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08:38

싱가포르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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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투배경과 전초전3. 말레이 반도 점령4. 싱가포르 함락5. 전투 결과6. 지퍼 작전, 조석 작전7. 기타

1. 개요

일본어: シンガポールの戦い
영어: Battle of Singapore, Fall of Singapore

싱가포르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1년 12월 8일부터 1942년 2월 15일까지 아서 퍼시벌 영국군 야마시타 토모유키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를 놓고 벌인 전투다. 일본 제국 싱가포르 점령에 성공하면서 일본 제국 승리로 끝난 전투다.

2. 전투배경과 전초전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일대를 장악하여 동남아 지역에서의 연합군 세력 약화와 동남아 공략의 발판 및 싱가포르에 영국이 오랜 세월 구축한 각종 시설을 포함한 강력한 해군 기지를 얻으려 했고, 영국군은 당연히 그러한 일본군의 공격을 수비하는 처지였다.

수비하는 입장이었던 영국군은 말레이반도를 점령해오면서 요새화된 방어선은 물론 오히려 공격측인 일본군에 대한 숫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 실상은 좋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우선 병력의 숫자는 일본군보다 많았지만, 일본군이 광적인 충성심과 중국 전선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영국군의 대부분은 아시아 식민지 출신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어 전투 경험이 없음은 물론 사기가 낮고 무장이 부실했다. 특히 전차와 전투기를 포함한 신무기 면에서는 확실히 일본군보다 열세였다.
  • 비록 나름 요새화된 방어선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레이반도의 북쪽은 중립국이자 약소국이었던 태국과의 국경선이었기 때문에 방어선 자체가 남쪽으로부터의 해상 공격, 즉 해안 방어에 치중되어 있었다. 또한 이 방어선의 약점을 지적하는 영국측 내부문서가 이미 일본과의 개전 이전 독일 해군에 의해 탈취되어 일본군에게 전달되었다.[1]
  • 인접국인 태국이 중립국이자 약소국이라는 점은, 그동안 전력을 육상방어에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으로 작용해왔지만 반대로 공격측인 일본이 이를 이용할 경우, 약점으로 바뀔 위험성이 있었다. 이미 일본은 군축조약 탈퇴 등 기존 국제 질서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특히 위험했다.

따라서 영국측은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안을 세웠지만, 대부분 준비단계에서 좌절되었다.
  • 병력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본국인 영국에 기갑병력 증원을 요청했으나, 당시에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펼쳐지는 중이었으며, 영국 입장에선 싱가포르의 중요성보다는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이 더 컸다. 따라서 처칠은 입으로는 "싱가포르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최후의 1인까지 저항하여 그곳을 수호하라."라고 말했지만, 정작 기갑병력은 북아프리카 전선에만 할당되었다. 공군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수한 전투기 스핏파이어를 보유한 영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미국의 2선급 전투기인 버팔로만이 배치되었다.
  • 태국이 가진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영국군이 선제적으로 태국을 침공하여 대신 해안방어를 해주는(...) 일명 '마타도르(투우사) 작전'이 입안되었지만, 얼마전 태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영국에게 이는 외교적 부담이었고,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2] 비슷한 입지였던 노르웨이의 경우,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작전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본국 정부에서 말레이-싱가포르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영국군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 일본군은 1941년 12월 8일, 즉 진주만 공습 바로 다음날 기습적으로 태국과 말레이 반도 북쪽에 상륙을 시도했다. 태국군은 최초 몇시간 동안 일본군에 저항했으나 일본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일본과 휴전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용했다.[3]

일본은 이를 통해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 다음,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끄는 일본 육군이 근처 비행장들에 전개한 육군 항공대를[4] 동원해 말레이 지역의 비행장들을 공격해 영국 공군을 완전 무력화시킨다.

