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2:12:45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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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F7F44><colcolor=#fff>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મોહનદાસ કરમચંદ ગાંધી

Mohandas Karamchand Gandhi
파일: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jpg
출생 1869년 10월 2일
영국령 인도 제국 포르반다르 국 포르반다르
(現 인도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
사망 1948년 1월 30일 (향년 78세)[1]
인도 연방 뉴델리
국적
[[인도 제국|
인도 제국
영국령 인도 제국
]][[틀:국기|
행정구
영국령 인도 제국
]][[틀:국기|
속령
영국령 인도 제국
]](1869~1947)

[[인도|
인도
인도 자치령
]][[틀:국기|
행정구
인도 자치령
]][[틀:국기|
속령
인도 자치령
]](1947~1948)
별명 마하트마[2]
Mahātmā | Mahatma
신체 162cm, 46.7kg, #
학력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법학 / 학사)
런던 시티 대학교 로스쿨
정당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1920년 ~ 1934년)
배우자 카스투르바 간디 (1883년 결혼 ~ 1944년 사별)
자녀 4남
종교 힌두교
서명 파일: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서명.svg
언어별 명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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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F7F44> 한국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영어 Mohandas Karamchand Gandhi
구자라트어 મોહનદાસ કરમચંદ ગાંધી
힌디어 मोहनदास करमचंद गांधी
}}}}}} ||
파일:external/www.ablenews.co.kr/%EA%B0%84%EB%94%942.jpg
<colcolor=#fff> 생전의 그를 담은 가장 유명한 사진이다.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1946년 작품이다.
생전의 모습

1. 개요2. 생애
2.1. 출생 ~ 청년기2.2. 남아프리카 생활2.3. 독립운동
2.3.1. 1910년대 ~ 1920년대2.3.2. 1930년대 ~ 1940년대
2.4. 인도의 독립과 암살
3. 사상4. 어록5. 평가
5.1. 긍정적 평가5.2. 부정적 평가
5.2.1. 인종 문제5.2.2. 카스트 제도 문제
6. 기타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중[3]
인도 변호사,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

대영제국의 식민 통치에 비폭력주의로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며,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인도에서 국부격 인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의 칭호인 마하트마(Mahatma)는 산스크리트어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며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붙여 줬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2. 생애

2.1. 출생 ~ 청년기

모한다스[4]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의 작은 소국인 포르반다르 국(Porbandar State)에서 카람찬드 간디와 파트리바이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는 포르반다르 국의 수상이었다. 간디 가문의 종교는 비슈누를 섬기는 종파인 바이시나바였고 특히 어머니가 대단히 독실했다. 그의 삶의 지침서였다고 하는 《 바가바드 기타》도 바이시나바의 경전이다. 그렇지만 집안에서는 자이나교, 이슬람 신자들과도 많은 교분을 맺었다. 그의 카스트는 평민인 바이샤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포르반다르에서 보내다가 그가 7세 쯤에 아버지가 라자스타니크의 가신(家臣)이 되면서 라지코트로 이사했고, 거기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인도는 초등학교 5년에 중학교 과정 없이 고등학교가 6년이었다. 학교 생활 중이던 1883년 13세의 나이로 마칸지 가문의 카스투르바이(कस्तूरबा)와 결혼했다.

《간디 자서전》에 따르면 자신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모범적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 일탈을 적어보면 친구의 권유로 염소 고기를 먹었던 일이 있었다. 고기의 경우, 식욕보다는 호기심과 당시 인도에 개혁 문화, 즉 인도의 카스트나 힌두교 악습 같은 비합리적인 문화를 없애고 서양식(주로 영국식)의 합리적인 문화를 수용하자는 움직임이 퍼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영국인처럼 육식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가져온 염소 고기를 시작으로 한 1년쯤 먹다가 어느날 문득 고기의 맛을 즐기고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자신을 깨달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의 일탈로는 아내와 싸운 뒤 매춘을 하려다 실패했던 일도 있었다고 서술했고 12세 때는 담배를 사려고 하인의 돈을 훔친 적도 있었으며 15세 때는 형이 가지고 있었던 금팔찌의 조각을 훔쳤던 일도 있었다고 서술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용서받고 그 일을 그만뒀다고 서술했다. 자살 시도도 한 번 있었다고 한다. (출처 모한다스 간디, 《간디 자서전》, 1부 4장)

이렇게 성장하던 중 그가 16세이던 1885년에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가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망은 그에게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는데 당시 그가 밤중에 아내와 성관계를 갖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5] 이 때문에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이 때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이 아이는 태어난 지 4일 만에 사망해 버렸다. 대부분의 위인 전기에서는 그것을 말하기 껄끄러웠던지 그냥 졸려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밤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급사하여 슬퍼한 것처럼 순화(?)시켰다.

그는 1887년 11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바우나가르 주의 사말다스 대학교(Samaldas College)에 입학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냈다가 방학 중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브지 다베(Mavji Dave)[6]가 자기 아들인 케발람 다베가 있었던 영국으로의 유학을 조언하게 되었다. 때마침 사말다스 대학교에서 성적과 흥미를 잃었던 그는 반대하던 어머니를 설득해 술과 육식, 불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영국 유학을 허락받아 8월 10일 당시의 봄베이[7]로 떠났다. 그는 1개월간 봄베이에 머물렀는데 이 때 그가 속한 모드 바니아(Modh Bania) 카스트의 '셰드'(카스트의 우두머리)에게 소환을 당했고, 여기서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들었지만 그의 뜻을 꺾지는 못했으며 많은 힌두인들이 믿고 있었던
'바다(Kala Pani, black water)를 건너면 카스트 계급을 잃는다.'
는 금기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1888년 9월 4일 그는 인도 봄베이를 떠난 뒤 9월 말 영국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 도착하게 되었다.

본래 군인이 되길 원하여 19세가 되던 1887년에 영국에 의한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참전하기 위하여 자진 입대했으나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입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염성 폐렴으로 귀향 조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888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에서 공부를 한 뒤 현재 런던 시티 대학교 로스쿨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황을 다룬 기록들을 보면 간디는 영국 생활에 진심으로 빠져들어서 한 때는 어느 영국인 여성과의 결혼까지 생각했다가 그만두기도 했고 바이올린 연주나 무도회 같은 영국 상류층들의 생활에도 능숙해질 정도였다.

2.2. 남아프리카 생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1893년에 남아프리카로 떠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에피소드 중 하나가 기차에서 짐짝과 함께 내동댕이쳐진 사건이다. 정당하게 티켓을 구매하였음에도 그는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1등석에서 쫓겨났다. 당시의 1등석은 오늘날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처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1등석의 영국인 승객이 차장을 불러 냄새나는 쿨리랑 같이 있기 싫으니 내보내달라고 하여 차장이 그한테 바로 나가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억지 핑계였다. 그는 생김새만 인도인이었을 뿐 오랫동안 영국 유학 생활을 하면서 상류층의 생활에 익숙해져 복장부터가 영국식 신사 양장이었고 영국인에 준하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차장은 1등석에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그한테 2등석, 3등석은 자리가 없으니 짐칸으로 가라는 모욕을 주었다. 그는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하여 차장이 기차 직원들이랑 같이 그를 기차에서 강제로 내동댕이치며 쫓아냈는데 쫓겨나는 그를 비웃은 것은 덤이었다. 기차에서 쫓겨난 그는 별수없이 역마차를 탔으나 여기서도 역마차의 영국인 마부가 그의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야겠으니 비켜 달라고 요구하여 비켜줘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상위 카스트에서 자라나고 영국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상류계급인 그조차도 단지 인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게 되자 비로소 대영제국이 겉으로만 식민지인을 같은 영국인이라고 했지, 실제로는 2등 시민으로 매우 멸시하고 차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자각하게 되었다.

