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하이드 브레레턴 Lewis Hyde Breret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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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0년 6월 21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 |
사망 | 1967년 7월 20일 (향년 77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미합중국 공군 |
최종 계급 | 미국 공군 중장 |
복무 기간 | 1911~1948 |
학력 | 세인트 존스 칼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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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출신으로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서 성장했다. 8세때 중이염을 겪어 평생을 청력장애에 시달리게 된다.[1] 형은 해군사관학교에 입대했고 본인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려 했으나 불합격하고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1911년 육군 OCS과정으로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해안 포병대로 근무했으며 1912년 최초로 편성되는 항공 지원대에 지원해 조종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1916년 수료했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대위로 진급해 12공격편대 소속으로 26사단, 42사단에게 항공지원했다. 백일 공세 당시 제2보병사단을 지원해 수훈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공수 작전에도 투입되기도 했다.
전후에도 항공대에서 복무했으나 1920년 중반부터 군법회의에 불려나가고 부인과 이혼하는등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시기였다. 1931년부터 상황이 호전되며 군경력을 이어나갔다.
1941년 소장으로 진급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공군과 함께 작전을 펼쳤고 북아프리카 전선당시 중동 육군 항공대 사령관으로 리디아, 팔레스타인을 공습했다. 엘 알라마인 전투당시 항공 참모로 활동했고 743소티를 보내 806톤의 폭탄을 독일군에게 투하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공군을 지휘했다.
1943년 1월 제9공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당시 영국 제2전술공군과 함께 주력 공군으로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제82공수사단, 제101공수사단이 강하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었다. 코브라 작전에서도 융단 폭격으로 독일군의 진형을 망가뜨렸다. 이 공으로 훈공장을 수여받았다.
제1연합공수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마켓 가든 작전을 펼쳤으나 독일군의 탄탄한 방어와 연합군의 빈약한 통신망등 여러 이유로 인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벌지 전투에 참가했고 종전을 맞이했다.
1947년 공군 창설 멤버가 되었으며 1948년 중장으로 퇴역했다. 1946년 다시 이혼했고 이후 자서전을 쓰기도했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