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0:06:16

한국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에서 넘어옴
1. 개요2. '시대별' 독립 운동
2.1. 경술국치 이전의 국권 수호 운동
2.1.1. 고종의 독립운동
2.2. 1910년대2.3. 1920년대
2.3.1. 국외 무장 투쟁
2.4. 1930년대 ~ 광복 직전
3. '분야별' 독립 운동
3.1. 외교 독립 운동3.2. 무장 투쟁 운동3.3. 실력 양성 운동
3.3.1. 애국계몽운동3.3.2. 경제적 구국 운동
3.4. 민족 문화 수호 운동
3.4.1. 국문 연구 및 작품 활동3.4.2. 예술 활동3.4.3. 한국사 연구3.4.4. 언론의 활동
3.5. 사회 운동
3.5.1. 농민 운동3.5.2. 노동 운동3.5.3. 소년 및 여성 운동3.5.4. 학생 운동3.5.5. 형평 운동
3.6. 종교계의 활동
4. 각종 단체
4.1. 단체 목록
4.1.1. 무장 단체
4.2. 언론사4.3. 교육기관 / 학술 단체4.4. 숭모/연구단체
5. 독립에 대한 기여도
5.1. 분야별 기여도
6. 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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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15 광복 이전까지 세계 각지에서 전개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서술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의 자료

1876년 강화도 조약과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을 계기로 조선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겪게 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 등의 조선과 인접한 열강 국가의 군대들은 조선을 밥 먹듯 드나들게 됐다. 특히 일본 제국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을 독점하게 되고, 급기야 1905년의 을사조약 등을 거쳐 기어이 1910년 대한제국 국권을 완전히 박탈함으로써 한국,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다.

열강들 대다수는 조선의 식민화는 물론 그 후의 악행들 역시도 눈감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했다.[1] 시대적 상황은 이토록 암울했지만, 조선인들은 각자 자유와 해방, 민족국가(근대국민국가) 건설, 공산혁명 등을 갈구하며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아래의 내용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 쓴 이름 없는 민중들과 민족운동, 그리고 그들이 만든 각종 독립 단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4. 9. 13. 기준 18,139명이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있다.

2. '시대별' 독립 운동

2.1. 경술국치 이전의 국권 수호 운동

일본 제국 포츠머스 조약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여러 강대국들과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맺었고, 이에 일반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게 됐다. 또한 신분제가 잔존하여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민중 운동은 반외세적 성격 뿐만 아니라, 민권 신장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1880년대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나 조일통상장정등이 체결됨으로써, 외국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내륙에 진출하여 상업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내의 상인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고, 각종 상회사나 단체를 설립하여 외국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였다. 대표적으로 시전 상인들이 조직한 황국중앙총상회가 있었고, 세곡 운반을 일본인들이 독점하자 수도권의 경강 상인들은 증기선을 구입하여 이에 대항하기도 했다.

1889년에는 방곡령 사건이 일어났는데, 방곡령이란 지방관들이 곡가 폭등이나 식량 부족등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그 지역의 곡물을 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조일통상장정에 따르면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선포하기 한 달 전에 일본에 통보하도록 되어있었고, 함경도 황해도 등지의 지방관들은 이 절차를 지켜 방곡령을 실시했다. 하지만 일본은 제대로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방곡령을 철폐시키고 보상금까지 뜯어갔다. 다만 방곡령의 실시를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조병식 같은 인물들은 1889년 방곡령을 통해 백성들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 절대 아니며, 단지 수탈의 주체가 일본에서 관아로 바뀌었을 뿐 백성들의 고통은 나아진 바 없다.