또 다른 에피소드로, 인도에 다녀올 때 인도인 청년들과 함께 돌아오자 반정부 운동에 반감을 가진 남아프리카 백인들이 그에게 린치를 행했고, 이에 남아공 경찰청장의 부인인 알렉산더 부인이 나서서 그를 보호한 사례가 있다.

변호사 개업 직후 남아프리카 정부에 반대하는 반정부단체를 결성하여 반정부운동을 벌였다. 특히 남아프리카 정부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 이민자들의 신상을 기록하게 하는 법률에 강력히 반발하여 이러한 법률의 폐기를 주장했고 이를 위한 게릴라 시위를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당했다.

출소한 그는 인도에 돌아오자마자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국군 입대를 자원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군의 입대시험 및 신체검사에 무사히 합격하여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나 당시 서류에는 계급이 없는 지원병 신분이었다.

제2차 보어전쟁은 영연방(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당시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의 지상군과 보어인으로 구성된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연합군 간의 전쟁이었다. 최초 2년간은 보어인들이 끈질긴 저항으로 영국군의 침공을 버텨냈으나,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기 위해 영연방은 당시 400,000명의 보어인 인구에 필적하는 350,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말살 작전을 펼쳤다.

결국 보어인 총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00,000여 명이 사망하면서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영국군 기록에는 8,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트란스발 공화국에서는 사망자 및 실종자 수로 130,000명을 주장했으며 특히 영국군 수용소에 갇힌 20,000여 명의 보어인이 종전 이전에 수용소 안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되어 의도적인 학살 의혹이 있다.

이 때 그와 인도인들은 의무병과 후송 임무 등을 맡았고 가혹한 환경하에서 후송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대표자 격이 되어 각종 조직의 위원으로 참여했는데 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중요 요직에는 오르지 않았으며 인도인 차별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이름을 넣는 것 정도 외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시민 불복종은 그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06년 남아프리카에서 <아시아 등록법>(Asiatic Registration Act)이 통과되었는데 모든 인도인에게 지문을 등록하고, 등록 서류를 항상 소지할 것을 요구하는 법이었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펼쳤다. 비폭력의 원칙을 대규모의 정치적 운동에 적용한 것은 이 운동이 처음이었다. 인도인들은 지문 채취를 거부했고 광부들은 파업했다. 7년간의 항의 끝에 <아시아 등록법>은 폐지되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남아프리카인은 보어인이었던 얀 스뮈츠 수상이었다. 스뮈츠 역시 그와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았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고 자신의 여러 저서에도 그를 언급할 정도로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는데 스뮈츠가 휴머니스트이고 남아프리카 내 인도인의 처우 개선에도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크다. 스뮈츠는 제1야당 남아프리카연합의 당대표였던 만큼 국민당의 집권과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본인이 총리로 있었던 시절 아파르트헤이트를 완화했지만 본인 역시 인종 분리를 지지했던 한계 탓에 본격적인 완화나 폐지에는 이르지 못해 흑인들은 흑인들대로 불만스러워했고 헤르초흐계 역시 불만을 품고 따로 정당을 차렸다.

2.3. 독립운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andhi_Salt_March.jpg

2.3.1. 1910년대 ~ 1920년대

1912년 그가 남아프리카에 있었을 때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이자 개혁가인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를 초청했다. 간디는 고칼레로부터 인도와 인도의 문제들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자서전》에서 고칼레를 '멘토'라고 부르며 그의 정신을 칭찬했다. 고칼레는 인도의 서구화를 지지하는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소모적인 참호전을 치르게 되면서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게 된 영국 정부가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한 인도 자치권 보장 약속을 믿고 영국군 모병관으로 참전했다. 당시 보어 전쟁의 영웅으로 각광받은 그를 본 수많은 젊은이들이 캐나다 호주와 같은 자치권 보장을 믿고 영국군에 지원했는데 그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1915년 고칼레의 요청으로 그는 인도에 귀국했다.

1918년 11월, 종전 이후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자 그는 모병관으로서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다시 한 번 영국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수여받게 되었다. 그가 군 생활을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받은 정근 훈장까지 합하여 총 3개의 영국군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급할 수 없었으며 영국에서도 인도인 신분으로 각종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영국에서 배척당하게 되자 결국 인도 정치계에 입문하여 본격적인 인도 독립운동을 이끌게 된다. 독립운동을 시작할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4개의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고 제국주의의 종말과 공산주의 정권의 탄생을 불러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 정부는 약간의 개혁만 하고 자치권 약속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영국의 배신 때문에 20년 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이 다시 한 번 자치론을 미끼로 협상을 하자 이를 단칼에 거절하고 반전운동을 전개했으며 결국 식민지 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당하게 된다.

반영운동이 지속되자 1919년 영국 식민지 당국은 <롤럿(Rowlwatt)법>을 통과시켰다. <롤럿법>은 영국 정부가 불복종 운동 참가자들을 범죄자로 체포하고 사법적 검토나 재판없이 투옥할 수 있도록 한 반인권적인 법이었다. <롤럿법>이 통과된 후 그는 항의의 뜻으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했다. 영국군은 시위에 참가한 비무장 군중들에게 발포했다. 이로 인해 인도인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그는 군중들에게 비폭력을 강조하며 영국인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는 1920년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취임했다. 1921년 9월 21일 마두라이에서 인도 빈민층과의 동질성을 상징하는 베옷을 채택했으며 지도자로서 인도 국민들의 영국 상품 불매운동, 정부 및 기관 보이콧을 이끌었다. 그는 1922년 정부에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감옥 안에서도 영국의 공장제 수공업에 대항해서 인도의 전통 수공업을 상징하는 물레인 차르카를 돌리면서 투쟁을 이어 나갔다. 후에 차르카는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24년 2월 그는 맹장염 수술로 석방되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황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무슬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19년 오스만 제국이 패망한 후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를 겸한 오스만 제국의 칼리파 제도 폐지를 우려한 인도의 무슬림들은 칼리파 제도 지지를 서명하는 힐라파트 운동을 벌였는데 그는 이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무슬림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비롯한 힌두교 인사들은 이러한 결정을 반대했다. 그의 힐라파트 운동 지지로 간디를 지지하는 무슬림이 늘어나면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력사태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1922년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부' 아타튀르크가 칼리파 제도를 폐지하면서 힐라파트 운동은 실패했고 그를 지지했던 무슬림들도 다시 외면하게 되었다.

2.3.2. 1930년대 ~ 1940년대

1930년 1월 26일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의 독립을 선언했다. 당연히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피폐했던 영국은 인도의 자원과 인구, 시장이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0년 3월 영국의 소금세 제정에 반대하는 소금 행진 시위를 시작했다. 인도로 수입되고 생산되는 모든 소금에 세금을 붙이며 가내 수공업으로 제조하는 소금은 불법으로 규정한다는 것으로 인도 경제를 종속시키려는 공작이었다. 유사 사례로 소금, 철 등 생활 필수품의 사적인 유통을 금지했던 한 무제가 있다. 문제는 한무제도 그렇고 후대의 당나라도 그렇고 소금세를 시행하면 중앙의 재정은 좋아지지만 소금이 생필품인 만큼 소금을 세금 주고 사야 하는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는 가혹한 착취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디 이전에도 소금세가 시행되었을 때 문제가 생기는 일이 많았으며 중국에서는 아예 소금밀매업자가 나라를 엎어 버리다시피 하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차라리 바다에서 소금을 가져다먹자며 아흐메다바드에서 단디까지 360km 가량을 행진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행진 도중 300명 이상의 시위자들이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시위 이후 영국 정부는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60,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투옥했다.

