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크록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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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레이 크록 Ray Kro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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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이먼드 앨버트 크록 Raymond Albert Kroc |
출생 | 1902년 10월 5일 |
미국 일리노이 오크 파크 | |
사망 | 1984년 1월 14일 (향년 81세) |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에델 플레밍(1922년 결혼 – 1961년 이혼) 제인 도빈스 그린(1963년 결혼 – 1968년 이혼) 조안 크록[1](1969년 결혼 – 1984년 사별) |
자녀 | 딸 마릴린 크록 바그(1924년 – 1973년) |
직업 | 기업인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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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기업인. 맥도날드의 초대 회장이었다.2. 생애
맥도날드를 완전히 인수하기 이전, 레이 크록은 믹서기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맥도날드 형제와의 만남 당시에도 그는 멀티믹서기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이었다. 어느 날, 맥도날드 형제가 멀티믹서기 8대를 주문하자 크록은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호기심을 느끼고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햄버거가 30초 만에 나오는 효율적인 시스템과 최소한의 인력으로 운영되는 작업 라인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를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여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 접근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확장하자고 제안했다.처음에는 맥도날드 형제가 갑인 상황이었고 레이는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확장을 위한 계약에서 비교적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이윤을 중시한 레이의 독선적인 운영과, 품질 및 맛을 중시[2]한 맥도날드 형제 사이에 충돌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 크록은 비용 절감을 위해 밀크셰이크 파우더 도입[3]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맥도날드 형제가 이를 결사반대하자 좌절한다. 한편 레이 크록은 사업을 확장하면서 지점장의 아내였던 조안 스미스와 친분을 쌓았고, 나중에 그녀와 재혼하게 된다.
레이 크록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해리 소너본[4] 이라는 인물에게 자문을 구했다. 소너본은 부동산 사업 모델[5] 을 제안했는데, 이는 맥도날드가 운영할 부지를 구매한 후 그곳에 건물을 세우고, 해당 부지를 맥도날드 프랜차이즈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크록의 사업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현재 맥도날드의 비즈니스 모델의 기초가 됐다. 이후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권리를 270만 달러에 서면 계약을 통해 매입하면서 그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는 직영점 외의 프랜차이즈 지점에 냉동 프렌치프라이와 밀크셰이크 파우더를 공급하며 운영 방식을 바꾸려 했고, 이 과정에서 형제들과 갈등이 발생했다. 그러나 맥도날드 상표권과 브랜드명은 구두 계약이 아닌 서면 계약을 통해 크록에게 매각됐다.
맥도날드의 모든 권리를 소유하게 된 크록은 이후 로열티와 관련된 구두 계약을 부인하며 형제들에게 추가적인 로열티 지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맥도날드의 초대 회장이 된 직후, 자신을 오랫동안 지지해준 아내 에델 크록과 이혼한 뒤, 불륜 관계였던 조안 스미스와 재혼했다.
3. 여담
- 핫도그 도입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아예 핫도그 도입을 대놓고 막을 정도였다. 그가 사망한 직후 맥도날드에서 핫도그를 판매하기 시작했으나 시원하게 망했다.
- 골수 공화당원(보수)이었던 레이 크록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정권 때 복지를 줄여야 한다, 뉴딜정책은 폐지해야한다 며 반대를 하면서 뉴딜정책 반대 및 복지축소를 위해 뇌물 즉, 로비활동하다가 걸리기도 했다.
-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구단주를 역임하였다.
- 현재는 맥도날드의 초대 회장이자 설립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최근까지 상당히 미화되었으나 더 파운더라는 영화를 계기로 매우 독선적인 경향이 심했던데다가 일생 전체가 성공한 양아치에 가까운 인물이었음임이 폭로되면서 재평가된 인물이다.
-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의 세 번째 아내 조안 크록이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재산을 이용해서 자선 사업가로 활동했다. 사실상 죽어서야 벌을 받은 셈.
[1]
2006년
3월 13일
뇌암으로 별세했다.
[2]
맥도날드 형제는 레이 크록이 제안한 냉동 프렌치 프라이 도입을 반대했다.
[3]
레이가 맥도날드 전부를 손에 넣은 이후에 밀크셰이크 파우더 형태로 판매를 했으나 결국 나중에는 밀크셰이크 파우더를 버리고 아이스크림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4]
이후 맥도날드 주식회사 초대 사장이자 경영자가 되었으나 레이 크록과 불화로 1967년에 사임했다.
[5]
이 방법은 점주들에게 임대료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점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하였다. 본사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임대 계약을 취소하는 조항을 넣었다. 또한, 은행에서 부동산 담보 대출을 받아 자본 침식 상태였던 당시의 레이 크록을 살리는 해결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