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1:38:37

조선지원병

1. 개요2. 상세3. 일본 특별지원병제의 채용 요건과 시험
3.1.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채용규칙의 개정
4. 조선지원병 지원 현황5.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6. 강제 모집의 이유7. 자발적 지원자
7.1. 지원 동기
7.1.1. 궁핍한 경제사정7.1.2. 조선인 권리증진
7.2. 지원자의 정체성
8. 번외편 학병 제도
8.1. 학병과 조선지원병의 차이점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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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군특별지원병제는 1938년부터 1944년 4월 징병실시까지 일본 제국 조선인을 대상으로 시행했던 제도이다. 일본군 육군은 1938년부터, 일본군 해군은 1943년부터 실시했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즉 학병과는 다르므로 주의할것.

모집 정원은 17,500명으로 이중에서 5,870명이 전사했다. 명칭은 '육군특별지원병제'가 맞으며 다만 동일한 명칭으로 대만에서도 조선을 따라 1942년부터 시행되었다. 식민지 동남아시아-인도의 경우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부대를 편성 하였다.

2. 상세

조선인에 대한 일반병 모집이 처음 거론된 것은 만주사변 직후인 1932년이었다. 여기에 앞장 선 이가 바로 일본 중의회 의원이자 대표적인 친일파 두목이었던 박춘금(朴春琴)이었다. 일자무식의 폭력배 출신인 그는 일본 우익단체인 흑룡회와 손을 잡고 조직폭력배를 운영하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며 부를 축적하였고 조선인 농민, 노동자들의 쟁의를 깡패들로 무차별 진압하는 등 친일 행위로 중의회까지 진출한 인물이었다. 1934년 2월 8일 일본 중의원에서 그는 "내선일체"의 실현을 위해 내각과 육군성에 조선인들에게도 "황군"으로서의 의무를 부여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우선 "지원병제"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여기에 대해 일본 정부와 군 수뇌부는 "조선인을 필요로 할 만큼 병력이 부족하지 않고 지원병제의 실시 역시 시기상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그의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 총독부와 조선군 주차 사령부에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여 "육군지원병제"의 실시에 필요한 각종 행정적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 직전인 1937년 6월 조선군 사령부의 명의로 육군성에 "조선인지원병제"의 실시를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또한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어용단체들은 서울에서 조선인 지원병제 실시를 촉구하는 간담회와 발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물론 이 친일파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 경쟁의 일환이지 조선인의 지위 향상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결국 일본 내각은 1937년 12월 24일 "조선인 특별지원병제"의 실시를 결정하였고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에 의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었다. 지원병령 제1조에는 "호적법(본토의 일본인에게만 적용되었다)에 적용되지 않는 17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로서 육군에 복무할 것을 지원한 자는 현역 또는 제1보충역에 편입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3. 일본 특별지원병제의 채용 요건과 시험

<colbgcolor=#f5f5f5,#191919> 채용요건 1. 17세 이상인자
2. 소학교 졸업 이상자
채용시험 1. 일본어(해독, 작문)
2. 국사(일본사) 필수
보면 알겠지만 일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과 저학력자들은 기본적으로 선발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원 및 자격 충족자 수가 예상보다 훨씬 더 저조하자 이 조건은 계속해서 낮아지게 되었다.

3.1.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채용규칙의 개정

1938년에 공포된 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채용규칙은 1940년에 개정을 하게 되는데, 이에 주목할만한 사항은, 1938년의 제1조 2항과 4항, 그리고 제출서류이다.

1938년 제1조 2항에서 신장에 대해서 160cm이상과 육군신체검사규칙의 규정에 의한 체격·등위가 갑종인 자라 하고 있지만, 1940년 제1조 2항에서는 신장에 대해서 155cm이상과 육군신체검사규칙의 규정에 의한 체격·등위가 갑종 또는 제1을종인 자로 범위가 확대된다.

또한 4항에 대해서는 “수업연한이 6년인 소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에서 “수업연한이 4년인 소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학력 커트라인이 내려간다.

게다가 1938년 시점에서 서류 5종류를 내야하는데, 지원자훈련소입소원, 이력서, 자산 및 소득조서, 증명서, 체력검사표를 내야하는데, 여기서 자산 및 소득조서와 증명서가 삭제된다. 여기서 증명서란 “주소지 또는 본적지의 부윤 또는 읍·면장의 증명서”인데, 지원자의 생계와 신원을 증명하는 서류이다. 근데 이것을 1940년에는 아예 삭제한다.

그러므로 1940년에는 지원병의 최소지원요건이 계속 내려간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일제가 원하는 만큼의 조선인 지원자(?)들이 많이 모집되지 않자 일제 스스로 광범위하게 지원 커트라인을 계속 낮추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4. 조선지원병 지원 현황

파일:1570078311.jpg
<rowcolor=#fff> 연도 채용수 응모자 배율 채용예정자(할당인원)
1938년 406명 2,946명 1: 7.7 400명
1939년 613명 12,348명 1: 20.1 600명
1940년 3,060명 84,443명 1: 27.6 3000명
1941년 3,208명 144,743명 1: 45.1 3000명
1942년[1] 4,077명 254,273명 1: 62.4 4500명
1943년 6,000명 303,394명 1: 48.2 5330명
합계(평균) 17,664명 802,047명 1: 45.4 16,830명
朝鮮及台湾ノ現状/1 朝鮮及台湾ノ現況 1 REFCODE B020312847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4700[2]

현역병은 총계 8,200명으로 '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서 6개월간 일본어와 교련, 황국화 교육을 받은 후 자대 배치가 되어 2년간 복무하였다. 이후 15,4년의 예비역 근무를 거쳐 40세(1943년부터는 45세)까지 국민역을 부담한다. 반면 제1보충역 9300명은 육군병지원자훈련소 훈련 후 일단 귀향 조치 된다. 이후 조선군사령부의 교육소집 명령에 따라 지정부대에서 3개월의 병과 교육을 마치고 제대한다. 그리고 본적지 재향군인회 소속으로 17.4년의 예비역근무, 40~45세까지 국민역을 부담한다. 제1보충역의 교육소집은 군사적필요에 따라 회수와 일수에 제한이 없었다.