이에 영국군은 급히 최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 전함 리펄스를 주축으로 함대를 꾸려 지원에 나서지만 이미 개전 초의 기습으로 인해 손상된 공군 전력으로는 아군 전투기로 공중 엄호를 할 수 없었으므로 말레이 해전에서 단순히 폭격기만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침몰하고 만다. 이것은 전함이 함대 결전 없이 항공기의 공격만으로 격침된 사상 초유의 전투였기 때문에 연합군 측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군은 이 전과를 바탕으로 한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까지 만들어 가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3. 말레이 반도 점령

결국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에 별 다른 방해 없이 상륙하는 데 성공하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총 병력이 겨우 3만인 데 비해 영국군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며, 진격로는 정글을 통과하는 길 3가닥, 게다가 정글에 총 3개 라인의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더군다나 싱가포르까지의 거리는 800km를 넘을 뿐 아니라 보급은 일본군이 더더욱 나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미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인데다가, 정글에서는 전차가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말레이 반도에 전차가 한 대도 배치되지 않았던 반면 일본군은 150대 가량의 치하를 보유하고 있었다. 치하는 마틸다, 4호 전차 등 당시의 동급 중형전차와 비교했을 때 성능상 열세이나, 당시 연합군 측은 이에 대항할 전차도 부족하고 대전차 능력도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강력한 전력이 될 수 있었다. 이후 미국 또한 필리핀에서 이 전차에게 호되게 당하게 된다.[5]

그리고 치하 전차의 좁은 전폭과 가벼운 차체는 현지 상황에 적합했기 때문에 대활약을 했다. 말레이 반도의 일본군 진격로상 대부분의 교량이 20톤 이상의 차량은 건너기 힘들었다. 그런데 치하는 15.8톤이었으므로 현지의 빈약한 교량과 밀림의 험로 등을 통과하는데 강력한 이점이 되었고, 여기에 치하의 장점 중 하나인 순간 가속 능력 등도 보탬이 되어 보병 위주의 현지 영국군 상대로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전차라는 물건 자체를 난생 처음 보는 식민지군 병사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어, 사기를 와해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만약 전차가 미리 배치되어 대전차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였다면 공황 상태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군은 전사에서 전차를 미리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 실수라고 명백히 인정하였다. 또 영국인들은 말레이를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의식이 호주군에 비해 부족했기에 사기 측면에서도 일본군에게 밀렸다.

게다가 현지 영국군의 기존 병력중 숙련병들은 얼마 안 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더 긴급한 유럽 전선으로 파병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말레이 반도에 남아 있던 영국인 연대들의 일부 대대들[6]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이후의 전투에서 밥값은 다했다.

영국인 병력이 유럽 전선으로 파병된 후 인도인 부대가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파견되었다. 인도인 부대를 주축으로 해서 여기에 제8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이 주축이 된 호주인 부대 및 현지 원주민까지 동원해서 급히 징집된 병력이 주력이었다. 호주군은 말레이를 지키는것이 자국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 열심히 싸웠다.

일본군이 골치를 썩힌 부대는 오직 호주군과 영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일본군 지휘관 야마시타 토모유키 아시아인들로 구성된 부대들 중에서 일본군을 이길 수 있는 부대는 없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사실 인도인 부대는 영국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낮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점쯤 되면 영국의 식민지배도 한계에 다가가고 있어 인도인들의 불만이 커져 있었고, 더구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인들이 영국군 휘하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영국은 약속하던 인도 자치를 어겼던 기억이 있던 터라 해외 주둔 인도인들은 대충 복무하면 그만이다라는 시각이 가득했던 점도 컸다. 말레이에 배치된 인도인들은 뭐하러 이런 곳까지 와서 영국 놈들 입맛대로 싸워야 하냐는 인식이 가득했다. 게다가 실전 경험도 없었고 훈련도 부족했다. 제3인도 군단 예하 제11 인도 사단과 제9인도 사단 및 4개 보병 여단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3개 보병 여단은 1월 중순 이후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거기다 노동자가 부족해서 습기 많고 벌레가 들끓는 정글의 방어선을 스스로 만들어서 지켜야 하는 사태가 되자 곧바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일본군의 포위 섬멸 작전에 쉽게 와해되어 갔다.

