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1:36:17

조지 워싱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 #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K.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A.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제46대 제47대*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도널드 트럼프
}}}}}}}}}}}}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파일:조지 워싱턴의 초상화.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32년 2월 22일
대영제국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어랜드
(現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
사망 1799년 12월 14일 (향년 67세)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마운트버넌
묘소 마운트 버넌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789년 4월 30일 ~ 1797년 3월 4일
서명
파일:조지 워싱턴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 시니어 (1694 ~ 1743)
어머니 메리 볼 워싱턴 (1707/1709 ~ 1789)
형제자매 8남 2녀 중 사남 (아버지 기준)
5남 1녀 중 장남 (어머니 기준)
배우자 마사 워싱턴 (1731 ~ 1802)
자녀 의붓아들 존 파크스 커스티스 (1754 ~ 1781)
의붓딸 패시 커스티스 (1756 ~ 1773)
친인척 고조부 로런스 워싱턴 (1602 ~ 1652)
고조모 암필리스 트위그덴
증조부 존 워싱턴 (1631 ~ 1677)
조부 로런스 워싱턴 (1659 ~ 1698)
조모 밀드레드 워너 (1671 ~ 1701)
학력 윌리엄 & 메리 대학교[1]
종교 표면상: 성공회
실질적: 이신론/ 프리메이슨[2]
신체 188cm / 체중 80kg / O형( Rh-)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3]
문장 파일:COA_George_Washington.png
군사 경력
복무 버지니아 민병대
1752년 ~ 1758년
대륙군
1775년 ~ 1783년
미합중국 육군
1798년 ~ 1799년
최종 계급 대령 (버지니아 민병대)
소장 (대륙군)
중장 대원수 (미합중국 육군)[4]
주요 참전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북서 인디언 전쟁
위스키 반란
}}}}}}}}}
파일:George_Washington_Lansdowne_portrait,_1796.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젊은 시절2.3. 영국군 장교 시절2.4. 결혼2.5. 미국 독립 전쟁2.6.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2.7.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귀향하다2.8. 사망과 그 이후
3. 평가4. 어록5. 선거 이력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대통령.[5]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자 대륙군 (미국 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과의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다만 엄밀히 따지면 최초의 President 직위는 조지 워싱턴이 아니다. president라는 단어는 한국어에서는 흔히 ' 대통령'으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영어권에서 회사의 대표이사(사장), 모임의 수장, 대학교의 총장 등 일정한 조직체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의미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며,[6] 1775년 대륙회의 의장(President of the Continental Congress)들이 최초로 쓴 것이었다.

며칠만 하다 관둔 의장들을 제외한 사실상의 초대 의장은 4대 의장이자 미국 독립선언문에 최초로 서명을 했던 존 핸콕[7]이었는데, 이 직위는 핸콕 이후 12년간 11명[8]에게 돌아가다가 대개는 1년 임기로, 독립이 인정된 1783년 이후로는 7명이 있었기 때문에 총 16대 15명이 있었다.

그러나 대륙 회의에 출석하던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행정부 미국 정부를 신설하고 대륙 회의가 가지고 있던 입법부 역할 역시 미국 의회가 생기면서 거기로 옮겨가 대륙 회의는 점차 유명무실해졌고 1788년 마지막 대륙 회의 의장인 사이러스 그리핀(Cyrus Griffin)이 사임했을 때 후임을 정하지 않으면서 자동으로 소멸했다.

그리고 신설된 행정부의 수장이자 국가원수의 직위 이름을 President로 정했고 워싱턴이 선출되면서 우리가 아는 대통령으로서의 President가 자리잡게 되었다.

때문에 대륙 회의 의장으로서의 President와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President는 만들어진 기원과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둘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워싱턴은 최초로 수장으로서의 President를 쓴 인물은 아니나 국가 수장(대통령)으로서의 최초의 President는 맞다.

지금의 미국에서도 President는 연방 대통령(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과 연방 의회의 미국 상원 임시의장(President pro tempore of the United States Senate) 두 명이 다 사용하는 호칭이다.[9]

2. 생애

2.1. 출생

1732년 2월 22일 금요일 버지니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워싱턴 가문은 본래 잉글랜드 북동부 타인위어에 위치한 워싱턴(Washington)[10] 출신으로 가문의 선조인 윌리엄 드 허트번(William de Hertburn)이 윌리엄 1세 잉글랜드 정복 당시 워싱턴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으며 성씨를 '드 웨싱턴(de Wessyington)'으로 바꾼 것에서 유래했다.[11] 이후 '드 웨싱턴' 가문은 '워싱턴'으로 성씨를 바꾸었으며 1613년 워싱턴 가문은 영지인 워싱턴 장원을 팔고 노샘프턴셔에 위치한 설그레이브(Sulgrave)로 이주하였다.

이후 조지 워싱턴의 고조부인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대에 그의 형이 찰스 1세의 총신인 조지 빌리어스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하면서 왕당파와 연줄이 생겼다. 당시 찰스 1세는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들과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고, 이에 로렌스 워싱턴은 국교회 수장인 켄터베리 대주교의 심복이 되어 청교도들을 숙청하는 데 기여했다. 이 댓가로 로렌스 워싱턴은 부유한 지역의 국교회 목사로 임명되었으나, 결국 찰스 1세가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하자, 로렌스 워싱턴 역시 몰락해 가난한 시골마을의 목사로 사망했다. 이로인해 그의 자식들은 스스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는데, 그의 맏아들이자 조지 워싱턴의 증조부가 되는 존 워싱턴(John Washington)의 선택은 상인이었고, 항해술을 배워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담배를 유럽으로 수입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자신을 고용했던 담배 농장주의 딸과 결혼을 하며 받은 지참금으로 미국 버지니아로 이주해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에 정착하였으며, 조부인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을 거쳐 아버지인 오거스틴 워싱턴(Augustine Washington) 대에 이르렀을 때, 담배를 주로 경작하는 큰 농장과 상당수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는 버지니아의 상류층에서 중간 급의 위치를 차지하는 가문이 되었다. 워싱턴의 아버지인 오거스틴 워싱턴은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의 판사이기도 했다.

2.2. 젊은 시절

조지 워싱턴이 11살일 때 아버지가 질병으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이복형인 로렌스가 가장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이복형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의 지휘자였던 이복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군인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군에 지원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그는 대신 버지니아 민병대로 지원했고 대령의 계급으로 근무했다.

광활한 토지에 대한 측량 업무가 중요하던 그 시절, 워싱턴도 일찍부터 측량 기술을 익혀 18살이던 1749년 윌리엄 & 메리 대학교에서 측량사 면허증을 수여받고 정식으로 전문 측량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 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워싱턴 대통령은 측량하기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2.3. 영국군 장교 시절

1753년 조지 워싱턴은 오하이오 회사라는 개척 회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오하이오 강 지역에 파견되는데, 이때 프랑스와 충돌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버지니아에서 영국군 소령 직위를 받았고 이렇게 워싱턴은 영국군에 입대한다. 그러던 중 1754년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의 전초적 전쟁이었던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2)이 벌어지고 조지 워싱턴은 중령 직위로 버지니아 의용군을 이끌고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 맞서 참전하였다.

워싱턴은 1754년 7월 네세시티 요새 전투에서 첫번째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다만 당시에는 징계를 받기는커녕 적절한 판단을 했다며 이후 표창을 받았다고. 1755년 영국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장군의 미국 측 자문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미국 최초의 정규 민병대인 버지니아 연대의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0개월 동안 인디언과 벌어진 20번의 전투에서 연대 병력의 1/3을 잃는 등 격렬한 전쟁을 지휘하였으며 1758년 퇴임하였다.

워싱턴이 그 후 독립 전쟁에서 발휘한 군 지휘관 및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바로 이 참전을 통해 얻게 되었다. 이때 영국군의 군사 전술과 장단점을 훤히 꿰뚫게 되었으며 군 조직, 군사 교육 및 훈련, 군수의 중요성 등을 이 기회를 통해 파악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인망을 보여 수하들의 신뢰를 얻었다.

2.4. 결혼

1759년 워싱턴은 마사 커스티스(Martha Dandridge Custis)라는 부유한 과부[12]와 결혼, 당대 미국 최대 갑부[13] 중 한 명이 되었다. 마사는 매우 지적이고 우아한 태도를 가진 여자로서 광대한 농장 관리에도 탁월함을 보여줘 둘의 결혼 생활은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원만하게 지속된다. [14]

다만 아내가 이전 결혼에서 출산경험이 있음에도 워싱턴과의 사이에선 아이를 낳지 못했다.[15] 이후 아내가 사별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의붓자식인 존 파크 커스티스(John Parke Custis)와 팻시 커스티스(Martha Parke "Patsy" Custis)를 입양해 키웠는데[16] 존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하자[17], 존 파크 커스티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손자인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를 입양해서 아내의 전 남편의 후손이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워싱턴은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재산 중 원래 워싱턴 가문의 재산은 조카 부시로드 워싱턴(Bushrod Washington)에게 상속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법적으로 금지된 지역을 개척해 재산을 불리는 꼼수도 부렸다. 이 당시 영국 측은 13개 식민지(미국)가 끊임없이 땅을 개척하도록 놔두면 '인디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그러다 보면 그 세력이 본국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개척에 상당한 제약을 가했고, 심지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게 법으로 금할 정도였는데 이를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어기고 열심히 재산을 부풀린 것.

2.5. 미국 독립 전쟁

1750~60년대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벌어지자, 신대륙에도 그 영향이 미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 조지 워싱턴은 다른 영국계 식민지 유지들과 함께 영국군을 지원하는 식민지 의용군에 가담하여 나름의 공로를 세운다. 허나 식민지 전쟁에 많은 예산과 국력을 소모한 영국 정부가 이를 메꾸려고 식민지에 세금을 늘리고, 새로 편입된 식민지의 원주민을 다독이기 위해 식민지인의 구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의 개척을 금지시키자, 이런저런 불만들이 쌓여서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1774년 구성된 대륙의회는 지휘관을 물색 중 이전 전쟁에서 인망을 보인 워싱턴을 대륙군(Continental Army) 총사령관으로 취임시킨다.