병종별로 보면 현역은 보병이 6,080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제1보충역은 보병이 2,500명인데 반해 치중병이 무려 4,850명이나 되었다. 현역은 1938~39년에는 관내의 조선군 상주 제19, 20사단에 배치 되었고, 1940년에는 관동군, 42년에는 지나방면군, 43년에는 일본 본토의 동부군, 중부군, 서부군까지 배치범위가 늘어 났다.

누적 응모자 약 80만 명에 총 17,664명을 뽑았다. 외관상의 경쟁률를 보면 대략 30~50 대 1의 수준으로 상당한 수치이다. 다만 저 누적 응모자 80만 명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수치이다. 아래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항목을 참고할것.

대만의 경우 3년간 4200명 모집에 1,486,344명이 지원하여 지원률 353.9배에 달했다.(별도로 모집한 대만 원주민 800명 T/O는 지원률 불명) 당시 대만의 17~30세 남성 인구가 60만명이었으니... 각자 2.5번씩 지원한 셈. 아니 보통학교 취학률이 60%였으니 자격요건이 되는 대만 청년이 3년간 각자 3번씩 지원해도 저 수치가 안나온다.

5.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

여기에서 말하는 '지원'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하여 지원병에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본 천황을 비롯하여 육군성과 조선총독부에 의한 강제력이 내포된 것이었다. 지원병의 정원 결정은 조선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일본군에서 책정되었고, 모집 방식에서도 도별 할당에 의해 모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ㅡ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 48p. (저자: 표영수)
우선 위에서 언급된 표를 보면 40년을 기점으로 응모자수가 폭증하는데 이는 권력측으로부터의 철저한 강제가 취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1941년의 응모자의 경우 자발적 지원자는 35% 정도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관청의 총력전과 같은 종용에 의한 것이었다.[3]

덕분에 통계상 자원자수는 매년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대부분 온갖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자원서를 쓴 사람들 즉, 허수들이었다. 1941년 조선총독부가 일본 제국의회에 제출한 통계에서도 전체 지원자 가운데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은 35퍼센트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지원한 자들이었다. 심지어 이조차도 조선총독부가 체면 치례를 위해 "다소" 숫자를 조작한 결과였다. 따라서 진짜 자신의 의지로 지원한 사람은 그보다도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일본육군의 업무일지인 육군성 업무일지 적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육군성 국장회보에서의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과 다나카 류키치 병무국장의 응답(1941년 4월 16일)

(군무국장)
조선의 징병제도, 및 타이완에서는 지원병 제도에 대한 요망 높음[4], 이는 정치상의 문제도 있으므로 검토하고자 함.

(병무국장)
조선의 현재 지원병 제도는 그 실질을 감안할 때 진실로 지원하는 자가 반드시 많은 것은 아니며 강압에 의해 부득이하게 지원하게 되는 자 많음. 따라서 징병제 시행을 크게 고려할 것을 요함
ㅡ '일본의 군위안부 연구' (저자: 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

당시 일본군 내에서도 지원병 중 상당수가 일제 권력기관의 강제에 의해 '지원 아닌 지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몇 가지 더 있다. 일제의 조선인 지원병, 그들은 왜 일본군이 되었는가
현재 지원병 제도가 거의 지원동기가 불순하고 권력에 눌려서 낸 자도 있으며지원병 대부분이 지방관청의 모집률 통계 다툼에 의한 것으로 룸펜(Lumpen)군과 같이 보이지 않을까 우려되며 명예로운 황군사상에 큰 오점을 남기니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하는 잡지 <동아연맹>에 기재되었다가 '조선 내의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삭제 처분을 받은 기사)
ㅡ 樋口雄一, 『皇軍兵士にされた朝鮮人-十五年戰爭下の總動員體制の硏究』, 社會評論社, 1991, 93쪽.
징병제 실시 이전까지 군사동원은 모두 ‘지원’의 형식이었다. 하지만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일제의 행정·경찰 기구가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제출한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보면, 1941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총 지원자 145,04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한 자는 50,184명이고, 관청의 종용에 의해 지원한 자는 79,672명, 기타 15,190명으로 나타났다.
ㅡ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조선총독부 제국의회 설명자료』 6, 不二出版社, 1994, 104쪽.
제81회 제국의회 귀족원위원회 속기록에는 이러한 내용도 나온다.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5]“지원병제도에 경찰의 압박이나 학교 생도의 가족이 협박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하자 당시 정무총감 타나카 타케오(田中武雄)가 이렇게 대답한다.
“(전략)一部遺憾な事例もあるやうであります、併し将来は左様なことのないやうに、適正に運営して参りたいと斯様に存じて居ります、(후략)”
“(전략)一일부 유감스러운 사례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러한 것이 없도록 적절히 운영하여 가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략)”
이렇게 대답한 이후, 타나카 타케오는 지원병 보도에 관해 '수십만의 지원자가 있었다.'와 같은 신문보도(新聞に何十萬志願者があったと云ふやうなことを余りに書くことは)에 대해서는 유의하고 있으며, 일시적으로 속기를 멈춰달라 요청한다. 이후 속기록에는 미즈노 렌타로의 다음과 같은 답변이 나온다.
“大変胸襟を開いての御話を色々と伺って能く分かりました”
“가슴 속의 이야기를 여러 이야기 해주셔서 잘 알았습니다.”
위 내용은 동경대학출판회의 제국의회귀족원위원회속기록 쇼와편 복제판 104권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작성한 특고월보의 쇼와 16년(1941) 12월분에는 지원병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이나 자발적 지원자들 중에서도 지원동기가 '불건전'한 자가 많음을 언급하는 증언들이 있다.
“(전략) 志願適令期になっても希望せず勧誘するも言を左右にして逃げる者が多く志願者と雖も満期後就職を有利に斡旋され或は社会的地位を得る等の野心を以て志願するので真に愛国心に燃えて居るものではない (후략)”