또한 개전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영국군이 세웠던 투우사 작전 계획 또한 패배의 원인이였는데 개전이 임박하면 태국을 공격하여 싱고라 항을 점령하여 일본군이 싱고라 항을 사용하지 못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는 태국의 중립을 무시하는 문제가 있었고 12월 6일에 일본 선단을 발견하여 작전을 발동할 기회가 있었으나 태국의 기세에 눌려 영국은 작전을 발동하지 못하였다. 공격 작전을 위해 부족한 자금과 훈련이 공격에 우선 배정되다 보니 방어선도 부실해지고 공격 계획의 취소로 병사들은 사기의 저하와 동시에 부실한 방어선에 들어가는 악영향을 주었다.

여기다가 방어 전력의 핵심으로 파견된 영국인 편성의 제18사단은 1월 25일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뒤늦게 100 경전차 중대의 전차가 양륙되었지만 일본군 장갑차 수준의 경전차인 빅커스 마크 6은 무장이 12.7mm 기관총에 불과하여, 하고는 제한적으로 상대할 수 있어도 치하는 상대할 수 없으며 숫자도 18대에 불과해 150대를 싱가포르에 투입한 일본군에 수적으로 압도당했다. 어차피 수가 많아봤자 일본군 전차에 비하면 성능이 현저히 떨어져 별 도움도 안 됐겠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싱가포르의 해군 기지를 유지하던 해군 병력들은 육군에게 알리지도 않고 영국군 사단을 수송한 선박편을 타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싱가포르 전투 당시 치하가 활약한 것이 동등한 입장에선 그저 "저거 전차 맞나요?"하는 허접 전차도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대전차 화기가 부족한 보병에겐 사신임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전형적인 사례가 말레이 반도 북단의 지트라에서 벌어진 전투로 97식 전차보다 더 약체이던 95식 경전차를 소대 규모로 지원받은 600명 규모인 일본군 혼성 부대의 우회 공격에 방어하던 제11인도 사단의 병력은 말 그대로 단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만 쳤다. 정예 부대인 구르카 대대까지 도망쳤는데, 행군 도중에 삼림에서 갑자기 전차가 튀어나오면서 사격을 해 댔으니 도망 외에는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나마 구르카 대대는 나중에 다시 모여서 전투에 들어가기라도 했는데 기타 인도인 부대들은 훈련 부족으로 인해 한번 무너지면 그대로 패주하면서 재규합이 도통 되지 않았다.

거기에 지휘부의 판단 미스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1월 7일에 슬림강 방어를 맡던 11사단의 경우 주 방어선을 탄종 말림으로 잡았고 대전차포 연대와 대전차 지뢰를 1,400개나 보유했으면서도 전초 방어선인 슬림강에 무려 2개 여단을 배치하면서 대전차포 중대와 대전차 지뢰 몇십개만 주는 삽질로 방어선을 스스로 붕괴시켜면서 자멸하였다.

다만 영국 입장에서는 대전 말기까지 주 전선은 유럽이었기에 아시아 전선은 구식 무기의 처분장에 가깝게 인식해 무기의 질이 매우 형편없었다. 하지만 이미 구식 병기화된 마틸다 II[7]도 투입되자마자 이동 벙커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인한 능력을 발휘했으니, 소수라도 전차가 있었다면 달라졌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일본군의 급강하 폭격과 근접 항공 지원의[8] 밥이 됐을 것이다. 위에서 보듯 대전차 무기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차와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쳐서 대전차전 무기를 갖춘 후 싸우는게 더 이득이다. 그래도 마틸다같은 전차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유리하다.

