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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4년 10월 15일 ([age(1944-10-15)]세) | ||
알바니아 왕국 비시돌 | |||
재임기간 | 제2대 알바니아 제4공화국 대통령 | ||
1992년 4월 9일 ~ 1997년 7월 24일 | |||
제32대 알바니아 총리 | |||
2005년 9월 11일 ~ 2013년 9월 15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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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라마 베리샤 母: 셰케라 베리샤 |
|
배우자 | 리리 라마즈 | ||
자녀 | 2명 | ||
학력 | 티라나 대학교 ( 의학 / 박사) | ||
종교 | 미상 | ||
소속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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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니아 제4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알바니아를 공산주의 체제에서 해방시킨 알바니아 제4공화국의 국부'이자 ' 희대의 경제 정책으로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은 타락한 독재자'라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인물이다.2. 생애
2.1. 젊었을 적
알바니아 북부의 비시돌이라는 마을에서 무슬림[1] 부모의 아들로 태어난 후 양을 치면서 살았다. 티라나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이후[2] 1980~1990년 심장학 교수로도 활동했고, 티라나 종합병원에서 심장병 전문의로, 근무한 이력이 있으며, 그의 혈역학 연구는 유럽 기준으로도 발군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베리샤는 의학부의 당 비서이자 당시 알바니아의 독재자였던 엔베르 호자와 공산당 고위층들의 심장병 주치의이기도 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의학 연구 위원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89년에는 티라나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베리샤의 젊은 시절,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와 알바니아 노동당의 1당 독재 체제였고, 베리샤도 노동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노동당에 입당, 노동당의 변화를 위한 토론 포럼에서 활동하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정치에 몸 담은 적이 있는 엘리트 의사로만 보였다.2.2. 민주화 운동
하지만 호자의 사후 알바니아도 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베리샤도 여기에 가담하면서 노동당과 틀어지게 된다.[3] 베리샤는 당시 알바니아 작가 연맹 신문에다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남은 장벽을 없애고, 알바니아인이 국내와 해외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알바니아가 고립주의적 외교 정책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으며[4], 1990년 8월 라미즈 알리아 서기장이 소집한 국가 지식인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알바니아 노동당에 노동당이 권력의 패권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 공산주의 헌법의 제3조를 폐지하고, 인권 헌장을 인정하고,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초안하고, 국가 내의 모든 스탈린 기념물을 철거할 것을 촉구했고, 신문에다가 알리아의 개혁이 국가 내부의 불안을 악화시키는 데만 기여한 '화장품 개혁'이라고 주장하며 정치적 다원주의 없이는 알바니아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이후 1990년 12월 12일 알바니아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중도우파, 민주화 인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1년 2월 민주당의 첫 번째 전국 대회에서 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91년 3월 첫 민주적 총선[5]에서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6] 1992년 총선[7]에서 민주화 열풍에 힘업어 140석 중 92석을 차지하는[8] 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어낸다. 베리샤는 이 때 페인트칠도 안 된 시멘트 벽돌집의 단칸에 세들어 사는 청렴함과 의대 교수 출신에 5개 언어[9]를 구사할 줄 아는 지성, 뛰어난 선동력과 카리스마로 알바니아인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런 인기 속에서 베리샤는 1991년/1992년 총선에서 자기가 출마한 지역구인 티라나주 카바여[10]에서 무려 90%/97.5%의 득표로 재선되었고 몇 곡의 대중가요 가사가 베리샤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개사되기까지 했다. 비록 민주당 내에서도 베리샤가 너무 위압적, 직설적이라는 염려가 있긴 했지만 집권 초 알바니아 국민들에게 이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 여담으로 베리샤가 대통령이 됐을 당시 나이는 만 47세로 매우 젊은 편이었다.[11]