결국 식민지 총독인 어윈 경은 그와 협상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는 영국-인도 원탁 회의에 인도 측 대표로 참석했다. 1931년 3월 <어윈 조약>이 체결되었다. 어윈 경은 시민 불복종 운동 중단의 대가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는 데 동의했다.

어윈 경의 후임 총독인 윌링던 경은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제하고 진압하는 강경 노선을 취했다. 그는 불복종 운동으로 감옥에 다시 수감되었는데 영국은 그를 고립시켜서 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했다. 영국의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그를
"힌두 무솔리니"
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에 대한 처칠의 비판은 유럽과 미국 언론에 의해 널리 보도되었다.

1932년 영국은 불가촉천민에게 일반 유권자와는 다른 선거권을 주는 <커뮤날(Communal) 법안>을 추진했다. 그는 이 법안이 힌두교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판단하여 감옥에서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했다. 그런데 정작 불가촉천민을 대표한 정치인이었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분리된 계층에게 분리된 선거권을 주는 이 법안에 찬성했는데 암베드카르는 일단 선거권이 주어지는 것 자체에 긍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잇따른 인도 대중들의 반발로 <커뮤날 법안>은 암베드카르와 간디의 협의하에 달리트(불가촉천민) 계층에게 기존보다 더 많은 의석을 주는 <푸나(Poona) 협약>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1933년 인도 내 불가촉천민의 차별 대우를 개선하기 위해 하리잔 운동을 벌였다.

1934년 인도 국민 회의의 의원직을 사임했다가 1936년 정계에 복귀했다. 차기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파트타비 시타라마야를 지지했지만 대영 강경파인 찬드라 보스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찬드라 보스를 비폭력 저항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비판했기 때문에 찬드라 보스와 대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도의 참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인도의 자유가 부정되어 있는 동안 인도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쟁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캠페인은 인도 대중과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라젠드라 프라사드와 같은 인도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실패했다. 당시 무려 250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소집되어 영국군에 합류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영 강경파인 찬드라 보스를 지지했다. 이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추축국 일본 제국 임팔 작전을 발동하며 인도를 침공했을 때 일본과 협력하면서 찬드라 보스 자유 인도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인도인들도 있었다.

전쟁 중이었던 1942년 <뭄바이 연설>에서 영국에게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며 인도 독립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던 영국 정부는 인도가 전쟁이 끝난 후에나 독립할 수 있다며 인도의 즉각적인 독립을 거절했다. 이후의 대규모 시위로 영국은 그를 또다시 체포하여 푸네의 아가 칸 궁전에 투옥시켰다. 수감 중 그의 오랜 비서와 아내인 카스투르바이가 사망했으며 그도 말라리아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항의의 표시로 식민 정부가 소유한 수백 개의 철도역과 경찰서를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전선을 절단했다. 그는 인도 국민들에게 제국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완전히 중단할 것과 이 과정에서 영국인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말고, 만약 영국 관리들에 의해 폭력이 시작된다면 기꺼이 고통을 받고 죽을 것을 촉구했다.

2년 후인 1944년 5월 6일 건강 악화의 이유로 그는 석방되었다. 구류에서 풀려난 그는 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자치령의 분리를 반대했다. 이 때의 파키스탄 자치령은 현재 파키스탄인 서파키스탄과 현재 방글라데시 동파키스탄을 전부 포함한다. 그는 파키스탄이 자치령으로 독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의 이슬람 지도자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와 2주 동안 여러 차례 만났는데 이때 인도 아대륙의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공존하는 인도 연합을 주장했지만 진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슬림 동맹은 영국과 협력했고 그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분리된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을 요구했다.

2.4. 인도의 독립과 암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는데 그는 이를
정신적 비극
이라고 칭했다. 결국 인도 아대륙이 분할되어 독립하자 간디는
"나는 125세[8]까지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명분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라며 크게 상심했다. 독립 기념일 연설과 독립에 관한 외신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도 무시할 정도였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로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는 힌두교 집단과 이슬람 집단 간에 준 내전에 가까운 유혈 충돌이 지속되었다. 특히 국경 지대인 동부의 벵골과 서부의 펀자브에서 가장 심했다. 그는 벵골 지역의 콜카타에서 두 종교 집단 간의 폭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단식을 했다. 이 단식은 상당히 위독한 지경까지 가서 당시 증오로 가득 차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던 무슬림과 힌두교도 당수들이 급히 화해했다.

콜카타에서 4주 정도 머문 그는 펀자브로 가기 위해 델리로 떠났다. 델리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난민들이 이슬람의 모스크를 파괴하고 무슬림들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델리의 옛 왕성 중 하나인 푸라나 킬라로 피신해 있었다. 그는 푸라나 킬라를 방문해 공포로 가득차 있었던 무슬림들을 위로했다. 간디는 펀자브에 가려는 생각을 일단 중지하고 델리에서 1개월 동안 난민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했으며 무슬림에 대한 공격 행위가 늘어나자 또 단식을 시작했다. 1948년 1월 13일, 그는 델리에서 힌두와 무슬림이 형제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힌두교만을 최고로 생각하던 극단주의 과격 보수파 힌두교 신자들은 그가 힌두교의 카스트 교리를 부정하며 무슬림을 인정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적대시했다. 결국 그는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17분, 78세의 나이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암살당하던 날 두 증손녀[9]의 부축을 받아 그를 환영해 주는 군중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당시 5일간에 걸친 단식 끝에 너무 몸이 쇠약해져서 부축을 받았다. 평소에도 두 증손녀가 그를 부축하곤 했는데 그는 이들을 '나의 걸어다니는 지팡이'라고 불렀다. 이 때 카키색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그에게 인사하며 마하트마의 발을 만지려고 했다. 이에 그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보답해 주며 미소를 지었지만 남자는 몸을 일으켜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든 뒤 정면에서 세 발을 쏘았다. 간디가
" हे ! राम" (Hē Ram, 아! 라마[10]여)
라고 신의 이름을 부른 뒤 그의 몸이 땅 위로 쓰러졌다.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그의 증손녀들과 주변의 군중들은 이 암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범인은 힌두교 극단주의 과격파였던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 1910 ~ 1949)였는데 그 자리에서 체포된 후 사형 판결을 받아 1949년 11월 15일에 암발라 중앙 감옥(Ambala Central Jail)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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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암살 다음날인 1월 31일 야무나 강 남쪽의 라지가트에서 화장되어 여러 개의 유골함에 나눠지고 2008년에 아라비아 해에 뿌려졌다. 화장터에는 그의 유언이 새겨진 검은색 대리석 대좌가 잔디밭 가운데에 놓여 있다. 당시 인도의 수상인 자와할랄 네루가 참석하여 추모사까지 지어 애도했으며 수많은 인도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례식 날 무려 20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와서 간디의 죽음을 애도했다. 1951년 기준 델리 인구가 174만 명 정도였던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파였던 셈이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슬림이 힌두교도인 간디를 죽였다는 말이 돌았지만 범인이었던 나투람 고드세는 힌두교도로서 반 이슬람 극단주의 힌두교 무장단체 라시트리야 세와크 상가의 회원이었다. 나투람 고드세는 간디에게 권총 베레타 M1934을 발사한 후에 도망가지도 않고 권총을 손에 든 상태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으며 전혀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엄청나게 분노한 민중들에게 붙잡혀 대번 권총을 뺏기고 죽지 않을 만큼 실컷 두들겨 맞았으며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간디의 암살자를 죽이라는 욕설을 실컷 들었다. 다음해인 1949년 11월 15일 공범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간디를 싫어하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간디를 암살한 것은 인간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힌두교는 물론 무슬림까지 포함해 강력히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인도 독립 문제로 간디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간디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군중이 무슬림의 짓이라고 외치자 무슬림이 죽인 게 아니라고 외쳤고
"만약 무슬림이 간디를 죽였다면 인도에서는 전면적인 내전이 터졌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간디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일 이유가 없었다. 간디가 죽기 몇 달 전 무슬림과 힌두교도가 싸우던 곳에 간디가 나타나자 며칠 만에 서로 화해하고 축제를 벌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할 정도다.