참고로 일본 측 기록에 나오는 싱가포르 전투 당시의 연합군 기갑은 브렌건 캐리어 등의 무한궤도가 달린 운반 차량이다. 또한 장갑이 차량을 전부 덮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단은 완전 무방비였다. 그냥 일본군의 장갑차 수준. 그나마 싱가포르에 뒤늦게 투입된 경전차 빅커스 Mk VI는 무장이 12.7mm 기관총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런 차량으로는 치하를 이론상으로밖에 격파할 수 없다. 그 이하 장갑차 정도라면 모를까.[9] 그래도 치하의 후면 하부와 같이 취약점을 12.7mm 이상 구경의 철갑탄으로는 관통 가능하긴했다.[10] 하지만 전차의 후면으로 돌아가서 기관총탄을 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은륜 부대라고 불리는 자전거 부대까지 편성해서 전진을 하고 영국군이 다리를 끊는 걸 저지하고 공병들을 기둥으로 한 인간 다리를 세우면서까지 빠른 진격을 해내는 일본판 전격전[11]을 하여 영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진격했다. 결국 말레이 반도는 빠른 시간 내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결국 영국군은 수많은 물자와 병력을 잃고 싱가포르로 퇴각했다. 이때 얼마나 많은 물자를 상실했는지 말레이 반도 전격전 당시에 일본기가 영국제 연료를 비행기에 넣고, 영국제 항공 폭탄을 달고 영국군에게 폭격을 한다든지 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넘어간 이 무려 32만 5,000톤에 달했다. 한 명의 병사에게 연 150kg씩 배급해도 20만명의 병사가 10년 버틸 수 있는 막대한 양이였다. 다 어디로 갔지? 아마 여기저기 수송하다가 잠수함에 터지거나 말레이 반도에서만 배터지게 먹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못 먹은 듯

4. 싱가포르 함락

영국군은 싱가포르 방어에 들어가지만 기존의 방어물과 중포대는 먼 바다에서 공격하는 적을 막는 용도로 건설된 것이라서 말레이 반도 쪽의 육지에서 공격하는 것에 대항하기에는 위치도 안 좋을 뿐 아니라, 심지어 중포탄도 적 군함을 격침시킬 목적의 철갑탄이 대부분이라 좁은 해협을 건너오는 일본군 보병에게는 별 피해를 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결국 싱가포르 섬 북쪽에 임시 진지를 가설하고 섬 전체의 해안선을 경계하느라 병력의 분산이 심해졌다. 영국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쉬운 섬 동쪽에 상륙할거라고 생각했고 일본군도 밤마다 트럭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섬 동쪽으로 갔다가 끄고 돌아오는 등의 방법으로 영국군이 동쪽에 주력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도하 거리가 짧고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호르 해협 맹그로브 지대에 5사단과 18사단의 13개 대대가 한꺼번에 공략하여 호주군 22여단을 압도하고 상륙에 성공하였으며 근위 사단은 둑길을 상륙하던 시점에 사단장의 오판으로 상륙에 실패할뻔 했으나 호주군 지휘관의 단독적인 후퇴로 인해 상륙에 성공하면서 영국군과 격전끝에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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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국군은 싱가포르섬의 수원지를 빼앗기는 등의 악재가 겹쳐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아서 퍼시발 장군 등 영국군 지도부는 결국 일본군에 항복, 개전 60여 일 만에 9만에 가까운 영국군이 포로가 되어버린다. 항복 회담장에서 퍼시발 장군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이 일갈했다고 알려진 "예스카, 노카?(예스냐, 노냐?)"라는 말은 한동안 일본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다만 야마시타 토모유키 본인은 소문을 부정하며 자신은 그렇게 압박주는 사람이 아니라며 꽤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회담 당시 통역관의 실력이 영 별로라서 버벅이자 답답해한 토모유키가 통역에게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항복할 건지 아닌지 '예스냐, 노냐'로 간단히 물어 봐라."라고 말했는데, 이게 기자의 윤색을 통해 '예스카, 노카' 일화로 유명해진 것.

나중에 퍼시발 장군은 일종의 보복 행위로서 미주리호의 일본 항복 조인식에 참관 명목으로 나온다. 바탄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영미 잡지에서 다루어졌었지만 의외로 졸장으로 이름이 남았다. 실제로 전시 중 중립국을 통해서 출간된 일본 포로 수용소 선전 잡지에서 웨인라이트와 즐겁게 낚시하면서 띵가띵까 노는 퍼시벌의 사진이 공개되며 여러모로 패장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선전잡지 내용일 뿐이고, 실제로는 원래 싱가포르에 같이 감금되었던 자신의 부하들과 강제로 떨어져 웨인라이트와 함께 중국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이후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주리호에서의 조인 이후에는 웨인라이트와 함께 필리핀으로 가서 필리핀의 일본군 항복 조인에도 참석했는데, 하필 이곳의 사령관이 야마시타 도모유키. 야마시타는 그들을 보고 상당히 당황했고, 퍼시발은 일본이 싱가포르에서 항복한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가혹행위에 대해 항의하는 뜻으로 악수를 거부했다고 한다.