이 시기 대표적인 반외세 운동으로는 동학농민운동을 꼽을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원래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으로 인해 일어난 반봉건적인 성향이 강한[2] 봉기였으나, 일본군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분노한 농민군이 다시 봉기하면서 반일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3]

1896년에는 독립협회가 창설되어 1898년 초 만민공동회를 통해 민중의 힘을 모아 러시아의 이권 요구[4]를 저지시키고, 민권 의식을 신장시켰으나, 대신 영국, 일본 등의 요구에는 수용적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 후 강대국들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은 후 을사조약(1905)을 체결했다. 이에 대한제국의 무관 민영환[5]은 항의의 뜻으로 자살했다. 또한 장지연은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집필하여 황성신문에 실었다가 일제에 체포당했다. 나철은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죽이려 했고, 이재명 이완용을 피습했으나 치명상만 입히고 죽이지는 못했다. 또한 장인환 전명운은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한 더럼 스티븐스 샌프란시스코에서 죽였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1895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 무장봉기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로 대표되는 강력한 탄압 이후 무장단체는 만주와 연해주 등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군이 되었다.

2.1.1. 고종의 독립운동

1908년 봄 이위종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종황제의 독립자금 1만 루블(Ruble)을 가지고 연해주 노보키예프스코예(Novokiyevskoye)에 도착했다. 한러국경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 마을인 연추는 전신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집결지로서 이미 러일전쟁 초기부터 한러군사협력 및 항일의병전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황제의 자금이 안중근, 최재형 등이 참여한 연해주 대한독립군 조직인 同義會 창설에 소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과 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하얼빈 의거는 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 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본 연구는 러일개전(1904)에서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기(1909)까지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을 황제의 강제퇴위(1907)를 정점으로 양 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전기는 개전 이후 단교되었던 한러관계가 주한공사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상하이정보국과 고종황제의 비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쟁기간 중 러시아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상하이정보국의 한국분과 요원들의 활동은 한러간의 정보협력뿐만 아니라 전후 이들이 의병활동에 투신함으로써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기는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고종황제와 러시아 당국간의 비밀교섭 창구 역할은 상하이주재 러시아 상무관이던 고이예르와 현상건이 맡았으며 이들은 러일전쟁기 파블로프의 상하이정보국에서 공조했던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한러관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보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고종은 망명을 해 국외에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첫 망명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공사관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6]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2번째 망명시도는 1907년 강제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7]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8] 4번째 망명시도는 고종은 1910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했다.[9] 즉 고종은 병탄 전에만 4번의 망명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합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 망명시도 이전에부터 고종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상황이었다. 1902년 12월 서울 경운궁에서 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하였고 베베르는 고종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들이 바로 이들이며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은 2015년에서야 밝혀졌는데,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로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이 당시 유명한 인물로는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로 김인수도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반일첩보활동은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한러 합작으로 운영되던 상하이 정보국이 1905년 11월 경은 일시로 해체되면서 끝이 나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함.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무렵 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하게 됐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났고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한국의 적극적인 무장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이었고, 한편으로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분과 고종의 반일 친러 행보는 당시 일본의 강한 경계를 받았고 이에 일본은 러시아 측에 '러시아 국적자인 김인수가 대한제국의 참령으로 복무하는 게 옳지 않다'는 식으로 러시아측에 강하게 항의하게되지만, '빅토르 김이 비록 러시아 국적자이지만 한국 출신이므로 한국군에 복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앞에와 같은 전문을 보내면 쿨하게 씹었고, 이후에도 김인수는 대한제국에서 고종황제의 러시아어 통역관 겸 시종무관 겸 첩보원으로 계속 활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러일전쟁이 터짐에 따라 결국 러시아로 탈출하게 됐다.[10]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 의친왕도 협력했었다.

고종 황제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의 왕녀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 황제가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하이와 베이징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베이징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베이징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경운궁을 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은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그리고 고종의 죽음이 독살이었음은 친일 성향의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치호는 또 다른 친일파 한진창이 전하는 말이라면서 고종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윤치호 일기』 1920.10.13.)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도쿄(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 의병들의 주 거점이 되었으며, 많은 의병 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 됐다.