2.3. 대통령 집권 후
민주화 이후 의원내각제로 개헌되었지만, 베리샤 본인은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한 민주당의 대표로서 총리직을 차지하는 게 정석임에도 불구하고, 총리직 대신 실권이 없는 대통령직을 가져갔다. 알바니아에서 대통령은 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며, 따라서 단독 과반을 얻은 민주당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베리샤는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베리샤는 국정 운영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12] 베리샤 시기 알바니아는 사실상 대통령중심제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한편 이 당시 알바니아의 경제 환경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체제 전환 과정에서 경제가 완전히 박살나 알바니아/경제 문서에도 나오듯 1992년 세계은행 통계 기준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200.85달러[13][14]로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 기준으로도 극빈국이었다. 어느 정도었냐면 세계은행 통계 기준 당시 알바니아보다 가난한 나라는 단 10개국밖에 없었으며, 명색이 유럽 국가인데도 1인당 GDP가 무려 부룬디(!!!)[15]와도 거의 차이가 없었으며, 너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던 나머지 한 여성이 흑백 TV(?!)를 구매하기 위해 자신의 아기를 헐값에 파는 엽기 사건까지 발생했다고 하면 말 다 한 셈이다. #
이런 암담한 상황을 해결하고 알바니아의 경제를 자본주의 체제에 맞추기 위해 살리 베리샤는 가격, 환율 자유화와 민영화,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며 친EU, 친미를 표방하고 알바니아의 법 체계를 유럽 표준에 맞게 고쳤으며 알바니아의 재이슬람화를 외치며 종교 박해를 전면 폐지하며 경제, 외교, 정치적으로 전면 개혁에 나선 것은 물론, 다단계 피라미드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경기부양에 나섰으며, 그 결과 알바니아의 경제는 단박에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고, 알바니아의 경제성장률은 연 8%대를 기록하여 1996년 1인당 GDP는 1010달러[16]를 기록하며 최빈국을 벗어나는 듯했다. 때문에 당시 알바니아는 동구권 국가 중 체제 이행이 순조로운 국가로 평가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갈수록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저질렀는데, 집권 초부터 당내에서 온건파들을 몰아낸 것을 시작으로 지방선거 과정에서도 야당이 이긴 도시에는 식량 원조를 거부하면서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식량 원조와 뇌물을 살포했고, 공영 방송국(RTSH)을 선전 도구로 쓰거나[17] 정부에 밉보인 기자들이 기소를 넘어 의문의 살해를 당하는 등 언론 자유가 철저히 침해받았으며,[18] 정치적 이유로 판사와 검사, 심지어 대법원장[19]이 해고되는 등 행정부가 사법부를 장악하며 삼권분립을 침해했고, 정보기관을 동원해 정권을 비판한 야당 의원과 활동가들을 체포, 고문하기도 했다.[20] 또 대통령이나 알바니아 국가와 그 상징을 모욕한 혐의로 3개월에서 5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과 친하다는 이유로 장관과 대사를 임명하기도 했고, 공산정권 시절부터 일해왔던 수많은 군 장교들과 관료들이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쫓겨났으며[21], 자신이 출생한 북부 지역 출신을 요직에 앉히면서 남부 지역 출신을 홀대했고,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를 추방하는 등 그리스계 알바니아인들을 차별했으며[22], 급격한 시장경제화와 함께 실업률도 올랐다.[23] # 이런 상황 속에서 지지율이 떨어져가고 야당 알바니아 사회당[24]의 공세도 거세지면서 베리샤의 국정 운영도 힘들어지자 1994년에는 개혁 노선을 계속하기 위해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는 헌법 개정을 묻는 국민투표를 열었지만 헌법 개정이 새로운 독재 정치의 재래로 받아들여졌기에[25] 43.6% 찬성, 56.4%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에 베리샤는 반발하며 1995년 3월에 베리샤는 행정부 권한을 축소하는 것을 지지한 민주당 의장 에두아르트 셀라미를 축출했다. 민주화를 기대했던 알바니아인들은 또 다른 독재에 접어들게 되었다.[26]
이 와중에 1996년 총선에서 부정선거를 치렀고[27][28], 야당의 보이콧으로 140석 중 단 18석을 제외한 모든 의석을 가져가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국내외적으로 1996년 선거는 부정선거로 인식되었으며, 1996년 선거 이후 정부의 입지는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안정해졌다.
