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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총리는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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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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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HE PEACEMAK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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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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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제5대 총리 이츠하크 라빈 יצחק רבין|Yitzhak Rab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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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츠하크 라빈 יצחק רבין | Yitzhak Rabin |
출생 | 1922년 3월 1일 |
영국령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예루살렘 | |
사망 | 1995년 11월 4일 (향년 73세) |
이스라엘 텔아비브 | |
국적 | 이스라엘 |
학력 | 카두리 농업고등학교 |
직업 | 정치인 |
당적 |
|
배우자 | 레아 라빈 |
자녀 | 2 |
종교 | 무종교( 무신론)[2] |
서명 | |
이스라엘 제5대 총리 | |
임기 |
1974년
6월 3일 ~
1977년
4월 22일 1992년 7월 13일 ~ 1995년 11월 4일 |
|
[clearfix]
1. 개요
이스라엘의 군인 출신 정치인. 이스라엘군 제7대 총참모장, 이스라엘 제5대 총리.총리 재임기에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증진을 위해 노력하며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협정 당사자들과 함께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여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극우 강경파인 유대인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면서 평화 정착을 완결짓지 못한 채 갑작스레 퇴장한 인물이다.[3]
2. 생애
2.1. 초기 생애
1922년 3월1일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카두리 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하가나에 들어간 그는 1941년 팔마하 특공대의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했다. 소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1945년 아틀리트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대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해 낼 때 부책임자로 작전에 참가했다. 이듬해 6월 그는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에서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명의 유대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10월 라빈은 팔마하의 부사령관이 되어 알론 바로 밑에서 일했다. 1948년 봄 그는 하렐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길을 뚫는 나손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과 세이크야라를 해방시켰다. 알론의 지휘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전선 작전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1946년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 직후 점령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츠하크 라빈 총참모장(오른쪽). 가운데 안대를 낀 인물이 당시 국방장관 모세 다얀 출처 |
그 후 라빈은 1953년 영국의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 ~ 1956년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되었고, 1956 ~ 1959년에는 북부사령부 사령관으로, 1959 ~ 1960년에는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61년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군 총참모장이 되었다. 6일 전쟁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1968년 1월 1일 전역과 동시에 주미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간 근무했다. 1973년 봄 라빈은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노동당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973년 크네세트(= 이스라엘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 에서 노동장관에 임명되었다.
2.2. 정치인 생활
2.2.1. 총리 1기
1974년에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는 최초로 총리가 되었으며,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달리 지난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으로 외교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1975년 시나이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그러나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고,[4] 더군다나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침체에 허덕였다. 자연히 정국은 불안정했고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으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된 끝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5]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2.2.2. 총리 2기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영원한 평화를 염원하다. 1993년 9월13일 백악관 정원에서 열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기본원칙 선언 서명식 |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협정을 개시했다. 1994년 10월 오슬로 협정을 맺었다.[6] 이 협정으로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위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양국 분쟁(물리적 충돌은 끝났지만, 종전된 상태는 아니었다)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7]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지역 확대를 골자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독립국가의 길이 형성되나 싶었다.
3. 사망
제2차 오슬로협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후 관용차에 탑승하던 중 하레디 청년 이갈 아미르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이전부터 유대교 근본주의를 강조하는 극우 강경파가 암살을 목적으로 테러를 벌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나와) 같은 유대인들을 믿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만 것.암살범 이갈 아미르는 유대인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극우 청년으로 밝혀졌다. 암살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아미르는 정부수반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 및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 그는 "(총리를 암살한)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나를 독방에 가둔 처분은 너무 가혹하다, 팔레스타인 수감자들도 이렇게 생활하지는 않는다"는 적반하장식 궤변과 망언[8]을 공공연히 일삼았다. # # 게다가 아미르는 같은 종파인 하레디 사람들이 넣어주는 사식도 꼬박꼬박 받아먹고, 독방 수감이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생활상의 불편함도 크게 없으며, 감옥 바깥에서는 "배신자를 죽인 애국자"라는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암살 사건 이후 "그와 결혼하겠다"는 신청이 쇄도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 그는 법적으로 혼인 관계인 여성과 면회를 통해 감옥 내에서 성관계를 맺는 정신 못차린 행보를 보였다.
