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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2c3f><colcolor=#fff> 폴란드 공화국 제7대 대통령
레흐 바웬사 Lech Wałę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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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43년 9월 29일 ([age(1943-09-29)]세) | ||
나치 독일 베르테란트주 포포보 (現 폴란드 쿠야프스코포모르스키에주 리프노군 포포보이) |
|||
재임기간 | 제7대 대통령 | ||
1990년 12월 22일 ~ 1995년 12월 2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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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2c3f><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벌레스와프 바웬사 어머니 펠릭사 카미엔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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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다누타 바웬사 (1969년 결혼) | ||
자녀 | 8명 | ||
종교 | 가톨릭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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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7대 폴란드 대통령이자 폴란드 제3공화국의 두번째 대통령으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연대노조)를 창립한 노동 운동가, 그리고 폴란드 제3공화국의 국부.2. 생애
1943년 9월 29일 폴란드[1] 중부 시골 포포보에서 가난한 목수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초등학교와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폴란드 북부 그단스크[2]-레닌 조선소에서 조선공으로 일하던 중, 1980년 폴란드 정부가 공장의 노동자들을 단체로 해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웬사는 이에 저항하면서 실질적 노동자 대표로 그단스크-소포트-그디니아 지역의 노동자 총 파업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 공산주의 체제가 허용하지 않는 자율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 노조는 폴란드 연대노조( 솔리다르노시치)[3]라고 불리고 바웬사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연대노조가 워낙에 강력하여 정부조차 협상 대표로 바웬사를 인정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56년에 포즈난 항쟁으로 정권을 한번 갈아엎은 경험이 한번 있었고,[4] 1970년에 또 한번 뒤엎은 경험이 있었던 데다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도 상당했기에[5] 자유노조를 때려잡았다가는 정권이 다시 갈아엎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례가 이미 존재했으니 때려잡기가 힘들었던 셈인데, 이 때문에 당시 폴란드 정부에서 악명을 떨쳐가면서까지 차마 자유노조를 갈아엎지 못하고 체제내에 편입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주변 동유럽 국가에 줄 혼란을 막기 위해 소련의 압력을 받은 폴란드 군부는 1981년 12월 13일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 지도부를 내쫓고 바웬사 등 노동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이 때 서기장이 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자유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했는데, 나중에 그가 회고한 바로는, 자유노조의 세력이 강해지면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처럼 소련군이 직접 나서겠다는 소련의 협박을 받고, 소련군이 폴란드를 장악하느니 폴란드인 스스로 문제를 정리하자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6] 그 후 바웬사는 1년간의 가택연금을 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연대노조를 지원하는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공산권 간에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교황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토로했다.
가택연금 직후 프랑스 파리로 자신의 자서전을 몰래 보내 <희망의 길 Un Chemin d'Espoir>를 발매했으며 이는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련 등의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들의 문제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이는 당시 폴란드를 떠날 수 없던 그 대신에 아내 다누타가 대신 받았다. 이렇게 폴란드의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던 그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을 통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에 기여했다.
이후 공산당과 자유노조의 원탁회의를 거쳐 헌법을 수정해 일부 의석에 대해 자유총선이 실시되고 대통령직을 신설해 초대 대통령으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간선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야루젤스키는 공산당(통일노동당)의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려다 자유노조의 반발을 사 철회되고 자유노조 인사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5년까지 폴란드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당시 정책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 폴란드/경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유권자들이 바웬사가 해주길 바랬던 경제 정책과는 완전히 딴판이었기 때문이다.[7] 이는 유럽 지역 탈사회주의 국가의 체제전환 초기임을 감안해야할 필요가 있다. 구 유고, 소련의 구성국이나 혁명을 겪은 루마니아는 물론 탈사회주의과정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폴란드를 비롯한 중부유럽 국가들도 체제전환 초기인 90년대 초에는 모두 경기침체를 겪었다.[8] 폴란드의 90년대 경제문제는 탈사회주의 국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바웬사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의 책임까지 바웬사에게 전적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9] 또 연대 진영의 내부 갈등과[10] 바웬사의 정치 스타일[11][12], 과도한 가톨릭 교회와의 밀착과 도덕적 보수주의[13] 등도 바웬사의 지지 하락에 일조했다.