2.2. 1910년대

1910년대에는 일제의 무단 통치 때문에 국내에서는 주로 비밀 결사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대성학교는 자립단을, 숭의여학교에서는 송죽회를 조직했다. 의병 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서북 지방 일부에서 1915년까지 전개되다가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전라도에서는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은 임병찬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의병 전쟁을 준비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체포됐다. 대구에서는 박상진 김좌진 등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친일 부호 처단, 일제의 조세 탈취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조직망이 발각되어 해체됐다. 이들은 이후 간도로 넘어가서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법정사항일운동이 있었다. 1918년 10월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으로 3.1운동 5개월 전에 일어난 1910년대 종교계 최대 단일 항일 투쟁이자 국권회복운동이었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연해주 일대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서간도에서는 경학사와 부민단이 조직되었고 신민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북간도 지역에서는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과 대한국민회 등이 조직됐고, 명동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이상설은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워 독립군 양성에 기여했다. 북간도 등지에서 조직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은 이후 청산리 전투를 이끌게 됐다.

연해주에서는 이상설이 권업회와 성명회를 결성했고, 일제의 간섭으로 이들 단체가 해체되자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했다. 1919년에는 손병희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대한광복군정부와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됐다. 상하이에선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어 김규식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 최대의 독립운동인 3.1 운동이 일어난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 통합운동이 일어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한편으로는, '복벽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잔존한 마지막 시대가 1910년대다.

비록 고종 황제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순종황제도 단순 이왕(李王)으로 전락했지만, 국권이 피탈된 지 채 몇 년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두 황제 역시 생존한 상태였으며, 아직 사회주의자나 계몽주의 계열로 돌아서지 않은 유자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제왕권, 혹은 입헌군주주의를 목표로 독립운동을 했으나 상기한 무장투쟁 계열 독립운동세력에 비해 그 한계점이 명확했고 또한 세력이 미비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설립된 상하이임시정부가 대한제국 관료를 지낸 뒤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은 김가진을 망명시켰고, 또한 부평군수를 지낸 바 있는 전협의 대동단을 통해 고종황제의 5남 의친왕을 망명시키려 한 대동단 사건이 그나마 유명하다.[11] 아주 넓은 범주에서는 13도 창의군도 복벽주의 계열로 볼 여지가 있다.

상기한 대동단 사건 이후 그나마 식민지 내 여론에 의식해 구 황족에 대해서는 유화 정책을 펴던 일제가 이왕가에 대해서도 강경하고 삼엄한 감시, 관리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복벽주의 계열은 소멸하게 됐다.[12][13]

2.3. 1920년대

1920년대 독립운동의 특징이라면 사회주의 한반도 전역에 급속하게 전파되어 독립운동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확산으로 인해 독립 운동 노선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었다. 이때 각종 사회주의 단체들이 조직되어서 학생 운동과 농민 및 노동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사회 운동 부분 참조.

1920년대 초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됐다. 대표적으로 이상재가 주도한 민립대학설립운동, 조만식 주도로 평양에서 시작된 물산장려운동 등이 있다.

1926년 순종 황제의 인산일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계열, 학생 단체들이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연대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27년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합세한 신간회가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9년에는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다.

2.3.1. 국외 무장 투쟁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기타 독립군 연합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최초로 승전보를 울림으로써 만주 무장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패배한 일본군은 만주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간도 조선인 토벌 계획을 세우고 훈춘 사건을 조작하는 등의 준비 끝에[14] 간도 독립군 일소를 위한 대규모 군대를 만주에 파병하였다. 이에 김좌진 북로 군정서 홍범도 대한독립군, 천주교 계열의 의민단과 기타 독립군 부대들은 퇴로 확보를 위해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대승리를 거두게 됐다.[15] ( 청산리 전투, 1920).

청산리 전투의 결과와는 별개로 일본군은 간도 조선인 토벌 계획의 일환으로 간도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간도참변).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에게 밀려났음을 인정하고 일단 해산하고 난 뒤 추후 재결집을 위해 러시아로 이동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독립군 부대 간의 지휘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됐다. 자세한 설명은 해당 문서 참조.

이후 남은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統義府, 혹은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였다(1922). 통의부는 서간도 최초의 통합 독립군 단체인 통군부를 확대하여 결성한 것으로 서간도 교육, 산업 및 지역 자치활동과 행정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다시 분열되어 의군부, 참의부(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등으로 조직이 나눠졌다. 이들은 미쓰야 협정(1925)으로 해체되었으나 이후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1929)로 재편되었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였으며, 북만주의 혁신 의회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은 이후 1930년대 만주에서 한중연합작전을 주도한다.

