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金南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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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5년 10월 16일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1] | |
사망 | 1994년 2월 13일 (향년 48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서울 고려병원[2]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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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시인 |
학력 |
해남 삼화국민학교 (
졸업) 해남중학교 (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중퇴) 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 영어영문학 / 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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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2. 생애
1945년[3]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 해남군에서 삼화국민학교,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시로 올라왔다. 196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이듬해 자퇴했고, 1969년 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반(反)파쇼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다. 《함성》지는 주로 유신독재에 대한 고발을 주제로 다뤘고 후에는 전국적으로 신문을 확산시키고자 《고발》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73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이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한다.
출소 후 해남군으로 낙향하여 잠시 농업에 종사하는 중에 《창작과 비평》지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했으며, 1975년에는 광주시로 다시 올라와 사회과학서점인 '카프카'를 개설했다. 1978년에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에 가입,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4] 이듬해에 이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익[5], '어느 좌익사상범의 고백:수인번호 3179'
김정익[5], '어느 좌익사상범의 고백:수인번호 3179'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부터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첫 시집인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같은 굵직한 시집을 출간했으며 시집들은 교도관에게 부탁했다. 시집은 주로 우유갑이나 심지어 낙엽에 손톱이나 이쑤시개, 날카로운 도구들로 꾹꾹 눌러 썼으며, 교도관이 시인의 아내[6]에게 전달했다.[7] 이렇게 옥중에서 쓴 그의 첫 시집이 《진혼가》로 1984년에 출간됐으며, 문학계에서 큰 파장이 있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고,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45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서울 고려병원(現 강북삼성병원) 지병인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유해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3. 시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초기 시’(1974~1979년), 투옥 이후부터 가석방으로 출소할 때까지의 ‘중기 시’(1979~1988년), 출소 이후 사망할 때까지의 ‘후기 시’(1988~1994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초기 시들은 '피'와 '꽃'의 상징이 두드러지는, 언어적 활력과 혁명적 열정이 넘치는 시들이 주를 이룬다. 반면 남민전 사건을 겪어 감옥에 수감되고 5.18 광주 학살을 겪은 후의 시는 5월 광주 사태에 대한 반성과 이에 대한 애도, 국가 권력에 대한 분노 등 '5월 문학'이 주를 이루며 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또한 나타난다. 감옥에서 석방되어 사회로 나온 후의 후기 시는 '일상'의 삶과 '투쟁'의 삶 사이의 모순과 혼돈 속에 이를 고뇌하고 자기성찰함으로서 다시 혁명 투사로서의 각오를 다지고 개인적·역사적 전환을 모색하기 위한 탐색으로 이어졌다.통일을 염원한 민족시인이지만, 계급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적나라하게 담은 시들을 쓴 혁명시인이기도 하다. 주로 통일된 세상을 염원하거나 노동자에 대한 사회와 착취에 대한 고발적인 시들을 썼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이후에는 <학살> 연작과 같이 정권의 민중 학살에 관련된 시들을 많이 썼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문학 사조인 '5월 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를 방조했다고 알려진 미국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드러내는 등 NL 이념과 유사한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을 침탈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변증법적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도 주를 이루었다. 그가 바라는 세계는 국가간 경쟁도, 계급 적대도 없이 자유와 평등,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상적 세계였다.
김남주의 5월 시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통해 현실을 뒤바꿀 혁명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있으며, 동시에 '국가'가 아닌 '공동체'와 '마을'로 형상화된 국가와 대립항을 이루는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적 세계를 제시한다. 그의 이러한 이상향을 아나키즘적 사유로서 판단하는 연구도 존재한다[출처1] 한편 90년대 이후의 시에서는 5월 문학의 비중은 줄어들고 '일상'과 관련된 시들이 주를 차지하며, 변혁이 좌절된 세계 속에서 일상을 중심으로 이상적 세계를 사유하는 경향을 보인다.[출처2]
이 벽은
나라 안팎의 자본가들이
그들의 재산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벽이다.