때문에 바웬사는 인기가 너무 없어서 지지율이 무려 5%를 기록한 적까지 있을 정도였고[14][15], 결국 1993년 총선에서의 대참패[16][17]를 시작으로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옛 공산당의 후신 정당인 사회민주당[18]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후보에게 패배했으며, 대선 패배로 연임에 실패하여 퇴임하면서 모든 퇴임 대통령의 권리를 포기한 탓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토크쇼 MC 등을 본다고 한다. 그래도 그 동안 폴란드 경제에 짐이 된 외채를 탕감시킨 것 자체는 높이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대통령 재직 시절 바웬사가 펼쳤던 정책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19] 참고자료
물론 대통령 재임시의 정치적 무능[20]과 정책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그가 폴란드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한 것은 많은 폴란드 국민들과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혁명과 국정운영은 전혀 별개의 직책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21] 끝까지 박수받으며 떠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독재자로 타락하지 않고 깔끔하게 은퇴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22]
2000년 '제3 폴란드 공화국의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정당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1.01%의 득표율로 12명의 후보 중 7위를 차지했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0 | 폴란드 대통령 선거[23] |
|
6,569,889 (39.96%) | 10,622,696 (74.25%) | 당선 (1위) | |
1995 | 폴란드 대통령 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917,328 (33.11%) | 9,058,176 (48.28%) | 낙선 (2위) |
4. 기타
- 민주주의 운동을 한 것과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군 생활이 굉장히 잘 맞았다고 한다. 한때는 장교로 임관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고.
- 2차 대전이 발발하고 폴란드를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자 당시 폴란드 정부는 런던으로 망명해서 계속 싸웠고, 이후 이들은 폴란드 망명 정부라고 불리게 된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자 폴란드 망명 정부는 귀국을 거부하고 계속 런던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 바웬사가 당선되자 이후 폴란드가 멸망한 1939년부터 51년 간 잘 간직해온 2공화국 대통령기와 휘장, 국새, 35년 헌법 원문 등 임시정부의 법통 일체를 넘겨준다. 이렇게 폴란드 임시 정부의 공식 '후임'으로서 바웬사는 폴란드 3공화국을 열게 된다. #
-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데, 2002년도에 덥다는 이유로 깔끔하게 면도했다가, 바로 후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콧수염 때문인지 묘하게 스탈린을 닮았다. 독설가로 유명한 오리아나 팔라치도 바웬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했다.
- 1988년 2월 한국 KBS와 처음으로 단독 인터뷰했고, 2016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발언을 했다. #
- 2016년 11월 한국 서강대학교, 계명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
- 1980년 솔리다르노시치의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을 다룬 영화 철의 사나이에서 본인 역으로 등장했다.
- 아내 다누타와의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는데 셋째가 2017년에 사망했다. 넷째 야로스와프는 정치가이다.
-
폴란드 민주화의 영웅이지만 그 자신은 독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실제로도
레흐 카친스키를 비롯한 바웬사의 동료들 중 상당수가
법과 정의당에서 활동하며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 바웬사는
2공화국 시절의 독재자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롤모델로 삼았고, "개혁지지 무당파 의원단"이라는
명목상 정당은 아니지만 사실상 정당인 어용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피우수트스키의 "정부협조 무당파 의원단"과 역할이 동일했을 뿐 아니라 약자까지 BBWR로 똑같아서, 그 야심이 상당히 노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웬사는 1993년 총선거에서 대참패하면서 아래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총선거의 결과는
부정선거라 우기거나 불복 선언을 하기는커녕 깔끔하게 받아들였으며[24], 말년에 식물 대통령 신세가 되었는데도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거나 정치 체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려는 시도는 일정 하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자 깔끔하게 물러남으로써 폴란드 민주화에 공헌했다. 그리고 같은 민주화 운동가 출신인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가 장기집권 끝에 독재자에 준하는 지도자로 추락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바웬사의 자제력과 자신이 참패한 총선 결과도 순순히 받아들이며 폴란드에 민주주의를 안착시켰다는 점은[25] 호평할 수밖에 없다.