1920년대에 활발한 무장투쟁을 한 단체로는 김원봉이 1919년 만주에서 조직한 의열단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내의 경찰서나 관공서,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등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이에 한계를 느끼고 이후 조직적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2.4. 1930년대 ~ 광복 직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국내의 사회 운동은 비합법적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주도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투쟁 또한 격화됐다.

일제는 이 시기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민족 문화 보존의 중요성을 깨닫고 민족문화수호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어학회가 1931년 창립되어 우리말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언론사들도 조선어 교육에 힘쓰기 시작했다. 역사학자들 또한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 문화를 수호하려 했다. 또한 예술과 문학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자세한 건 아래의 민족 문화 수호 운동 부분 참조.

1931년에는 김구 한인애국단을 창설했다. 이에 1932년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쇼와 덴노를 저격하였다가 실패했다. 윤봉길 의사도 같은 해에 훙커우 공원 의거를 성공시켰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장제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여 국민대표회의 이후 위축되었던 임시정부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국외에서는 무장투쟁 또한 활발히 전개됐다. 이 시기의 국외 무장투쟁은 주로 만주 중국 관내에서 이루어졌다.

만주에서는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으로 한국 중국이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이겼다. 양세봉은 이후 일제에 의해 매수된 중국인에 의해 피살되었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사도하자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 지청천과 한국독립군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1930년대 후반에는 간도 지역에서 조국 광복회가 중국의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고 보천보 전투에서 이겼다.

중국 관내에서는 보다 복잡하게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1935년 난징에서 김원봉 좌익 우익의 5개 단체를 연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하지만 김원봉의 독주로 조소앙 지청천 등의 우익 인사들이 이탈하여 각각 한국독립당[16]과 조선혁명당을 세웠다가 김구가 1935년에 조직한 한국국민당과 연합하여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곧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게 됐다. 임시정부는 1940년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한편 김원봉은 다시 좌익 세력을 규합하여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고, 1938년 산하 군대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이후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고,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호가장 전투에서 승리한다. 김원봉은 이때 조선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합류했고, 잔여 세력은 김두봉의 주도 하에 1942년 화북의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산하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됨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의 건국 준비 활동도 활발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조소앙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를 토대로 건국강령을 공표했다. 국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익 독립운동가들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광복을 준비했다.

3. '분야별' 독립 운동

3.1. 외교 독립 운동

열강의 이해관계를 이용한 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결과론 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운동이자 가장 성공한 독립운동의 축이다. 원래는 고종이 추구했던 노선이지만 고종자체의 능력부족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외교독립운동의 중심은 상해 임시정부였으며 이는 임시정부의 위치가 각 열강의 조계지인 상해인 점을 통해서 잘 파악이 가능하다.

임시정부의 다양한 활동은 결국 국제여론을 움직여 한국을 독립시킬수 있는 외교적 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자는 목적이었으며 한인애국단 활동을 통해서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과 지지를 받을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광복군을 조직했다.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이 언급된 데에는 중화민국 장개석의 공이 컸는데 이는 임시정부의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편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 서재필 등의 미주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주내의 활동을 통해 미국정계에 인맥을 구축하고 미국내의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서 강연을 하는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정점은 이승만의 저서 일본내막기란 책이며 이 책이 발간한후 진주만 공습이 벌어져서 나름 화제가 되었다.[17]
일본은 한국에 가한 잘못을 교활하게 은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미국에 알려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 1919년 4월호 『코리아 평론』 논설. 서재필.

전후 협상을 하던 연합국은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을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독립을 보장받았지만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분단의 형태로 독립되어 빛을 바래게 되었다.

3.2. 무장 투쟁 운동

3.2.1. 의병 운동

의병 운동은 주로 구한말에 복벽파(왕정복고파)에 의해서 일어났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국외로 넘어가서 여러 갈래의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구한말의 의병은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호칭은 의병 활동이 일어난 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먼저 을미의병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의 결과인 단발령 시행 등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의병장은 주로 유생층이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의 잔여 세력 또한 가담하였다. 고종황제는 의병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단발령을 철폐하고 의병에 해산 권고 조칙을 내렸으며 의병들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끝났다.

