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7:52

앨버트 웨드마이어

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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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웨드마이어.jpg
풀네임 Albert Coady Wedemeyer
생몰년도 1897년 7월 8일 ~ 1989년 12월 17일 (92세)
소속 미합중국 육군
복무연도 1919년 ~ 1951년
최종계급 육군 중장[1]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장제스의 참모장이 되다2.3. 중일전쟁의 종결과 중국 공산당과의 불화2.4. 국공내전과 말년
3. 참고문헌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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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합중국의 군인.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조지프 스틸웰에 이어 국민혁명군 참모장을 지냈다. 여러모로 스틸웰보다 유능했고 중국에 대한 이해도나 정치적 식견 또한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그가 부임한 1944년은 스틸웰의 수많은 뻘짓거리를 복구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때였으며, 거기에 여러 악재가 겹치며 중국의 공산화를 막지는 못한다.

웨더마이어로 표기한 곳도 확인된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7년 7월 8일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시에서 태어났고 1919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1934년 미국 육군대학에 들어가서 2년간 공부했으며 1936년 졸업, 바로 나치 독일 육군대학으로 유학가서 2년간 공부했다. 나치 독일의 장교 교육 시스템에 따라 방학 동안 독일 국방군에서 참모로 근무하며 군사훈련에 참가했다.

1938년 귀국한 이후 독일과 미국 육군대학의 비교에 관한 검토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명령받았고 100쪽에 걸쳐 독일과 미국의 육군대학 조직 기능의 비교는 물론 독일군의 기계화사단, 공정사단, 대전차부대를 비롯하여 당시 미국에 도입되지 않았던 각종 전술개념에 대해 소개했다. 하지만 미국 육군참모총장 크레이그 장군을 비롯한 미국 육군 관계자들은 웨드마이어의 군사적 보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의 사생활에 관한 정치적인 질문만을 요구하여 웨드마이어는 실망했다. 이중에서 예외적으로 웨드마이어의 군사적 검토를 높이 평가한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준장이었던 조지 C. 마셜 장군이다. 1939년 9월 1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마셜은 1940년, 우연히 웨드마이어의 보고서를 접하게 되어 웨드마이어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마셜은 웨드마이어를 불러 같이 식사하며 웨드마이어의 견해에 대한 큰 관심을 보였다.

2.2. 장제스의 참모장이 되다

1941년 초, 웨드마이어는 마셜의 주선으로 참모본부 전쟁계획처에 배치되어 <승리의 계획>의 입안을 맡았다. 마셜은 웨드마이어를 크게 신임하며 1942년 4월 웨드마이어를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영국 해협 횡단작전을 영국 측에 제안, 설명하는 임무를 맡겼고 웨드마이어는 전략계획처장으로 승진했다. 1942년 6월 웨드마이어는 대령으로, 7월에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1943년 1월 7일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주장, 1943년 9월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10월 인도에 있는 루이 마운트배튼 대장의 사령부에 부임했는데 웨드마이어는 이것이 자신의 직설적이고 아첨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윗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좌천된 것으로 생각했다.

