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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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7년 7월 6일 |
독일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라체부르크 | |
사망 | 2016년 1월 25일 (향년 78세) |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라체부르크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2] |
직업 | 사진기자 |
소속 | 독일 공영방송 ARD 일본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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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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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다큐]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방송정보] |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기자.위르겐 힌츠페터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3년 5월 18일 일요일 저녁 8시에 KBS 1TV를 통해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서였다. 이 다큐멘터리의 부제가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이다.[4][5] KBS가 처음으로 군부 독재정권 시절 자사의 과오를 자신들의 방송을 통해 반성하였다. 당시 PD는 장영주로, 이 PD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감독도 맡았다.
'푸른 눈의 목격자'(witness with blue eyes)라는 별명과 달리 실제로는 눈이 푸르지 않았다. 2000년대 후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동아시아학과 학생들이 개최한 5.18 민주화운동 세미나에 부인과 함께 참가했는데 이 자리에서 자신은 벽안이 아닌데 한국에서 이상하게 그렇게 불린다는 얘기를 유쾌하게 전한 일화가 있다.[6]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유럽계 백인들을 표현할 때 푸른 눈이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쓰는 경향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의사를 지망하던 의학도였으나 미디어로 진로를 바꿔 1963년에 당시 서독의 ARD 소속 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으로 입사했다. 1967년 초에는 그 당시 ARD의 유일의 동아시아 방면 지부가 있던 홍콩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1969년 봄에는 베트남 전쟁에 종군기자로 취재하다가 사이공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의 도쿄 지국으로 옮겨가 1973년부터 1989년까지 17년간 특파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의 한겨례 신문 기고에 의하면 그는 독일의 파울 슈나이스 목사[7] 소개로 1974년 9월 26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을 취재하기 위하여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다.[8]
이 기간 동안 그는 몇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정권하의 여러 공안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가택 연금 중이었던 김영삼과의 인터뷰를 녹화하는 등 다양한 취재를 하고 있었다.
2. 푸른 눈의 목격자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오후, 그는 독일 제1공영방송(ARD) 북부독일방송 특파원으로 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했다. 5월 19일 오전, 힌츠페터는 일본 언론 보도를 듣던 중 '계엄령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9] 힌츠페터는 그 전날 한국군 계엄사령부의 계엄령 선포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한국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에 힌츠페터는 2시간만에 짐을 싸서 같은 방송국의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와 함께 5월 19일 오후 직접 서울로 향했다. 이는 21일이 되어서야 광주로 향한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다.당시의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취재하려면 국가홍보원에 신고해야 했지만, 그는 광주 취재 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예상했기에, (실제로 BBC는 광주 앞에서 막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막힌 도로 앞에서 리포트를 했다.) 아예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잠입한다. 서울로 도착한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조선호텔에 숙박하고, 5월 20일 오전 외국인 전용 호텔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은색 새한 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10] 광주로 내려갔다. 김사복은 호텔택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힌츠페터를 직접 안내했다. 처음에는 검문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의 없었다.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제지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선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고. 