을사의병은 을사조약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도 이 시기의 의병장이었다. 최익현 또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이 진압하러 오자 "동족끼리 싸울 수는 없다"며 자진 체포당한 뒤 쓰시마 섬에서 순국하였다.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으로 인한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이때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의병활동에 참가하면서 의병 활동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이들은 연합 부대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한 후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호남 지역의 호남 의병을 비롯해 의병이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살아남은 단체는 해외로 이주하는 등, 국내에서 조직적인 의병 운동은 채응언을 제외하곤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3.2.2.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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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실력 양성 운동

3.3.1. 애국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은 주로 국권피탈 이전인 1900년대에 전개되었다. 관료와 지식인들 중심으로 실력 향상, 자강(自強)을 통한 국권회복을 추구하였으며, 여러 계몽 단체를 조직하고 언론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려 하였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이 있었다.

러일전쟁 시기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가 있자, 이에 중추원 부의장 이도재를 중심으로 하여 '직접 사업을 하자'라는 기치로 정부에서 특허를 받아서 농광회사(農鑛會社)를 설립한다. 이에 일본 공사가 대한제국 정부를 비판하면서 농광회사를 없애려고 하였다. 이후 1904년 전현직 정부관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18] 보안회 역시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해산 이후 대규모 집회는 금기시 되고 있었는데, 그 독립협회에 반대했던 정부관련 인사들이 대규모 반대투쟁을 전국적으로 진쟁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에서 뒤를 봐준 단체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후 일제는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면서, 철회조건으로 농광회사에 대한 정부의 허가 취소를 요구해서 농광회사는 해체된다. 보안회는 해체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협동회로 이름이 바뀌고 활동이 줄어들게 됐다.

1906년 조직된 대한자강회는 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후 고종 강제 퇴위에 대해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으며, 대한협회가 뒤이어 계몽운동을 펼쳐나간다. 1907년 조직된 신민회 공화정체의 근대 국가 수립과 무장 독립 투쟁을 추구하였다. 해당 문서 참조.

교육 분야에서는 각종 학교와 학회 등이 설립되었다. 서북학회, 기호흥학회, 서우학회, 호남학회 등이 조직되었으며 남강 이승훈 오산학교를,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이동휘는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간도 지역에선 명동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중 서북학회, 오산학교, 대성학교는 신민회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안창호가 조직한 수양동우회(1926~1937)도 알려져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흥사단 문서도 참고.

국문 연구 또한 활발하여 국문 연구소가 조직되었고 각종 위인전과 해외의 흥망성쇠사를 다룬 책들이 간행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인해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고취되고 근대적인 의식이 고양되었지만, 경제와 교육, 문화 분야에만 치우쳤고, 일제의 감시 속에서 활동해야 했기에 이후 일부는 자치론(일제 아래에서 조선인의 합법적인 사회운동과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노선)으로 가는 등의 한계를 보였다.

3.3.2. 경제적 구국 운동

경제적 구국 운동은 외국 상인들이 내지 무역을 시작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동안 거류지에서만 무역이 가능했던 외국 상인들과 국내 소비자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챙기던 보부상 등의 국내 상인들은 외국인의 내지 무역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1883년에는 개항장 객주들의 주식회사 격인 대동상회와 장통상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또한 시전 상인들은 독립협회와 연계하여 황국중앙총상회를 조직하고, 보부상들은 황국협회를 조직[19]하며 이권 수호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갑오개혁부터는 정부에서도 열강들에 의한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적 능력을 양성하려고 노력하였다. 1896년에는 최초의 은행인 조선은행[20]이 설립되었으며, 1897년에는 한성은행( 신한은행의 전신),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 우리은행의 전신)이 설립되었다. 대한 제국기에는 조선 직조사 등 정부 주도의 상업회사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것을 막고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어 전국에 퍼져나갔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경제적 구국 운동은 이후 일제강점기로 넘어가서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계승되었다.

