), 김창근(부)
김영화(처)
경력 만주국 육군 상위
대한민국 육군 소장· 중장(추서)

1. 개요2. 생애3. 논란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군(軍) 부문에 등재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하였고,[1] 태평양 전쟁에 종군하여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서보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고,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3사단을 이끌고 가장 먼저 삼팔선을 돌파하였으며, 중공군의 참전으로 흥남시에서 해상으로 철수하게 되자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여 피난민 수송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2. 생애

1917년 만주 길림에서 태어났다. 1935년 보성고보를 나온 후,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하고 만주군 보병 소위 임관하였다.

1938년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 등과 함께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로 참여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하면서 항일무장세력을 진압하는 활동을 지휘했다.

광복 후 선대의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으로 돌아왔는데, 북한 정권으로부터 인민군 창설에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자 거절하였고, 신변에 위협을 느껴 월남하였다. 이후 세상이 다 붉게 물들어도 나는 청천백일하여 반공을 견지한다는 의미를 담아 '김백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중위로 임관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 제3연대를 창설하여 연대장에 올랐는데, 10월 전북 이리에서 군 보급품인 C-레이션을 처분하여 화려한 결혼식을 한 것 때문에 연대장에서 해임되기도 했다.[2]

1948년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전라남도 광주에 소재한 대한민국 국군 제5여단을 이끌며 진압을 행하였다. 6.25 전쟁 당시 제1군단장을 맡았고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흥남 철수 당시 미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여 약 10만 명의 피난민을 배에 태워 피난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51년 항공기 사고로 사망하였고,[3][4]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아들 김동명(전 함경북도 도지사) 또한 육군사관학교를 진학하여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5]

3. 논란

  • 광주 서구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앞의 도로명이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로'라서 문제가 불거졌다. 백일로 외에도 백일초등학교, 백일 어린이공원, 백일산 등도 마찬가지였다. 서구 화정동의 '백일'이란 지명은 1950년대 이 지역에 만들어진 백일사격장을 유래로 하고 있다. 육군이 초대 육군보병학교장인 김백일의 이름을 따 사격장 명칭으로 삼았고, 이후 1990년대 초반 '백일택지개발지구' 등의 이름이 붙은 도시 조성사업이 진행되어 지금껏 백일이란 지명이 이어진 것. 결국 도로명이 학생독립로로 변경되었고, 백일초등학교도 성진초등학교로 바뀌었다.
  • 경남 거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워진 김백일 동상에 대해 철거 논란이 있다. 흥남 철수 당시의 공로를 기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와 함북6·25전적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인데 거제시와 시민단체에서 철거를 요구한 것이다. 결국 대법원에서 동상 존치 확정판결을 받았다. #
  • 2019년 3월 1일 경남 거제시 시민단체들이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

[1] 반대로 할아버지 김영학은 독립운동가였다. [2] 김백일의 부인 김영화는 후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개원 후 최초의 기념품 가게를 운영했다고 한다. [3] 당시 기상이 좋지 않아서 조종사가 이륙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백일은 권총까지 내밀면서 조종사를 협박하여 이륙을 강행하였고, 결국 좋지 않은 날씨로 인해 대관령 인근에 추락으로 사망했다. 자업자득 [4] 사망 당시 입었던 자켓과 군화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자켓의 팔 부분을 보면 응급처치 흔적이 남아 있다. [5] 단, 돌이 되기 전 아버지가 사망해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