간디를 암살한 나투람 고드세가 속했던 힌두교 극단주의 단체 라시트리야는 지금은 합법 정당이 되어서 인도에서 잘나가고 있으며 현재 인도의 여당인 인도 인민당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물론 나투람 고드세는 이런 정황을 떠나 좋은 소리를 들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살인 범죄자이다. 라시트리야는 자신들이 시킨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무사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간디의 영향력을 보면 제아무리 극단주의 단체인 라시트리야라고 해도 정말로 간디를 죽여버리면 분노한 인도 정부에게 당장에 박살날 것이 분명해서 죽일 생각을 못 했다. 인도 정부가 직접 안 나서도 종교를 떠나 인도의 절대 다수의 민중들에게 지지받는 간디인 만큼 정부에게 박살나기 전에 분노한 민중들에게 먼저 처참하게 박살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투람 고드세는 법정에서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내가 간디를 죽인다고 어떠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나는 파멸과 증오만 받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재판에서 그가 남긴 말에 의하면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불복종 운동은 자신도 존경하던 것이었으나, 간디는 이슬람 편만 들었을 뿐, 힌두교도들이 이슬람에게 박해받는 걸 무시하고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것으로만 해결하려고 들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독립한 인도가 강해지는 것을 막는다"
라는 논리였다. 그래봐야 힌두교만이 으뜸이라고 고집부리는 악당의 진짜 미친 헛소리지만.

3. 사상

그가 주창한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무상해)
였다. 그는 정치적인 폭력을 거부했으며 인류애를 통한 폭력 부정을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몇 개의 단어로 대변한다면
아힘사(비폭력)
도올 김용옥이 EBS <중용> 강의에서 해설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진리(사티아)를 거머쥔(그라하) 사람들이고, 따라서 우리가 강자이며 저들(영국)이 약자인데, 어떻게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느냐,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간디의 비폭력 철학이다. 사티아(진리) + 그라하(꽉 움켜쥠, 거머쥠)
브라흐마차리아(감각의 완전한 통제, 금욕)
아파리그라하(무소유)

등을 들 수 있다.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평생 채식을 했으며, 진실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그 방식은 비폭력이었으며,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 브라흐마차리아 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실한 힌두교도였으나 다른 종교와 그 교리에도 관심이 많아 《 성경》을 비롯하여 다른 경전도 많이 읽었다. 하나된 인도를 꿈꾸었던 그가 여러 종교가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여러 종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이나교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사상과 관련되어 그가 사용한 용어들도 자이나교에서 비롯되었다. 헐벗고 다니는 그의 모습도 자이나교 수련자들과 비슷한 면모이며 그의 금욕주의 또한 극단적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자이나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간디를 알기 위해서는 자이나교에 대해서 아는 것도 중요하다.
7가지 사회악 (Seven Social Sins)

① 노동 없는 부 (Wealth without work)
② 양심 없는 쾌락 (Pleasure without conscience)
③ 인격 없는 교육 (Knowledge without character)
④ 도덕 없는 상업 (Commerce without morality)
⑤ 인간성 없는 과학 (Science without humanity)
⑥ 헌신 없는 종교 (Religion without sacrifice)
⑦ 원칙 없는 정치 (Politics without Principle)

위의 내용은 간디가 출판한 주간신문인 《영 인디아》(Young India)에 1925년에 실렸으며 마하트마 간디 추모공원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간디 본인이 위의 7가지를 엄선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 6개월 전에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프레드릭 도널드슨(Fredrick L. Donaldson)의 설교 중에 나왔던 말로, 해당 내용이 영국에서 출판되자 지인을 통해 이를 접한 간디가 감명을 받아서 따로 허락을 받고 인도에서 다시 기고한 것이다.

4. 어록

"나는 크리스천이자 힌두교도이자 무슬림이자 유대인이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면 그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리에 대한 일관성이다."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한다면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머물러 있겠습니다."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3등 칸으로 여행해야 한다."
"남들이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검소하게 살라."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패배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우리는 힘사(폭력) 속에 갇힌 무력한 인간들이다."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폭력이 선을 행한 듯 보일 때, 그 선은 일시적일 뿐이고, 그것이 행하는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의견) 차이는 대개 진보를 위한 건강한 신호다."
"자신의 지혜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가장 강한 것도 약해질 수 있고, 가장 지혜로운 것도 틀릴 수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 건강하다."
"절망에 빠졌을 때, 나는 기억한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진리와 사랑이 승리했다는 것을. 독재자도 살인자도 있었고, 그들에게 당장 대항할 수 없어 보여도 결국엔 무너진다는 것을. 이것을 생각하라. 언제나." [11]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더라도, 온 인도가 다 일어나서 나를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나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나도 지금 우리 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 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신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신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고통받는 세계에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이 자신의 평생 동안에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절대 이 영원한 법칙의 오류는 아니다."
"항상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늘 생각을 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자제를 실행하는 한에서만 사람다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소유를 내버릴 수 있을까. 내 몸부터 훌륭한 소유가 아닌가."
"내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내에 대한 나의 성실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노예의 쇠사슬을 끌고 정규 교육을 받느니 차라리 자유를 위하여 무지한 채로 돌을 깨는 편이 낫다."
"나는 민중을 알게 되었고 민중은 나를 알게 되었다."
"관용과 사랑과 참이 있을 때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유익했다."
"신에게 건강한 신체를 내놓는 일은 경건한 사람의 의무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처럼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동전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 동포를 천대하면서 자기가 높아진 듯이 여기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늘 가난한 사람들 속에 뛰어들었고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에게서 신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를 더 알려고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24시간 매분마다 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12]
동물 보호주의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이나, 실제로 간디가 이 발언을 했는지의 여부나 출처는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
"세상에는 일곱 가지 죄가 있다. 노력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기도, 원칙 없는 정치."
※ 출처 : 간디 자서전(한길사)
"내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십시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배우십시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나의 인생이 나의 전언이다."
"나는 당신들이 믿는 예수를 존경하오. 그러나 나는 예수쟁이들은 싫소.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도 닮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오."
"Victory attained by violence is tantamount to defeat, for it is momentary."
"폭력에 의한 승리는 패배를 잠시 미루는 미봉책과 같다."