광주로 가는 중, 광주로 통하는 도로를 달리는 차가 자신들 말고 단 1대도 없다는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껴 그 휑한 도로를 촬영해두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로 통하는 길목은 달라서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마침내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힌츠페터는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그 결과 광주의 참상이 그의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힌츠페터는 종군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도로 비참한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학살 현장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비디오로 찍으면서, 그는 가슴이 꽉 막히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촬영을 가끔씩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슬픈데도 촬영을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자료를 모아야 하니까 슬픔과 참담하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뒤로하고 계속 찍을 수밖에 없었다. 슬퍼하기만 했다면 자료를 많이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11] 한편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삼엄한 봉쇄망의 빈틈을 뚫고 들어온 외신 기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사실 힌츠페터뿐만이 아니라 외신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에 비해서 모두 다 큰 환대를 받았다. 한국 언론들은 취재도 힘들고 해봤자 검열 때문에 제대로 보도가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폭도들이라고 왜곡하는 기사가 나올 뿐이다.[12] 그리하여 한국 기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전남도청으로 (시민군 상황실로 쓰였다.) 외신 기자들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 체류하고 있었던 외국인들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평화봉사단 직원들을 만나 사태 초기의 상황에 대해 전해듣게 된다. 이때 힌츠페터가 만난 이들은 팀 원버그[13], 폴 코트라이트[14], 쥬디 챔벌레인, 데이비드 돌린저 등이다. 이때 건물 옥상에서 이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또 그 다음날 새벽 4시경, 그는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자 재빨리 카메라를 켜고 소리를 담기도 했다. 아침이 되어 총에 맞아 숨진 두 사람의 시신을 보고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만 하루 동안 취재를 한 후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왔다. 이때 검문을 피하기 위해 1등석에 탑승했으며, 공항에서의 필름 압수를 피하기 위해 일부는 허리띠에 넣어 몸에서 떼어놓지 않게 숨겼다. 그리고 일부는 당시 서울신라호텔에서 팔던 로열 단스크(Royal Dansk)사의 파란색 버터 쿠키 통 속에 숨겼다.[15] 22일 오전 힌츠페터만 혼자 광주에서 서울을 경유해 비행기를 통해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갔고, 필름은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곧장 모국인 독일로 보내졌다. 검문을 뚫고 가는 데 시간이 걸려 21일 밤 11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필름을 넘겨주고 곧장 돌아온 힌츠페터는,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또 잠입하면서 시민 자치하의 광주의 모습을 추가로 촬영했다. 이번에는 김제에서 택시를 타고 갔으며,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 광주에 남아 있는 회사 부장을 빼오겠다"면서 군인들을 속여서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고급 차량과 외국인 두 명 그리고 호텔 택시기사였기 때문에 속일 수 있었다.
이 필름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규탄 대회(힌츠페터는 이 장면이 인상깊었다고 한다.) 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을 담았고, 힌츠페터가 될 수 있는 대로 모은 광주 상황을 보도한 외국 신문이 대자보처럼 붙여지고 관심을 갖고 이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모습이나 약탈이나 물자 부족 같은 것 없이 음식이 가득한 시장 상황, 계엄군 측과 협상하기 위해 애쓰는 수습위원회 위원들 등을 담고 있다. 당시 계엄군 측이 언론에 흘린 '폭도가 점령해 아비규환이 된 시내' 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힌츠페터 본인도 당시 광주 상황이 안전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촬영한 장면이다.
힌츠페터는 두 번째 취재 자료를 독일로 보낸 후 5월 27일 세 번째로 광주에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계엄군의 강제 진압이 이루어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그를 환영하는 인파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고.
힌츠페터의 취재와 영상자료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오늘날의 평가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진실이 알려지다
22일 일본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서독으로 보내진 힌츠페터의 필름은 22일 저녁 ARD가 서독 전역에 동시 송출하던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8시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를 통해 즉시 보도되었으며, 23일 잠입해서 찍은 필름까지 보태 후속 보도도 나왔다. 그해 9월에는 《기로에 선 한국(Südkorea am Scheideweg)》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송되었다.힌츠페터 일행 외의 다른 외신 기자도 많이 왔지만 힌츠페터 일행은 최초로 광주에 잠입한 외신 기자이며 현재 남아 있는 컬러 영상 자료의 대부분을 촬영했기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 취재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들이다. 또 한국에서 컬러방송이 시작된 것이 1980년 12월 1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약 6개월 이후라서 광주에 대해 취재한 국내 영상물의 대부분이 흑백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한뉴스는 컬러로 촬영되기는 했지만, 관제뉴스 특성상 광주의 상황에 대해 의도적으로 왜곡했기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 자체에 대한 영상자료로 쓰이지는 않고 당대 군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왜곡했는지에 대한 자료로만 쓰이고 말았다. 이렇게 힌츠페터 일행이 광주에 오지 않았으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벌어졌던 신군부의 시민 학살이 묻히고 축소되었으며 흑백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 기자를 '항쟁의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역사의 증인'이며, '계엄군', '광주시민'과 함께 항쟁을 구성하는 3개 주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광주비디오'가 되다
