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5:30:28

제시 오언스

파일:오륜기(여백X)_흰색.svg 올림픽 육상 100m 남자 우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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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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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제시 오언스[1]
Jesse Owens
파일:Jesse Owens.jfif.jpg
본명 제임스 클리블랜드 오언스
James Cleveland Owens
출생 1913년 9월 12일
미국 앨라배마 주 오크빌
사망 1980년 3월 31일 (향년 66세)
미국 애리조나 주 투손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육상선수, 마라토너, 인권운동가
신체 180cm, 75kg

1. 개요2. 수상 기록3. 생애
3.1. 어린 시절3.2.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시절3.3.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45분3.4.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3.5. 올림픽 후일담3.6. 올림픽 이후의 삶
3.6.1. 흑인 민권 운동
3.7. 죽음
4. 말말말5. 유산6. 매체

[clearfix]

1. 개요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 마라토너 겸 육상선수, 흑인 민권 운동가. 육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육상선수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4관왕의 주인공이다.

단거리 달리기와 멀리뛰기를 주력으로 했으며, 1935년 미시건 주 앤아버에서 열린 빅 10 트랙 대회에서 불과 45분만에 3개의 세계 기록과 1개의 세계 기록 동률을 기록하면서 스포츠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45분(the greatest 45 minutes ever in sport)” 이라고 불린 업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다음 해 1936년 독일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 100m, 멀리뛰기, 200m, 4×100m 계주에서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육상계의 전설이 되었다. 당시 올림픽에서 가장 화제가 된 선수였으며, 개최지 개최지의 지도자가 지도자인지라 추후 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으로 인해 홀로 히틀러의 아리아인 우월주의 신화를 무너뜨린 선수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2. 수상 기록

올림픽
<colcolor=#000> 금메달 1936 베를린 100m
금메달 1936 베를린 200m
금메달 1936 베를린 400m 계주
금메달 1936 베를린 멀리뛰기

3. 생애

3.1. 어린 시절

제시 오언스는 1913년 9월 12일 앨라바마 오크빌에서 소작농인 아버지 헨리 클리블랜드 오언스와 어머니 메리 엠마 피츠제럴드 사이 7남 3녀 집안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그 지역과 시대가 시대인지라 불과 그의 할아버지 세대까지도 노예였다고.[2] 오언스가 9세 때 그의 가족은 당시 150만 아프리카계가 북부로 진출하던 시절인 대이주(Great Migration)에 휩쓸려 북부 도시인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사했다. 상기된 입학 명부 이야기도 이때. 그 후로 평생 제시 오언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소년기의 오언스는 아버지와 형이 제철소에서 일하는 동안 식료품 배달이나 화물 적재, 신발 수리 등의 잡일을 했으며 그 와중에 본인이 달리기에 엄청난 소질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게다가 그의 은사인 페어마운트 중학교의 육상 코치 찰스 라일리는 방과 후 일을 해야만 하는 그의 집안 사정을 알고 수업 전에 육상 트레이닝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오언스는 결혼도 그의 달리기만큼 빠르게 했는데 (물론 당시 시대상 흑인들은 일찌감치 결혼하곤 했지만), 그가 19살 때인 1932년 부인 루스 솔로몬과의 사이에서 첫째 딸 글로리아를 낳아 아버지가 되었다. 결혼식은 1935년에 올려 두 딸을 더 낳고, 1980년 오언스가 사망할 때까지 쭉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루스 솔로몬 오언스 여사는 2001년 타계.

그리고 1933년 고등학교에 들어간 오언스는 그때부터 전국구 레벨의 유망주로 발돋움한다. 시카고의 전국 고등학교 선수권 대회에서 100야드(91미터) 스프린트에서 9.4초를 기록했고, 멀리뛰기 7.56미터를 뛰었는데 이건 둘 다 당시 세계 기록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의 실력을 주목한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스카우팅된다.

3.2.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시절

오언스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입학했고, 다행히도 그의 아버지도 직장을 구해 가족을 부양할 염려 없이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애칭인 “벅아이 뷸릿”(대략 오하이오 특급 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될 듯)으로 불리던 시절이었고, 유능한 육상 코치였던 래리 스나이더의 지도하에 1935-36년동안 4번씩 총 8번의 NCA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놀랍게도 70년 후인 2006년까지 NCAA 4개의 금메달은 오언스가 유일했다. 재비어 카터가 2006년에 4개를 획득했지만, 계주 메달도 포함한 수치.)