"It is better to be violent if there is violence in our hearts, than to put on the cloak of non-violence to cover impotence."
"잠재된 폭력성을 표출하는 것이 비폭력의 가면을 쓰는 것보다 낫다.
이 어록은 영화 A특공대에서 마지막 작전을 준비하는 B.A.와 한니발의 대화에서도 나온다.[13]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 뉴욕 타임스》는 지난 1,000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ㆍ불복종 운동을 선정했다. 간디는 정치 운동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틴 루터 킹, 제임스 로슨, 넬슨 만델라 등의 정치 운동가들이 간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성웅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이순신이지만 중국 등 중화권에서 '성웅'이라는 단어는 중국사의 어떤 역사인물이 아니라 거의 이 사람의 전용 칭호에 가깝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 바로 '성웅'이다. 마하트마 간디를 한자로 성웅 간디(聖雄甘地)라고 쓴다. 구글에서 '성웅'(聖雄)을 한자로 검색하면 간디만 뜨고 자동 완성도 된다.

인도의 국부로 추앙받으며 현대 인도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간디가 아니었으면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지금의 통일된 14억 인구의 남아시아 단일 정권이자 그 규모만으로도 남아시아의 지역패권국이자 전세계에서 제3세계의 리더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대국 인도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이며 간디의 사망일인 1월 30일은 '순교자의 날'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인도의 모든 지폐(현재는 10, 20, 50, 100, 200, 500루피)에는 전부 간디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1969년에 간디 탄생 100주년 기념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기념주화도 여러 차례 발행되었는데 간디의 탄생 100주년인 1969년에는 이를 기념해 50파이스, 1루피, 10루피 은화의 3종 주화에 간디의 얼굴을 넣어 발행했고, 2005년 간디가 주도했던 소금 행진 75주년 기념주화에도 간디의 모습이 들어갔으며, 2019년에는 간디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서 150루피 은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매년 인도에서는 간디의 탄생일에 대형 물레를 마치 축제 가마나 상여처럼 짊어지고 기념 행진을 한다. 인도 독립 운동에서 간디와 물레는 떼놓을 수 없는 상징인데 간디는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거나 물레를 돌려 실을 짓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독립의 메시지를 민중에게 꾸준히 던졌다. 영국의 경제적 침략의 상징이 바로 기계로 짠 옥양목이었고, 물레로 실을 자아내는 것은 인도의 전통적 면직 산업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간디는 모국인 인도뿐만 아니라 구미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1924년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로맹 롤랑이 《마하트마 간디》라는 저서를 쓰면서 간디에 대해 처음 논했다. 그리고 브라질의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라세르다 지 모우라는 평화주의에 관한 저서에서 간디를 소개했다.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간디와 편지를 교환했으며 그를 "인도인의 도덕성을 일깨운 롤 모델"이라고 칭찬했다.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정치에서의 도덕성을 논할 때 간디의 철학을 참고했다.

영국의 음악가 존 레논은 비폭력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 간디를 언급했다.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도 마하트마 간디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제45대 부통령인 앨 고어는 2007년 기후 변화에 대한 연설에서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을 인용했다.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의 인도계 거주구역은 간디의 이름을 따서 "마하트마 간디 구역"으로 명명되었다.

5.2. 부정적 평가

인도의 정신적 지주라는 간디도 생전에 실책과 과오를 숱하게 저질렀다. 쇼맨십이 상당히 강했으며 자기애도 강했다고도 전해진다. 간디의 이미지 자체를 뒤흔드는 도덕적 추문도 있다. 다만 일부는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목적으로 과장하거나 날조한 부분도 있으므로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2010년대 이후로는 여성차별,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기까지 했다.

아내였던 카스투르바이 "카스투르바" 모한다스 간디(Kasturbai "Kasturba" Mohandas Gandhi, 1869~1944)가 폐에 병이 났을 때 영국인 의사의 진료를 거절했으나 아내가 죽고 난 후 자신의 학질에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장염에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는 말이 있고, 이에 대해 일구이언적인 태도라며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의인지 아닌지 모를 심각한 왜곡이며 실제로는 영국인 의사라고 아내의 치료를 거절한 것이 결코 아니다. 간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디는 영국인을 차별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고 혼을 나눈 영국인 벗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의 제자 겸 정치적 동지들 중에는 미라벤[14]이라는 영국인도 있었다. 전술한 대로 간디는 젊었을 때 영국 유학을 하면서 세련되고 품위있는 '영국 신사'를 동경하여 바이올린 연주나 무도회 같은 영국 상류층의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가지 짚고넘어가야 할 것은, 우선 1944년 초 그의 부인, 카스투르바가 위독한 상태였을 때, 간디는 감옥에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치료법의 선택권은 주로 카스투르바와 그의 막내아들 데브다스에게 있었다. 이미 20여년 전에 페렴에 걸려 서양식 수술을 받았던 카스투르바는, 페렴이 재발하자 이번엔 서양 의학 대신 인도 전통 의학에 의한 치료를 선택했으나, 결국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에 데브다스가 다시 서양의학에 의한 치료를 결전했는데, 이전 수술당시와는 달리 이젠 페니실린 요법이 개발된 상황이었으나, 치료시점이 너무 늦어 장기부전에 빠져버렸다. 결국 카스투르바는 1944년 2월 말에 사망했고, 간디는 독일과의 전쟁이 끝날 무렵인 5월 초에 풀려났다. 사실 간디 역시 감옥안에서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위독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5월에 풀려난 것은 간디를 감옥안에서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꺼린 영국의 결정 때문이었다.

아들인 하릴랄 간디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국으로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려고 했으나, 아버지 간디가 그것을 강하게 반대했고, 하릴랄의 결혼에 대해서도 평생 금욕을 강조한 내가 어떻게 네게 성을 즐기라고 할 수 있겠냐면서 반대하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지나치게 완고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릴랄이 1911년에 가족과 절연했다는 말이 있다.

1990년대 이후 간디의 성인과 같은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짐에 따라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맹세 때문에 평생 금딸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대신 몽정으로 고생했다. 간디 스스로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부인과 부부관계를 할 때야 괜찮았지만 중년 이후 부부관계도 끊었기 때문에 무려 66세에도 몽정을 했다. 중년 이후에는 거의 끊겼다가 딱 한 번 했다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디가 택한 방법은 여러 아가씨와 함께 잠을 자는 의식이었다. 밤에 오한에 시달리던 간디는 친한 집안 처녀나 색시, 심지어 조카며느리와 증손녀뻘 되는 친척에게도 나체로 함께 잠자리에 들어 체온으로 몸을 덥혀줄 것을 부탁했다. 간디가 소아성애자였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이것 때문으로 보인다. 서양의 회춘법인 슈나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에 이같은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인도의 전통 요법이라고도 한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로 잠자리에 들었다. 조카가 자기 아내 대신 자기가 잠자리를 덥혀 드리겠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금욕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서 벌컥 화를 냈다고도. 일간에서는 간디의 금욕기준이 삽입 여부라고 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특이한 순결 시험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소년소녀를 함께 목욕시키면서 목욕 중 성적인 대화나 접촉을 하면 벌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것도 현대에서는 두고두고 까이고 있는 중. 간디가 아내와 이혼한 이유가 남성 보디빌더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간디의 생활비는 부유한 상인귀족 세 사람이 댔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간디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무척 많은 비용이 든다." 언뜻 보기에 간디의 생활에는 별 비용이 들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함께 생활하는 추종자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고, 간디는 고기만 먹지 않았을 뿐이지 음식에 매우 까다로웠으며, 대식가여서 식사를 자주 했고,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았다. 간디의 일상적인 음료는 레몬주스에 탄산소다를 넣어 신맛을 없애고 꿀을 탄 것이었다. 그러니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간디 자신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너무 먼 거리라서 어쩔 수 없이 기차를 이용해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무조건 도보로 이동을 했으며[15], 걸핏하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데다[16] 수시로 단식투쟁을 일삼아서 사망 시에도 몸무게가 50kg이 채 안되었기도 했다. 그런 몸으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을 한다면 대식가적인 식성을 가지거나, 꽤 비싼 과일에이드 같은 것으로 식사하느라고 생활비가 크게 들어간 건 당연지사다[17]. 게다가 인도가 독립을 했을 당시에 간디의 나이가 78세로, 한창 독립운동에 열을 올렸을 당시에는 이미 노인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험난한 길을 걸으려면, 식생활까지 검소했다간 뜻을 이루기도 전에 눈을 감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인도의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이는 매한가지여서, 자와할랄 네루는 원래 부유한 브라만 집안 출신인 걸 감안해도, 간디는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대놓고 상류층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간디의 또다른 동지로, 자국에서 인도에서의 간디와 동급의 국부로 숭앙받는 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항상 말쑥한 양복 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멋으로 모노클을 착용하는 등으로 패션에 신경을 많이 써서 아예 이게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다. 허나, 네루나 진나는 영국 식민당국과 자주 접촉해서 일선에서 독립을 위한 협상에 나선 사람들이니, 사치스런 사생활을 즐기는게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했다.[18]