워싱턴은 초반에는 영국군에 연전연패하였는데, 워싱턴부터가 총사령관 임무는 처음 맡는 신참이었던데다가 초기 식민지 대륙군은 당시 영국군의 보조병격으로 원주민 또는 (비슷한 처지의) 프랑스 식민지군이나 상대해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영국군 같이 고도화된 선진군대와 싸운 적은 없는 민병대에 불과한 오합지졸들이었다. 워싱턴도 전술적 실수를 몇번 하는데, 그렇다고 대안이 있었냐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서, 초기의 영웅이자 후반의 배신자인 베네딕트 아놀드나 대니얼 모건, 너대니엘 그린 정도가 고작이었고, 이중에서도 총사령관이 가능한 인물은 베네딕트 아놀드 정도였지만 이때만 해도 그 정도급은 아니었고 결국엔 배신 때린다. 찰스 리처럼 어떻게든 총사령관 자리 좀 뺏어보려고 온갖 뒷공작을 하며 워싱턴을 괴롭히거나, 호레이쇼 게이츠처럼 얼마 되지 않는 군대를 제대로 말아먹은 인물도 있었다.

허나 이런 유리한 전쟁 상황 속에서도 영국군은 여러모로 운이 안따라줬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776년 12월 26일에 있었던 트렌턴 전투이다. 이 전투 직전의 상황은 연전연패하고 사기가 떨어진 워싱턴의 대륙군이 영국군만 보면 싸움을 회피하고 도망갈 정도였으나,[18] 이래 가지곤 어차피 못이긴다고 판단한 조지 워싱턴의 과감함 + 전술적 변경 + 운이 합쳐져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조지 워싱턴의 급박한 열흘. 참고로 트렌턴 기지를 기습하기 위해 새벽에 얼어붙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의 모습은 훗날 화가 엠마누엘 로이체의 손에 의해 가로 6m가 넘는 대작으로 그려져 미국 독립전쟁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으며 지금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
파일:1280px-Washington_AAAA-Crossing_the_Delaware_by_Emanuel_Leutze_MMA-NYC_1851.jpg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엠마누엘 로이체 작

이 외에도 워싱턴의 대륙군은 뜻밖의 행운 덕분에 열세를 딛고 위기를 극복한 사례가 신기하게 많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고대 건국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영웅담 수준이다. 그리고 1777년 이후, 생각보다 선전하는 대륙군을 보고 벤자민 프랭클린 등의 꼬드김에 응한 영국의 앙숙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부터의 지원에 힘입어, 워싱턴은 영국군을 본격적인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토벌군은 단발적인 전술적 승리를 했음에도 전략적인 소모전에 계속 끌려다니다가[19] 마지막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해 항복, 그길로 식민지에서 손을 뗀다.

워싱턴이 없었으면 미국 독립 전쟁은 얼마 안가서 끝났을 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식민의회는 독립파와 왕당파가 여전히 독립하냐 마냐로 팽팽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었는데, 때문에 인망이 없는 사람이 독립파를 지휘했으면 얼마 안가 민중의 지지를 잃고 독립파의 입지도 좁아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찌됐든 조지 워싱턴은 전술 천재 소리까진 듣지 못했지만 전략적 판단과 친화력, 통솔력으로 말 많은 13개 주를 단합시켜 끝내 독립을 쟁취한다.

2.6.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이 독립에 성공한 이후 그는 미련없이 총사령관 자리를 내려놓고 고향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가 농장 경영에 집중했다.[20]

워싱턴은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대륙 회의에서 기존의 연합 규약은 서로 따로 놀던 주들을 한 나라로 묶어놓기에는 취약하다면서 진정으로 주들이 한 나라로 단결하기 위해서는 전 국가적인 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워싱턴의 우려대로 1786년 매사추세츠에서 매사추세츠 주 당국의 과세 정책에 반발한 셰이즈의 봉기(Shays' Rebellion)가 일어나자 헌법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에 1787년 5월 25일 대륙 회의는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워싱턴은 버지니아주 대표이자 제헌 회의 의장으로 참석하여 헌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787년 9월 17일 총 7개조로 이루어진 미국 헌법 초안이 완성되어 1787년 12월 7일 델라웨어부터 시작으로 1790년 5월 29일 로드아일랜드를 마지막으로 13개 주가 비준을 완료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연방국가 미합중국이 완성되었다.

헌법까지 완성이 되자 진짜 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워싱턴은 완전히 은퇴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제는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을 처음으로 선출해야 했는데 워싱턴 본인은 '전쟁은 이겼고 내 할 일은 다 끝났으니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초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워싱턴뿐이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워싱턴한테 몰려와 "제발 대통령이 되어주세요!"라고 애원하면서 워싱턴을 난감하게 하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은 다른 사람들의 추대로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만장일치로 선출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워싱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21] 조지 워싱턴의 취임사에서도 나와있듯 만장일치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책무에 대한 부담감을 멋진 연설로 승화시켰다. 워싱턴은 취임 후 대통령 직책도 꽤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 퇴임할 때도 그는 국왕이 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지라[22] 임기를 2번만 치르고 물러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많은 혁명으로 집권한 첫번째 집권자들이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속에 10~20년씩 장기 집권하다가 점차 독재자가 되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매우 큰 업적이다.

대통령 시절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주도하는 정파간 대립이 심화되자 이를 어느정도 통솔하는 모습도 보였고, 내각(cabinet) 시스템, 국가 중앙은행 설립(1차 미국은행. 20년 간 존속한다) 등 헌법에 기술되지 않은 대통령의 임무도 은근히 잘 수행했다.

새로 창설된 미국 의회와 오랜 시간 협의한 끝에 세금 제도도 개편하여 소득세, 법인세 등 직접세 위주의 세수 기반을 확보했다. 또한, 대통령한테 부여된 거부권도 한 차례 행사하여 미국 의회를 견제하면서 해당 법안을 의회에서 재의결하자 그대로 수용하는 등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획정에도 힘을 썼다. 그리고 인구주택총조사( 센서스)와 토지- 부동산 총조사 시행이란 업적도 남겼다. 초기 대통령으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인구와 토지, 건물의 측량과 세입 기반을 확정하는 데에 2기 동안 진행된 8년 대통령 임기 중 6년을 투자했다. 미국은 워싱턴이 계획한 센서스 방식을 21세기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워싱턴은 매우 청렴한 성격으로 미국이란 신생국 정부가 뇌물이 오가는 부패한 공무원들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며 의회에 요청해 청탁 금지법을 만들었다. 국가직, 지방직, 의회 공무원을 불문하고 공무원과 배우자에 대해서는 공무원 자신이 속한 정부 부처에서만 선물(즉, 부서에서 증여하는 기념품이나 상여금이 현물화된 형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외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심지어 생일 파티도 외부 인사를 초청하지 못하게 하고 공직 사회 내부 인원들끼리만 시켰다. 조지 워싱턴 본인부터 대통령직에 있는 기간 동안에는 타 정치인이나 민원인들로부터 각종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 청탁 금지법은 위반이 적발되면 그 즉시 공무원 직에서 파면하는 파격적인 법안이었다. 허나 이 청탁 금지법은 안타깝게도 워싱턴 임기 종료 50년 후 앤드루 잭슨이 폐지시켜 버리는데, 이후 미국 정치권은 19세기 엽관제가 횡행하고 20세기 좀 주춤하나 싶더니 21세기에는 로비를 아예 비범죄화 하는 등 완전히 쇼미더머니를 보여주고 있다.[23]

2.7.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귀향하다

2번의 임기가 끝나자 워싱턴은 3선 출마를 거부하고 대통령을 그만두고 바로 고향인 마운트버넌(Mount Vernon)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 이상 집권하게 되면 그것은 대통령이 아닌 '왕권'이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 미국 국회의사당 정중앙 돔의 천장에는 조지 워싱턴이 당시 주 개수인 13명의 천사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최대 권력을 미련 없이 의회로 되돌려 놓은 조지 워싱턴의 고결함을 신격화한 모습이다.

워싱턴은 마음만 먹으면 독재자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총괄 지휘권자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인 만큼 군대마저 워싱턴 개인의 사병이나 다름없었고,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를 받았다는 것에서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듯 연방주의자/공화주의자들의 지지 세력을 상회하는 인기를 혼자서 누리고 있었다. 거기에 8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신생 국가 미국을 안정시키며 통치 능력도 증명했다. 초창기 미국에선 종신 집권이 불법도 아니었으며, 도리어 상당수 지지자들은 워싱턴의 종신 집권을 원하기도 했다. 게다가 최초의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워싱턴의 언사 또한 왕을 모방했었으며, 본인이 원한다면 아예 워싱턴 왕조를 개창할 수도 있었을만큼 지지도 권력도 굳건했다.[24]

그러나 그는 모든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고 대통령직을 떠났다.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지닌 지도자라도, 단순한 권력욕 뿐만 아니라 자기 추종자에 대한 의리, 후손들의 지위에 대한 걱정,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딴 놈들이 이 나라를 망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들 때문에 장기 집권을 추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위에 언급했듯, 당 시대에 워싱턴의 인기는 타의 추종이 불허했다. 모두들 워싱턴이 계속 나라를 이끌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워싱턴은 그 모든 유혹을 모조리 뿌리친 것이다. 본인은 대통령 업무가 너무 힘들었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어쨌거나 본인의 확고한 신념, 철학과 초인적인 자제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후 2년 뒤에 사망했기 때문에 통치가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지만,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것으로 치세를 마무리했기에 이후 실험적인 정치 체계였던 대통령제가 실질적이고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가 있었다. 신생국을 진정한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만든다는 자신의 이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모든 정치적 권력을 포기하고 희생했다는 점에서 조지 워싱턴은 "역대 최고의 대통령 "으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해방자로서 칭송받았지만 독재자로 전락한 시몬 볼리바르 이승만 등과 대조되는 부분이다.[25]

이러한 워싱턴의 절제력 덕에 미국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시도한 정치적 모험 대통령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대통령제 민주주의를 제대로 굴리는 나라는 미국 하나뿐이다' 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어떠한 추문이 있어서도 아니고, 깔끔하게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물러남으로써 새로 생긴 민주적 국가 지도자, 대통령직의 신성성을 더럽히지 않고 고귀하며 존경받는 자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인이라면 누구든 존경할 수밖에 없는 위인이자 초대 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위치에 있던 본인이 2선까지만 하고 물러났으므로, 그 이상의 장기 집권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가 그 워싱턴보다 잘난 놈임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주게 되었다. 당연히 이는 현재까지도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딱히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음에도 후임 대통령들 대다수가 워싱턴의 전례를 따라 암묵적으로 두 번을 초과하여 대선에 나가는 걸 금기시했다.[26] 이로써 독재자의 등장 가능성이 미연에 방지되는 효과가 있었다.