1944년 10월 27일, 마셜로부터 조지프 스틸웰에 이어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전문을 받았다. 괴팍한 성격으로 장제스와 충돌을 빚던 스틸웰은 장제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으며 전 중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요구했고 듣지 않는다면 중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끊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장제스는 좋을대로 하라면서 스틸웰을 용인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보내게 되었다. 이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스틸웰을 해임하고 웨드마이어를 임명한 것이었다. 스틸웰은 화가 나서 인수인계에 대한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고 중국을 떠나버렸고 웨드마이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의 전임자인 스틸웰 장군이 내가 도착할 때까지 이 방면의 미국과 중국의 요인들에 대해 인계하기 위해 임지에 머물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스틸웰이 당시 계획 중인 작전계획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기 위해 하루 더 기다렸다면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쿤밍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스틸웰이 '어디 인계할 서류를 두었으니, 도착하면 찾기를 바란다.'라는 쪽지라도 있으리라 굳게 믿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나는 스틸웰이 인도의 뉴델리에서 기자회견을 몇시간 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충칭에 도착한 이후, 미국 대사 클레런스 가우스는 웨드마이어에게 '플러그를 뽑아' 중국 정부를 전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944년 11월 2일, 웨드마이어는 장제스와 첫 만남을 가지고 긍정적인 평가를 남기게 된다.
종종 아무런 휘장이 없는 평상복 차림이던 장제스는 프로이센풍의 녹갈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별 5개의 원수 견장도 달려 있었다. 웨드마이어가 보기에 그는 "검고 날카로운 눈과 매력적인 미소를 지닌, 키가 작고 품위가 있으며 좋은 가문의 사람"이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참모장이 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썼다. 그는 대중국 무기 대여 프로그램에 따른 보급품으로 매달 인도에서 들어오는 비행기 연료와 무기, 탄약 공급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웨드마이어를 특별 접견실에서 맞았다. 벽은 아름다운 중국 그림과 판화로 장식되어 있었고, 광을 낸 바닥에는 깔개가 깔려 있었다. 탁자는 티크 재목으로 만들어졌고, 의자에는 구슬이 박혀 있었으며, 꽃을 꽂아놓은 꽃병도 있었다. 긴 옷을 입은 하인들이 차와 음식을 가지고 미끄러지듯 드나들었다. 접견실에는 수많은 커튼과 병풍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웨드마이어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기록하게 될지" 알수가 없었다.

"플리즈, 플리즈."

장제스는 이 말만은 영어로 하며 웨드마이어를 긴 의자로 안내하는 몸짓을 하고는 그를 자기 옆에 앉게 했다. 두 사람이 대등하다는 제스처였다. 그는 스틸웰과는 같이 소파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웨드마이어는 이렇게 썼다.

'그는 수줍은 듯 했으나,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 71~72페이지

웨드마이너는 당시 미국에서 무능한 돈벌레[2], 공산당 토벌에만 집착하는 부패한 독재자로 비난받던 장제스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잘못되었고 오히려 나치의 침략에 힘없이 무너진 프랑스와 달리 장제스가 형편없는 원조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있는 유능한 지도자라고 고평가했다.
중국은 서방의 무관심과 방치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실체로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 스틸웰과 특파원으로 가 있던 일부 그의 미국인 친구들이 말했듯이 싸우기를 주저하기는 커녕, 대일 항전에서 놀라울 정도의 강인함과 인내력을 보여주었다. (...) 중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일본이 조만간 서방 열강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월한 세력에 맞서 버티는 것 뿐이었다. 대원수는 일본의 힘을 소진시키는 데 주력하고, 일본군의 전선이 과도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견실한 전략을 채택했다.

웨드마이어는 중국군이 현대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지적했으나 악의적인 중상모략만을 일삼은 스틸웰과 달리 상황 개선과 중국군의 현대화에 주력하여 장제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2.3. 중일전쟁의 종결과 중국 공산당과의 불화

대륙타통작전으로 충칭이 위험해지자 12월 2일과 12월 4일, 웨드마이어는 장제스에게 수도를 쿤밍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3] 하지만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고 장제스의 일기에 따르면, 웨드마이어는 장제스가 충칭을 떠나지 않으면 자신도 떠나지 않겠다면서 충칭에 남았고 장제스는 매우 감격해 하는 일기를 남겼다. 하지만 웨드마이어는 조금 다른 기록을 남겼다.
나는 의 입장을 존중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다른 두 경우에서 그가 비슷한 의향을 표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번은 난징에서였고, 두번째는 한커우에서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접근해 오자 그는 철수하자는 조언자들의 설득에 굴복했다. 나는 충칭에 잔류하여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살해되는 것이 나의 의도가 아니며, 가능하다면 쿤밍으로 가서 거기에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가장 강력한 방어를 조직하고 싶다는 것을 총통에게 분명히 밝혔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510페이지