5.2.1. 인종 문제

  • 간디는 다른 아리아계 힌두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남아공에서 열차를 탈 때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서 차별을 받은 일은 불쾌하게 여겼지만 정작 흑인을 남아공 사회 주류에서 배척하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 간디의 군 복무 기록과 각종 증언을 토대로 간디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의견이 강하다. 특히 줄루족을 학살한 보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주간지인 《사고 리더 메일과 블로그》(thought leader mail & blog)의 2008년판에도 간디의 인종차별 및 학대에 대한 기사가 작성될 정도로 흑인 사회에서는 간디를 흑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차별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참조 문헌) 일본과 일본의 간디 관련 위인전을 번역해 읽었던 대한민국에서는 간디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와는 다르게 직접 연관이 있는 영국 및 서방에서는 이미 간디의 실체를 비판하는 상당수의 기록과 그에 대해 분석한 저서가 넘쳐난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서로는 G.B싱(G.B. SINGH)이 쓴 《간디: 신의 가면 뒤에는》(Behind the mask of divinity)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간디 추종자들의 살해 협박을 피하기 위해 필명을 사용했으나 책에는 실제 기록과 자료를 인용했다. 또 2016년에 서아프리카의 가나에서 간디 동상 철거 요구를 하기도 했다. # 결국 해당 동상은 2018년에 해당 대학생과 교수가 손수 철거했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많이 왜곡된 것이다. 간디는 보어 전쟁에서 부상자들을 후송하는 인도인 의무봉사대를 조직하고, 이곳에서 일했다. 당시부터 이미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던 그는 애초에 전투원이 아니었고, 당연히 직접적인 전투행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총탄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맨몸으로 환자를 실어나르는 용기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적십자 국경없는의사회가 전쟁터에서 의료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이들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니 평화주의자가 아니다'라거나 '옳지 않은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다.'라고 주장한다면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1893년 간디는 남아프리카 의회에서 "식민지에서의 일반적인 믿음은 인도인이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야만족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5.2.2. 카스트 제도 문제

  • 간디는 힌두교를 인도 사회의 중추로 생각하고 인도인들이 힌두교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가 영국 정부와 독립 문제를 놓고 협상할 때부터 종교 문제는 인도의 가장 큰 현안이었다. 간디는 인도가 갈라지는 것은 반대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와 힌두교 간의 평등이나 소수 종교 보호 제도에는 소극적이거나 우회적으로 반대했다. 그 덕에 모하마드 진나 같은 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간디가 충분히 인도 아대륙의 단결에 이바지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은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악화시켰으며, 그의 암살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분열에 간디의 책임만 묻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진나를 위시해 주요 종교의 지도자들 또한 이기적인 망동을 하여 인도의 분열을 가속했다.
  • 간디는 오랜 기간 동안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활동했다. 이를 위해 여러 차례 시위와 집회에 참가하고 다양한 운동을 조직했으며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단식을 하다 위험한 상태에 이른 적도 있었다. 또한 간디는 불가촉천민과의 교류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반발하는 가족들을 비판하고 질책해 가족들이 불가촉천민들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카스트 제도의 차별을 반대했다. 그는 불가촉천민 제도를 인도 사회의 저주나 오점으로 취급할 정도였고 불가촉천민 인권 운동을 전개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힌두교 우파들에게 테러를 당해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 맞거나 총격을 당하는 등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노력한 간디의 헌신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
다만, 간디는 온정주의적인 입장에서 불가촉천민들을 대했으며 그들의 가장 큰 족쇄인 카스트 제도를 없애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힌두교 보수 세력의 눈치를 봐서 불가촉천민 해방 운동의 수위를 적당히 조절하는 행태를 보였다. 물론, 목숨을 여러 번이나 위협받았으니 활동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는 바이지만, 원래부터 간디는 사상적으로 카스트 제도를 긍정하고 옹호하면서도 이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는 대단히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간디는 직업 세습 제도가 유지되는 전통 사회를 이상향으로 인식해 '카스트' 제도의 차별은 완화해 나가고 '바르나'의 직업 세습은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간디의 인식은 동일한 뜻을 지닌 카스트와 바르나의 의미를 뒤섞어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려 한다는 암베드카르의 비판을 받았다. 암베드카르와의 갈등 이후 간디는 불가촉천민의 아이를 양자로 거두며 불가촉천민들에게 멸칭인 '찬달라'(부정타는 자들) 대신 하리잔(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부르자는 운동을 펼쳤으나, 카스트 제도 자체에 반감을 가졌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는 이들을 달리트(억압받는 자)로 부르기로 하고, 카스트 제도 폐지 운동을 전개했다. 간디는 암베드카르의 운동과 불가촉천민들의 불교 개종을 힌두교 사회의 분열을 야기하는 부정적인 활동으로 인식했다.[20]
하지만, 노예 제도 폐지의 공적이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역시, 여러 번이고 노예 제도 폐지의 방식이나 시기에 대해 여러차례 수위를 조절하고 말을 바꿔왔음을 생각하면, 간디의 얼핏 모순되어보이는 행적이 충분히 설명이 된다. 링컨도 어찌되었건 노예제 폐지와 인종차별 철폐라는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다가 백인 우월주의자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당했고, 간디 역시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에 대해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끝내 힌두교 근본주의자인 나투람 고드세에게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당대 기득권층의 반대를 뚫고 신분제를 없애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인도의 수상들이 카스트 철폐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카스트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현재진행형이고, 그나마 현대에 이르러서 최소한 대도시에서나마 다른 카스트끼리 명목상으로는 얼추 어울려다니는 수준에 이른 것이지 간디 생전에는 도시에서도 노골적인 하위 카스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이어졌던 걸 보면, 이미 종교 문제로 인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떨어져나간 상황에서 이 문제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남은 인도마저 공중분해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일선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간디가 이를 모를 리 없었으므로, 당장의 카스트 철폐는 없을 것처럼 주장하면서 기득권층이 자신과 그 동지인 자와할랄 네루[21]가 추진하는 개혁정책과 독립운동을 훼방놓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다[22]. 이 역시도 링컨이 처한 상황과 똑같은데, 그도 실제로는 급진적인 노예 폐지론자였음에도 당내 보수파나 민주당 내 연방잔류파를 의식해서, 겉으로는 온건파이거나 노예제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세했다.
  • 간디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권 자체를 부정하는 제도를 시도했고, 이밖에도 임노동자들의 권리를 약화시킬 수 있는 제도에도 찬성했다. 자식이 하위 카스트와 결혼하려 했을 때 극구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은 하위 카스트가 아닌 무슬림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 반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평화와 화합을 바랐던 이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된다..이와 관련해서는 인도의 좌파 운동가 남부디리파드가 저술한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을 참고. 한편으로 간디는 천민들을 사랑과 온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보수적 성향의 상급 카스트들에게도 까이는데 애초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천민들이 사랑과 온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인도의 근대화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21세기 인도에서조차 상급 카스트계 후손들이 카스트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23] 카스트 제도의 영향이 더 많이 남아있었던 20세기 초중반 기준으로는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되 천민들을 사랑과 온정의 대상으로 여긴 간디의 성향도 나름대로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의 이슬람 왕조들 및 인도 제국조차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를 완전히 없애는데 실패했을 정도로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단지 암베드카르가 훨씬 적극적으로 카스트 제도 철폐를 주장했을 뿐 간디도 천민들에게 최소한의 사람 취급이라도 해야 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 평가의 여지는 남아 있다. 간디가 무슬림들을 포용하려다가 힌두교 광신자의 손에 살해당했고, 그의 신분도 고위급 평민 계층인 바이샤였다. 당시 인도 기준으로는 가장 깨어있는 선진 영국식 교육을 받은 상류층 문명인이었음에도 인도의 독립과정에서 영국 식민지 때보다 퇴보한 수꼴적인 정치행보를 보인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통일 인도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중국의 사례를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하지만 인도가 중국처럼 통합하기에는 인도 내부의 분화된 언어집단, 종교집단, 인종집단, 문화집단이 너무 많이 분절되어있고 그들의 이해가 너무 제각각이라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도에서 가장 큰 통합의 구심점인 힌두교를 내세울 수 밖에 없고 그것이 힌두교의 근간인 카스트 제도의 긍정등 수많은 구시대적 관습과 사회적 퇴보를 가져옴에도 그렇게 해야 이들을 인도인으로 간신히 묶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단 1명이라도 더 인도인을 늘리기 위해 이슬람도 포용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립 후 간디가 암살당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6. 기타