놀라운 기록을 쓰고도 오언스 역시 흑인에게 만연한 인종차별을 피해갈 수 없었는데, 백인 전용기숙사를 사용할 수 없었고, 대학 내 팀과 함께 이동할 때도 따로 흑인 전용 식당이나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직장을 얻었다 해도 집안의 가난이 해결된 건 아니었던지라 장학금을 받을 수 없던 오언스는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3.3.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45분

1935년 5월 25일은 제시 오언스가 육상에서 4개의 세계 기록을 세운 날로 기억된다.

오언스는 미시간 주 앤아버의 페리 필드에서 열린 빅 10 대회에서 45분만에 세계기록 4개를 갈아치웠다. 그가 달성한 기록들을 보자면…
100야드(91m) 달리기 9.4초
멀리뛰기 8.13m [3]
220야드(201.2m) 달리기 20.3초
220야드(201.2m) 허들 22.6초 [4]

220야드(201.2m)에서의 기록은 당시 둘 다 세계기록이었으며, 이 기준으로는 세계기록 6개를 갈아치운 셈이 된다(…). 괜히 전설적인 하루라고 불리는 게 아닌 셈.

3.4.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그리고 1936년 대망의 베를린 하계 올림픽이 다가왔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올림픽을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선전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고, 실제로도 당시 나치즘은 현재처럼 완전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인종차별주의를 기반으로 한 이념이라는 건 당시 미국인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NAACP(전국 유색인종 발전 협회)의 비서관이었던 월터 프랜시스 화이트는 오언스에게 편지를 썼지만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오언스가 참가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려 했다는데, 자국의 백인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타국의 인종차별 쇼에서 비웃음거리가 될 것을 걱정해서였다.

실제로도 그 이유로 올림픽 보이콧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꽤나 있었다. 편지를 보내진않았지만, 오언스와 NAACP 운동가들은 "차별을 받고 있는 독일의 소수 민족이 있다면, 미국은 1936년 올림픽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미국 체육계에서 가장 강력한 위상을 가진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 에버리 브룬디지가 NAACP를 매국노들이라며 언플을 했고, 미국인들 역시 올림픽에서 자국의 활약을 보고 싶어했기에 결국 보이콧은 흐지부지되었다.

1936년, 오언스와 미국 팀 동료들은 SS 맨해튼을 타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도착한 뒤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4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동료 미국 단거리 육상선수 제임스 루벨에 의하면, 올림픽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어린 소녀들이 “제시가 누구에요” 라면서 달려들었다고. 이미 오언스의 명성은 그가 모르는 동안에도 퍼져 있었다.

게다가 대회 직전 아디다스의 창립자가 올림픽 선수촌의 오언스를 방문하여 게브뤼더 슬러 슈파브릭 신발을 신도록 설득했다. 이것 역시 유색인종 스포츠 역사에 남을 일이었는데, 아프리카계 운동선수가 받은 첫 스폰서쉽이었던 것. 후술하겠지만, 나치 독일이라 해도 오히려 미국보다 이런 면에서는 인종차별이 덜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아리아인과 유대/로마인사이의 황백흑인종을 가리지않고 공평하게 차별해서 그렇다 카더라

오언스는 먼저 육상의 하이라이트인 100미터 달리기에 출전했다.

히틀러가 보고 있던 앞에서 8월 3일 오언스는 10.3초의 기록으로 100미터 달리기에서 팀 동료이자 대학 친구인 랄프 멧칼프를 0.1초 차이로 이겨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0.3초는 세계 타이 기록.

그리고 다음날 멀리뛰기에서도 8.06미터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나중에 그는 경쟁자였던 독일의 루츠 롱[5]의 조언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오언스의 점프력이라면 굳이 점프 위치에 극도로 신경쓰지 않고도 우승이 가능하다는 조언이었다고. 그리고 그 둘은 히틀러의 앞에서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축하를 나눴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오언스는 200m 달리기에서도 20.7초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땄다. 이어 400m 계주에서는 39.8초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해버려 베를린 올림픽 4관왕이 됐다.