1996년 9월에 4명의 알바니아인이 공산당을 창당하고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한 혐의로 12~1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달에 공산당 시대의 고위 관리 9명이 (5명은 궐석재판) "대량 학살법"에 따라 반체제 인사에 대한 정치적 박해 혐의로 최대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선거 전인 동년 1월에는 당시 알바니아 최대 일간지였던 Koha Jonë(우리의 시간)가 세르비아 비밀 경찰과 협력했다는 근거 없는 혐의로 모든 직원들이 구금되었다.[29] 1996년 10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52.5% 지지율로 시장 63명 중 58명, 지자체장 297명 중 267명을 차지했는데 사회당은 31.2% 지지율에도 각각 4명/15명만 얻는(...)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2.4. 불명예스러운 대통령 퇴임
그 와중에 전술한 피라미드식 경제로 인해 터진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의 여파로 알바니아의 경제는 박살났다. 이 사태의 여파로 알바니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으며[30][31], 이 과정에서 사기꾼 몇몇이 정부와 유착 관계를 맺고[32] 1996년 국가 및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을 후원한 게 알려지며 베리샤의 이미지도 추락하여 결국 초기총선에서 대패하였고 베리샤는 사임을 선언했다.[33][34][35] 대통령직은 노동당의 후신인 알바니아 사회당 소속의 레제프 메이다니가 가져갔다. 심지어 베리샤는 내전 중 베리샤 시기 알바니아 총리였던 알렉산데르 멕시(Aleksandër Meksi, 1939~)[36]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3월 1일 사임했지만 베리샤는 야당의 사임 요구를 거부했고[37], 결국 총선 패배 한 달 후인 7월 23일에야 물러나게 되었다.2.5. 대통령 퇴임 후
하지만, 최소 민주화를 이끈 영웅 이미지 덕에 국민들 사이에서 향수가 남아 있었고, 베리샤는 1997년과 2001년 텃밭인 카바여에서 의회에 입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민주당 대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2005년 총선 이후 총리에 취임하는 방식으로 8년 만에 권력에 복귀한다.[38] 다만,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데 실패하여, 군소 중도 정당들과의 연정으로 집권했고, 이 덕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 시절과는 달리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에는 사회당 탈당파가 꾸린 통합사회운동과의 연정으로 집권하여, 일부 진보 노선을 포용하기도 했다.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고도 정치 인생이 끝나기는커녕 알바니아 우파 진영의 대부 지위를 유지하고 이를 넘어 총리직을 2번이나 역임했다는 것은 베리샤의 정치적 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39]2013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하면서 사회당으로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베리샤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후 2022년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패 및 테러리즘 지원 혐의로 미국과 영국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된 이후, 룰짐 바샤가 이끄는 민주당에 의해 제명당하자,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민주당 중앙당사를 습격하고 반미 음모론과 부정선거 음모론을 펴면서 당을 쪼개버리는 등, 여러모로 굉장히 추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1]
사실 알바니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같은 민족이 사는)
코소보와 함께 유럽의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다.
[2]
1967년 국비장학금으로
프랑스 파리 유학을 간 적이 있고, 이후 1978년
UNESCO의 지원으로 다시 파리로 유학을 갔다.
[3]
사실 베리샤는 해외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해외의 자유상에 감명을 받았고, 이는 베리샤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4]
당시 알바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였던지라 나라에 제대로 된
항공사도 없고
올림픽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해외 정보는 철저히 차단되어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도 알리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알바니아인들은 알바니아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착각할 정도였다.
[5]
이는 1923년 이후 68년 만에 치러진 알바니아의 민주적 총선이었다.
[6]
당시 인민회의 의석 250석 중 사회당은 169석(기존에는 의석 전체를 차지했으나 이제는 2/3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75석을 얻었다. 때문에 민주화된 알바니아의 첫 대통령에 오른 사람은 라미즈 알리아 서기장이었다. 사회당은 모든 주요 도시에서 민주당에 졌지만, 농촌에서 이겼기에(농촌에서 의원을 선출하는 데 필요한 표가 도시에서 선출하는 데 필요한 표보다 훨씬 적었다) 총선에서 이길 수 있었고, 선거 과정에서 부정과 사기가 보고되었다고 한다.
[7]
이 총선에서는 부정과 사기와 관련된 보고가 거의 없었다.
[8]
사회당은 38석을 얻었다.
[9]
알바니아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10]
알바니아에서 민주화 시위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곳으로, 알바니아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1]
이는
빌 클린턴보다 1살 많고
버락 오바마보다 1살 어리다.
[12]
반면 하술하듯 총리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3]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452달러도 되지 않는데,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한국의 실질 1인당 GDP가 2024년 가치로 환산한 게 605달러다.
[14]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으로 경제가 작살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몰도바조차 당시 알바니아보다 양반이었다고 하면 말 다 한 셈이다.
[15]
당시 1인당 GDP가 188.6달러였다.
[16]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2030달러다.
[17]
1996년 총선 당시 여당에 야당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선거 후 항의 시위에서 경찰이 가한 폭력 진압을 보여주지 않았다.
[18]
언론인보호위원회가 1997년 언론 자유의 10적 중 10위로 살리 베리샤를 선정했을 정도였다.