워싱턴이 권력에 대해 가진 나름의 철학은 그의 고별사(Farewell Address)[27]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워싱턴은 '진정한 힘은 그 힘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세계의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명언이다. 이미 독립 전쟁 전부터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나는 당신들의 이상에 동의하는 한물 간 군인일 뿐이니 정치는 당신네들이 하시고, 진짜로 실력 행사할 거면 부르시오."였다. 실례로 독립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783년 초, 대륙 회의가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밀린 봉급을 주지 않아 불만을 품은 루이스 니콜라 대령과 대륙군 장교들이 워싱턴에 편지를 보내 "대륙 회의를 쿠데타로 뒤집어 엎어버리고 장군님을 미국의 국왕으로 추대하겠습니다"는 뉴버그 편지를 보내고,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부관인 존 암스트롱 소령[28]과 군인들이 대륙 의회에 최후 통첩을 보낸다는 소위 ' 뉴버그 음모(Newburgh Conspiracy)를 꾸미기도 했으나, 워싱턴은 군의 불만을 이해한다면서도 직접 "후손들에게 군과 의회가 대립하는 비극의 역사를 물려줘선 안 된다" 라며 명확히 거절한 뒤 군인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감정적으로 진정시켜 평화롭게 쿠데타 시도를 좌절시킨 적도 있었다.

이 때 대륙의회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보내온 편지를 워싱턴이 병사들 앞에서 직접 읽게 되었는데, 워싱턴은 편지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자 품에서 안경을 꺼냈다. 당시는 지금처럼 장수하기도 힘들었고 안경이 널리 보급되지도 않은 시절이라 안경을 쓰는 것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나 할 법한 일로 여겨졌기에 워싱턴은 자신이 안경을 착용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으나, 병사들 앞에서 글을 읽어야 했기에 이번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워싱턴은 당혹감에 웅성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제군, 부디 그대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네만. 나 역시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 머리가 새하얘졌고 눈까지 멀어버렸네."라며 양해를 구했다. 병사들은 수십년 동안 그들과 함께 싸워온 미국의 영웅이 그토록 초라하게 늙어버렸다는 것과, 그럼에도 마지막까지도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고 차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면서 미국 최초의 반란 시도가 해결될 수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도 최초를 쓴 위인이다. 역사에 '영웅'은 어찌보면 흔하지만, ' 독재자로 변하지 않는 영웅'은 생각보다 드물고, '본인의 의지로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영웅'은 더더욱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워싱턴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이 미련 없는 퇴임이야말로 가장 큰 업적이라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대쪽같은 행보 덕분에 조지 워싱턴은 지금도 수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고향 마운트 버논 농장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관리를 소홀히 했는지 워싱턴이 퇴임하고 막 돌아왔을때에는 엉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한것이 농장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후임인 존 애덤스 대통령의 임기 당시 프랑스와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준전시상태(Quasi-War)까지 가자 은퇴를 번복하고 미군에 복귀하면서 중장 계급으로 육군참모총장(당시에는 육군 선임장교)에 임명되었다. 다만 본인은 마운트 버논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부관 격으로 붙어있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일을 처리했다.[29]

2.8. 사망과 그 이후

워싱턴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지 2년만인 1799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워싱턴의 공식 사인은 ' 과다출혈'이다. 워싱턴은 눈 내리는 날 무리하게 말을 타고 산책하다가 폐렴과 후두개염에 걸렸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무리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피를 뽑았다.[30] 결국 5파인트(약 2.35리터)나 되는 피를 뽑은 워싱턴은 폐렴에 걸린 지 3일만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90년대만 해도 위인전에서는 겨울에 웬 비가 내려서 산책 나간 워싱턴이 비를 잔뜩 맞고 폐렴에 걸려 죽었다고 나오기도 했었다.

워싱턴의 사후 원래는 미망인 마사의 제안에 따라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 영묘를 만들어 워싱턴의 을 안치하려고 했으나, 고인의 의사에 따라 유해는 생전에 개인 영지인 마운트버넌에 만들어놓은 가족 선영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워싱턴이 안장될 당시까지만 해도 마운트버넌의 선영은 관리가 매우 부실한 상황이었고, 워싱턴은 마운트버넌에 안장되길 바라면서 무덤을 새로 더 크게 개축하길 바랐지만 이 유언은 집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1830년 마운트버넌에서 일하다 해고당한 후 앙심을 품은 정원사가 워싱턴의 유골을 훔치려고 시도한 사건이 터지면서 워싱턴의 무덤을 새로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미영전쟁 당시에 불타버린 국회의사당을 재건하면서 국회의사당 지하에 새로이 워싱턴의 묘실을 만들어 그곳으로 이장하자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당시 남부 출신 의원들의 반발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워싱턴은 1837년 마운트버넌에 새로 만든 무덤에 부인 마사 그리고 다른 워싱턴 가문의 구성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 국회 의사당 지하에 마련된 묘실을 이용하지 않자 이후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자리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현재도 이곳은 "워싱턴을 안장하려 했던 자리"로 팻말만 붙어 있고 비어있는 상태다. 때문인지 미국 대통령들도 사망하면 보통은 자기 고향이나 살던 곳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

훗날 남북 전쟁이 터졌을 때 워싱턴의 연고지였던 버지니아주가 미합중국을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가담했기 때문에 마운트버넌은 물론 그곳에 있는 워싱턴의 무덤까지 졸지에 남부연합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마운트버넌에서 북쪽으로 겨우 20km만 가면 북부의 수도 워싱턴 D.C.가 나오는 데다가 포토맥 강만 건너면 바로 북부 메릴랜드주인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파괴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으나 워싱턴은 남북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영웅이었기 때문에 양측은 암묵적으로 마운트버넌을 중립 지역으로 정하고 그곳에서의 교전을 피했다.[31] 때문에 남부의 수많은 농장이 전쟁으로 파괴되는 와중에 농장은 물론 워싱턴의 무덤 역시 무사할 수 있었다.

마운트버넌에 있는 워싱턴의 무덤( 영상) 아내 마사 워싱턴과 합장되어 모셔져 있다.

2024년 1월 8일에 우주장 회사 셀레스티스가 진행하는 "엔터프라이즈 비행"의 일환으로 유해의 일부가 우주로 발사되었다. 발사된 유해는 우주를 영원히 떠돌게 될 예정이다.

3. 평가

전쟁 속에서도 으뜸, 평화 속에서도 으뜸,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이었던 사람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
헨리 리 3세(Henry Lee Ⅲ)[32], 조지 워싱턴의 장례식에서의 추도 연설
按, 華盛頓, 異人也. 起事勇於, 割據雄於, 旣已提三尺劍, 開疆萬里, 乃不僭位號, 不傳子孫, 以創爲推擧之法. 幾於天下爲公, 駸駸乎三代之遺意. 其治國崇讓善俗, 不尙武功, 亦逈與諸國異.
余嘗見其畵像, 氣貌雄毅絶倫, 嗚呼, 可不謂人傑矣哉! 米利堅 合衆國以爲國, 幅員萬里, 不設王侯之號, 不循世及之規, 公器付之公論, 創古今未有之局, 一何奇也! 泰西古今人物, 能不以華盛頓爲稱首哉!
살피건대, 화성돈(華盛頓: 워싱턴)은 이인(異人: 비범한 사람)이로다.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진승· 오광과 같고, 천하를 분할해 웅거함은 조조· 유비와 같다. 그러나 3척의 검을 들고 일어나 만 리가 되는 영토를 얻었는데도, 참람되이 을 자칭하지 않고, 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지도 않았으며, 외려 추거(推擧)의 법을 세웠다. 이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를 사유물이 아닌 공적인 것으로 여김)[33]에 따른 것이니, 3대에 남길 뜻을 널리 떨쳤도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선량한 풍속을 숭상하고 무력을 높이지 않았으니, 이 또한 다른 나라들을 둘러보아도 같지 않다.
내 그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기골과 용모가 굳건하고 빼어났으니, 이야, 인걸이라 아니 부를 수 있겠는가! 미리견(米利堅) 합중국의 도로써 나라를 세우니, 만 리나 되는 영토를 아우르지만, 왕후(王侯)의 칭호를 세우지 않고, 세습의 법규도 따르지 않으며, 나라의 일을 공론에 따라 처리하여, 고금에 없던 형국을 만들어내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고금의 태서(泰西) 인물을 통틀어, 어찌 화성돈이 으뜸간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서계여(徐繼畬: 1795~1873)[34], 《영환지략(瀛環志略)》[35]
그렇게 마무리짓고 끝낸다면, 그가 이전에 무엇을 해왔는지와, 이 사이의 관계를 볼때, 그를 살아있는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며, 그가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여겨지게 할 것이다.
(That act closing and finishing what had gone before and viewed in connection with it, placed him in a light the most distinguished of any man living, and that he thought him the greatest character of the age.)
영국 국왕 조지 3세[36][37]
내가 미국사를 읽어 천추에 길이 빛날 영웅을 찾다가 한 사람을 얻으니, (…) 옛날과 지금의 세계에서 첫째로 빼어난 인물 워싱턴이 아닌가! 워싱턴은 호걸 중의 군자요, 군자 중의 영웅이로다.
안중근 #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의 영웅이라는 명성에 힘입어 당선된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8년의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고[38] 220년이 훨씬 넘은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에서 지켜지고 있는 평화로운 정권교체(Peaceful Transition)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며 이를 미국의 정치적 전통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39] 거칠게 말해서, 워싱턴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언제든지 군주가 될 수 있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왕이나 독재자로 변할 수 없었다. 미국이 건국 이래 독재자 쿠데타 없이 민주주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이룬 워싱턴의 공이 매우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또한 대통령제를 도입한 여러 나라에도 그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법이나 약속이 아닌 로버트 월폴의 행보 자체가 총리라는 직책이 되었듯, 대통령이라는 직책 역시 한낱 법률 사항이 아니라 조지 워싱턴의 영웅적인 행보 자체가 대통령직의 규범이 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통령이 왕의 다른 명칭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통치 유형에서의 수장임을 역사에 보여준 인물이다. 이 점이 완전한 통일 연방을 만든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조지 워싱턴이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자리에서 변동이 없는 이유다.[40] 다소 과격한 주장이긴 하지만, 미국 역사에 링컨과 워싱턴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미국의 발전이 몇백 년은 늦어졌을 거라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게 과언이 아닐 정도.

이 전통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와 선출직 지도자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들의 경우 대통령 제도 자체가 처음부터 어그러진 경우가 많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한국만 봐도 사사오입 개헌이나 3.15 부정선거 등으로 미국과 달리 첫 방향성이 어그러지니 권력을 잡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정신이 우세해져 5.16 군사정변, 유신 헌법, 12.12 군사반란 등의 사건으로 인해 나라가 오랜 기간 계속 삐그덕거릴 수밖에 없었다.[41][42]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신흥독립국의 독립영웅들이 독재자로 전락하는 경우는 엄청나게 흔해빠진 일인데,[43] 이를 통해 군주정이 주류였던 18세기에 독립영웅이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은 워싱턴이 얼마나 큰 결단을 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권력을 깔끔하게 포기한 조지 워싱턴의 행적 때문인지,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은 이런 조지 워싱턴을 좋게 표현한다. 반대로, 독재 국가를 긍정적으로 보고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조지 워싱턴이 권력을 포기한 행적을 별거 아닌 것처럼 표현하거나 아예 무책임한 것으로 표현한다.