워낙 스포츠 역사상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보니 히틀러와의 악수 이야기가 유명하다. 인종차별주의자였던 히틀러가 4관왕인 제시 오언스와 악수를 거부했다는 썰이 그것.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로 브렌다 하우겐이 글쓰고 이남석이 옮겨 미래엔의 아이세움에서 출판한 '아이세움 역사 인물 12 히틀러'편에서 히틀러는 발두어 폰 시라흐에게 미국인들은 깜둥이가 금메달 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으며 독일 선수들과 악수했지만 오언스와는 악수하지도 않았다고 서술되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전후 프로파간다에 이용하기 위해 각색된 것으로, 8월 2일 육상종목 첫째 날에 히틀러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우승자들을 로열박스로 초청하여 악수를 나눴다. 문제는 다음날 IOC 위원장인 바이유라뚜르 백작이 일국의 국가원수가 선수들을 사적으로 초청하여 축하하는 것은 의정에 위반된다고 한 것. 당시 전 세계의 시선을 신경 쓰던 히틀러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8월 3일과 그 이후 우승자들은 아예 히틀러와 악수할 기회가 없었다.

1970년도에 출간된 오언스의 자서전에서는 오히려 히틀러는 오언스가 VIP석 아래를 지날 때 자리에서 일어나 지나가던 오언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오언스는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고. 마찬가지로 손기정 옹의 일화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이 일화가 사실에 근접할 듯하다. 다만 알베르트 슈페어의 말에 의하면 유색인종들이 계속 우승을 하자 히틀러가 짜증을 내긴 했다는 듯.

여하튼 악수를 거부한 히틀러 썰은 독일과 나치당이 완전히 적국으로 바뀐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프로파간다로 이용하기 위해 각색된 측면이 있다. 오언스 스스로도 이 일화가 스포츠 역사에 남을 일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한 듯 하고. 본인 회고에 따르면 자신을 냉대한 건 오히려 루스벨트였다고 한다. 히틀러와 달리 루스벨트는 자신을 본 체도 하지 않았다고.[6] 다만 축하를 받긴 했어도 오언스 본인은 독재자였던 히틀러에 대한 감정이 좋지는 않았는지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1830년, 내 조상들은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던 미국 땅에 노예로 팔려왔다.
1936년, 그리고 나는 다른 민족이 모두 자신과 게르만 족의 소유라 믿는 히틀러와 싸워 이겼다."

3.5. 올림픽 후일담

육상역사의 영웅이 된 제시 오언스는 '올림픽 영웅'으로 미국에 돌아왔고, 오언스만을 위한 환영 리셉션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렸다. 다만 그가 객실로 이동하려는 순간 백인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막아섰으며, 오언스는 화물용 승강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오언스에게 축전을 보내지 않았고, 올림픽 우승자의 특권 중 하나인 백악관 초청도 제외되었다.

3.6. 올림픽 이후의 삶

우승 이후 미국 올림픽 팀 전체가 스웨덴에 초청받았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던 오언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이런 초청을 언급하며 조금 더 나은 대우를 요구했지만 미국 체육회에서 돌아온 건 분노와 오언스의 아마추어 자격 철회였다. 오언스는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파벌 간의 이익 다툼에 본인이 희생되었다고 회상한다. 사실 이해는 가는 것이, 많은 유색인종 육상 선수들이 장학금을 받지 못해 결국 대학을 끝마치지 못하고 다시 잡일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기 때문.

4개의 메달과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오언스는 일자리를 찾기도 버거웠고, 주유소, 운동장 청소부 등의 일 뿐만이 아니라 돈을 받고 말을 상대로 달리는 일까지 하곤 했다. 아마추어 육상계에서 제명당한 때문에 상업적인 제안 등이 다 사라졌으며, 그는 심지어 12인조 재즈 밴드에서도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여담으로 남자 육상 200m 달리기에서 제시 오언스 다음으로 골인한 은메달리스트이자 20세기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친형인 매튜 로빈슨은 올림픽 이후에도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거리의 청소부로 일을 했다. 어느 날, 미국 육상 국가대표팀의 자켓을 입고 청소를 하는 로빈슨을 본 백인들의 신고로 경찰서에 잡혀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들이다.