#
프리덤 하우스가 산정한
언론자유지수에서도 1994년 지표에서는 총 53점(18+16+9+10)으로 '부분 자유'였지만 1997년에는 총 75점(26+23+20+6)의 '부자유'가 되었다.(사실 1995년부터 '부자유'로 강등되었다) 당시 알바니아의 언론자유지수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집권하는
벨라루스(85점)을 제외하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집권 중이던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유럽&구소련권 최하위였고,
시에라리온 내전에 시달리던
시에라리온,
하페즈 알 아사드가 집권하던
시리아와 동점이었다. 당시 최하위는 100점 만점을 기록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북한이었고, 최상위는 5점을 기록한
노르웨이였으며, 한국은 25점이으로 '자유' 등급이었다. 여담으로 알바니아의 언론자유지수는 1998년에는 총 56점(18+22+10+6)으로 다시 '부분 자유'로 돌아왔고, 2017년 마지막 통계를 냈을 때 점수는 총 51점(15+19+17).
[19]
제프 브로지. 1995년 사법부의 독립성 침해에 의문을 표하다가 해고되었다.
[20]
1993년에는 당시 사회당 대표였던 파토스 나노(Fatos Nano, 1952~. 1991년 4개월 동안 총리를 역임한 적이 있다)가 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로 체포된 후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바가 있다. 이후 나노는 1997~1998(다름 아닌 베리샤를 패배시킨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2~2005년 총리를 역임하며 설움을 풀었다. 당연히 1993년부터 1994년까지 호자의 미망인 네지미예 호자와 호자의 후임인
라미즈 알리아를 포함한 10명의 전직 노동당 고위 관리들이 부패 및 공적 자금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징역 3~9년을 선고받았으나 5년 이상 감옥살이를 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호자의 아들인 디르 호자도 1995년 "공공의 평화를 위협하여 국민적 증오를 조장했다"는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1996년 2월까지 32명의 전직 지도자가 공산주의 정권의 범죄로 투옥되었다.
[21]
물론 국민들은 이에 대해 공산잔재 청산이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이런 군 정책은 후술할 1997년 사태 때 정부군의 진압 능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으며, 상술한 폰지사기도 공산정권 시절 훗날을 대비해 키워놓은 경제 관료들을 쫓아내면서 경제 전문가를 찾다가 검증도 안 된 사기꾼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22]
그 외에도 그리스어 학교가 폐쇄되고, 그리스인이 군에서 추방되고, 사유화 경매에서 차별을 받기도 했다.
[23]
사실 후자는 다른 체제전환국들도 다 겪은 일이긴 하다.
[24]
알바니아 노동당의 후신
[25]
전하는 말에 따르면 헌법 개정안에서는 입법, 사법 및 행정 권한의 구분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에게 총리, 장관, 판사를 임명하고 해임하고 대법원을 주재할 권한이 주어졌다고 한다.
[26]
다만 베리샤에게도 할 말은 있는데, 베리샤가 집권 전에 보고 배운 정치 체제가 공산권 중에서도
민주 캄푸치아,
북한을 제외하면 가장 억압적이고 가혹했던 알바니아의 체제였기에 그러한 모습에 익숙해져서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가 된 후에도 독재정권에서 봐온 모습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27]
그 이전 1995년에는 9월에 "공산주의 대량 학살 금지법"을 채택해 전 정치국과 중앙 위원회 위원, 그리고 1991년 5월 이전의 의원들의 정치 활동을 2002년까지 금지했는데, 이 법에 따라 사회당 사무총장 Gramoz Ruci와 12명의 사회당 의원들을 포함한 35명의 사회당원과 여러 다른 주요 야당 인사가 대량 학살법을 시행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 임명 "검증" 위원회에 의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이 법은 베리샤의 사임 후 폐지되었다) 이에 알바니아 사회당 측은 민주당이 '정치적 복수를 제도화'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따지자면 베리샤도 과거 호자의 주치의가 아니었냐고 비난했다. 또 선거 전 선거관리위원회를 정부에 유리하게 개편하고, 대통령에게 선거구 변경을 승인할 수 있는 전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선거 전에 야당 후보가 구타를 당하거나 위협을 받은 사례가 200건 이상 보고될 정도였고, 그 외에도 참관인 감소, 동일인의 반복투표, 여당을 찍으라는 협박도 있었으며, 당시 투표에 참여한 사람 중 16% 가량이 무효표를 찍었다. 게다가 민주당은 55.5% 득표율로 122석을 얻었는데 사회당은 20.4% 득표율로 10석을 얻은 등
게리맨더링 정황도 보인다. 이에 야당 지지자들은 1996년 5월 28일 티라나에서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었으나 경찰한테 폭력적으로 진압당했고, 이후 모든 집회는 일시적으로 금지되었다. 결국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요구에 따라 너무 티나게 부정선거를 한 17개 구역은 재선거를 하게 되었다.(...) 당시 알바니아를 방문한 독일인은 1996년 총선 이전에는 "이번 봄에는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는 알바니아인이 거의 없었다"고 밝히며 여론조사와 선거 결과가 다른 결과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사회당이 여전히 공산주의 유산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출마한 13개 정당 중 실질적인 대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면서 나름대로 진심이 담긴 결과물이라 보았다.