이후 1945년 봄, 웨드마이어의 지원으로 재건된 국민혁명군은 랴오허커우와 즈장 전투에서 승리했고 알파 사단 계획을 통해 중국군 36개 사단을 미제 무기로 무장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20개 사단을 동원해 광저우, 홍콩을 탈환한다는 카보네이드 작전을 수립하여 1945년 9월에 반격을 감행하려 했지만 그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웨드마이어는 연안에 모스크바 주재 무관을 지냈던 이튼 대령을 감시단장으로 파견하여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면담하게 했는데 중국 공산당이 항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세력확장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이후 1945년 1월에 중장으로 진급,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와 더불어 마오쩌둥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미국의 중국통의 견해를 반박하고 마오쩌둥이 정권 탈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이들을 '농촌 민주주의자'로 여기는 견해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중국공산당- 중국국민당 연립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반대했고 1945년 10월 충칭 회담에서 마오쩌둥에게 홍군이 미군 특수요원들을 억류하거나 살해한 일에 대해 크게 항의했으며 저우언라이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거짓말, 협박, 살인 및 노예화라는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언제나 예외없이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탈취하고 유지하기 위한 상투적 방법이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파괴할 때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2.4. 국공내전과 말년

전쟁 종결 이후 만주를 신탁통치 하에 둘 것을 장제스에게 건의했으나 장제스는 더 이상 만주를 외세의 지배 아래에 둘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후로도 반공노선을 견지했으나 하지만 1945년 12월 미국에 특사로 온 마셜 장군은 웨드마이어의 반대를 묵살하며 연립정권을 수립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1946년 4월 중국의 미군 사령관 자리를 길렘 장군에게 물려주고 마셜에 의해 신임 주중 미국대사로 추천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반대로 인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마셜도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중국을 떠났다. 1947년 7월 마셜은 웨드마이어에게 다시 한번 주중 미국대사를 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으나 웨드마이어는 육군에 잔류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에 마셜은 웨드마이어에게 중국과 한국에 대한 정세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웨드마이어는 이것이 해리 트루먼 행정부가 공산당에 대한 강경정책을 취하려는 준비로 여기고 수락했다.

1947년 7월 9일 웨드마이어는 2개월 동안 미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한국과 중국을 방문하여 조사와 면담을 실시하여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한반도에 미군 주둔, 남한 경비대의 강화를 비롯하여 공산당에 대한 강경정책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9월 19일 제출했으나 미국 정부는 이것이 관계국들과의 외교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국민정부가 공산당에 패해 국부천대를 단행하자 웨드마이어는 만약 자신이 예편하여 미국 국민들에게 중국 문제에 대한 진실을 전달했으면 국민당의 패배도, 6.25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상당히 후회했다고 하며 6.25 전쟁을 '피비린내나는 무익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베를린 봉쇄 때 적극적인 공수 작전을 주장했다.

1951년 퇴역했으며 1953년에 예비역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 1958년 11월 회고록인 <웨드마이어는 보고한다!>(Wedemeyer Reports!)를 출간하였는데 한달 만에 3판이 나왔고 1959년 1월에 4판을 발매, 2년에 걸쳐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1985년 5월 23일, 척 예거와 함께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89년 12월 17일 사망했다. 이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웨드마이어 회고록과 논평, 이종학,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4. 관련문서


[1] 예편 이후 대장으로 진급. [2] 장제스를 당시 미국에서는 Cash my check이라고 부르면서 조롱하고 있었다. 장제스의 광동어 발음인 Chiang kai-shek을 비꼰 것. [3] 이때 도쿄 로즈는 웨드마이어는 추수감사절 만찬을 인도에서 즐겨야 할 것이라고 조롱하는 선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