놈들로 하여금
놈들의 손톱으로 하여금
철근과 콘크리트로 무장한
이 벽을 허물게 하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中
나라 안팎의 자본가들이
그들의 재산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벽이다.
놈들로 하여금
놈들의 손톱으로 하여금
철근과 콘크리트로 무장한
이 벽을 허물게 하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中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도 많이 지었다. 그는 미국에 의해 우리 민족이 부당하게 분단되어 민족 모순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쓰리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르막길 위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사나운 파도의 뱃길 위에도 쓰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리라
밤길 위에도 쓰고 새벽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조국은 하나다」 中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르막길 위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사나운 파도의 뱃길 위에도 쓰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리라
밤길 위에도 쓰고 새벽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조국은 하나다」 中
날카롭고 투쟁적으로 쓰인 시어가 주조를 이룬다. 시들 중 일부는 민중가요로 제작되기도 했다. 번역시집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시선들 중에서도 일품인 시들을 모았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 中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 中
교도소에 있을 때 쓴 시 중 위의 구절이 인상깊던 독자가 후일 '감옥 안에서 어떻게 이런 구절을 썼느냐'고 물었다. 이에 시인은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개니 하트라서'라는 일화가 있다.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가야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中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中
4. 여담
- 정치권에서 가끔 인용되며, 2016년에 필리버스터 정국으로 주목받았다. 남민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시인이자 한때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국회의원 이학영은 필리버스터 발언 중 김남주의 시들을 낭송하기도 했다.
- 시인이 된 계기는 《 창작과 비평》에 실린 시를 읽다가 나도 써볼 수 있을거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했다.
- 생전에 계급사회에서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전사'라고 자처했다.[11]
- 인간적이고 따뜻한, 오히려 허술한 모습에 지인들 사이에서는 '물봉'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독재와 억압에 반대해 인생을 걸고 긴 옥고를 치른 인생에서 독자들이 더 감동을 받는지도 모른다. [12]
5. 작품
시집《진혼가》, 청사, 1984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솔직히 말하자》, 풀빛, 1989
《사상의 거처》, 창작과비평사, 1991
《이 좋은 세상에》,한길사, 1992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창작과비평사, 1995
선집
《학살》, 한마당, 1988
《사랑의 무기》, 창작과비평사, 1989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창작과비평사, 2004
번역서
프란츠 파농,《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청사, 1978
하이네·브레히트·네루다,《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남풍, 1988
하이네,《아타 트롤》, 창작과비평사, 1991
전집
《김남주 시전집》, 창비, 2014
《김남주 산문 전집》, 푸른사상, 2015
6. 관련 문서
[1]
현재도 이 주소지에
시인김남주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2]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3]
그동안 김남주 시인의 출생은 1946년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22년 출간된 김형수 저작의 김남주 평전에선 1945년 생으로 정정되었다.
[4]
그가 구속된 사건이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남민전 사건이다.
[5]
남민전에서 교육을 받은 좌파였다가 전향한 사람이다. 위의 인용은 회고록에서 김남주를 감방에서 만나 그가 말 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전향한 자가 사상검증을 위해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을 고려할 때 신뢰도가 다소 떨어지기는 하다. -대표적인 예로
김문수-
[6]
부인과 남민전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
[7]
광주교도소니까 당연히 광주항쟁에서 체포된 사람들이 수감되었고, 교도관도 당연히 광주 사람인지라 이런 물밑 협조가 가능했다고 한다.
[출처1]
김동명(Kim Dong-myeong). "김남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아나키즘적 특성 연구." 批評文學 -.81 (2021): 7-39.
[출처2]
고봉준 ( Ko Bong-jun ). "김남주 시에서 ‘5·18’의 의미 - 광주항쟁시선집 『학살』(한마당, 1990)을 중심으로." 영주어문 47.- (2021): 5-30.
[10]
정작 시인 생전에 전남대학교는 그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문제삼아 퇴학시켰다.
[11]
https://www.youtube.com/watch?v=nmZ7siOR5_g
[12]
https://youtu.be/gJOusi74aGo?si=nSN0fkCfqbPP0wq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