단, 웨인라이트는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대통령 직접 명령에 의해 탈출한 후 사방 천지에 적뿐이며 고립되고 부서져가는 코레이도르 요새에서 물자 부족에 시달리며 지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한동안 저항을 더 지속, 미국 내에서의 평가가 크게 나빠질 일이 없었다. 이에 비하면 어찌 되었든 현지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과 물자, 해군 지원까지 받던 퍼시발 장군이 더 안 좋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그래서인지 일본 항복 조인식 이후에는 영국의 주요 정치가, 저명 인사, 군인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웨인라이트가 전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대통령에게 명예 훈장을 직접 수여받고 제4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것과는 천양지차.[12] 이는 힘이 세다고 시건방진 사촌인 미국인이나 자국보다 훨씬 열악한 국력을 가진 네덜란드보다도 위대한 영국의 군대가 먼저 백인 흉내를 내는 일본군에게 항복했다는 인종차별 의식이 적용된 괘씸죄가 아주 크게 작용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퍼시발에게 주어진 전력의 상태라는 것은 숫자는 많아도 훈련과 사기가 부족한 인도인 - 호주인 부대를 주력으로 삼아 작전 기간 막바지까지 싸워야 했고, 지상군을 지원해야 할 공군력은 일찌감치 사라진 상태여서 싱가포르 방공만도 힘에 겨웠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싱가포르 공략을 위해 일본 육군, 해군이 동원한 항공기는 작전기만 617기고 예비기도 182기였지만, 영국 공군은 싱가폴과 말레이에 고작 246기만 전개시키고 있었고 그 주력도 F2A 버팔로같이 하야부사에게 밀리는 기체들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앞에서 말했듯 싱가포르에 주둔한 해군은 육군에게 알리지 않고 해군 기지를 포기하고 대부분의 기지 병력을 먼저 철수시켰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당장 영국 육군이 반도를 방어하는 가장 큰 전략적 목적이 오직 싱가포르 북안의 세레타에 건설된 거대한 해군 기지를 지키는 것이었고, 이를 일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려면 싱가포르 섬만 방어해서는 안되고 말레이 반도를 방어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군에게 해군이 해군 기지를 방폐하고 철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지 않고 그 파괴조차 육군에게 떠넘긴 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였다.

오히려 일본 해군은 말레이 해협 북단에서도 주정을 이용한 소규모 상륙전을 반복해가며 반도에서의 일본 육군 작전을 지원했고, 심지어는 페낭 섬까지 함락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막아야 하는 영국 해군은 그냥 가만히 보기만 했다. 영국군의 막대한 물자 보급 물품 중에서도 1차 대전 이래 지상전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으로 인정된 전차는 겨우 경전차 18대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퍼시발 자신은 작전 기간 내내 말레이 육군의 사령관으로 지휘했고 말레이와 싱가포르 전체의 영국 육군, 해군, 공군을 지휘하는 권한은 전혀 없었다. 이지역의 전체 지휘관은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인 로버트 브룩-포팜 공군대장이었는데, 심지어 그에게도 전체 지휘권한이 없어서 육해공군이 각각 군종별로 영국과 연락하여 지휘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군사 재능은 전혀 없으면서도 군사작전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처칠이 따로 자신의 측근[13]을 특사로 파견해 따로 보고서를 받으면서 작전마다 제동을 걸고 있었으니,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령 퍼시발이 아니라 몽고메리가 말레이군 사령관이었더라도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방어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전사가들이 내리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퍼시발은 1930년대에 말레이 식민지 육군의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올바른 전략적 판단에 의거한 제대로 된 방어 계획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말레이 육군 사령관으로서의 자신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진행되는 사태에 질질 끌려다녔다. 특히 계속 후퇴만 요구하는 제3인도 군단장인 루이스 히스(Lewis Heath)를 휘어잡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과 영국군은 반도에서 지리멸렬한 전투만 하다가 결국 싱가포르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퍼시벌의 졸렬한 지휘는 그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는 전사가들조차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고, 이것만으로도 퍼시벌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넘쳐난다.