“(전략) 지원적령기가 되어도 희망하지 않고, 권유하는 말에도 어물쩍거리며 도망가는 자가 많고, 지원자라고 해도, 만기 후 취직을 유리하게 알선 받기 위해 또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등 야심을 가지고 지원하기 때문에 진짜 애국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후략)”

- 제 1기 지원병
“(전략) ○真面目に働いて居る者に対しては制裁を加へることか。
○朝鮮語の使用を禁じられて居るに拘はらず敢て朝鮮語を使用することか。
○教官に対して故意に欠礼するとか。
○現役二ヵ年在営を嫌ひ短期を希望するとか。
誠に面白からざるものがあった。之が原因は一躍一千名以上の多人数を収容したのに対し教官が不足せることと各道より半強制的に募集した結果であって、将来訓練上相当考研する必要があると思ふ。(후략)

“(전략)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제재를 가하는 것이라든지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상관없이 구태여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이라든지
○교관에 대해서 고의로 결례를 범하는 것이라든지
○2년 동안의 현역기간을 싫어해 단기를 희망하는 것이라든지
정말로 바람직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이 원인은 일약 천명이상의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에 있어서 교관이 부족한 것과 각도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모집한 결과로, 장래에 훈련상 상당히 참고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후략)

- 제 2기 훈련생
“我々は志願兵制度に応募する気持にはなれない。何となれば現在の各層を見るに悉く内鮮人間に差別待遇があり、甚しきは内地婦女子迄が鮮人を軽蔑して居る現状である。これではとても軍人となり国家の為に生命を賭すると云ふ気持には到底なり得ない。最近志願兵募集に当り各地共青年に対し半強制的に応募を從慂して居るが、之が皆逆効果を来たして居る様だ。”
“応募者の地方頒布状況を見ても都会地の青年よりも田舎の淳朴な青年が多く又中等学校卒業者が少ないのを見ても知識階級は之を喜ばない傾向にあることが窺はれる”

우리들은 지원병제도에 응모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각 계층을 모두 내선인 간의 차별대우가 있고, 심하게는 내지 부녀자까지 선인을 경멸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군인이 되어 국가를 위해 생명을 걸 기분이 도저히 나지 않는다. 최근 지원병 모집에 있어서 각 지방공동체 청년에 대해서 반강제적인 응모를 종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부 역효과를 불러오고 있는 것 같다.
응모자의 지방분포상황을 보더라도 도회지의 청년보다 시골의 순박한 청년이 많고, 또한 중등학교 졸업자가 적은 것을 봐도, 지식계급은 이것을 반기지 않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 금융조합서기 모
“私が帰鮮中、村でも三十人余りの志願兵応募者の割当を受けて居るが、それ丈の人数が如何にしても出来ないしそれでは村の名誉にも拘はるから、お前は三十五歳以上で不合格になることは判つて居るが名前だけ是非貸して呉れと頼まれたので貸したが其の後街頭へ出て見ると成程募集に苦心して居る様な宣伝ビラが沢山貼られて居るのを見受けた。斯様な事は独り私だけでなく他にも幾多あつた様に聞いて居る。未だ未だ半島人は心から応募しやうとするものは少ない様だ”

내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중, 마을에서도 30명 정도 지원병응모자의 할당을 받고 있는데, 그 정도의 사람 수가 어떻게 해도 안되고, 그러면 마을의 명예에도 걸리니까, 너는 35세 이상으로 불합격일 테니까, 이름만 그냥 빌려달라고 부탁받았기에 빌려줬지만 그 후에 길거리에 나가보니, 정말 모집에 고심하고 있는듯한 선전삐라가 많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많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직 반도인은 진심으로 응모하려 하는 자는 적은 모양이다.

- 시가현 고용인 박춘웅
“朝鮮では男兄弟二、三人あれば必ず一人は兵隊を志願しなければ非国民のように云はれるので、止むなく三十歳前の人は志願せねばならないと云ふ事である。先日も父から手紙が来て『お前は帰国すると兵隊を志願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帰つて来ないように』と云ふ意味の事を言つて来たので自分も暫く帰らない考へだ”

조선에서는 남형제가 두세 명이 있으면 반드시 한 명은 군대에 지원하지 않으면 비국민이라고 불리므로, 부득이하게 30살 이전의 사람은 지원해야만 한다. 요전번에도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와서 "너는 귀국하면 군대에 지원해야만 하니까 돌아오지 말라."고 하셔서 나도 당분간은 안 돌아가려고 생각했다.

