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mbing of Darwin(1차), Raid on Darwin(2차)
ダーウィン空襲
1. 개요
다윈 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부에 위치한 다윈시를 공습하여 발생한 전투로 2차례에 걸친 공습이 있었다. 1차는 '다윈 폭격(Bombing of Darwin)' 이라고 부르며 2차는 '다윈 공습(Raid on Darwin)' 이라고 부르지만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1차와 2차로 구분하여 서술한다.2. 제1차 다윈 공습
1942년 2월 19일에 일본 제국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부에 위치한 다윈시를 공습하여 발생한 전투이다. 제1차 다윈 전투는 이후 97회 이상 발생할 일본의 오스트레일리아 공습의 시작을 알리는 공격이었으며 단일 공격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2.1. 배경
다윈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노던 준주의 주도이지만 전쟁 이전의 인구는 5,000여명의 작은 마을 수준이었으나 오스트레일리아 해군과 공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다윈은 일본이 점거한 남양군도를 피하는 항공노선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전쟁 발발 이후 이 지역은 연합군의 중요한 기지중 하나가 되었고 일본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연합군이 반격을 해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대규모 공습을 계획하게 된다. 한편 연합군도 다윈의 방어를 보강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방어 계획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대공포는 3.7인치 대공포 16문과 3인치 대공포 2문과 저고도를 방어할 루이스 경기관총이 있었으나 탄약 부족으로 대공포 사수들은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했다.2.2. 전개
나구모 주이치가 지휘하는 일본 해군 제1 항공전대는 4척의 항공모함(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9일 아침 8시 45분에 188기의 항공기를 발진시켜서 다윈항을 공습했다. 공격 총대장은 진주만 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아카키의 비행대장 후치다 미쓰오가 맡았다.이들은 다윈항으로 이동하던 도중 마주친 PBY 카탈리나 1대를 격추시켰으나 9시 37분에 발각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공군(RAAF)에 전달되었으나 RAAF는 이것이 악천후로 돌아오는 미 육군의 P-40으로 오판하여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여 공습했고 기습을 당한 연합군은 격렬한 대공사격을 가했다. 일본의 1차 공습은 약 30분이 지나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오전이 끝날 무렵 10시 10분에 발진했던 54기의 G3M과 G4M 편대가 다윈에 도착해서 다시 한번 공습을 퍼부었다.
한편 1차 공격대는 귀환하면서 다윈 외곽에 정박한 필리핀 국적 화물선 2척을 발견했는데, 나구모는 이후 별도로 소수의 D3A 급강하폭격기들을 발진시켜 두 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2.3. 결과
다윈에 배치되어 있었던 RAAF의 전투기 31대 중 30대가 파괴되었다. 또한 민간인 502명이 사망하고, 군인 236명이 전사했으며 3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인적 손실을 입었다. 무엇보다 동남아시아 전선에 지원가야할 소중한 군수물자 상당수가 소각 및 파괴되었고 그나마 이를 선적하고 수송할 항만시설과 수송선들도 다대한 손상 혹은 격침되는 물적 손실까지 겹치면서 연합군의 동남아시아 전선 보급로 중 하나인 호주 서부 방면 보급로가 일시 차단되는 치명적인 결과가 나왔다.반면에 일본은 4기의 항공기가 파괴되었고, 1명이 포로가[1] 되었으며 2명이 전사하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만을 입었다.
당시 일본군이 다윈 항에 투하했던 폭탄의 수량은 2개월 전 일어났던 진주만 공습보다도 많았다. 다만 대부분은 소형 폭탄이었고, 때문에 폭탄의 전체 중량으로 따지면 진주만 공습보다는 적었다. 양측 비교
다만 이렇게 큰 전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 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목표에 지나치게 많은 전력을 쏟아부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대표적으로 공격 총대장을 맡았던 후치다 미쓰오는 아래와 같이 발언한 바 있다.
이 공습은 마치 달걀을 깨는 데 슬래지해머를 쓰는 꼴이었다.
후치다 미쓰오
후치다 미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