참고자료 사실 베리샤의 권력을 강화하는 투표에 40%대 찬성으로 부결되었다는 것을 보면 투표 결과에 조작을 가했을 리는 없는 데다가 베리샤가 독재를 할 것 같다고 해도 지지하는(...) 매우 탄탄한 지지층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부정선거를 안 했어도 가까스로나마 과반 의석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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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5월 26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115석 중 95석을 차지했으며, 6월 2일 25개 의석에 대한 2차 투표에서도, 6월 16일 부정선거를 너무 티나게 한 17개 의석에 대한 재선거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투표 후 야당들은 선거 결과를 보이콧했고, 특히 알바니아 사회당은 1차 투표 후 국회에서 의석을 차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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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신문사 사무실은 하술할 내전 시기 화재로 파괴되었고 발행인은 구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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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경제성장도 폰지사기로 인한
거품경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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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베리샤는 시위대를 "무장한 공산주의 반군"으로 부르며 시위대에
폭격을 명령했다. 공산정권 시절 군 장교들을 부역자 취급하며 쫓아냈다가 군의 진압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 물론 알바니아 공군 조종사들은 이 명령을 거부하며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났는데, 만약 이들이 명령을 따랐더라면 알바니아에는
리비아 내전과 같은 참상이 벌어지고 아직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1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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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정부가 공영 TV 방송국을 통해 3개월 안에 돈을 3배로 늘려주겠다고 광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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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40석 중 92석, 1996년 140석 중 122석을 얻었던 민주당이 1997년에는 155석 중 단 27석만 얻었다. 베리샤와 알바니아 민주당이 얼마나 처참히 몰락했는지 제대로 보여준 셈. 쉽게 말해 의석 90% 가까이 독점하던 정당이 하루아침에 의석의 20%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거 과정에서 어떠한 부정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다 베리샤가 자초한
자업자득이다. 게다가 과거 알바니아 노동당의 폭정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고려하면 과장 안 보태고
리즈 트러스보다 더 한심하다고 욕먹어도 싸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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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1997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52.75%, 민주당은 25.7%를 얻었는데, 달리 말하자면 내전을 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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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민주화 후 공산당의 후예가 다시 정권을 잡은 동구권 국가는 알바니아 외에도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도 있었다. 참고로 불가리아는 공산당이 재집권 후 오히려 민주정부보다 더 경제를 개판으로 만들어놔서(1997년 물가상승률이 무려 1058%였다) 다시 민주화세력이 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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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민주당 소속이었는데도 "너무 온건하다"는 이유로 당시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알바니아의 정보기관은 멕시를 감시하거나 베리샤에게만 보고하는 등 일국의 총리(그것도 자기 진영의!)를 마치 적처럼 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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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는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추태가 아니라 비상시국에 대통령직에 공백이 생기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만약 총리가 공석인 와중에 대통령까지 공석이었다면 알바니아는 내전 와중에
무정부 사태에까지 접어들어(심지어 (명목상으로는) 민주정을 세운 지 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국민들의 정치 경험도 부족했던 판이었다) 명색이 유럽 국가인데도
소말리아,
아이티 못지않은 인외마경이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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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역사상 총리와 대통령을 모두 역임한 지도자는 살리 베리샤와
일리르 메타(이쪽은 국회의장도 역임했다.)가 유이하다. 다만
블라디미르 푸틴과
우르호 케코넨,
최규하처럼 총리와 대통령을 모두 역임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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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과장 안 보태고
북한과 동급의 억압적인 학정을 펼친 호자의 후계자들을 이긴 민주화영웅 이미지 덕이 컸겠지만, 비슷하게 '성공한 민주화운동가이자 실패한 정치인이던'
레흐 바웬사와 비교하면 베리샤의 정치력이 탁월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참고로 바웬사는 말년 지지율이 5%(...)였는데, 물론 바웬사는 순수 정치력이 형편없었을 뿐이지 베리샤처럼 폴란드를 내전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