- 이와테현 고물상 이사용
“(전략) 又総督府は必要数丈は容易に得られるのであるが各道に責任数を割当て居り後に之を講評するので警察は勢ひ強制的に募集する様になり茲に無理が生じ入隊しても挨拶も出来ない様なものが入り、内地人軍人から馬鹿にされ延ては帝国軍人の内容と素質を低下させる様なことにもなる。又一面知識階級者は志願を忌避すると云ふ傾向に流れて居り少し金持の所では無理しても子供に上級学校に入学させると云ふ傾向があり思想的に面白くないのであるそこで私は彼等を真に皇民化するには義務教育の徹底と徴兵令の施行を要望するのである”

(전략) 또한 총독부는 필요인원만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각도에 책임수를 할당한 후에 이것을 부석하고 평가하므로, 경찰은 당연히 강제적으로 모집하게 되어 여기서 무리가 생겨, 입대하여도 인사도 못하는 자가 들어가, 내지인군인으로부터 바보처럼 돼서는 제국군인의 내용과 소질이 저하되게 된다. 또한 한편은 지식계급자는 지원을 기피하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고, 조금이라도 돈이 있는 곳에서는 무리해서라도 아이들을 상급학교에 입학시키는 경향이 있고, 사상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서 나는 그들을 진짜 황국화시키기 위해서는 의무교육의 철저와 징병령의 실행을 요망하는 바이다.

- 조선인장교 모
“志願兵制度が実施されてから毎年三千名宛募集して居るが其の結果は余り良好とは申されない。その原因は志願する者が余りに好条件を予想して入って来るからだと思ふ”

지원병제도가 실행된 후부터 매년 3천 명을 모집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별로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원인은 지원하는 자가 너무나 호조건을 예상하고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내지인장교 모
“新聞等では志願兵が殺到して居る様に書いて居るが実際は警察や其他で強制的に応募して居る実情で内地人が見て居る程に信頼することは出来ない。彼等は機会あらば独立運動をしやうとする不逞者が居ると思はねばならない”

신문 등에서는 지원병이 쇄도하고 있다고 쓰고 있지만, 실제는 경찰이나 그 외로 인해 강제적으로 응모하고 있는 실정으로 내지인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이는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기회가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려하는 불령자가 있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 내지인 국민학교교원 모
ㅡ [特高月報] (1941년 12월호), <四,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이처럼 지원병제도가 할당량 채우기 식으로 강제적으로 진행된 결과 지원자원들은 대부분 형편 없었으며, 그에 대해 일본 내무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혹독한 평가를 내려야만했다.
1. 응모자는 진심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지원하였다.
2. 응모자 중 유식자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대다수가 농촌청년이다.
3. 응모자는 좋은 조건에 유혹당하고 제대후 자기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사람들이다.
ㅡ [特高月報] (1941년 12월호), <四,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이상의 증언들과 기록들을 통해 결국 지원병으로서도, 조선인으로서도, 내지인으로서도 지원병 수가 굉장히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결과는 일제 당국으로서도 큰 충격이었는데, 의회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으며 총독부는 준비 부족을 이유로 들었다. 또한 <동아연맹(東亞聯盟)>이라는 잡지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가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삭제조치되기도 했다.
"현재 지원병 제도는 거의 동기가 불순하고 권력에 눌러 마지못해 낸 사람도 있으며 또 지원병 대부분이 지방관청의 경쟁에 의한 것으로 부랑자 군대같이 보이지 않을까 우려되며 명예로운 황군사상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다."
- <동아연맹(東亞聯盟)>

이런 실태인데도 친일파 단체인 조선지원병후원회의 회장 윤치호는 1940년 7월 "지원병 부모에게 고하는 글"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지원병제도가 실시된지 3년만에 지원자수가 전 조선에 10만명을 돌파했다고 하니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시아 신질서 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조선 청소년들이 대화족남아(일본청년을 의미)와 일체가 되어 참가하게 된 것은 참으로 경하할 일"이라는 망언을 일삼았다.

그외 구체적인 입대 동기를 보자면 대지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지원병 2기생 오종철은 "조선인이라 자각하고는 있었지만, 일본국민의 일원으로 군대에 가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으로 세뇌되어 있었고, 이미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라며 일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입대하였다.

반면 같은 지원병 2기생 김시형은 모친이 무허가 노상영업으로 군산경찰서에 연행되자, 경찰서에서 모친 방면을 조건으로 육군특별지원병 지원을 강요하였다. 그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불효자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지원서를 제출하였고, 모친은 15일 만에 귀가 하였다. 당시 지원율이 20대1에 달했는데도 반강제로 끌고 간 것은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경찰서별로 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원병중에는 일부 친일파도 있었고, 반강제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지만 강요에 의한 비자발적인 지원이 훨씬 더 많았으므로 전체적인 지원률 자체는 크게 과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강제 모집의 이유

일제가 조선에서 강제로 지원병을 모집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일부 일본인들이 이야기하듯이 조선인 지원병 수 자체가 조선인의 애국심(일본에 대한)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자 수를 늘리기 위해 여러 회유책과 선전, 광고 심지어 '강요'까지도 이루어졌다.[6] 그런 이유 때문에 일제는 일본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하면 제대후 공무원의 특채까지도 미끼로 사용하면서까지 지원병의 수 부풀리기에 나선 것이었다. (지원병에 대한 지원은 해당 경찰서에서 지원을 받는 방식이었음)