3.4. 민족 문화 수호 운동

3.4.1. 국문 연구 및 작품 활동

국문 연구에 대한 중요성은 애국 계몽기부터 부각되어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계속 연구되었다. 1907년 지석영 주시경 등에 의해 국문 연구소가 설립되어 '국어 문법'을 저술하였다. 이후 1908년에는 국어학 연구소가 설립되어 국어의 발음과 맞춤법 등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에는 박은식 최남선 등이 조선 광문회를 결성하여 우리나라의 고전들을 정리하고 간행하였다.

1921년에는 이윤재, 최현배 등이 국문 연구소를 계승하여 조선어 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잡지 <한글>을 간행하고 1926년에는 가갸날( 한글날의 전신)을 제정하였다. 이후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어 한글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 등을 제정하였고,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려고 시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1942년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해체시켰다. 이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해방 1개월만에 우리 손으로 만든 국어 교과서로 국어 수업이 진행되는 쾌거로 이어졌다.

작품 활동도 활발하였다. 1905년 발표된 신소설 혈의 누를 시작으로[21] 1907년에는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최남선[22] 해에게서 소년에게 등이 출판되었다. 이후 1910년대엔 이광수[23]가 근대소설의 시초인 무정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들어선 각종 동인지와 잡지들이 발간되었다. 이 시기 김소월 한용운 등이 식민지 현실을 표현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후반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신경향파가 등장해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는 사회주의 문학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이후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붓을 꺾거나 친일 문학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윤동주 이육사 등은 저항시를 발표하여 더욱 돋보인다.

3.4.2. 예술 활동

190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 이후 1910년대에는 신파극이 유행하였다.

1920년대에는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토월회에서 본격적인 극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30년대의 극예술 연구회로 전승되었다. 1926년에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0년 조선 영화령을 공포하여 한국 영화계를 탄압하였다.

3.4.3. 한국사 연구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롯이 남을 수 없는 것인가. - 박은식, <한국 통사> 서문

일제는 식민 통지를 좀더 수월하게 하기 위해 1910년대부터 조선사 편수회 청구 학회 등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 사학을 만들어서 조선인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식민 사관은 크게 타율성론, 당파성론, 정체성론의 3가지로 나뉜다. 자세한 것은 식민사관 문서 참조. 이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역사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연구는 연구할 때 이용한 관점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된다.

민족주의 사학은 한국사의 자주적 발전 및 민족의 정신을 중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 박은식 신채호가 있으며, 조선학 연구를 주도한 안재홍 정인보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였으며, 민족의 "혼"을 강조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독사신론> 등을 집필하였으며 화랑도에서 비롯한 낭가 사상을 중시하였다. 정인보는 민족의 "얼"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등의 긍정적인 역할도 수행했으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사회경제사학은 사회주의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아 세계사의 보편적인 문명 발전 법칙이 한국사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대표적 학자로 백남운이 있으며,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의 실증 사학을 기반으로 하여,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사료와 문헌 고증을 통해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학자로 이병도, 손진태 등이 있다. 이들은 진단학회를 조직하여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3.4.4. 언론의 활동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 민족혼을 고취시키다.

당시 언론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단군, 이순신, 권율, 을지문덕 등의 위인들을 조명하면서 사당을 중건하고 유적을 보존하는 등 각종 현양사업을 펼쳤다. #

소설 연재를 통해서도 민족정신을 고취했는데,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던 현진건은 1938년 7월 20일부터 역사소설 ‘무영탑’을 연재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근대소설사연구’에서 소설의 내용은 남녀간의 비극적 사랑이지만 “‘무영탑’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다름 아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나석주 폭탄의거 호외가 압수되자 더 자세히 담은 ‘호외의 호외’를 계속 배포했으며, 윤봉길 의사 의거도 동아일보에서 최초로 알려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 1920년 4월 강우규 의사의 공판 보도, 1922년 3월 김익상 의사의 공판상황 현장중계 보도,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 의거 호외 보도 등도 이어 보도했다.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도 통제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민족정신을 고취한 것이다.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항일 투쟁을 이끌다

3.5. 사회 운동

3.5.1. 농민 운동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농민들의 상황은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이나 산미증식계획 등의 정책으로 인해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다행히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의 실제 영토를 뺏기거나 하지 않았지만[24], 그 의도는 일본제국으로 세금을 수월히 걷기 위함으로 결국에는 부담으로 다가갔고,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이 을 자국으로 공출해가 조선인들의 쌀 소비가 오히려 줄어들기도 했다. 고율의 소작료와 지주들의 횡포 등으로 당시의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것이 각종 소작 쟁의로 이어졌다.