힌츠페터의 취재를 바탕으로 한 《기로에 선 한국(Südkorea am Scheideweg)》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한국인 가톨릭 신부들이 녹화[16]한 뒤 번역해 귀국할 때 다른 신부들에게 몰래 전달하여 한국으로 들여왔다. 장용주 신부가 들여온 힌츠페터의 다큐를 보고 김성용 신부가 오디오를 제작하는 식이었다.[17]한편 다른 외국에서도 광주의 소식은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는데, 미국에 있었던 민주구락부 교민이 소식을 듣고 세계기독교연맹 목사와 자료를 수집한 끝에 일본에 한반도 상황을 알리려고 제작한 조총련의 16mm영상을 입수하는 식이었다.[18] 마침내 ABC 필름을 입수해 비디오를 편집 및 제작했고, 한국 성우 출신 교민을 기용해 내레이션을 만드는 식이었다.[19]
이후, 힌츠페터의 취재를 비롯한 '광주비디오'들은 언론 통제하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이었음에도 은밀하게 재야에 유입된다. 이는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상영되었고, 광주의 참상을 국내에 널리 알렸다. 예를 들어 82년 5월 워싱턴으로 이주한 교민 고재형은 1985년 마침내 비디오를 한국에 밀반입하는 데 성공했고, 명동성당 청년회장이었던 기춘은 입수해서 돌린 뒤 명동성당 소성당에서 86년 5월 18~28일 동안 비밀 상영회를 열었다. 아날로그 시대인지라 비디오를 일일이 복사해야 했는데, 증폭기를 사용해 1개를 30개로 불어나게 만들면서 대략 2천 개 정도를 복제해내 전국으로 퍼지게 만들었다고.[20]
주로 외부 침입이 어려운 성당 지하나 구석진 곳에서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커텐까지 닫아서 상영했으며, 몇 명이 조를 짜서 침입에 대비하여 보초를 서기도 했다. 그러다가 걸려서 압수당한 적도 있지만, 어쨌든 이를 통해 전라도 지방에서는 80년 후반~81년 초부터 이 비디오를 몰래 보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특히 가톨릭 신자들의 상당수가 이 비디오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이후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과 문재인의 주도로 1987년 5월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최초로 정식 상영되었고, 이는 6월 항쟁에도 기폭제가 되었다.[21]
5. 이후
5공 말기인 1986년 11월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도중 사복경찰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목뼈와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22] 이 중상으로 인해 한국에서 그의 다큐를 볼 수 있을 즈음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독일에서 1년간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1995년 은퇴하고 독일에서 거주했다. 그는 광주에서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했고, "내가 한 취재 중 80년 5월의 광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잊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PTSD 수준의 트라우마가 남은 듯하다. 수술 후 섬망 증세를 보일 때 광주에서 봤던 군인의 모습을 환각으로 봤다고 한다.2004년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그가 "사후 국립 5.18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혀, 광주민주화운동 유족회 및 광주광역시 등 관련 단체들이 힌츠페터 기자의 명예 시민증 부여와 5.18 묘역 안장을 추진했다. 당시 그는 심장 질환으로 병상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병세가 위중한 상태일 때도 꼭 "나를 광주에 안장해 달라"고 수없이 되뇌일 정도였으며, 그 자신은 물론 관련 단체들도 한결같이 그의 광주 망월동 안장을 원했다. 하지만 광주광역시청에서 외국인이 광주 시내의 국립/시립묘지에 안장되는 경우는 광주에서 사망한 이에 한한다는 시립묘지 관리 조례를 들며 "현재 조례상으로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시립 공설묘지에 매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네티즌들 사이에 공설묘지에 매장했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5.18 관련 단체와 수시로 연락을 취하면서 혼수상태에 빠진 위르겐 힌츠페터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있다."고 전하고 "오는 28일 시의회 임시회에서 시조례 개정을 전제로 사고가 생기면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네티즌들은 "명예시민증을 수여해서라도 그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며 그의 망월동 안장을 허가해 달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23] 결국 시청 측에서도 "법 개정을 통해 힌츠페터 사후 5.18 묘역에 안장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힌츠페터는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이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 광주에 묻히고 싶지만 가족들이 반대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모발과 손톱 등 신체의 일부를 5.18기념재단에 전달해 수장고에 보관했었다.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한국방송기자협의회는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하였다. 또한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공로로 송건호 언론상의 2회 수상자 겸 유일한 외국인 수상자가 되었다.[24]
2016년 1월 25일 독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향년 78세. '광주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생전의 유언을 따라서 유해의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서 그를 기리는 비석과 함께 5.18 구묘역 입구에 안치했다. 유족 측에서 그의 시신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은 힘들어서 그 대신에 그의 모발과 손톱, 그리고 생전의 유품을 보내는 걸로 대신하였다고 한다. 정식 안치 행사는 2016년 5.18 기념식 때 행해졌다.