당연하지만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인의 사상자 또한 점차 늘어났다. 일본인들 역시 징집되기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조선인들이라고 다를리가 없었다. 더욱이 "일본이 조선인들을 총알받이로 쓰려고 한다"라는 소문이 돌면서 자발적인 지원자는 점점 감소하였다. 하지만 조선 총독부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주도하여 실시한 정책이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은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일본 관료들에게는 체면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따라서 각 지방 행정기관에 목표인원을 강제할당하고 향촌의 친일세력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게다가 어차피 육군에서 채용할 인원은 한정되어 있음에도,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게 지원자수를 늘리려고 온갖 경쟁을 벌였다. 단순히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한다는 목적을 넘어서 의도적으로 경쟁률을 높인 것은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각을 보여주겠다는 현지 관청들의 과당 경쟁의 결과였다. 이들은 사전에 지원 자격에 해당되는 이들을 선별한 후 명부를 만들어 해당 가정을 방문하여 지원할 것을 종용하였다. 예를 들어,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에 재학중이다 지원병으로 끌려간 김익권이라는 사람은 아버지가 이렇게 하소연했다며 회고하였다. "고등계 경찰이 뻔질나게 찾아와서 너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치니 살 수가 없다. 우리 집안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치고 네가 지원해라. 내가 지원서에 이미 대리로 사인했다" 일본의 방식이란 바로 이런 식이었다.

결국 위의 증언들과 기록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 지원병제도는 지원을 억지로 강요당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나 불령선인(不逞鮮人)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본인들의 입장[7]에서나 둘 다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제도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물론 총독부와 일제 또한 이런 불만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사기 고양을 위한 선전 선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런 제도를 계속 운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지원자격 즉, 커트라인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면서까지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억지로라도 유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은 1944년 징병제로 완전히 전환되기까지 지속된다.[8]

7. 자발적 지원자

모집 과정에서 일선 관청과 경찰에 의한 할당량 및 실적 채우기성 강요로 지원율이 굉장히 과장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자발적 지원자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의하면 전체 41년도 총 지원자 중 35%인 약 5만 명은 자발적 지원자였다.[9] 또한 최종적으로 선발된 약 1만 7천여 명은 일본군이 철저하게 검사하여 선발한 인원이기에 자발적 지원자도 분명 존재했다.

7.1. 지원 동기

7.1.1. 궁핍한 경제사정

吾々は志願者をその環境乃至素質の面から眺めて見て、そこに[ruby(幾許, ruby=いくばく)]の[ruby(寂寥, ruby=せきりょう)]を感じざるを得なかったのである。即ちこれ(引用者註:志願者)を職業別に見ると、その八、九割以上は小作農民であり、その他は若干の事務員、官公吏員を除いては、給仕小使傭人であり、学歴より見るも中等学校卒業者または中途退学者は実に[ruby(微々, ruby=びび)][ruby(寥々, ruby=りょうりょう)]たる実状であり、名門出の子弟有力者、資産家、知識階級の子弟は更に稀なる情況であり、ここにも半島の伝統的兵役に対する観念の反映を見たのである。

우리는 지원자를 환경 혹은 소질의 측면에서 바라보았고, 그것으로부터 약간의 씁쓸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인용자 주: 지원자)를 직업별로 보았을 때 그들 중 80%, 90% 이상은 소작 농민이었고, 나머지는 몇 명의 사무원,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급사 사환 고용인이며, 학력으로 보아도 중등 학교 졸업자 또는 중도 퇴학자는 참으로 미미한 실정이며, 명문가 자제 유력자, 자산가, 지식 계급의 자제는 더욱 드문 것이 현실로, 여기서도 반도의 전통적인 병역에 대한 관념의 반영을 본 것이다.
ㅡ 朝鮮総督府 陸軍兵志願者訓練所 『志願兵を訓へて』 雑誌『朝鮮』1940年4月号、p60
ㅡ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 <지원병을 가르치며> 잡지 『조선』1940년 4월호 60페이지
入所者を職業別に見ると…(中略)…大部分は農業者にして残余が官庁の給仕小使その他傭人等によって占められ、将来半島の青年層に働きかけ得る実力を有する地位の者が未だ非常に少ないのである。この情況は入営の学歴にも現れて、中等学校卒業者等はその数ごく僅少にて、未だ半島が真に兵役の崇高なる[ruby(所以, ruby=ゆえん)]を理解するの域に達せず….

입소자를 직업별로 보면...(중략)...대부분은 농업자로, 나머지가 관청의 급사, 기타 용인에 의해 채워지며, 장차 반도의 청년층을 이끌어갈 실력을 가진 지위에 있는 자가 아직 매우 적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입영자의 학력에도 나타나, 중등학교 졸업자 등은 그 수가 극히 적으며, 아직도 반도가 진정으로 병역의 숭고한 사유를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후략)...
ㅡ 海田要・陸軍兵志願者訓練所教授 『志願兵制度の現状と将来の展望』 『今日の朝鮮問題講座』第3巻収録 1940年、P5-16
ㅡ 우미다 가나메 육군병지원자훈련소 교수 <지원병제도의 현황과 장래의 전망> 『오늘의 조선문제강좌』제3권 5~16페이지, 1940년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에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최대원인은 조선 농민들이 처한 극한 궁핍이었다. 빈곤으로 소학교 이상으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지만,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소작농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던데 조선인 청년들의 가장 흔한 지원 이유였다.(미야다 세즈코,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

실제로 지원병이 될 경우 여러 가지 특혜도 주어졌는데, 제대 후 이들을 황민화의 지도자나 경찰, 공무원 등으로 채용할 계획이었다. 일본은 이런 우대 정책으로 중류층이상의 자산을 가진 친일파 지식인계층의 자제들이 대거 지원하리라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지원자의 90퍼센트 이상은 소작농 출신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단지 미래가 없는 농촌에서 평생 남의 땅을 부쳐 먹는 신세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즉, 어떻게든 군복무를 마치고 상등병으로 제대만 해도(물론 상등병 제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각종 사회적 지위상승과 경제적 혜택이 있었고 설령 전사한다 해도 영웅시하고 유가족에 대해 적극적인 우대책이 있다고 선전되었으니 빈농출신 조선인 저학력자들이 그 유일한 출세길을 잡아보고자 눈에 불을 켰던 것이었다.