한편, 당시 미국 남부의 웬만한 대지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워싱턴 본인 역시 농장을 경영하면서 노예를 거느렸다. 워싱턴은 자신의 보금자리 마운트 버넌에 결혼 당시 기준 50여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사망 직전에는 이 숫자가 3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자신이 운영했던 농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예 수도 점점 더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워싱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마운트 버넌을 찾는 이들도 많았기에 이를 수발할 인력도 필요해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이들은 단지 잡일만이 아니라 대장장이나 천을 짜는 일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했다.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노예제에 대한 워싱턴의 견해는 다른 농장주들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44] 독립 전쟁을 치른 이후 노예제에 대해 점차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허나 노예제 문제가 기껏 하나로 모은 미국을 분열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워싱턴은 공식 자리에서는 노예제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본인의 유언장에는 독립전쟁 때부터 자신을 수발한 비서 흑인을 자신의 사후에 자유인으로 풀어주도록 했으며, 자기 집에 있는 나머지 노예들은 부인 마사가 사망한 후[45]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 주도록 하였다.

워싱턴 본인은 죽을 때까지 노예를 소유했기에, 2020년 BLM 시위가 한창일 땐 워싱턴의 동상이 페인트 테러를 당하거나 스프레이로 노예 소유주, 백악관을 불태워라 등의 메세지가 적히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백악관 공무원들에 의해 주의를 받고 훈방 조치된 뒤, 동상은 백악관 공무원들이 다시 원래대로 복원시켰다.

미국 건국 초기 지도자들은 노예제에 비판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이미 존재하던 노예제에 대한 현실적 제약이 있다보니 노예 제도의 존폐를 헌법에 명시하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찬성하는 남부의 연합이 균열되어 연방이 와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개별 주에 찬반 여부를 맡기는 일종의 방임 정책을 썼다.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의 경우 이렇게 비노예주를 늘려가다보면 노예제 허용주들도 자연스레 이를 폐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46] 당시의 노예제 인식은 그나마 좋게 봐서 "필요악" 수준 정도였는데, 문제는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이론들이 나오더니[47] 심지어 정당화되고 이념화되었다는 것.[48]

4. 어록

Of all the dispositions and habits which lead to political prosperity, religion and morality are indispensable supports.
정치적 번영을 이끄는 특징과 습관들 가운데, 종교와 도덕은 필수불가결의 버팀목이다.
고별사(1796) 中

5.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755 버지니아 하원의원 선거 프레더릭

[[무소속(정치)|
무소속
]]
40 (6.88%) 낙선(2위) -
1758 310 (39.04%) 당선(1위) 초선
1761 505 (42.15%) 재선
1788~1789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 43,782 (100.00%, 69인) 초선
1792 28,300 (100.00%, 132인) 재선

6. 기타

  • 파일:$1 front.jpg

    미국 1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49] 이유는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그를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미국 달러 발행 초기부터 조지 워싱턴이 1달러에 배정되어 있었는데, 조지 워싱턴이 1달러 도안으로 캐스팅된 건 1811년이다. 1811년 당시 1달러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고 하니 많이 보라고 1달러에 넣었다는 게 어느정도 납득이 가는 지점이다. 지금이야 1달러 지폐는 아무데나 쑤셔넣는 입장이지만 19세기 초반 당시의 조지 워싱턴 1달러 지폐는 고액권이었다. 미국 달러 발행 초기에는 1달러, 5달러, 10달러 세 종류의 지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에는 일상적인 거래는 센트 단위로 했으며 달러 단위로 거래하는 것은 고액거래를 했을 때였다. 2달러, 20달러 등의 고액권 지폐는 남북 전쟁때 추가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1달러의 가치가 시대를 지나 하락했고, 21세기 들어서는 싸구려 과자, 컵라면 1개나, 음료수 한병 정도나 살수있는 돈이 되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지만 자주 지폐를 구기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닌다.[50]
  • 생전에 치아 상태가 매우 나빠서 틀니를 끼고 다녔다. 선천적으로 치아가 약했던데다가 호두 껍질을 이로 깨먹는 습관이 있었고, 양치질을 할 때 매우 힘을 꽉 주고서 했기 때문에 이에 상당히 무리가 갔다. 워싱턴은 하루 3번씩 양치를 꼼꼼히 했다고 하지만 담배가루를 치약으로 썼기 때문에 오히려 증상을 더 악화시켰다.[51] 이 때문에 워싱턴은 젊은 나이부터 치아가 빠졌고, 젊어서부터 치통으로 고생을 했다. 심지어 미국의 독립전쟁이 끝났을 당시 그의 치아는 몸소 철사로 묶어서 간신히 붙들어 매달았을 정도였다. 조지 워싱턴의 절친한 친구 치과의사 존 그리우드가 조지 워싱턴의 치아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내린 해법은 이를 모두 뽑고 틀니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52] 이때 조지 워싱턴은 의치를 만드는 대가로 약 15달러를 지불했다. 그리하여 초대 대통령 취임 당시까지 남아있는 치아는 왼쪽 아래턱에 있는 제2소구치 하나가 전부였다. 이렇게 되자 틀니를 할 때까지 호케이크와 수프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이후 대통령에 다시 취임해달라는 제의에 모양이 안서자 노예의 치아와 하마뼈, 바다코끼리 엄니, 밀랍과 금으로 만든 틀니를 만들어 끼우고 다녔다.[53] 문제는 이 틀니가 너무 커서 잘 맞지도 않을 뿐더러 금으로 스프링을 만들다보니 툭하면 입이 벌어지는 모양새여서 워싱턴은 항상 입을 꽉 다물고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뾰루퉁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워싱턴의 초상화는 많지만 전부 입술을 삐죽 내민 모양으로 남은 건 이 때문이다. 거기다 고통스럽기 까지 해서 워싱턴은 아편 팅크까지 복용했다.
  • 실제 워싱턴이 연설을 길게 한 기록은 찾기 드문데 그것 역시 틀니가 입에 맞질 않아 언제나 틀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을 걱정해서 일부러 말을 짧게 했기 때문이다.[54] 설상가상으로 이 치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닳아 없어지는 데다가 재료의 성질상 기공이 많아서 미세한 구멍에 찌꺼기가 끼기 쉬웠다. 워싱턴은 와인을 자주 마셨는데, 그 결과 의치가 변색되고 썩어버리는 바람에 지독한 냄새가 났으며, 워싱턴은 그 냄새가 역겨워 항상 입을 부풀린 채 다녔다. 게다가 이물질을 너무 많이 물고 있었기에 나중에는 입안 곳곳이 곪아서 턱 일부가 뭉개지기까지 할 정도가 됐다. 후일 워싱턴이 대통령에서 물러나 남은 여생을 자기 집에서 보낼 때 화가 길버트 스튜어트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초상화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틀니를 너무 오래 껴서 볼 살이 늘어나다보니 틀니를 뺀 말년에는 볼살이 늘어져 화가가 입 속에 솜을 넣어서 그림을 그려야 할 정도가 됐다. 다만 그 틀니가 어지간히 사람을 괴롭혔는지 솜을 넣고 그린 워싱턴의 초상화는 이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자상한 모습이다. 초상화
  • 당시 워싱턴의 틀니를 만들어준 사람은 당대 최고의 치과 의사이자 임플란트의 시조인 이삭 그린우드의 아들 존 그린우드로서 그는 워싱턴의 의치를 만들었다는 것을 광고로 손님을 끌어모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허나 정작 그 광고의 주인공인 워싱턴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틀니로 인해 엄청난 애로사항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린우드에게 자주 불만을 표했으며, 툭하면 그린우드가 돌팔이라고 투덜댔다.
  • 틀니로 인해 초상화가 상당히 무뚝뚝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워싱턴은 관저에서[55] 카드놀이를 열광적으로 즐겼고, 무료하면 관저를 나서 여우사냥에 심취했으며 다과회와 파티도 자주 열어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제법 미식가라서 음식에도 까다로웠으며 앞서 말한대로 포도주에는 사족을 못 썼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호케이크(Hoecake)였는데[56], 매일 아침마다 꿀과 버터를 뿌린 호케이크를 먹을 만큼 좋아했다.[57] 게다가 독립전쟁 이전부터 재력가로 한 이름 날렸기에 아메리카 대륙 버지니아 식민지 사교계에선 나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연극도 무척 좋아하여 평생 수 많은 종류의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갔었다. 또한 역사가들이 당시 문서를 뒤져본 결과, 워싱턴은 카스웰 메시 향수와 파우더 뿌린 가발을 자주 쓰는 등 외모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멋쟁이였다. 섹드립도 종종 즐겼는지 독립전쟁 때 자신의 부관에게 "애인을 기쁘게 하려면 열심히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아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농담도 종종 재밌게 했었던지, 헨리 녹스[58] 라는 뚱뚱한 부하가 워싱턴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줄려고 움직이자, 헨리의 엉덩이를 툭 차면서 “배 가라앉지 않게 엉덩이 조심히 움직여라” 하고 놀린 일화도 있다.
  • 일각에선 워싱턴이 흑인 노예와 불륜을 저질렀고, 한겨울 엄동설한에 자신이 사랑하던 흑인 노예를 만나러 갔다가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도 떠도는데 폐렴에 걸려 치료 도중 과다출혈로 죽은 건 사실이지만 흑인 노예와의 불륜설은 증거가 없다.[59] 다만 흑인 노예와는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염문설은 많았는데, 명확히 밝혀진건 없다.
파일:All_Washington_Counties.svg.png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운티
  • 어렸을 때부터 승마를 즐겼는데, 이 덕분인지 기골이 장대하고, 생전 마지막으로 쟀던 조지 워싱턴의 키는 188㎝로 이는 어지간한 운동선수와 맞먹는 키이다. 특히나 18세기 당시엔 위생,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던걸 감안하면 엄청난 장신이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당시 유럽 남성의 평균 신장이 보통 165㎝ 정도였다. 현재의 관점으로 봐도 상당히 큰 키인데, 영양 상태가 좋지 않던 당시 기준에선 거의 거인 수준이었을 듯. 지금도 미국의 대통령들의 평균키보다 크다. 거기에 어깨가 떡 벌어진 당당한 체격과 더불어 비율과 기럭지가 좋아서 키와 덩치가 더욱 커보인다. 현재 미국 남성의 평균키가 176㎝라는 걸 생각하면 현재 기준으로 2m는 되는 셈.
  • 미합중국 국군에서 연공 서열이 가장 높은 군인이기도 하다. 생전 그가 전역할 땐 중장(Lieutenant General)에 불과했지만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미 의회가 법률을 제정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추인하여 그를 3계급 특진 대원수(General of the Armies)로 추서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 법에 "'General of the Armies'라는 칭호는 6성 장군에 해당한다"라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미군에는 5성 장군인 원수 계급까지 있었고 이 법에는 "'General of the Armies' 칭호는 과거이든, 현재이든 미합중국군의 다른 모든 계급에 선임한다"라고 명시해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6성 장군 계급과 마찬가지이다. 이 칭호를 받은 군인은 워싱턴 말고도 존 조지프 퍼싱도 있지만 퍼싱은 대원수가 아닌 사실상 원수 계급으로 이 칭호를 받은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정식으로 원수 계급이 신설되면서 퍼싱의 계급에 대한 논란이 생기자 당시 미 육군 장관 헨리 스팀슨은 "퍼싱의 계급은 다른 원수 계급에 선임한다"고 해석을 내렸고 워싱턴의 사후 추서 때 정식 계급으로 신설되면서 대원수 계급으로 덩달아 올라간 케이스이다. 또한 법을 통과시킬 때 '연공 서열에서 워싱턴이 퍼싱보다 앞선다'라고 못박아놨기 때문에 미군에서 연공 서열이 가장 높은 군인은 워싱턴이다.
  • 워싱턴이 도끼로 아버지가 아끼는 벚나무를 베었을 때 그가 솔직하게 말하자 아버지가 용서해줬다는 일명 벚나무 이야기가 나름 유명한데, 이 이야기는 목사 행세를 했던 외판원 윔스[61]란 사람이 워싱턴의 위인전이 너무 얇다고 생각해 맘대로 붙인 이야기였다. 워싱턴 생가엔 벚나무가 없다. 더군다나 원래 버전은 워싱턴을 포함한 형제들이 같이 놀다가 벚나무 가지를 꺾어먹는 것이었고, 이때 무려 4살짜리 막내 워싱턴이 자기가 했다고 말했다는 비범한 내용이었다. 사족으로 이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소년 시절에 물건을 팔면서 가격을 깎고자 하는 손님에게 가격을 계속 올리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62] 이 윔스라는 남자는 나중에 일명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위인전도 썼다.
  • 아메리칸 조크에서는 이 일화를 다음과 같이 유머스럽게 설명한다.
    선생님: "조지 워싱턴이 벚나무를 자른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왜일까요?"