  •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간디가 인도 총독 궁전 계단을 누더기를 입고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경악스럽고 역겹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처칠은 31세에 식민성 차관이 된 이래로 인도의 독립운동에 대해 늘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쟁 하지 마세요"라고 충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번역은 여기서(삭제됨) 읽어 보면 알겠지만 뭔가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쓴 듯하기도. 물론 지금 저 인간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정도의 정황으로 해석하자면 당대 간디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겠다. 2011년에 상영된 인도 영화 < Gandhi to Hitler>는 이를 소재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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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지 《젊은 인도》에서 간디는 인도가 피해야 할 7대 사회악으로 원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노동 없는 부, 도덕성 없는 상거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육, 희생 없는 신앙을 꼽았다. 현재 사회에도 통용되는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 2009년 간디의 유품인 안경, 가죽신발, 그릇 등이 미국 경매에 나오자 인도 전역이 한바탕 뒤집힌 적이 있었다. 이에 인도 정부 등이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결국 경매는 진행됐고, 다행히 인도의 재벌로 국민 맥주인 킹피셔 맥주의 모기업인 UB그룹의 회장인 비자이 말야가 180만 달러에 구입해 인도 정부에 기증했다. 그 외에도 2020년에는 영국 경매에서 간디가 1910~1930년대에 사용했던 안경이 출품되기도 했는데 이 안경은 26만 파운드(한화 4억 1천만원 가량)에 낙찰되었다. 간디는 자신이 사용하던 물품들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나눠주곤 했기 때문에 이렇게 간디가 사용했던 이런저런 물품들이 가끔씩 경매에 나온다고 한다. #
  • 인도의 초대 수상인 네루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비록 네루와 의견 차이로 싸운 적도 있지만 네루가 인도의 총리가 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1947년에 인도가 인도 자치령으로 독립했을 때도 비록 의견차이로 충돌하기는 했지만 당시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네루는 간디에 대해 '선생님은 구닥다리'라고 절하하면서도 간디의 의견도 존중했다. 네루가 딸인 인디라 간디를 데리고 간디의 집에 방문하는 등 사이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인도 독립 후 간디가 암살당하자 네루는 국토의 반쪽을 잃었다며 힘들어했고, 장례식 때는 상주 역할을 했다.

7. 대중매체에서

7.1. 소설

7.2. 게임

  • < 시리어스 샘 2>에서 중국과 비슷한 에피소드에 적들과 싸우기 전 이벤트 동영상으로 민간인이 얽히지 않게 하자고 샘이 말하자 적들이 동의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피하는데, 바로 간디와 비슷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느리게 피하는 통에 샘이나 적들 모두가 지루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100m도 채 안되는 길을 20분이 걸려 간다고 자막까지 나오며, 나중에 샘은 앉아서 졸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걸어가고 견디다 못한 적들이 벌떡 일어나서 할아버지를 옮겨준다.
  • <PLAYERUNKNOWN'S BATTLEGROUNDS>에서는 게임 플레이 방식의 일종으로 최대한 싸움을 회피하며 마지막까지 버티는 플레이를 '간디메타'로 부른다. 이와 반대로 눈에 보이는건 닥치는 대로 쏴죽이는 호전적인 플레이는 ' 여포메타'라고 부른다.
  •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 영국의 1차대전 패배로 세조각으로 쪼개진 인도 중 사회주의 국가인 바라트 코뮌의 정치인으로 있다. 농본파를 대표해 집권할 수 있는데 그러면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전체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반대로 보스가 집권하면 간디의 농본파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7.3. 만화

  • 미국-캐나다의 성인 애니메이션 < 클론 하이>에서는 간디의 복제인간이 등장한다. 위인들의 DNA로 만든 복제인간들을 고등학생으로 만든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배경 설정이다. 여기서 간디는 매우 경박스러운 성품의 눈새인데다가 여자도 밝히고 실수로 감옥까지 들어가는 등 사고뭉치 그 자체로 나온다. 게다가 자기 입으로는 인도인이라고 하면서 정작 하는 짓이나 분위기는 영락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테레오타입을 따라간다. 게다가 에 환장하고 심지어 잘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작중에서 그의 친구인 조지 워싱턴 카버의 복제인간은 간디의 이런 짓거리를 유색인종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한다며 무지 싫어했다. 결국 인도에서 간디의 손자를 비롯한 150명의 정치인들이 해당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방영한 MTV의 인도 지부에 몰려가 단식투쟁을 하고, 건물까지 봉쇄할 정도로 항의했다. 이때문에 결국 <클론 하이>는 시즌 1을 끝으로 종영당했다. 출처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이렇게 거칠게 항의했는지는 간디가 나오는 부분들을 봐보자. 그래서 그런지 20년만에 시즌 2의 티저영상이 나왔지만 전 시즌의 레귤러 멤버들이 다 나오는데 혼자만 타 멤버들이 해동될 때 여전히 냉동된 상태로 등장하며 짤렸다. #
  • < 원피스>의 오로성 중 하나인 에단바론 V. 나스쥬로 성이 간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험악한 인상이며 연로하신 중에도 유일하게 [25]을 들고 계시는 모습 등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결코 비폭력주의자는 아닐 것이라는 예상하는 독자들이 많았으며 최종장에서 이 예상에 걸맞은 강자로 나왔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끼리 간디라고 하면 오로성이다.