이러한 궁핍한 경제적 요인과 제대 후의 여러 혜택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원하는 경우들이 많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것이 바로 1942년의 채용자 숫자인데
<rowcolor=#fff> 연도 채용수 응모자 배율 채용예정자(할당인원)
1938년 406명 2,946명 1: 7.7 400명
1939년 613명 12,348명 1: 20.1 600명
1940년 3,060명 84,443명 1: 27.6 3000명
1941년 3,208명 144,743명 1: 45.1 3000명
1942년[10] 4,077명 254,273명 1: 62.4 4500명
1943년 6,300명 303,394명 1: 48.2 5330명
합계(평균) 17,664명 802,047명 1: 45.4 16,830명
朝鮮及台湾ノ現状/1 朝鮮及台湾ノ現況 1 REFCODE B020312847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4700[11]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그 다음 해인 1942년의 '진짜 지원자'들의 지원률이 대폭 폭감하여 유일하게 할당인원조차 채우지 못하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원래부터 지원자 숫자 자체는 일제의 반강제적인 할당에 의한 모집 방식이어서 수치상으로는 줄곧 많아보였지만 진심으로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진짜 지원자'들의 숫자는 항상 적어서 딱 할당인원 만큼만 가려서 뽑아왔었는데 그 할당 인원수 조차 채우기 힘들 만큼 자발적으로 지원한 '진짜 지원자'들의 수가 폭감하였던 것이다. 즉, 전역 후의 여러 혜택들을 잔뜩 기대하고 지원을 하다가 미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무사히 전역하는것 자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진짜 지원자'들의 지원률이 대폭 폭감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지원병 지원의 이유에 대해 아래 이유들을 그 원인으로 설명한다.
  1. 지원자 수 할당 등 강제적 조치
  2. 지원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조치 (병역을 마친 이는 경찰, 소방 등에 채용, 가족에게 자금 융통 등)
  3. 어려운 경제사정에 따라 군대에서 호구책 마련

이 중 2번과 3번은 경제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식민지 인도군을 월급과 연금, 농지 지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경제적 이득으로 모집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병졸들의 월급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밥만 겨우 먹여주는 수준이었다. 일본의 가난한 농민들은 군대에서 처음으로 고기를 먹어봤다고 하고,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군의 빈약한 식단에 배고파서 크게 고생한다. 그러니 직접적인 금전적 이득 보다는 사회적 이득이 더 컸다.

그리고 이 때문에 당대 식민지 조선의 상류층에서는 아예 지원자가 없었다. 지원자들은 부유한 지식인 계층의 자제들, 도시 출신, 자산가 계층은 거의 없었고 농촌의 가난한 소작농 출신들이 다수였다. 학력 역시 80% 이상이 지원 커트라인만 간신히 넘긴 소학교만 근근히 졸업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입대했다고 볼 수 있다.

7.1.2. 조선인 권리증진

조선의 지식인들 중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조선인의 대우를 향상시키는 일이라 믿었던 사람들 역시 지원을 독려했다. 다음 우수용의 회고록을 참고하자.[충성과반역]
그런데 그 무렵부터 저희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바로 대놓고 '조센진(朝鮮人)' 하고 민족을 비하(卑下)하여 부르던 그들이 그 말을 쓰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고, 대신 지역을 말하는 '한토진(半島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너희들에게도 곧 참정권이 주어져서 우리들과 같은 권리행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 친구가 늘어났습니다. 저는 저희들에게 주어진 병역 의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대가로 뒤에 남은 동족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징집 영장이 바로 오지 않고 본적지 면사무소에 와서 영장을 받아 입대하라는 면장으로부터의 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처음 보는 고향 면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송행사에 다른 입대 장정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고향 어른들이 저희들의 장도를 격려해주셨고, 고향 후배인 학생들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입대하였습니다. 기왕에 죽을 바엔 일본인 병사들보다 더 용감하게 죽어서 조선 젊은이의 기개를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사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이 반민족행위자인 저의 변명의 전부입니다.
ㅡ 우수용 선생 회고 중 일부 발췌 출처

7.2. 지원자의 정체성

小学校卒業者で、まして陸軍兵を志願する者が、日本の国柄の万国に優れた点を問われて行き詰ったり、教育勅語中一番大切な箇所を問われて的外れな答をしたり、皇国臣民の誓詞が言えなかったりしては、むしろその不用意さに驚くの外はない。
右の国家観念に関する問に対し、答えられる者も相当あるが、しかし中には棒暗記的あるいは一夜造りの準備的とって置きの答をする者がある。