    학생: "네, 조지 워싱턴은 아직 도끼를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위스키와 인연이 좀 있는 인물인데 영국과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위스키에 세금을 매겼다가 폭동이 일어나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쪽에도 사정이 있는 것이, 애팔레치아 개척지역민들은 험난한 산맥으로 곡물을 나르는 대신 남는 곡물로 만든 위스키를 운반하는 걸 선호했을 뿐더러 현금이 귀했던 개척지의 사정상 위스키는 일종의 화폐로도 사용되어 왔었다. 즉 이들에게 위스키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필품이었던 것. 워싱턴 정부는 위스키세를 사치세로 생각했는데 이들에게는 소득세가 된 셈. 결국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워싱턴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토벌하면서 연방정부의 권한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직접 군사를 이끈 최초이자 최후의 친정이었다. 이렇게 보면 워싱턴과 위스키가 악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퇴임하던 해, 워싱턴은 버지니아 주에 증류소를 세웠고 사망하기 전까지 미국 최고의 양조업자가 되었다.
  • 독립군 시절에 영국군과 내통하던 요리사가 조지 워싱턴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카더라성 일화가 있다. 그 요리사는 조지 워싱턴이 평소 즐겨먹는 요리에 독을 바른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독이라는 게 다름이 아니라 토마토였다. 그 요리사는 토마토를 바른 요리를 워싱턴이 깨끗이 비우자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해 영국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물론 토마토엔 독 따위 없었으므로[63][64] 워싱턴에겐 아무 이상도 없었다. 토마토의 영양가를 생각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킨 셈. 다만 이 일화는 다른 대통령 버전도 떠도는 것(특히 에이브러햄 링컨)을 볼 때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 1789년 10월 5일에 빌려간 책을 죽을 때까지 반납하지 않았다.(...) 뉴욕 소사이어티 도서관(New York Society Library)에서 2권의 책을 빌렸다. 각각 국제관계학을 다룬 'The law of nations'와 영국 하원의 토론 내용을 담은 'Commons debates'라는 책이었다. 연체료는 누적된 액수와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할 때 약 30만 달러. 이 책은 2010년에 반납되었다. 해당 책 자체는 찾지 못해서, 워싱턴 기념 사업회에서 해당 책과 같은 판본의 책을 따로 구입해서 반납했다. 연체료는 도서관 측에서 면제해줬다. 뉴욕데일리뉴스 기사
  • 2024년. 조지 워싱턴이 기거하던 저택인 마운트 버넌에서 250여년 전 수확된 체리가 완벽하게 보존된 채 발견됐다. #
  • 알링턴 국립묘지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 국립묘지가 위치한 부지가 바로 워싱턴의 아내인 마사의 개인 재산이었다. 마사가 워싱턴과 재혼한 이후 워싱턴이 마사의 개인 재산까지 관리했는데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1802년 마사가 세상을 떠나자 워싱턴의 의붓손자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가 마사의 개인 재산이었던 친할아버지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의 개인 농장을 상속받았고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에게는 장성한 자녀가 딸 메리 애나 1명 뿐이라서 이 농장은 1857년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한 후 딸 메리 애나와 그의 사위에게 돌아갔는데 이 사위가 바로 로버트 E. 리이다. 그리고 남북 전쟁 시기에 리가 아메리카 연합국 측에 가담하면서 리 일가가 남부로 떠나자 연방 정부는 이 농장을 매입(사실상 강제점거)하여 전사자들을 위한 국립묘지를 조성했는데 이 곳이 바로 알링턴 국립묘지이다.
  • 이 이름을 본뜬 워싱턴 주도(Washington State Road)가 있으며 범례는 그의 실루엣을 형상화했다.
  •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개인 자산이 제일 많은 대통령이었다.[65] 이 기록은 무려 220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66] 2016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이 기록을 깼다. 월스트리트의 분석에 의하면, 가장 재산이 많았을 때 그 액수는 현재의 한화로 8천 8백억 원 가량이다.
  •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은 1879년부터 1971년까지 '워싱턴 탄신일(Washington's Birthday)'이라는 이름의 연방공휴일이었으나 1971년에 통일 월요일 휴일 법으로 2월 셋째주 월요일로 바꾸어 연휴로 통합해서 쉰다. 또 명칭도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로 정해 역대 대통령들을 모두 기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이름은 '워싱턴 탄신일'라고 정해져 있으며, 조지 워싱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같이 평가가 높은 대통령들의 비중이 크다.[67]
  •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와 영국과 관련된 에피소드. 미국이 독립한 뒤 버몬트 주의 정치인인 이든 앨런(Ethan Allen)[68]은 영국을 방문했다. 공식 일정을 수행하던 도중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에 갔는데, 거기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있었다. 당연히 미국과 워싱턴을 조롱하기 위한 의도였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앨런에게 영국인이 워싱턴의 초상화를 보았냐고 묻자 앨런은 보았다고 대답했고,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해 "참으로 초상화를 걸기에 어울리는 장소이더군요. 영국인이라면 누구든지 그를 보고 지린다는 거 아닙니까?" 라고 말했다고. 에이브러햄 링컨 시절부터 내려온 이야기로, 링컨 본인이 꽤 좋아한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실화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 외모나 이름도 영국식이고, 영어를 사용했고, 집안도 이민자 출신에 독립 전쟁을 이끌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조지 워싱턴은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 다만 그의 두 형[69]들은 영국의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와 그의 동생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많이 그의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생존했다면 그 역시 영국에서 교육받아 좀 더 영국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영국에서 교욱받은 그의 형들은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살지 못하고 독립전쟁 전에 사망했다.
  • 미국 대통령 중 초대 워싱턴부터 5대 먼로까지 5명이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이었는데, 미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의외로 상당수가 정식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여서, 이 중 워싱턴만이 유일하게 대학에 가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고등교육을 받은 동료 정치가들과는 좀 데면데면한 관계였던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인 너새니얼 그린이나 이스라엘 퍼트넘 같은 사람들과 친했다. 성격 자체도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소탈한 편. 어떤 사람들은 워싱턴이 이론을 들이대며 잘난척하는 동료 정치가들 꼴보기가 싫어서 3선을 거절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정식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문맹자가 수두룩했던 당시 기준으로 워싱턴은 상당한 지식인이었다.
  • 1835년에 본인이 조지 워싱턴의 간호 노예였다는 161세 할머니가 등장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80세였고, 하지만 '피니어스 바넘'이 그녀의 유명세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사기극을 벌인 것이 밝혀졌다. #

7. 대중매체에서

7.1. 게임

7.1.1. Liberty or death

코에이의 역사게임 Liberty or death에서 미국측 총사령관 캐릭터로 나오는데 다른 코에이의 역사 게임의 주인공격 캐릭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칭기즈 칸이 전투형 캐릭터인데 비해 워싱턴은 정치형 캐릭터에 더 가깝다. 워싱턴은 총사령관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인물이었다. 전투력만 따지면 베네딕트 아놀드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7.1.2.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

  • 문명 4 문명 5에서 미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4의 경우 확장팩을 모두 설치했다고 가정할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 링컨과 공동 출연.

7.1.3.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흥미롭게도 이 게임에서 조지 워싱턴은 주인공의 협력자도 되지만 동시에 원수도 되고, 선하고 정의로운 성격이지만 동시에 악행도 저지르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심지어 DLC 에덴의 조각에 지배당한 조지 워싱턴이 절대군주가 되어 폭정을 자행하는 환상이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조지 워싱턴(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항목으로.

7.1.4.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진짜 조지 워싱턴은 아니지만, 그 사람을 모델로 한 적, '기계 애국자'가 나온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적 항목으로. 팬들과 게이머들 사이에선 '좀비 로봇 워싱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7.1.5. 시드 이야기

웬만한 신화속의 신과 역사 인물들이 모에화되어서 등장하다보니, 여기서 등장하는 조지 워싱턴도 얄짤없다.

참고로 출시되었던 대통령들로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율리시스 그랜트, 존 F. 케네디 등의 대통령도 있었는데 문제는 케네디의 설명에 해당 게임에선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 썼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나머지 캐릭터들의 성별 논란이 있었고 이후 케네디의 설명이 변경되면서 해결되었다.