아미르의 이토록 뻔뻔한 태도와 옥중 기행에 당시 정치권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으며, 라빈의 정치적 반대파인 보수우파 인사들조차 "한 나라의 정부 수반을 죽여놓고 저렇게 당당하게 애국자라며 떠들고 다니니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형국인가" 하며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이스라엘 정치권은 자신들과 대립 관계인 이웃나라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안와르 엘 사다트 대통령이 1981년 암살당하자 "자기네 나라 대통령을 암살하다니 말이나 되는가" 하며 비웃은 바 있다. 정확히 14년 만에 그 비웃음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고 어이없게 한 암살범 이갈 아미르는 지금까지 20년 넘게 버젓이 살아있으며, 여전히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내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한국에서 라빈의 무덤을 참배하던 히잡을 쓴 팔레스타인 여성이 슬피 울며 안타까워하는 사진이 보도된 바 있는데, 이 배경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팔레스타인/역사 문서에도 쓰인 것처럼, 오슬로 협정이 전쟁보다는 낫지만 그렇게까지 팔레스타인에게 괜찮은 협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월간조선에서 근무하던 언론인 조갑제 편집장이 라빈을 인터뷰했는데, 인터뷰를 마친 뒤 34시간 후에 암살당했다. 뜻하지 않게 이 인터뷰는 라빈의 생전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되고 말았으며, 해당 기록은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수록되었다. 관련 자료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엄수되었다. 그와 함께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며 노벨 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이스라엘 극우파의 테러 가능성에 대한 안팎의 우려에 끝내 불참했다. 손녀 노아 벤아르치는 자신을 극진히 아낀 할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한편,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서 복수심마저 자리잡지 못했다"며 눈물의 연설을 해 주목을 받았다. 하관식 때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이 라빈의 관에 형 JFK와 로버트의 묘역에서 가져온 흙을 뿌렸다.( 당시 부산일보 기사, 조선일보 기사)
사망 이후 이스라엘 은행[9]에서는 인플레를 대비한 고액권 발행 겸 그의 추모를 위해 500 셰켈 지폐를 발행하며 여기에 라빈의 초상화를 넣으려고 했으나 예상외로 물가가 너무 안정되어 필요성이 줄어들자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10]
그의 사망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Yom Hazikaron leYitzhak Rabin/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있다.[11]
라빈 암살 사건은 2015년 아모스 기타이가 영화화해 개봉됐다.
현 시점에서 현직 신분의 선진국 국가수반이 암살된 가장 최근의 사건이기도 하다.[12]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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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란의 땅에 평화를 이식한 협약의 체결자들을 말한다. 93년, 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야세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총리, 남아공 대통령 클레르크가 공동 선정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협약들이 같은 해에 체결되었다는 이야기. 이 4명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며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역시 만델라밖에 없다.
[2]
#
[3]
한편으로는 제1차 인티파다를 강경진압하도록 명령한 인물이기도 하다.
[4]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한 이유가 황당한데, 당시 신형 전투기였던
F-15 4대가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들어왔을 때, 들어온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라 공군이 안식일 규율을 깨트렸다(...)는 이유에서였다.
[5]
당시 이스라엘 환전법 상으로는 사전 허가 없이 개인이 외국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6]
이 공으로 아라파트 의장과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7]
A지역은 안전 지역으로써 팔레스타인 완전 자치 구역, B지역은 위험한 지역으로 팔레스타인 부분 자치 지역, C지역은 극히 위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 완전 지배 지역. 이 3개로 나누어 점차 C지역을 B-A로 바꾼다는 협정이었다.
[8]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은 시민으로서의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온갖 고문과 탄압, 차별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실태를 왜곡함과 동시에, 그저 자신이 독방 생활하는 게 힘들다며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9]
Bank Of Israel. 이스라엘의 중앙은행이다.
[10]
500셰켈은 2017년 기준 한화 약 15만 6000원 정도의 금액이다.
[11]
다만 공휴일은 아니다.
[12]
라빈 총리의 피살 이후 일어난 선진국 국가수반 암살 사건은
2022년 발생한
아베 신조 피살 사건 정도밖에 없고, 그것도 아베가 전직 국가수반이었을 때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