6. 극우 세력의 날조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부정하는 전두환 측이나 극 우단체들은 힌츠페터 기자를 기레기에 동독의 공작원으로 왜곡했다.[25]당연히 전두환 측이나 극우단체 측이 주장하는 내용이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만의 창작이자 역사왜곡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에 불과하다. 더 갈 것도 없이 힌츠페터는 서독에서 일한데다[26] , 베트남 전쟁 당시에 종군기자의 자격으로 갔다가 공산 북베트남군에게 죽을 뻔 했던 사람이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동독을 방문하지 못했다.
이런 비난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 그를 도운 김사복과 관련된 내용은 이 항목을 참고하자.
7. 기타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제목은 ' 택시운전사'로, 광주까지 힌츠페터 기자를 택시로 태워 준 기사를 의미한다. 송강호가 주연인 택시운전사 역을 맡았으며, 같은 독일인 배우 토마스 크레치만이 위르겐 역을 맡았다.[27]
힌츠페터 기자는 당시 광주에 들어갈 때 함께한 택시운전사 김사복을 다시 만나 그의 택시를 타고 새로워진 한국의 모습을 둘러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 택시운전사의 마지막 부분에 이를 언급하는 힌츠페터의 독일어 인터뷰가 나온다.
위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5.18 이전에도 구면이었고, 1982년경에 처음 나온 기종의 ENG 카메라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이 발견된 것을 보면 광주에 다녀온 이후에도 인연이 닿은 모양이다. 그러나 힌츠페터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한국에 거의 오지 못하는 사이 김사복이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1984년 사망하면서 서로 연락이 끊겼고, 이후 힌츠페터 기자는 평생 김사복을 수소문했음에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내 그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영화가 흥행하면서 김사복의 아들이 나타났다. 트위터에 글을 올려 자신을 알렸는데 자작극 논란도 있었지만 확인 결과 진짜였고, 아버지인 김사복은 영화처럼 가명이 아니라 본명 그대로였으며 일반 택시 운전사가 아니라 호텔택시 운전사였다고 밝혔다. 힌츠페터가 그를 찾았음에도 김사복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이미 1984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된 뒤였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복권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더욱 몰랐던 것. 사람들은 힌츠페터 기자가 살아 있는 동안 찾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천국에서나마 둘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등의 반응을 남겼다. 김사복 참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인 1987에서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을 연세대학교에서 이한열이 동아리실에서 몰래 상영한다.
당시 그가 찍었던 영상들을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가 2018년 5월 17일에 개봉했다. 감독은 2003년에 고인을 한국 언론 최초로 만났고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의 PD였던 장영주 PD. 즉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원안이 바로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인 셈. 미공개 장면들과 장영주가 힌츠페터 사후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 등이 추가되었다.
생방송 화제집중 2005년 5월 18일 1776회에서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다루었다.[28]
그가 타계한 지 5년 뒤인 2021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이 제정되어 각국의 자유와 평화가 탄압받는 상황을 놓치지 않고 촬영한 기자들에게 상을 주고 있다. 1회 시상식은 동년 10월 27일에 있었다.
8. 같이 보기
[1]
2003년에 방송한 KBS 일요스페셜에서는 위르겐을 유르겐으로 표기했다. 예전에는 일본식 표기법을 따라
ü를 '유'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2]
나치 독일 시대에 출생하였고
독일 분할 이후
서독에 있었다가
통일 후 독일 시민으로 되었다.
[방송정보]
KBS 일요스페셜(2003년 5월 18일 방송)
[4]
[5.18다큐]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by KBS광주, 2019-03-15, KBS 광주 유튜브
[5]
물론 미디어매체 출연 이전에도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1997년 출간된 ‘5.18 특파원 리포트’라는 책에 그의 증언이 실려있으며, 그 내용에
김사복 씨도 언급되어 있다.
[6]
다만
택시운전사에서 힌츠페터를 연기했던 독일 영화배우
토마스 크레치만은 벽안이다.
[7]
2022년 2월 11일 독일에서 향년 88세를 일기로 별세.