7.1.6. 루카스 아츠의 텐터클 최후의 날

코믹 어드벤처 게임인 이 작품에선 황당하게 나온다. 과거로 간 주인공 중 하나인 호기가 게임 진행을 위하여 미래에서 건네받은 폭발하는 시가(담배)를 그에게 주는데 고맙다고 그 시가를 피다가 폭발하면서 이빨이 다 부숴진다. 덕분에 이빨이 하나도 없는 확 늙어버린 모습으로 변하는데 역시 미래에서 건네받은 딱딱 움직이는 틀니를 주면 그걸 끼는데 이빨이 딱딱 움직이는 지라 얼굴이 흔들리면서 마치 추워보인다고 존 핸콕이 토머스 제퍼슨에게 모닥불을 피우게 한다.

나중에는 그 모닥불을 엄청 화력이 높게 만들면 불이야~ 소리 지르면서 핸콕, 제퍼슨과 같이 창문을 깨고 달아나는데 대머리( 가발)이다. 특별히 병신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가볍게 웃기게 만든 수준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7.1.7. 도미네이션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워싱턴(도미네이션즈)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협의회/조지 워싱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1.8.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캠페인 등장인물 목록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대전사 아시아 왕조
액트1. 피 액트2. 얼음 액트3. 강철 액트1. 불 액트2. 그림자 액트1. 일본 액트2. 중국 액트3. 인도
<colbgcolor=#8fbc8f,#427042> 주인공 모건 블랙 존 블랙 아멜리아 블랙 <colbgcolor=#fae7a6,#594604> 나다니엘 블랙 <colbgcolor=#fae7a6,#594604> 체이튼 블랙 <colbgcolor=#ffcc97> 사쿠마 키치로 <colbgcolor=#ffcc97> 지안 후앙 <colbgcolor=#ffcc97> 나니브 사히르
서브
영웅
엘리자벳 램지 카넨케 #s-5.1.1 성난 말/프랭크 삼촌 토리이 모토타다 라오 첸 프라바르 파텔
사힌 노나키 쿠퍼 소령 카넨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알레인 매그넌 워릭 피에르 보몽 스벤 쿠첼러 윌리암 홈 이시다 미츠나리 왕 진하이 조지 에드워드슨
델가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NPC 칠체 스튜어트 블랙 시몬 볼리바르 노나키 아멜리아 블랙 - - 바하두르 샤 2세
#s-5.1 칠체
}}}}}}}}} ||

파일:attachment/screen13.jpg

미션에서 주요 인물이자 주인공 가문인 블랙 가문의 조력자로 등장. 성우는 홍성헌. 영국군 장교[70]로 나오며 캠페인 2장 '얼음'에서 주인공인 존 블랙 7년 전쟁 속에서 합동작전을 펼치며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7.1.9.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대전사

파일:attachment/screen30.jpg

사진 오른쪽의 인물. 왼쪽은 나다니엘 블랙

성우는 오리지널과 마찬가지로 홍성헌. 오리지널에서는 그냥 장교였지만 확장팩의 캠페인 '불'에서는 잘 알려진 독립전쟁의 총사령관으로 등장. 존의 아들인 나다니엘 블랙의 보좌를 받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인격도 훌륭해 전쟁에서 죽어가는 장병들을 안타까워하며 요크타운 전투에서 나다니엘의 전역이 다음 달이니 몸 사리라고 충고도 해준다. 오리지널과 확장팩에서의 스킨이 다르며, 체력이 좋고 공격할 때 군도를 들고 직접 공격한다. 컨트롤을 안 하면 다른 유닛들이 원거리 공격을 하는데 워싱턴 혼자 군도 들고 돌격하다가 쓰러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살려가면서 컨트롤해봐야 특별히 이득이 있는 스펙도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제일 먼저 앞세워 일점사를 받아내게 하고 다른 유닛들로 공격을 하면 유닛 손실 없이 캠페인을 클리어 할 수 있다. 체력이 네 자릿수라 은근히 오래 버틴다.

7.1.10.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결정판

DLC로 추가된 미국 문명의 지도자로 나왔다.

7.2. 만화 및 애니메이션

7.2.1. 티미의 못 말리는 수호천사


티미의 못 말리는 수호천사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티미가 역사 숙제를 하기 위해 수호천사에게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을 불러오라는 소원을 빌어서 등장. 여기서는 나무를 보자마자 도끼로 찍으려고 발작을 한다. 위의 '기타' 문단에도 등장하는 벚나무 일화의 패러디인 듯. 이때 발작하면서 외치는 대사인 MUST CHOP WOOOD!(나무를 찍어야 돼!)는 밈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성우는 코스모와 조르겐 등을 맡고 있는 대런 노리스. 여기서 나온 워싱턴의 필수요소 3가지는 흰 머리, 나무틀니, 자유 정신이다. 티미 엄마가 제퍼슨을 보고 니켈(5센트)에 그려진 사람이라고 신기해하자 "하, 니켈이라고! 나는 1달러에 있다고! 너보다 20배는 더 잘났단 말씀!"이라며 놀렸다.[71]

이후 다른 에피소드에서 등장할 때도 나무만 보면 도끼질을 하고 싶어서 발작하는 기믹이 꼭 들어가는데, 베네딕트 아놀드가 워싱턴으로 변장해 독립선언서 작성을 방해하려 하는 편에서는 이 기믹 덕분에 진짜 워싱턴을 찾아낸다. 진짜 워싱턴과 감쪽같이 변장한 아놀드 중 진짜 워싱턴을 찾아야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작성할 수 있는데, 이때 티미가 둘 앞에 나무를 내놓는 묘수를 낸 것. 역시나 가짜 워싱턴 아놀드는 그게 뭐라는 정상적인 반응인 반면 진짜 워싱턴은 도끼를 들고 난리를 친다. 지켜보고 있던 건국의 아버지들이 쟤 저러는 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라 놀랍지도 않다는 듯, 아주 심드렁하게 저쪽이 진짜네.라고 말하는 것이 압권이다.

7.2.2. 벤10 옴니버스

말트루언트를 막기 위해 타임 사이클을 통해 1773년으로 시간 이동한 벤과 루크가 만나며 배관공의 일원이란 설정이 붙었다. 성우는 David Kaye.

7.2.3.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시리즈

작중 세계관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브리타니아 공작에게 회유되는 바람에 미국 독립전쟁에 실패한다고 나온다. 여기서는 미국 독립전쟁이 아닌 워싱턴의 반란으로 나온다. 대신 영국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7.3. CF



크라이슬러 닷지 챌린저(Dodge Challenger) 광고에 등장했다. 친히 자동차를 운전해 영국군에 돌진해서 격퇴시킨다는 내용.

7.4. 기타

  • Deadliest Warrior란 프로그램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5:5로 싸워서 이겼다.
  • 1980년대 방영된 조지워싱턴, 조지워싱턴2라는 TV 미니시리즈가 있었다.[72] 조금더 최신작으로 2020년 히스토리에서 워싱턴 3편이 나왔다.[73]
  • 현재 유일하게 연방법으로 규정된 미국 1달러 초상을 바꿀 수 없는 인물이다. 즉, 초상화를 바꾸려면 연방법을 개정하는 것 밖에 없다.

8.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10px" <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808080> 파일:조지 워싱턴 투명.svg 조지 워싱턴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08080> 일생 생애 및 정치 이력
가족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 시니어 · 어머니 메리 볼 워싱턴 · 아내 마사 워싱턴
역대 선거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7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토머스 제퍼슨 · 알렉산더 해밀턴
관련 전쟁 미국 독립 전쟁,(1775~1783),
평가 평가
기타 조지 워싱턴 대학교 · 조지 워싱턴 대교 · 조지 워싱턴급 잠수함
}}}}}}}}} ||

파일:미국 국장 (원형).svg
건국의 아버지들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앤드루 애덤스 존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 토머스 애덤스
존 앨솝 에이브러햄 볼드윈 존 배니스터 조사이아 바틀렛
리처드 바셋 건닝 베드퍼드 주니어 데이비드 브렐리 에드워드 비들
존 블레어 리처드 블랜드 윌리엄 블라운트 사이먼 보름
카터 브랙스턴 제이콥 브룸 피어스 버틀러 캐럴턴의 찰스 캐럴
대니얼 캐럴 리처드 캐스웰 새뮤얼 체이스 에이브러햄 클라크
윌리엄 클링건 조지 클라이머 존 콜린스 슈테판 크레인
토머스 쿠싱 프랜시스 대나 조너선 데이턴 사일러스 딘
존 드 하트 존 디킨슨 윌리엄 헨리 드레이턴 제임스 두에인
윌리엄 듀얼 엘리퍼릿 다이 윌리엄 엘러리 윌리엄 퓨
토머스 피츠시먼스 윌리엄 플로이드 나다니엘 폴섬 벤저민 프랭클린
크리스토퍼 개즈던 조셉 갤러웨이 엘브리지 게리 니콜라스 길먼
나다니엘 고램 버튼 그윈넷 리먼 홀 알렉산더 해밀턴
존 핸콕 존 핸슨 코르넬리우스 하니트 벤저민 해리슨
존 하트 존 하비 패트릭 헨리 조셉 휴이스
토머스 헤이워드 주니어 새뮤얼 홀텐 윌리엄 후퍼 프랜시스 홉킨슨
슈테판 홉킨즈 티투스 호스머 찰스 험프리스 새뮤얼 헌팅턴
리처드 허슨 제러드 잉거솔 존 제이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존슨 윌리엄 새뮤얼 존슨 루퍼스 킹 제임스 킨제이
존 랭던 에드워드 랭워시 헨리 로렌스 프랜시스 라이트풋 리
리처드 헨리 리 프랜시스 루이스 필립 리빙스턴 윌리엄 리빙스턴
제임스 러벌 아이작 로우 토머스 린치 헨리 머천트
제임스 매디슨 존 매튜스 제임스 매켄리 토머스 매킨
아서 미들턴 헨리 미들턴 토머스 미플린 거버니어 모리스
루이스 모리스 로버트 모리스 존 모턴 토머스 넬슨 주니어
윌리엄 파카 로버트 트리트 페인 윌리엄 패터슨 에드먼드 펜들턴
존 펜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 찰스 핑크니 페이튼 랜돌프
조지 레드 조셉 리드 대니얼 로베르도 시저 로드니
조지 로스 벤저민 러시 에드워드 러틀리지 존 러틀리지
나다니엘 스커더 로저 셔먼 제임스 스미스 조너선 베이야드 스미스
리처드 스미스 리처드 돕스 스페이트 성 토머스 제니퍼의 대니얼 리처드 스톡턴
토머스 스톤 존 설리번 조지 테일러 에드워드 텔페어
매튜 손턴 매튜 틸먼 니콜라스 반 다이크 조지 월턴
존 월턴 새뮤얼 워드 조지 워싱턴 존 웬트워스 주니어
윌리엄 휘플 존 윌리엄스 윌리엄 윌리엄스 휴 윌리엄슨
제임스 윌슨 헨리 위스너 존 위더스푼 올리버 월코트
조지 위스 조지 메이슨
}}}}}}}}} ||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2014년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제국 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출처 }}}}}}}}}

