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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4년 10월 15일 ([age(1944-10-15)]세) | ||
알바니아 왕국 비시돌 | |||
재임기간 | 제2대 알바니아 제4공화국 대통령 | ||
1992년 4월 9일 ~ 1997년 7월 24일 | |||
제32대 알바니아 총리 | |||
2005년 9월 11일 ~ 2013년 9월 15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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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000> 부모 |
父: 라마 베리샤 母: 셰케라 베리샤 |
|
배우자 | 리리 라마즈 | ||
자녀 | 2명 | ||
학력 | 티라나 대학교 ( 의학 / 박사) | ||
종교 | 미상 | ||
소속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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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니아 제4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2. 생애
알바니아 북부의 비시돌이라는 마을에서 무슬림[1]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티라나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이후[2] 교수로도 활동했고, 티라나 종합병원에서 심장병 전문의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그의 젊은 시절,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와 알바니아 노동당의 1당 독재 체제였고, 베리샤도 노동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다. 이 때만해도 그저 평범한 정치인으로서만 남을 것으로 보였지만, 호자의 사후 알바니아도 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베리샤도 여기에 가담하면서 노동당과 틀어지게 된다. 이후 알바니아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중도우파, 민주화 인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2년 총선에서 민주화 열풍에 힘업어 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어낸다.
민주화 이후 내각제로 개헌되었지만, 베리샤 본인은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한 민주당의 대표로서 총리직을 차지하는 게 정석임에도 불구하고, 총리직 대신 실권이 없는 대통령직을 가져갔다. 그럼에도 민주당을 이끌며 알바니아의 민주화를 주도하는 데 앞섰다. 이 당시 살리 베리샤는 친EU, 친미를 표방하고 알바니아의 법 체계를 유럽 표준에 맞게 고쳤으며 알바니아의 재이슬람화를 외치며 종교 박해를 전면 폐지하며 외교, 정치적으로 전면 개혁에 나선 것은 물론, 다단계 피라미드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경기부양에 나섰으며, 그 결과 알바니아의 경제는 단박에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고, 알바니아의 경제성장률은 연 8%대를 기록하였다. 다만 이 와중에 1996년 총선에서 깨끗치 못한 선거를 치렀고, 야당의 보이콧으로 대승을 거두기는 했는데[3], 그 와중에 그 피라미드식 경제로 인해 터진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의 여파로 알바니아의 경제는 박살났다. 당연히 이전까지 알바니아 경제를 되살린 구세주 이미지였던[4][5] 이 사태의 여파로 알바니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으며, 이와 함께 베리샤의 이미지도 추락하여 결국 초기총선에서 대패하였다.[6] 대통령직은 노동당의 후신인 알바니아 사회당 소속의 레제프 메이다니가 가져갔다.
하지만, 최소 민주화를 이끈 영웅 이미지 덕에 국민들 사이에서 향수가 남아 있었고, 베리샤는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민주당 대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2005년 총선 이후 총리에 취임하는 방식으로 8년 만에 권력에 복귀한다. 다만,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데 실패하여, 군소 중도 정당들과의 연정으로 집권했고, 이 덕에 민주당이 과반이던[7] 대통령 시절과는 달리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에는 사회당 탈당파가 꾸린 통합사회운동과의 연정으로 집권하여, 일부 진보 노선을 포용하기도 했다.
2013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하면서 사회당으로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베리샤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후 2022년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패 및 테러리즘 지원 혐의로 미국과 영국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된 이후, 룰짐 바샤가 이끄는 민주당에 의해 제명당하자,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민주당 중앙당사를 습격하고 반미 음모론과 부정선거 음모론을 펴면서 당을 쪼개버리는 등, 여러모로 굉장히 추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1]
사실 알바니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같은 민족이 사는)
코소보와 함께 유럽의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다.
[2]
이때 국비장학금으로
프랑스 파리 유학을 간 적이 있다.
[3]
140석 중 단 18석을 제외하고 전부 민주당이 가져갔다고 한다.
[4]
덤으로 상대가 동유럽에서 가장 가혹한 학정을 벌이던(과장 좀 보태면 무려
북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다) 호자 공산독재의 후예에 거기에 반해 베리샤는 그러한 호자 잔당으로부터 알바니아를 해방시킨 민주화영웅 이미지까지 더해졌으니 인기가 낮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5]
사실 저 경제성장도 폰지사기로 인한
거품경제였다.
[6]
1992년 140석 중 92석, 1996년 140석 중 122석을 얻었던 민주당이 1997년에는 155석 중 단 27석만 얻었다. 베리샤와 알바니아 민주당이 얼마나 처참히 몰락했는지 제대로 보여준 셈. 쉽게 말해 의석 90% 가까이 독점하던 정당이 하루아침에 의석의 20%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다 베리샤가 자초한
자업자득이다.
[7]
사실 과반 정도가 아니라 한국으로 치면
180석도 뛰어넘는 포지션의 초거대여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