조지 워싱턴,
자와할랄 네루,
세레체 카마,
시우사구르 람굴람,
샤나나 구스망만큼은 아니더라도
독재자가 된 영웅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해낸 셈이다.
“만약 독재를 도입해야 하고 민중들이 내게 그 역할을 맡도록 강요하는 때가 온다면, 나는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 2019년에 "30년 동안 포퓰리즘이 만연했고, 민주주의를 과신했다"고 발언했다. #
- 현 폴란드의 급진 좌파들 사이에선 러시아에서의 보리스 옐친 못지 않게 이미지가 나쁘다. 탈공산화 후 경제를 망쳤다는 이유도 있고 노동자 봉급을 깎거나 복지를 축소하는 등 긴축정책을 펼쳐 노동자 인권을 후퇴시켰다는 이유에서다.[26]
5. 둘러보기
[1]
당시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2]
독일 이름인 단치히(Danzig)로도 알려져 있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된 곳으로도 유명한 곳.
[3]
한국에서는 보통 '연대노조'라고 하는데 연대노조의 정식명칭은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Niezależny Samorządny Związek Zawodowy "Solidarność", NSZZ "Solidarność")다.
[4]
포즈난 항쟁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이후에 집권당내에서 파벌이 교체되었다.
[5]
게다가 불과 2년 전인 1978년 바티칸은 폴란드 출신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요한 바오로 2세다.
[6]
야루젤스키 자신은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에 끌려가
시베리아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강제노동을 했고 이 때문에
시력에 치명타를 입은 전적이 있다.
[7]
게다가 그런 와중에 바웬사는 폴란드를 "제2의
일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나치 독일과 같은
추축국 진영이었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당시 일본의
경제적 위상을 고려하면 폴란드를 그만큼 잘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보여주긴 한다.
[8]
실제로
헝가리,
불가리아,
알바니아도 민주화 10년도 채 안 되어 민주화세력의 무능한 경제정책에 실망한 사람들의 손으로 공산당의 후신들이 다시 정권을 잡기도 했다. 다만 알바니아는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이
내전으로 번진 것의 영향도 크다.
[9]
당시 폴란드 부총리와 재무장관이었던 레셰크 발체로비치가 주도한 자본주의 충격 요법(Shock Therapy)에 의한 결과였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당시 폴란드는 국영기업들이 일거에 사유화되고 시장경제가 도입되자 경쟁력 없는 기존의 기업들은 대거 문을 닫으며 실업자는 인구의 15% 안팎 수준의 300만,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는 국민은 전체 국민의 1/3로 나타났지만 이런 과감한 구조개혁이 없었다면 지금 폴란드 경제는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되었을 거라는 재평가론이 있다.
[10]
바웬사 본인도 총선 무렵인 1993년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개혁지지 무당파 의원단(BBWR)을 만들며 연대로부터 사실상 떨어져나갔지만, 창립 당시 지지율이 18%였을 정도로 민심이 매우 나빴고, BBWR 자체도 당시 폴란드 의회에서 국회의원들에 대한 평판이 가장 나쁜 당이었다고 한다. BBWR도 1995년 대선 과정에서 바웬사의 재선에 힘썼지만 바웬사가 낙선하며 5개 정당으로 분열되고 1997년 선거에서도 0석을 얻으며 해산되었다. 물론 내각도 '상부에서의 전쟁'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혼란스러워 그가 대통령을 역임한 5년 동안 무려 7명의 총리가 있었을 정도였다.
[11]
당시 폴란드 사람들은 바웬사의 정치 스타일이 너무 '직설적이고 품위가 없으며' '불규칙하고' (세임을 약화시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려 하여) '권위주의적'이라고까지 생각했으며, 게다가 당시 바웬사도 실언을 많이 했다고 한다.