또한 농민들은 각종 소작인 조합과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 등을 벌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됐고,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분리되어 1927년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됐다. 이 시기 대표적인 쟁의로 전라남도 무안(현재의 신안군)에서 일어난 암태도 소작 쟁의와 황해도 재령에서 일어난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 쟁의 등이 있다. 특히 1923년 일어난 암태도 소작 쟁의는 7할의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며 1년 이상 투쟁을 계속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는 합법적 투쟁을 개량주의로 비판한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로 농민 운동 또한 혁명적 적색 조합을 중심으로 비합법 투쟁을 지속했다.

3.5.2. 노동 운동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 또한 노동 운동을 촉발시켰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하였으며, 임금 수준은 일본인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여기다 성차별까지 더해 남성 노동자들 평균 임금의 절반 수준밖에 받지 못하였다.

1920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 노동 공제회가 창립된 이후 전국에서 각종 노동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22년에는 조선 노동 연맹회가 결성되었고, 1927년에는 조선 노농 총동맹에서 갈라져 나온 조선 노동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노동운동으로는, 평양부- 경성부의 인쇄 직공 파업, 목포부 제유공 파업, 영흥군 노동자 총파업, 원산 총파업이 있다. 특히 1929년 일어난 원산 총파업 일제강점기 최대의 노동 투쟁으로,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이 파업에 참가하여 4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전국의 각계각층에서 구호 물자 등을 보내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일본의 사회주의자들도 지원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식민통치자들에게 노동운동의 힘을 재고하게 하였다.

3.5.3. 소년 및 여성 운동

1920년 전개된 각종 사회 운동 속에서 민권 의식이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그동안 천시받았던 어린이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어린이를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소년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에는 방정환의 주도 하에 천도교 소년회가 조직되어 어린이날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호주제가 법제화됨에 따라 여성들의 민권은 더욱 침해받았으며, 여성 노동자들의 대우도 매우 열악했다. 이에 대항하여 여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에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 여자 교육회, 1924년에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 여자 동우회 등이 결성되어 여성 인권에 대한 의식을 신장시켰다. 1927년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가 조직되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여성 계몽에 노력하였다.

3.5.4. 학생 운동

1910년대부터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3.1운동, 6.10 만세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다양한 항일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1930년대에는 비밀결사의 형태로 운영해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다양한 학생운동 조직이 활동했다.
주로 경상북도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초창기에는 학생 자체의 권익이나 공익이 투쟁의 대상이었으나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엘리트 양성기관화 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거의 사회주의 운동에 종속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강화로 사회주의가 위기를 맞으면서 다시 풀려나게 됐다.[25]

1941년 이후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학원 통제, 전시체제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지만 일제의 언론에 대한 재해석, 외국 신문, 외국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전이 예측되면서 일제가 실시하는 군사제도를 이용한 무장봉기 또는 자체적으로 부대를 조직해 무장봉기를 시도하거나, 독립할 조국의 지도를 위해 인재양성에 힘쓰기도 하였고, 지원병, 학병, 징병 반대운동을 벌이거나 국내에서 탈출해 국외의 독립군에 합류하려고도 했다.

3.5.5. 형평 운동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 우리의 취지이다. - 조선 형평사 취지문 (1923)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한반도에서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수 천년을 이어온 신분제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가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 백정을 호적에 등록할 때 도한(屠漢)이라는 글씨를 추가하여 차별 정책을 유지함에 따라 백정의 자식들은 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차별에 대항하여 백정들은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조직하여 형평 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도 부라쿠민들이 신분 해방 운동으로 수평사를 조직하고 수평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형평 운동도 이에 자극을 받았다.

형평 운동은 백정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언론과 사회주의 진영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백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철폐를 주장하였고, 교육을 위한 강습소 등도 운영하였다. 결국 1930년대 들어 관청에 기록되었던 백정 표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백정 자녀들의 학교 입학도 허용되었다.