5. 전투 결과

영국: 5,500명 전사 10,000명 부상 283명
일본: 1,793명 전사 3,742명 부상

이 패배로 영국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및 그 주변의 식민지를 상실하였으며 수상 윈스턴 처칠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고까지 표현했다.[14]

이 전투로 싱가포르를 얻은 일본은 쇼난(昭南)이라는 새 이름을 붙인다. 쇼와[15] 시대에 차지한 남쪽 땅이라는 뜻이다.

말레이와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작전하면서 막대한 물자를 노획한 달콤한 경험으로 인해 일본군은 이후의 공세에서도 보급은 현지 조달 위주로 작전을 세우게 되었는데, 유럽인에 의한 식민화 이전부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문명화된 물자가 풍부한 동남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과달카날, 솔로몬이나 뉴기니는 훨씬 궁벽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싸운 일본군은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싱가포르에서 노획한 온갖 사치품과 군수 물자로 일본군은 영양 상태가 매우 좋아지고 장비도 충실해졌다. 대표적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은 위스키를 마실 수 있었다. 또한 중국 전선에서는 차가 없어서 사단장 이하는 모두 을 타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는데 싱가포르에서는 사령부 참모들은 위관급 장교까지도 노획한 고급 승용차를 관용차로 배차받을 수 있었다.

6. 지퍼 작전, 조석 작전

싱가포르 지역은 영국이 탈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미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독일과의 싸움에 우선 집중해야 했던 영국의 처지로는 태평양이나 인도양에서 본격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시기는 1945년 초에나 가능했고, 따라서 말레이 반도 탈환은 1945년 9월 9일에 실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지퍼 작전(말레이 반도 북부 방면), 조석 작전(싱가포르 방면)이라고 이름이 붙은 말레이 반도 탈환 계획에는 유럽 전선의 종결로 인해 영국이 온전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전의 실책을 거울삼아 중장비들도 적극적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1945년 8월에 끝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연합군의 반격을 끝까지 받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들은 재수 없게 격전지로 증원간 병력이나 일부 수상함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놀고 먹다가 전쟁이 끝나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본 수뇌부도 여기에 병력을 짱박아두지 않아 상당히 많은 병력이 격전지로 차출되었고 1945년에 들어서 연이은 폭격에 전후에는 말레이 진격전이나 싱가포르 점령시 벌인 잔학 행위(주로 화교에 대한 학살)에 대한 전범 재판으로 인해서 그렇게 편한 말로는 겪지 못했다.

7. 기타

  • 싱가포르는 당시 일본에 함락된 2월 15일을 '총력안보(total defence)의 날'로 지정하여 매년 민방위 관련 태세의 점검과 대국민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기준에서 외국의 무력 점령을 받은 유일한 사례였다는 점에서, 싱가포르에게도 상당한 타격이 되었던 점을 반영한 듯.
  • 이때 영국군 포로로 잡힌 에릭 로멕스가 말년에 집필한 <레일웨이 맨>은 2014년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 졌다. 포로들은 동남아에서 철도를 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는데 '침목 하나당 생명 하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겼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영국에서 부터 철덕으로 활동했는데, 포로 생활 와중에도, 일본에서 공수된 기차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온 제목이 <레일웨이 맨>.