7.4. 영화

  • 1982년 개봉한 영화 < 간디>에서는 인도계 영국인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했다. 정말로 간디와 닮은 모습으로 열연했기에 간디의 모습을 직접 봤던 인도의 노인들은 촬영장에서 놀랐다고 하며 간디의 환생으로 착각받은 벤 킹슬리는 촬영 때 고생했다. 의도된 캐스팅으로 킹슬리부터가 인도계로 킹슬리의 아버지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간디와 같은 구자라트 출신이었다.
  • 1989년 개봉한 영화 <UHF 전쟁>에서는 주연인 위어드 알 얀코빅이 패러디한 인물들 중 1명으로 나온다. 영화 간디의 후속작이랍시고 원작 영화의 드라마 장르가 아닌, 액션 장르로 나온 <간디 2>의 창작 예고편에서, 평화주의적인 이미지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악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양쪽에 여자들을 끼고 다니는 안티 히어로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채식을 실천했던 간디가 웨이터에게 스테이크를 미디엄 레어로 주문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다.
  • 2003년 개봉한 영화 <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하느님( 모건 프리먼)이 브루스( 짐 캐리)의 손가락을 7개로 만들어 브루스를 놀라게 하는 장면이 있다. 브루스는 그냥 기겁하고 말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면 간디는 너무 놀라서 2주간 단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때 <간디 올마이티>였던 셈.

7.5. 기타


[1] 힌두교 극단주의자였던 나투람 고드세의 총에 암살당하였다. [2] 커다란(mahā) 혼(ātman)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산스크리트어 별명이다. 영어로는 그레이트 스피릿(Great Spirit) 정도로 번역된다. 보통 위대한 영혼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본인은 이와 같은 극존칭을 매우 부담스러워했고 자와할랄 네루나 가까운 지인들은 그를 간디지(ghandiji)나 구자라트어로 (양)아버지라는 의미의 바푸로 불렀다. [3]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프랑스 마르세유의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4] '다스'(Das)는 ''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한다스'(Mohandas)는 '모한의 종', ' 크리슈나의 종'이라는 뜻이다. [5] 정확히 말하자면 간디는 평소 노환에 걸린 아버지의 팔다리를 잠자리에 들기 전 성심성의껏 주무르며 안마를 했다. 그런데 그 날따라 10분쯤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간디의 아버지가 "피곤할 텐데 그만하면 되었구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간디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당시 신혼이던 아내와 성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 사이 아버지가 사망한 것이다. [6] 간디는 '조시지'라고 불렀다. [7] '뭄바이'는 1995년에 바꾼 이름이다. [8] 이때까지 살았으면 1994년이다. [9] 간디가 일찍 결혼해서 78세에도 다 큰 증손녀들이 있었다. [10] 대서사시 《 라마야나》의 주인공이자 비슈누 신의 7번째 화신인 라마찬드라를 일컫는다. [11] 이 말은 1983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을 받은 간디의 전기영화 마지막 장면에도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12] 그런데 근대 최초 동물보호법을 시행한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였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을 수 있겠으나 사실 이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의외인 면을 보여주는것이지 동물보호법이 구시대적이라는 의미가 되는것이 아니다. [13] 그러면서 한니발이 "간디는 신념을 위한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14] 본명은 매들린 슬레이드로, 모한다스 간디의 고결한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머리를 깎고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간디를 따라서 인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래서 인도가 독립한 후에, 영국인임에도 인도인들에게 인도의 국가적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다. [15] 인도 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콜카타에 머무르고 있던 인도 제국 총독인 윌링던을 만나겠다면서, 반대편인 서쪽 끝에 있는 펀자브 지역에서 직접 걸어서 이동한 일도 있었다. 비록 윌링던이 만나주지도 않고 안면몰수를 하여 회동은 실패하였으나, 중간에 험준한 히말라야산맥을 거쳐가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그곳까지 간 것이다. [16] 간디의 생애에서 감옥 생활을 한 기간이 도합 2,388일이나 된다. 인생의 몇 년 남짓한 기간을 감방에서 지낸 셈이며, 이 정도의 형기를 한꺼번에 채운 것도 아니고 수도 없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를 반복하면서 치렀다. 당연히 이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17] 무엇보다도 인도의 대부분이 열대 기후라서 열대과일 구하기가 쉬운 것도 있고, 오랫동안 단식을 해와서 소화능력이 크게 떨어진 사람인 만큼, 주스를 자주 마셨던 것은 간디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식습관이다. 실제로 기아나 그에 준하는 상황때문에 영양 실조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소화능력이 회복될때까지 절대로 일반 음식을 안 먹이고, 미음이나 과일주스를 먹이는 것이 상책이다. [18] 같은 이유로 역시 조선총독부 미국의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여 외교전을 벌이는 일이 잦았던 안창호 여운형 등의 실력양성론파 독립운동가들도 평상시에는 고급스런 양복이나 한복을 입고 멋으로 콧수염까지 길러서, 당대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 간디 본인이 주축이 되어 세운 사바르마티 아시람이라는 마을에 불가촉천민이 이주해오는 문제로 싸움이 나자 스스로 불가촉천민들의 마을로 들어가서 살겠다고 말하면서 불만을 잠재워 버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 집에 세들어 살던 불가촉천민에게 화장실 사용을 금지한 부인을 크게 나무라고는 천민 전용인 요강을 신분으로 세입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부숴 버리라고 요구하기도 했을 만큼, 그들에 대한 포용의 의지는 컸다. [20] 현재 인도에서는 누구도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이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21] 뒷날 인도의 초대 수상을 지냈다. [22] 실제로 영국 식민지배 당시에 영국 식민당국을 향한 인도인들의 시선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았다. 하위 카스트들이야 자신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영국 정부를 적대시한 건 당연했지만, 고위 카스트들은 식민 당국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친영파 성향이 매우 강했다. 당연히 간디가 카스트를 철폐하려는 본심을 섣불리 드러내는 순간, 고위 카스트들이 영국과 손을 잡아서 독립운동을 집요하게 방해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당대에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회피할 수 밖에 없었다. 자와할랄 네루 역시 인도의 수상으로 등극한 뒤에 인도 귀속을 선언한 각지의 지역 번왕들에게 정부 명의로 내탕금을 주고 달래가면서 이들이 인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막아야했고, 이들의 기득권을 본격적으로 회수한 건 인도의 국가 체제가 탄탄하게 자리잡은 뒤에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집권했을 때나 가능했다. 당연히 그 전에는 누구든 카스트 철폐에 대한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23] 심지어 이슬람 국가인 영향으로 카스트 제도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식이 인도보다도 더욱 부정적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도 이맘이 인도에서의 브라만에 해당하는 지위라서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없어졌다고 보기는 힘든데, 아예 국가 자체가 힌두교가 주류인 인도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24] <문명>의 시스템상 전쟁을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어서 협박과 전쟁을 통해서라도 궁극적인 평화를 얻어내려는 설계를 해버린 결과 후자의 이미지가 되었는데 이게 의외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게 되어 간디의 핵전쟁광 이미지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시드 마이어가 오버플로 버그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25] 초대 귀철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