소학교 졸업자인데다 하물며 육군 병에 지원하는 자가 일본의 국체가 만국(다른 여러 국가)보다 뛰어난 점을 묻자 답을 하지 못하거나, 교육칙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묻자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황국신민의 서사를 말하지 못하거나 해서는, 오히려 그 부주의함에 놀라울 수밖에 없다.
오른쪽[13]의 국가관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도 꽤 있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기계적으로 암기했거나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낸 모범 답안을 말하는 자가 있다.
ㅡ 陸軍兵志願者訓練所 塩原所長談話  雑誌『朝鮮』1939年1月号、p60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한 사람들 대부분은 보통학교만 졸업한 사람들로, 80~9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일제의 교육을 받은 중등학교 이상 졸업한 사람들이나 소작농이 아닌자들 즉, 당시 지식계급들은 오히려 일본군에 지원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지원하는 자들도 '애국심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위해 야심을 갖고 지원한다', '호조건을 예상하고 들어온다' 등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를 볼 때 지원자들은 일본에 대한 애국심이나 일본인 정체성보다는 입대에 따른 경제적 대가나 명예를 보고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8. 번외편 학병 제도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병력 자원의 확보를 위해 1942년 5월 9일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징병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10월 20일에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 채용규칙(육군성령 제48호)>이 공포되어 그동안 병역을 면제하고 있던 대학생과 전문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말이 지원이지 온갖 강압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11월 12일까지 자원율은 38%에 불과하였다. 나머지에 대해서도 일괄 휴학 처리 후 강제 입대 또는 공장, 광산 등에서 근무토록 하였다.

8.1. 학병과 조선지원병의 차이점

지원병의 경우 장교가 아닌 을 받았고 이들 중에는 종전 당시에 하사관까지 진급한 인물들도 있었다.[14] 건군기 군사영어학교에서 강제징병으로 오느라 응집력이 약했던 학병 출신들과 달리 지원병 출신들은 서로 동질감이 강해서 뭉쳤다. 만주군 군맥(軍脈)과 비슷한 경우였다.

학병들의 경우 해방 이후 고등교육을 받았고, 억지로 끌려갔다는 명분이 있는 학병파는 모임도 갖고, 책도 써냈으며[15] 무엇보다 당당했다. 하지만 지원병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회고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지원했다는 부끄러움에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대한민국 수립 이후 장군까지 승진한 지원병 출신들은 회고록을 쓰는데 지원병 시절은 당연히 스킵.

일제는 1944년부터 징병제를 적용했는데 그 전인 1943년에 전문학교 등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학병을 뽑았다.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유학생을 강제로 뽑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학병은 강제입대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는데 육군 장교는 사회적 자원으로 뽑아갔고 주로 훈련 중에 낙마한 이는 강제로 육군 으로 복무시켰다.

이처럼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때문에 입대에 대한 회피와 저항이 있었다.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도 함경북도 청진 검사국[16]의 보고에 의하면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는 도내 겨우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다른 대부분은 모두 농후한 지도적 격려를 더하면서 결의 지원한 자”라고 하였고
ㅡ 高等法院檢事局, 「臨時陸軍特別支援兵の動向一斑」, 『朝鮮檢察要報』 1, 1944. 3, 2쪽.
교련 교관: "황국신민이라면 지원해!"
(마음속으로): "물론 아니지, 황국신민이 뭐야? 이 미친놈들아!"
교련 교관: (지원자가 없자 일본도를 빼들며)"지원하지 않는 자는 일본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오늘 목을 잘라 버리겠다! 그런 놈은 죽여 버려야 해!"
ㅡ <학병>, 손종영, 2008년, 60쪽.
일본은 계속해서 필리핀, 월남,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뉴기니아, 그리고 진주만 폭격으로 전쟁을 벌여 나갔는데 그래서 병력이 많이 소모되고 모자르게 되어 결국 대만과 한국을 황국신민화시키고 실업학교[17]를 많이 만들어서 한국인구 2천만에 2백만을, 대만인구 8백만에 1백만을 전쟁에 동원하자는 계획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도 태능에 지원병 훈련소를 만들어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전문대학에 다니는 인문계통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것이 생겼는데 말이 좋아 지원병이지 실제로는 강제징발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때 나도 강제지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원에 응하지 않으면 공민권 박탈은 물론이고 만주벽지 탄광에 노무자로 보내느니 식구들 사업도 방해하고 또 공무원도 못하게 되어 있어 마지못해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 25연대장, 김병휘 장군 인터뷰 중. 월간 군사세계.
첫번째 인용문을 살펴보면 함경북도 청진 검사장에서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 의사"에 의한 자는 10명도 채 되지 않으며 "다른 이들은 모두 '지도적 격려'를 더하여 결의 지원한 자"라며 타의에 의한 강요임을 에둘러 보고하고 있다. 물론 다른 지역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심지어 두번째 인용문에서 언급한 '농후한 지도적 격려'는 더욱 살벌한 것이었다. 손종영이 다니던 경성고등상업학교의 경우 결국 조선인 20명이 모두 지원서를 쓰게 되었다. 눈앞에서 일본인 교련 교관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안쓰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데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자인 손종영은 시골로 도망갔는데 본인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지만, 일본 경찰이 가족까지 압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경찰서에서 다시 한번 지원서를 쓰고 모두 다 함께 1944년 1월 20일에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구체적인 저항도 있었는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이런 학병 거부자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학병에 강제지원하기 싫다고 에 들어간 사람들 얘기가 바로 여기서 유례한 것이다.
215p.
학도지원병은 말로만 지원병이었다. 이 (학도)'지원'병은 부모,형제,처자에 대한 위협과 공갈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북 의성 출신 오탁근은 명치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교련교관, 의성경찰, 헌병 등이 총동원되어 가족을 위협하고 협박했다. 조선-일본간의 연락선은 물론 철도의 승차권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어 학병 '지원' 여부를 검사했다. 가족들의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학병들은 학병거부 및 도피를 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16p.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가기 싫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학병 해당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 파괴한 후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 등 학병 60명이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서재균 등은 재동파출소를 습격했으나 학도지원자라는 이유로 문책받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경성제국대학 이혁기, 보성전문 이철승 등이 주동이 되어 학병 거부를 주도하며,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ㅡ 정병준 교수 저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학병은 전문, 대학재학 이상의 고학력자들 위주였고 지원병은 기껏해야 소학교 졸업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자녀에게 그런 고등교육을 시킬수 있는 집안이 과연 가난한 집이었을까? 학병들은 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먹고 살만한 집안이었고, 반대로 지원병은 80~90%가 소작농 자제로 그들의 선대들은 지주가 다수인 학병의 선대들에게 착취당하던 사람들이었다.[18] 고학력인 학병에 비해 지원병들은 중학교 졸업자도 드물었다. 반면 당시 소학교 취학률이 30%밖에 안되는 시기라 지원병이면 사회적 최하층민은 아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학병을 거부하였다가 잡혀온 응징 학도 150명이 1944년 1월 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서 2주간의 황민화 교육을 수료하며 아리랑을 불렀다. 그러자 지원병 출신의 조교 송요찬이 두발로 땅바닥을 차면서 "이 조선반도는 대일본 제국의 영토다. 이곳에 살고 있는 너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거룩하게도 천황 폐하의 황은을 입고 있음에 보답하여야 한다. 이 반도에서 생산되는 쌀은 천황폐하의 쌀이다. 너희들은 일본의 쌀을 먹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국민의 3대 의무인 병역을 기피했으므로 비국민인 것이다. 너희들은 병역을 마쳐야만 일본인다."라며 고성을 질렀다. 학병과 지원병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참고로 여기서 언급된 조교 송요찬은 해방 후 제11대 육군참모총장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들은 귀환하게 되는데 규모는 약 6천 명 수준이었다.