[12]
바웬사가 대통령으로서는 미숙했던 이유에 대해 발렌사의 국가 안보 고문인 야체크 메르켈은 노조 지도자로서는 효과적으로 노동자들이 느낀 것을 표현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직을 기관으로서 이해하지 못해 대통령으로서 권한을 위임하거나 관료주의를 헤쳐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3]
바웬사는 낙태에 반대했으며, 학교에 성교육 수업을 폐지한 대신 신부가 가르치는 '가정생활' 수업으로 대체하고 종교 과목도 개설했다.
#
[14]
이미 대선 1년 전이던 1994년 4분기 기준 바웬사 지지율은 5%에 불과했고,
# 1995년 9월 기준으로도 10%를 밑돌았다.
# 사실 바웬사의 집권으로부터 1년 남짓 지난 후인 1992년 2월 6일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바웬사의 인기는 '야루젤스키보다도 없었다'고 한다.
#
기사 원문
[15]
참고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폭로 후 폭락한
박근혜의 지지율이 4%였다.
[16]
1993년 총선거에서 폴란드 통일노동당의 후예인
민주좌파연합이 460석 중 171석, 관제야당 연합인민당의 후신인
폴란드 인민당이 132석을 차지해 둘이 도합 303석 연정으로 세임을 장악했는데 이는 세임 좌석 중 2/3에서 고작 4석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덤으로 상원(총 100석)은 각각 37석/36석, 도합 73석을 차지했다. 참고로 BBWR가 차지한 의석은 세임 16석, 상원 2석, 총 18석의 괴멸 수준의 대참패였고, 연대가 의회에서 차지한 의석은 세임, 상원 다 합해 무려 0석(...) 집권 중반의 민심이 이 모양이었으니 후반의 민심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7]
이게 생각보다 심각한 게, 폴란드는
이원집정부제라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실권을 가진 나라다. 심지어 폴란드 사람들이 극성
반러 성향에 폴란드 공산정권을 사실상 소련의
식민지 시절처럼 간주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뼈아픈 참패다.
[18]
당시 사회민주당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으로 체질을 바꾸며 복지랑 민영화 관련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서자 폴란드인들은 자연스레 민좌련을 찍게 되었다.
[19]
사실 이런 현상은 폴란드에서 이전에 두번의 선례가 있었다. 고무우카는 1956년 포즈난 항쟁으로 스탈린주의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인물이었지만 집권 후반에 무능한 독재자로 전락하면서 인민들의 지지가 추락한 끝에 1970년 민중붕기로 물러났고, 고무우카를 축출하면서 집권한 기에레크는 초기에 경기호황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오일쇼크와 외채문제가 터지면서 역시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20]
특히 바웬사와 엇비슷한 포지션이던
알바니아의
살리 베리샤가
공산당의 후신에 정권을 넘겨준 후에도 알바니아 우익 진영의 대부로 자리잡으며 총리 2연임에 성공한(알바니아는
의원내각제 국가라 총리가 실권을 지닌다. 다만 베리샤가 대통령이었을 때는 대통령의 입김이 큰 편이었다) 것과 비교하면 더더욱 부각된다.
[21]
이 점은 한국에서 군부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지도자였지만, 대통령으로는
IMF 외환위기 등으로 평가가 부정적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22]
후술하듯 독재자로서의 기질을 암시하는 면들도 있었지만 그걸 모두 말끔히 넘겼다.
[23]
폴란드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
[24]
물론
발데마르 파블라크 총리와 사이가 나쁘긴 했다.
[25]
실제로 법과 정의가 아무리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더라도 아예 법과 선거 제도를 뜯어고쳐가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면서까지 억지로 정권을 연장할 생각만큼은 하지 못했고, 2023년 총선에서의 패배도 말끔히 받아들였다.
[26]
실제로 폴란드는 동구권임을 감안하더라도 노조 조직률이 낮은것으로 악명높은데, 주요 노조 조합원 수를 합쳐도 우리나라의 민주노총 조합원 수의 반 밖에 안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