[1] 자신들의 약점에 대해 상관에게 문제제기하는 이 문서의 내용이, 일본군의 문화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일본군은 한동안 이것을 가짜문서 취급했다는 웃픈 뒷이야기가 있다. [2] 결국 나중에 허가가 떨어지기는 하는데, 일본의 침공이 일어나기 바로 3일전이어서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었다. [3] 결국 한달여 후, 일본이 친일파였던 쁠랙 피분송크람 총리를 내세워 태국을 추축에 가입시키고 연합국에 선전포고하게 시켰으나, 전후에는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참작되어 전쟁전 영토를 인정받았다. 송크람은 몰락했지만 냉전기의 혼란에 힘입어 군사쿠데타로 다시한번 권력을 잡았다가 또다시 쫒겨나, 일본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4] 이때 동원된 전투기가 일본 육군의 신예기인 하야부사들이다. 제로센은 해군 항공대 함재기다. 하야부사랑 제로센이 거의 똑같이 생겼다보니 일본 국민들도 헷갈려 하야부사의 공적도 먼저 활약하기 시작한 제로센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작전을 세우기 위해 엄밀히 적기를 식별해야할 미군들도 하야부사랑 제로센을 자주 헷갈렸다. [5] 필리핀엔 스튜어트 경전차가 40대 정도 있어서 상황이 그나마 나았다. [6] 주로 스코틀랜드 연대 예하였다. [7]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8,8cm FlaK이 본격적으로 등판하면서 2선급 전력으로 돌려지거나 랜드리스로 소련에 제공되었다. [8] 당시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하야부사 Ki-51 습격기( 급강하 폭격기), Ki-21 폭격기등을 주로 운용했는데 250kg 폭탄을 장착 가능한 급강하 폭격기 선에서 정리가 가능했다. 아라스 전차전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마틸다 II를 격파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항공지원이었다. [9] 일본군에서 전차 판정도 못 받을 정도로 장갑이 빈약한 장갑 차량들은 어느 정도 50구경이 먹히긴 했다.(물론 소련, 영국, 이탈리아 할 것 없이 이런 탱켓류 차량은 운용되었다.) 치하는 그래도 명색이 전차였기에 기관총탄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10] 일반 보병이 철갑탄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11] 합동군사대학교에서 편찬하는 군사평론에서도 말레이전 당시 일본군의 전술과 기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일본판 전격전이라고 평가한다. 당시 일본군 정보기관의 활약과 부족한 시간을 적극 활용하여 현지 적응 훈련 및 지침서 하달 등의 일본군의 준비태세에 대해 극찬하고는 등 상세히 설명하니 장교로 입대하거나 업무를 마치고 약간 시간이 남는 행정병이 있다면 한 번쯤 찾아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간부도 아니고 행정하고도 거리가 멀다면 병영 도서관에 관련 내용이 있는 과월호를 간부가 도서관 한구석에 짱박아 놓았기를 빌자. [12] 대신 미국은 진주만 공습의 책임자였던 허즈번드 킴멜 제독에게 퍼시발과 비슷한 대우를 했다. [13] 더프 쿠퍼(1890~1954). 처칠과 닮은 점이 많아서 초급장교 경험만 있을 뿐이지만, 전간기에는 대독일 강경론자로 처칠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싱가포르 함락 이후, 이로 인해 퍼시발, 브룩-포팜과 함께 엄청난 비난을 들었으나, 처칠은 그를 드골의 프랑스 망명정부 대사로 임명했는데, 외교적 재능은 뛰어났는지 처칠과 관계가 영 껄끄러웠던 드골과의 조율을 잘 수행했다. 전후 처칠이 실각하며 그의 측근들이 대거 해임되는 와중에도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 때문에 유임되었을 정도. 군사적 재능보다 글쓰는 재능이 더 뛰어난 것도 처칠과 닮아서, 결국 외교와 문학적 공로로 노리치 자작위를 받았다. 여담으로 이 사람의 아들인 2대 노리치 자작 존 줄리어스 노리치 역시 외교관이자 작가로 유명한데, 특히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룬 역사책은 일반인 대상으로 쓰여있어 쉽고 재미있어 인기를 끌었으며 한국어로도 번역출판되었다. [14] 2차세계대전 재조명이라는 다큐에서는 퍼시벌의 항복으로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수 세기 동안 지켜온 위신은 고작 몇 주 만에 사라졌다고 대차게 비판했다. [15] 히로히토 당시 일본 덴노 재위기의 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