그 후 뉴욕 메츠의 러닝코치로 고용되기도 했지만 결국 파산을 신청했다. 다행히도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모습에 여러 스포츠계의 도움이 들어왔고, 정부는 오언스를 미국의 친선 스포츠 대사로 임명해 말년은 조금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는 흑인 권익을 위해 힘썼다.

3.6.1. 흑인 민권 운동

흑인 민권 운동을 했다. NAACP와의 활동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는 공화당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200미터 달리기 금메달, 동메달을 수상한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시상식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로 시상대에서 검은 장갑을 쓴 사건(통칭 Black Power Salute)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검은 주먹은 무의미한 상징입니다. 주먹을 열면, 빈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검은 주먹이 유일하게 의미있을 때는 돈이 그 안에 들어있을 때 뿐이죠. 그 때만 힘이 있습니다."

다만 4년 후, 1972년에 출판한 책 I Have Changed에서 그 견해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나는 싸우는 것이 흑인의 인권에 관해 유일한 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70년에 싸우지 않은 흑인은 장님이거나 겁쟁이였습니다."

3.7. 죽음

“제시 오언스, 1936년 올림픽 챔피언”
-묘비명-

오언스는 32세부터 35년동안 담배를 하루 한 갑씩 피워대던 골초였다. 그리고 1979년에 12월부터 결국 폐암으로 투병하기 시작했는데, 불과 3개월 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시카고의 오크우즈 묘지에 묻혔고, 묘비에는 “제시 오언스, 1936년 올림픽 챔피언” 이라고 새겨졌다.

당시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으로 인해 오언스와 날을 세웠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사후 오언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4. 말말말

어떤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자 올림픽 선수 선발에 있어서 우사인 볼트 마이클 펠프스를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제시 오웬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거나 올림픽 가치를 의인화한 사람은 거의 없다.
올림픽 #

TNT 스포츠 기자 “역대 최고의 스포츠 선수는 누구인가요?“
조세 무리뉴 “제시 오언스”
조세 무리뉴의 20질문답 인터뷰에서 #

5. 유산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 중 하나지만, 다른 상징들인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비교하면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여담으로 1936 베를린 올림픽 육상 200m에서 제시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이 재키 로빈슨의 형인 매튜 로빈슨이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오언스가 썼던 기숙사는 당시 그의 사진과 히틀러와 악수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팬의 편지(게슈타포가 가로챈)가 있는 박물관으로 복원되었다.

2016년에는 오언스와 18명의 흑인 선수들의 1936년 올림픽 출전 이야기가 "올림픽의 명예, 미국의 편견"(Olympic Pride, American Prejudice)으로 영상화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에서 유래한 제목이다.

그의 이름을 딴 제시 오언스 상(Jesse Owens Award)은 그 해 최고의 육상 선수에게 주어지는 미국 육상 최고의 상이다.

오언스는 ESPN에 의해 20세기의 6번째로 위대한 북미 운동선수이자 육상계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랭크되었다. BBC에서도 1999년 기준 세기의 스포츠 인물 후보 6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6. 매체

  • 겟 아웃: 로즈 아미티지의 조부가 1936 베를린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 예선대회에서 흑인 육상 역사의 신화인 그에게 패배했다는 설정이다.


[1] 제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제임스 클리브랜드 오언스는 제임스의 J와 클리브랜드의 C를 딴 JC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집에서도, 친구들도 그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JC 오언스라고 불렀다. 이후 학교에 입학할 때, 학교 선생이 오언스의 이름을 묻자 늘 JC로 불리던 오언스는 JC로 대답을 하였으나 선생이 Jesse로 알아듣고 제시라고 입학명부에 기록해 버린 것(...). [2] 현재도 앨라배마주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편이고, 주기조차도 남부연합기의 십자가를 색만 빨갛게 한 깃발을 쓴다. [3] 무려 25년동안 깨지지 않는다. [4] 23초를 깬 첫번째 인간으로 기록되었다. [5] 이후 시칠리아에서 전사한다. 오언스는 전쟁 이후 롱의 아들 카를(애칭은 카이)을 만나기도 했다. [6] 이랬던 루스벨트는 정작 4년 후 미군 최초의 흑인 전투조종사 부대로 유명한 제332전투비행단을 창설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