파일:미국 대통령 문장.svg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d164a,#FFC224> 정당 대통령 후보 순위
<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비고
Ind 무소속 조지 워싱턴 1위
존 애덤스 당선
[ 역대 선거 | 펼치기 · 접기 ]
1789 · 1792 · 1796 · 1800 · 1804 · 1808
1812 · 1816 · 1820 · 1824 · 1828 · 1832
1836 · 1840 · 1844 · 1848 · 1852 · 1856
1860 · 1864 · 1868 · 1872 · 1876 · 1880
1884 · 1888 · 1892 · 1896 · 1900 · 1904
1908 · 1912 · 1916 · 1920 · 1924 · 1928
1932 · 1936 · 1940 · 1944 · 1948 · 1952
1956 · 1960 · 1964 · 1968 · 1972 · 1976
1980 · 1984 · 1988 · 1992 · 1996 · 2000
2004 · 2008 · 2012 · 2016 · 2020 · 2024
}}}}}}}}}}}}

{{{#!wiki style="margin: 0 -1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2005년 AOL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로널드 레이건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터 킹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6위 7위 8위 9위 10위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엘비스 프레슬리 오프라 윈프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빌리 그레이엄 토머스 제퍼슨 월트 디즈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머스 에디슨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존 F. 케네디 밥 호프 빌 게이츠 엘리너 루스벨트 랜스 암스트롱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무하마드 알리 로자 파크스 라이트 형제 헨리 포드 닐 암스트롱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파일:미국 국방부 휘장.svg
미합중국군 원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대원수
General of the Armies / Admiral of the Navy
육군
Army
조지 워싱턴
율리시스 S. 그랜트
존 조지프 퍼싱
해군
Navy
조지 듀이
원수
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General of the Air Force
육군
Army
윌리엄 테쿰세 셔먼
필립 셰리든
조지 C. 마셜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헨리 아놀드
오마 브래들리
해군
Navy
윌리엄 리히
어니스트 킹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홀시
공군
Air Force
헨리 아놀드
*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Mt. Rushmore
러시모어 산
<rowcolor=#FFFFFF> 초대 미국 대통령 3대 미국 대통령 26대 미국 대통령 16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1] 측량사 면허(a surveyor's license)를 받았으나 수업을 듣지는 않았다. [2] 표면적으로는 성공회 신자이나 많은 연구가들이 계몽주의에 기반한 이신론을 믿었을 것이라고 추정 중이다. 실제 당대 이신론을 표방한 프리메이슨 로지의 정식 마스터 메이슨이었으며, 본인의 기록 및 저서에도 '하느님'이라는 표현과 일반적인 기독교에서의 신앙관보다도 '최고의 설계자'라는 당대 이신론자나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즐겨쓰던 용어를 사용하였다. [3] 실제 정치 성향은 민주공화주의자보다는 연방주의자에 좀 더 가까웠다고 추정된다. 재임 시절 뭘 했다기보단 퇴임하면서 본인이 상대적으로 주보단 미국 연방을 중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 [4] 생전의 최종 계급은 중장이였으나 사후 대원수로 추존. [5] 참고로 세계 최초의 의원내각제 수상은 영국 총리를 지낸 로버트 월폴이다. [6] 그래서 미드 존 애덤스를 보면, 존 애덤스가 " 술집에도 프레지던트(=사장)는 있잖소"라며 'President'라는 용어가 일국의 지도자 칭호로는 너무 평범하다는 투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7] 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서명하면서 "크게 써야 영국 조지 3세가 돋보기 없이도 이름을 볼 수 있지 않겠소?"하면서 큰 글씨로 서명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존 핸콕이란 이름 자체가 '자필 서명(autograph)'이란 뜻으로 쓰인다. 가령 'Please put your John Hancock'이라고 하면 '여기 서명 좀 해 주세요'라는 의미다. [8] 핸콕이 두 번 했다. 첫번째엔 2년 5개월, 다음번엔 7개월. [9] 2001년 미국 상원에서는 부시와 대선에서 붙었다가 낙선한 앨 고어 미국 부통령으로서 겸임하고 있던 상원의 'President' 자격으로 직접 부시의 'President' 당선 확정 선언을 하게 되는 장면이 연출되며 한동안 놀림거리가 되었고, 반대로 1989년 미 상원에서는 1988년 대선 결과에 따라 아버지 부시가 상원의 'President'로서 본인의 'President' 당선 확정 선언을 하는 장면 또한 연출된 바 있다. 덧붙이자면 미국 하원 의장은 'Speaker'로 불리므로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10] 이 당시 이름은 웨싱턴(Wessyington). 오랫동안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있다가 1974년 선더랜드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1] 잉글랜드 정복 당시의 주체가 노르망디 출신의 노르만족이라 당시의 잉글랜드 지배계층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12] 당대 버지니아 식민지 최고의 갑부였던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Daniel Parke Custis)와 결혼했는데 1757년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남편의 재산이었던 17,000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와 300명에 달하는 노예를 상속받았다. [13] 결혼 후 워싱턴의 토지는 22,000 에이커가 되었다(부인 측 토지가 1만 7천 에이커). 워싱턴 자신의 상속재산 포함이다. 조지 워싱턴의 재산을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5억 8,700만 달러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도널드 트럼프에 이어 두번째로 재산이 많은 대통령이다. [14] 딱히 관련이 있다고 하긴 뭐하지만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역시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했다. [15] 워싱턴이 10명의 사생아를 두었다는 낭설이 있는데, 근거가 없다. [16] 마사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존 파크 커스티스 위로 아들인 대니얼과 프랜시스, 2명을 더 낳았으나 둘 다 마사가 워싱턴과 재혼하기 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17] 의붓 아버지인 워싱턴을 따라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으나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직후 병으로 사망했다. [18] 물론 전략적으론 원정군인 영국군에 불리한 소모전 성격은 있었지만, 이것도 아메리카 땅이 넓어서 가능했지 아니었음 진작에 영토 다 먹혔을 것이다. [19]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모습은 베트남 전쟁 시기 호치민이나 보응우옌잡에게 당한 미군의 모습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20] 조지 워싱턴은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와 같은 이름이었는데, 독립 전쟁 후반 미국의 독립이 거의 확정된 상태에서 "만일 미국이 독립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이후 워싱턴은 어떤 행보를 보일까"에 대한 얘기가 영국에서 나왔는데 궁정 화가이자 미국 출신인 벤저민 웨스트가 "미련 없이 총사령관 자리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얘기하자 이 말을 들은 조지 3세"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묘한 예언을 남겼다. [21] 당시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행사하며 투표하고 싶은 2명에게 각각 1표씩 투표해서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방식이었는데 워싱턴은 모든 선거인단에게서 1표씩 받았다. 득표율은 50%지만 모든 선거인단이 워싱턴에게 표를 던졌으므로 사실상 만장일치이다. 더 대단한 점은 선거인단이 아닌 유권자 투표에서도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는 점. 재선 때도 그랬는데, 다만 부통령은 존 애덤스와 조지 클린턴이 경쟁을 통해 선출되었다. 단, 1820년 제임스 먼로의 재선 선거에서는 후보자가 한 명뿐이었는데, 선거인단 선거 지지율은 100%였지만 존 퀸시 애덤스를 찍은 반란표로 선거인단 만장일치는 없었다(228/231). [22] 비록 워싱턴은 대통령 재직 시절 "폐하"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게 하고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는 등 국왕과 다를 바 없는 언행을 했지만, 워싱턴은 단순히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넘어서서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역사적 전례가 없는 직책을 처음 떠맡았으니 참고할 만한 사례는 없을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을 " 투표로 뽑는 국왕" 비슷한 개념으로 시작하게 된 것. 그리고 그의 이후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단지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유럽 황가를 참조했을 뿐 제왕적인 행보는 전혀 밟지 않았다. [23] 미국 정치인들이 바보도 아니고 단순한 탐욕 때문에 합법화한 것은 아니다. 불법이던 시절에도 로비는 있었으며 오히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는 로비가 더 심해서 이럴바에는 로비를 합법화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대신 시민의 눈을 믿고 투표장에서 심판하게 하겠다는 것이 로비 합법화의 근본 취지였다. 하지만 미국인의 정치 감시 능력은 미국 정치인이 생각한 것보다 더 낮았다.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실행하는 선거를 평범한 시민의 눈만으로 공정하게 분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24] 다만 워싱턴은 미국 건국 전에 이미 죽은 의붓아들을 제외하면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25] 권력을 버리고 낙향한 선례로 보면 로마 황제 중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있는데, 인민에 의해 투표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아니고 제위를 물려주는 방식으로 권력을 이양했기 때문인지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이후의 황제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26] 3선을 시도한 대통령은 율리시스 S. 그랜트(3선 준비 중 스스로 포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3선을 위해 공화당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분당까지 강행하며 나갔지만 우드로 윌슨에게 패배해 목적을 이루지 못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관례를 깨고 4연임)의 3명 뿐이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실제로 3선 이상을 성공하고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장기집권을 마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자 그때서야 대통령 3선 금지가 부랴부랴 헌법에 명문화되었다. [27] 명칭은 저렇지만 워싱턴은 이를 직접 연설하지는 않았고 1796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에 내용이 발표되었다. [28] 나중에 미국 7대 전쟁장관이 된다. 음모에 대한 처벌은 받지 않았다. [29] 당시 애덤스는 해밀턴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워싱턴이 간곡히 부탁을 한 끝에 해밀턴이 장교로 임명될 수 있었다. [30] 당시 서양에서는 그때까지도 병이 나면 무작정 피를 뽑는 '방혈 치료'가 유행했다. 