9. 관련 문서



[1] 유일하게 할당인원을 채우지 못한 해이다. [2] 참고로 일본 육군의 조선지원병 통계이다. 해군은 통계자료가 명확치 않다. [3] (표영수,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 [4] 대만에서는 1942년이 되어서야 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다. 한족이 대다수인 대만인 중일전쟁에 투입되면 배반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5] 조선총독부 제 2대 정무총감이었고, 문부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6] <志願兵制度に對する朝鮮人の動向> ('特島月報' 1941年 11月號) ; '第81回 帝國 議會 貴族院予算委員會 第3分科會議速 記錄' 第2號 (1943年 2月 26日字) [7] ​원래 일제는 조선인들에 대해 심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헌병 보조원 같은 치안 유지 이외에 일본군에 식민지 조선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신성한 황군을 더럽힌다"라며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깊은 불신감과 우월의식, 이들에게 병역을 부여한다면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될 것, 이들이 자칫 반란을 일으키거나 집단으로 무장 탈영하여 만주의 항일단체에 가담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실제로 1938년 조선인 지원병제가 처음 실시되었을 때 조선인 지원병들을 중국이나 만주에 보내지 않고 조선 주둔 제19사단과 제20사단에만 배치토록 한 것만 봐도 당대 일본인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불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인이 정식으로 배치되기 시작한 때는 1941년부터였다. 1942년에는 화북에도 배치되었고 1943년부터는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 남방전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에 조선인들을 배치하였다.) [8] 일제는 1944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1945년 8월까지 총 38만 5천여 명의 조선인이 군인, 군속으로 징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끌려갔다. 이 중에는 군인 20만9천명(육군 18만7천명, 해군 2만2천명), 나머지는 군속이었다. 이들 가운데 21,699명이 전사하였다. 또한 약 5만명 이상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으며 후생성 통계에 따르면 1100명이 전사하였다. 우리 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 전범들과 함께 합사되어 있다. [9] 하지만 이 비율 조차도 조선총독부가 체면 치레를 위해 "다소" 숫자를 조작한 결과였었다. [10] 유일하게 할당인원을 채우지 못한 해이다. [11] 참고로 일본 육군의 조선지원병 통계이다. 해군은 통계자료가 명확치 않다. [충성과반역] 정안기 [13]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세로쓰기이므로 앞부분 서술이 오른쪽에 있다. [14] 지원병 1기생의 경우 준위까지 달았다. 함병선의 경우 1938년 12월 1일 입대하여 1943년 12월 1일 하사관 최고 계급인 조장으로 승진하였고, 일제 패망 이후 준위로 전역하였다.(학병은 역사가 너무 짧아 패망 이후에야 소위로 진급했다.) 2기생은 조장까지 승진한 예가 있다. [15]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문서를 보면 나오는데 주로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수기이다. 학병은 워낙 탈출을 많이해 탈출 수기만 수십권에 달한다. [16] 현재의 검찰청에 해당. [17] 구제전문학교는 국내에서도 남아있다. 부산고등수산학교(현 부경대), 수원고등농업학교( 서울대 농과대), 대구농업전문학교( 경북대 농과대), 경성약학전문학교( 서울대 약학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 치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통합),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 광산전문학교(서울대 공과대학), 평양공업전문학교등이 당시 일제가 만든 전문학교들. [18] 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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