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1 16:29:41

이준식(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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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준식.jpg
출생 1900년 2월 18일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면 서변리 #
사망 1966년 4월 5일 (66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본관 수안 이씨
화강(火岡)
일명 이웅(李雄), 증손, 이진탁(李辰卓), 휘석
직업 군인

1. 개요2. 일생3. 그 외4. 관련 문서
파일:이준식().jpg

1. 개요

한국 광복군에서 활동한 군인.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 독립군과 광복군을 거쳐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활동했다.
  • 1900년 출생
  • 1921년 중국 군사학교 졸업
  • 1929년 조선혁명군 참모장
  • 1931년 한국군인회 조직
  •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시 항일전투 참여
  •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제1지대장
  • 1966년 서거

2. 일생

이준식은 1900년 2월 18일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면 서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그의 본관이 수안 이씨(遂安 李氏)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1919년 7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산하의 청년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 요인들의 소개와 주선에 힘입어 중국 운난성 곤명에 있는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입학했다. 운남강무학교는 1909년 중국의 군벌 탕지야오가 설립한 군사학교로, 주로 운남, 귀주성에 주둔 중인 군대 소속 각급 군사각부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1910년대부터 많은 한인 청년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는데, 그 중엔 김홍일, 김훈, 최용건 등 항일 전쟁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도 있었다.

1921년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 이준식은 만주로 가서 자유시 참변 후 잔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했다. 그러나 통의부 내 구성원들 간의 이념 차이로 인한 갈등으로 1923년 2월 복벽주의 성향의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의용군이 이탈하여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했다. 이후 의용군 1,2,3,5 중대가 그해 1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하고, 1924년 11월에 남은 통의부 세력이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했다. 이때 이준식은 정의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정의부는 참의부와 대립하면서 봉천성과 길림성을 세력 범위로 삼아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산업, 교육에도 힘썼다. 이준식은 정의부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7년 오동진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후임으로 정의부 군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927년 4월 정의부 군사위 대표로 길림성 신안둔에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던 1928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가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했고 이준식 또한 국민부에 가담했다.

이준식은 정의부에서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29년 12월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조직되자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의 중앙 정치를 담당하는 한편 조선혁명당 산하 무력단체인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도 활동했다. 한편 그는 1920년대부터 만주에 널리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 이념과 방략을 수용하고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설위 만주부 간부로 활동했다.

1930년 8월 8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이때 이준식은 국민부 내부의 좌파 인사들과 함께 국민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민중 조직을 건설해야 하며 국민부 소속 인사들 모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민족주의를 고수하고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반발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급기야 1930년 8월 20일, 흥경 북방의 황구에서 국민부를 반대하는 좌파 인사들이 농민 100여 명을 동원하여 국민부 소재지인 흥경현 왕청문으로 진입했다.

이에 국민부 옹호파들은 이들의 소행을 관헌에 알려 이동림(李東林) 등을 체포하고 농민들을 탄압했다. 또 국민부측은 10월 초순 왕청문(旺淸門)의 중국인 유지 왕동헌(王彤軒)과 국민부의 김학규, 장신규 등을 봉천성 당국에 파견해 공산당 타도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심지어 9월 20일에는 조선 혁명군을 동원해 국민부 반대파 주하범(朱河範), 김창룡(金昌龍), 김이택(金利澤) 등 3명을 처단하기까지 했다. 이에 반발한 좌파 세력은 10월 4일 왕청문의 국민부 근거지를 습격해 간부 김문거(金文擧)가 총살되었다. 이렇듯 양측간의 유혈 충돌은 현익철 등 국민부 옹호파가 동북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장학량 군벌 정권과 결탁해 반대파 인사들을 축출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파 인사들과 뜻을 같이 했던 이준식 역시 국민부에서 축출되었고, 1930년 10월 중국 관내 지역으로 피신한 뒤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했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그는 김철, 박창세(朴昌世)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그는 김구와 연계하여 일본 주요 간부, 부역배, 식민기구를 공격했으며, 국내외로부터 상하이 등지로 찾아온 청년들을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소개했다. 그러다가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자, 그는 상하이를 탈출했다.

이후 이준식은 중국군에서 복무해 광둥 일대에서 중국군 보병소좌로 활동했고 1934년 경 김병인(金秉仁)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가 창사, 광저우 등지로 이전하자, 그는 중국군 장교로서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 데 많은 지원을 했고, 1939년에는 중국군에서 자진 에편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중국령 대표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조성환, 황학수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화북 지구 특파단으로서 시안에 파견되어 병사 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을 때, 이준식은 총사령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1940년 11월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한인 병사들을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공작을 전개했다. 1941년에는 노태준, 안춘생, 노복선(盧福善), 조인제(趙仁濟), 이건우(李健宇), 김자동(金紫東), 이석화(李錫華) 등 제1지대 간부와 함께 태원, 대동, 석가장, 임분 등지에서 옌시산 군벌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항전했으며, 그해 광복군 제1징모분처(第一徵募分處) 주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준식은 항일전쟁에 관련된 글들을 광복군 기관지 <광복>에 기고했으며, 1942년에 임시의정원 비서장을 겸직해 의장을 대리했고 중령구(中領區) 의원 선거회장도 맡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군무부 부원으로도 활동했다. 1943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전입되었고 동년 5월 중경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총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8.15 광복이 도래할 때까지 광복군 총사령부에 복무하는 동시에 임시의정원에서도 활동했다. 1945년 2월에는 유동열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8.15 광복 후, 이준식은 조국에 귀환하여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 부단장을 맡았으며, 고급군사훈련반을 졸업한 뒤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서 활동했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내촌-태릉 전투를 지휘했고, 이후 사단장, 군단장을 역임하고 육군 중장으로 활동했다. 그 뒤 재향군인회 회장, 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1966년 6월 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향년 6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준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3. 그 외

  • 그와 관련된 만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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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