현대인이라면 이런 치료법이 황당해 보이겠지만, 그 시대에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체내 혈액의 불균형이 각종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거나 병으로 더러워진 피를 빼내고 깨끗한 새 피가 만들어지면 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이런 잘못된 처방으로 인해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다. [31] 때문에 근방에 배치된 남군과 북군 병사들은 때때로 무기를 내려놓고 마운트버넌을 방문하기도 했다. [32] 독립 전쟁 당시 기병대를 지휘한 참전 용사로 독립 이후 제9대 버지니아 주지사를 맡았다. 로버트 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33] 자치통감에 나오는 말이다. [34] 청나라 말기의 경세 사상가로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오르지 못할 왕좌는 감히 쳐다보지도 않는 게 미덕이었다. 선양 항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설령 기존 권력을 찬탈하고 새 군주로 추대받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도 '나는 관심(혹은 능력)이 없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밀어붙인다면 별 수 없이…' 와 같은 정치적 쇼맨쉽은 빼먹지 않는 게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비혈연자로의 정권 교체는 곧 구권력 세력에 대한 대숙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보통이라 더더욱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는 권력자가 드물었다. 그래서 왕이 되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워싱턴이 대통령을 4년+4년만 하고 쿨하게 손을 떼버렸다는 얘기를 들은 근대 유학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모양. 서계여 외에도 동아시아의 근대 유학자들은 근대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에 대해서 의외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례가 많다. [35] 서계여의 지인들은 이 글을 새긴 비문을 미국에 보냈고, 당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이에 대한 답례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서계여에게 선물했다. 이 비문은 워싱턴 기념탑에 있다. [36] 7년 전쟁 문서에도 소개되어 있는 펜실베이니아 출신 궁정 화가 벤저민 웨스트에게 미국이 독립을 이룬 이후에 워싱턴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고, 웨스트는 이에 그는 자기 농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37] 실제로 조지 3세의 말처럼 조지 워싱턴의 이름은 인류사에 보기 드문 권력을 스스로 넘겨준 특별한 인간으로 역사에 남았고 그의 이름을 딴 수많은 도시들이 건설되며 위대한 인간으로 존경받고 있다. [38] 이후에 애덤스 부자를 제외하고 7대 앤드루 잭슨까지는 모두 8년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다. 다만 그 이후로는 8년 임기를 원만하게 보낸 대통령은 18대 율리시스 S. 그랜트, 34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44대 버락 오바마 이 3명 뿐이다. 자세한 것은 율리시스 S. 그랜트 기타 문단으로. [39] 보통 신생국가의 지도자들은 국가 안정을 명분으로 다연임으로 독재자가 되는 사례가 많으며 대한민국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적 평가 중 하나가 이기붕과 함께 독재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건국되던 시기에는 각 유럽국가를 비롯해 타 대륙국가들은 국왕과 귀족이 있는 왕정국가였고 워싱턴도 말이 대통령이지 상당 부분은 이런 왕정국가의 국왕에 가까운 형태로 나라를 운영했다. 만약 조지 워싱턴이 마음만 먹었다면 대통령이 아니라 '워싱턴 왕가'를 제창해 영구 집권하는 지도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고 실제로 재선 이후 임기 말, 측근들이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후보가 여러번 출마가 가능하도록 건의를 했지만, 조지 워싱턴은 그러면 민주주의가 깨진다며 거절하고 그대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40] 링컨이 분열된 조국을 하나로 만들어 주들의 연합이 아닌 연방으로 만들고 흑인 인권에 대한 명시적 한계를 해제하며 세계 최강대국으로 거듭날 미국의 근본을 설계했다면, 워싱턴은 미국을 독립시킨 총사령관이었고 당연히 왕이 있는 게 정상인 세계에서 군부의 지지까지 받았으면서도 왕의 불필요성을 보여주며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이상적으로 수행하여 민주주의를 역사에 등장시켰다. 이는 사실상 현대 미국의 핵심을 세우고 다진 두 대통령의 평가가 내려가지 않는 절대적인 이유들이다. [41] 그나마 한국은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과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독재 국가로 남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고, 미국과 같은 좋은 선례를 얻지 못한 나머지 많은 대통령제 국가들은 호칭만 대통령인 왕정 독재를 향해 달려가게 되기에 정치학적으로 대통령제는 미국 등 일부만 예외적으로 성공한 제도이며 일반적으로는 실패 확률이 높은 제도라고 평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42] 현재 제대로 된 민주주의 선진국 중, 대통령제로 돌아가는 나라는 미국, 프랑스, 대한민국3개국이다. 프랑스 마저도 처음 대통령제를 한 후에 나폴레옹 대통령이 제국으로 다시 전환해버리고, 그 후에도 내각제, 알제리 군사 쿠데타 등을 전전하다 20세기 중반 들어서야 현재의 대통령제(명목상 이원집정부제이지만 오래전 몇 차례 말고는 동거정부가 안 나와서 사실상 대통령제가 된 지 오래이다.)가 안착했다. 한국도 3차례의 군사독재 정권을 겪고 중간에 내각제로 잠시 돌아갔던 시절도 있었다. [43] 오히려 인도, 보츠와나, 동티모르가 예외일 정도. 보츠와나의 세레체 카마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대단히 뛰어난 자질의 지도자였으나 그런 그조차 (국민의 자발적인 뜻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4년 장기집권은 포기하지는 못했다. [44] 그래서 워싱턴에게 충성하는 노예들도 많았지만 반항하거나 도망가는 노예들도 있었다. [45] 워싱턴 사후 모든 노예를 풀어주면 자기가 물려받을 유산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아내의 반발이 있었다. 또 워싱턴 가의 노예는 워싱턴 외 부인 마사 소유인 노예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워싱턴 노예만 풀어주면 마사측 노예와 결혼한 노예 가족들은 생이별을 해야 될 판국이라 유보한 것도 있었다. [46] 이 생각은 남부에서 면화 농업이 번성하기 전까지는 얼추 맞았으나, 면화 농업이 번성하자 노예제는 오히려 강화된다. [47] 예를 들어 노예제가 자본주의의 빈부격차에 의한 갈등을 완화시킨다(노예니까 가난해도 문제없음)/서로 다른 두 인종이 공존할 수 있음(노예에겐 권리가 없으니까)/노예노동은 국익에 유익함/노예제는 적극적 선(positive good이다) 등등… 물론 인권 관점, 실질적인 관점에서도 맞는 소리는 없었다. 이런식의 괴상한 논리는 이전부터 있어서 약 반세기에서 한세기 전 사람인 윌리엄 스넬그레이브는 노예제가 전쟁 포로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전쟁포로를 죽이는 대신 부려먹던 게 노예제의 시초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천년 전이었다면'.) 팔려간 노예는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주인은 그들을 돌보는 데 큰 관심을 쏟으며 연체자의 노예화를 허용하여 상인들에게 이익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노예제 옹호론자들의 논리는 훗날 거꾸로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그쪽 말대로라면 지금쯤 노예제는 자연스럽게 없어졌거나 서서히 사라져야 하고 노예들도 사실상 자유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왜 아직까지도 그런 모습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가?'라고 주장하던 논리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48] 노예제도를 사수하기 위해 종교를 악용하기도 했는데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핀이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친 것을 알고 고민에 빠지는데 그 이유가 뭔고하니 도망가는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핀은 모범생보다는 부랑아에 가까움에도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해야 도망치는 노예를 도울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종교를 악용했는지 알 수 있다(참고로 허클베리는 교회에서 자기가 한 행동이 옳았는지 예수님에게 기도하다가 '알 게 뭐야. 내가 지옥 가고 말지 뭐' 하며 감싸줬다). 존 브라운 같은 노예제 폐지론자에게 종교적 신념이 노예제 폐지론에 영향을 미쳤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49]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초상화이다. [50] 한국 천원권 지폐처럼 물가 사정상 거래의 주역은 안 되어 잔돈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다. 흔히 볼 수 있는 1달러 지폐들은 갓 찍어낸 것이 아니면 대부분 지폐는 구겨져 있거나 기괴한 낙서가 적혀져 있거나 심지어는 지폐를 말아서 약을 빤다. 이래저래 험한 꼴 많이 보는 지폐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10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이유 하나로 미국의 경제 패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 것과 대조적이다. [51] 천연두 치료를 위해 염화 수은을 복용한 것이 한 몫했다는 가설도 있다. [52] 존 그린우드는 워싱턴의 마지막 치아를 워싱턴에게서 선물 받았다. [53] 물론 남의 치아를 강제로 뽑아서 틀니로 만든건 아니고, 돈 주고 사온거다. 중세 시대때 부터 서양에선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치아를 뽑아 파는 일이 많았다. [54] 연설을 90초만에 중단한 일도 있었다. [55] 백악관은 아니다. 워싱턴 D.C.는 1791년에 조지 워싱턴의 성씨를 따 건설되었으나 백악관은 워싱턴 재임기에는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6] 밀가루 대신 거친 옥수수가루 콘밀을(Corn meal) 이용해 만든 팬케이크다. [57] 보통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작은 잔에 담은 차 두잔과 서너개의 호케이크를 아침으로 먹었다. 원래도 호케이크를 좋아했지만, 서술했듯 치아 상태가 매우 나빠지자 부드러운 음식을 많이 찾게되며 호케이크를 더욱 많이 먹게되었다. [58] 훗날 미국 초대 육군 장관이 된다 [59]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불륜설의 주인공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유명하다. 제퍼슨의 경우 20세기 후반까지는 음모론에 불과했지만, DNA 분석이 도입되며 정말 혈연관계라는 것이 밝혀져, 현재는 정설로 취급되고 있다. [60] 결국 로렌스는 결핵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인 1752년 사망한다. [61] Mason Locke Weems, 1759~1825 [62] 이 웜스는 어쌔신 크리드 3에서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며 매우 영악한 쥐새끼라고 까이는데, 코너가 워싱턴 암살 기도에 대해 말하자 "워싱턴은 주피터의 환생이자 이 나라를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국가로 키워낼 인물이니 죽어선 안 된다"라며 허풍을 떨어댄다. [63] 줄기와 잎 쪽에 독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지식이 없었으니 그냥 토마토 열매를 썼을 것이다. [64] 참고로 토마토에 독이 들었다는 낭설은 한동안 유럽에서 꽤 널리 퍼졌는데 이는 토마토와 외형이 유사한 벨라돈나의 열매가 독이 있었기 때문. [65] 애초에 금수저 출신임을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재임 기간 중에 워싱턴이 비자금으로 착복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다. [66]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라 다음 대통령인 애덤스가 당선될 때부터 기록하는 것이다. [67] 특히 링컨은 생일이 2월 12일로 워싱턴의 생일과도 가까운 일자에 태어났다. [68] 이 사람은 독립 전쟁 당시 민병대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하기도 했다. [69] 정확히는 세명이었지만, 첫째가 유아기에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두 이었다. [70] 한국에서는 해군 장교로 나오는데, Colonel의 오역이다. [71] 실제로 제퍼슨은 2달러 지폐에도 그려져 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워싱턴보다 액면가가 높지만, 미국에서는 2달러 지폐를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72] 조지워싱턴 (미니시리즈) [73] 워싱턴 (미니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