[8]
[왜냐면] 1974년과 80년, 힌츠페터에 대한 두 번의 회고 / 손규태, 2017-08-28, 한겨레신문
[9]
당시 마침 한국에 있었던
NHK 소속 PD 와타리 마사오의 취재였으며, 이는 5.18 상황을 해외에 알린 세계 최초의 외신 보도다. 그는 2020년 다큐멘터리 <광주비디오: 사라진 4시간>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술회하였다. 그 역시 서울에서 전주, 광주를 거쳐 1박 2일 동안 엄격한 검문을 거쳤고, 광주시민들로부터 밖에 상황을 좀 알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고.
[10]
공교롭게도 레코드 로얄은 독일차인
오펠 레코드를 기반으로 한 차량이었으니 힌츠페터 본인에게도 꽤 익숙한 차량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힌츠페터는 본인이 오펠 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김사복을 찾는 단서였던 호텔의 사설 택시기사였다는 점은 당시 레코드가 서울에서 모범택시 느낌으로 자주 운용되던 차량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묻히게 되었다.
[11]
출처:
5.18 힌츠페터 스토리
[12]
나중에 한 취재기자가 술회하길, 광주에서 소식을 보내도 중앙언론에서는 전혀 사실이 안 나왔다고 한다. 계엄군에 의해 도시가 봉쇄되어
신문도 안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만약 신문이 그대로 배달되었다면 광주 현지 기자들의 신변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출처: <5.18 특파원리포트>) 하지만
전파로 전달되는 방송은 막을 수 없어서 사정이 달랐고, 결국
KBS광주와
광주MBC는 왜곡보도 때문에 말 그대로 불탔다.
[13]
1993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1987년에 자신의 경험을 다룬 광주항쟁 관련 논문을 남겼다. 이는 광주의 비극에 대한 최초의 영어 보고서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광주항쟁 곳곳에 등장한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2020-05-12, 오마이뉴스,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2020-05-15, 오마이뉴스
[14]
2020년 40년만에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을 출판하였다. 한국에도 정발되었다.
40년 후 광주 할머니와의 약속 지킨 미국 청년, 2020-05-13, 오마이뉴스
[15]
위르겐의 증언에 따르면, 이 통 속에 숨긴 필름이 검문중에 결국 들켰지만, 이를 본 군인이
눈 감아줬다고 한다.
[16]
독일의 송출 방식은 PAL이고 한국은 NTSC이지만 PAL 방식 VCR을 멀티 시스템 VCR에 연결하면 녹화가 가능하다. 한국은 1993년까지 개인의 멀티 시스템 수상기/VCR 소지를 제한했는데 이 일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
제목은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이며 위의 영상 51:17초 부분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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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의 것이라 북한 영상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소행설을 전혀 안 믿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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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창기 '광주비디오'에서 남성 성우는 김응태, 여성 성우는 이유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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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비디오: 사리진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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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구에서는 부산과 달리 끝내 상영회가 무산되었다. 비디오 전달을 맡은 배급자 이도준이 검문받을 때 소지품 검사를 받으면 들킬까 봐 일부러 파출소에 길을 물어보는 척해서 에스코트를 받아 택시를 타서 검문을 피하는 등, 드라마틱한 일화까지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반발이 컸다고. 사진전은 가능했지만 상영회는 무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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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santes aus der Keksdose, 2003-12-20, Hamburger Abendl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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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들 "위르겐 힌츠페터를 허하라", 2004-05-0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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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송건호 언론상에 위르겐 힌츠페터 전 기자, 2003-11-27,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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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 사망관련 오늘 주요기사문구, 2016-02-13,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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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출생 년도는 서독은 고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나치 독일이 지배하던 1937년이다. 다만 그가 8세 시절에 나치 독일이 패망했고 12세 때 서독 정부가 출범했으므로 서독 사람이 분명하다. 34년생으로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이순재같은 사람도 (태어났을 당시 국적이었던) 일본 사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는 것처럼. 포인트는 힌츠페터는 자유주의 진영인 서독 사람으로 저렇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동독이나 공산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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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송강호, '의형제' 장훈 감독 신작 '택시 운전사'로 재회, 2016-01-07, 스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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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화제집중 1776회, 2005-05-18, i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