이후 1930년대 일본 제국 경찰이 형평 운동을 사회주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강화하자 급격히 퇴조하여 30년대 중반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3.6. 종교계의 활동

특히 대종교 기독교 진영에서 항일 운동이 두드러졌다. 기독교계의 경우 YMCA의 활동이나 ' 신사참배 거부운동', 그리고 헐버트 등 여러 선교사들의 활동이 알려져있고, 대종교는 해당 문서 내에 서술되어 있다.

4. 각종 단체

4.1. 단체 목록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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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협회 독립협회
신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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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대한인국민회
한국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인동지회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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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무장 단체

4.2. 언론사

4.3. 교육기관 / 학술 단체

4.4. 숭모/연구단체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 광복회
  •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 의열단약산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

5. 독립에 대한 기여도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 훙커우 공원 의거)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 후 일본 경찰의 취조 도중 밝힌 거사 이유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연합국 지도부는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일본이 점령한 영토 및 식민지 반환을 결의한다. 그런데 이렇게 된다면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은 해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카이로 회담에 참석했던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가 "한국인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유의하여 연합국은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이다."라는 조항을 카이로 선언문에서 확정될 수 있도록 강력히 주장한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정치적으로 당시 일본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빼기 위한 행보이다. 장제스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을 근거로 들었다. 장제스는 실제로 윤봉길의 의거를 칭찬하고 그의 유족들에게 '장렬천추'(壯烈千秋, 장한 의기는 천 년동안 빛나리라)라는 휘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도 밀접한 관계였다. 특히 김구는 장제스에게 카이로 회담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고, 장제스도 이를 받아들였다. 장제스는 뒤이은 얄타 회담에서 다시 한 번 다른 연합국 지도부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확인받는다.

물론 장제스가 선의에서만 한국 독립을 지원한 것은 아니고, 정치적으로는 독립한 한국이 일본을 견제할 것을 계산한 행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이런 행보를 보인 것 역시 적어도 한국민들이 독립을 원하며 서방 측에게 이를 설득할 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일본은 5년 후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에게 '한국의 재식민화' 같은 소리를 늘어놓을 정도였다. 미국에서 플랜카드 내걸고 시가행진하며 미군에 자원입대하던 재미교포들의 행보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귀동냥으로라도 들어보지 않았다면 과연 극동 어느 조그만 식민지를 무조건 독립시켜야 한다는 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물론 아시아에 식민지를 잔뜩 들고 있었던 영국은 중국의 영토 회복(대만, 만주 등)이면 몰라도 일본 식민지의 '독립' 논의에 대해서는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세계정세 및 판도 상황, 강대국들이 전황에 따라 재빨리 주판알을 굴리는 등의 외부 영향이 매우 컸다고는 해도, 독립운동가들의 수많은 노력이 카이로 회담 등에 일조한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당시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일본 입장은 몰라도 미국 입장에서, 나아가 연합국 입장에서는 문제가 아니었다. 엄연히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게 있어서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주체가 일본이었으므로. 참전 군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결코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본토 공습, 나아가 수만의 피해자[27]를 낸 원폭 투하에 대해서 일본에게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가지지도, 일본 정부에 대한 '사과'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 # # 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연민이나 그런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전쟁에 대한 회의감은 가질 수 있지만, 일본 정부의 식민지 가해자로서, 그리고 전범으로서의 책임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다.

5.1. 분야별 기여도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독립운동가 중에는 할아버지인 이회영을 비롯한 무장투쟁론자도 있었고, 안창호 선생처럼 힘을 기르고 자기혁신을 해야 한다는 분도 있었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같은 외교 노선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라는 입장을 보였다.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태진 명예교수는 “역사적인 인물을 평가할 때 내 편, 네 편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전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없다”면서 “항일 독립투쟁 노선은 외교 노선, 무장투쟁 노선, 민족개량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갈래로 치열했다. 그걸 객관적으로 보고 각각의 역할을 인정하면 아름답고 위대한 역사가 된다”고 평가했다. #

송상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국내에서 독립운동한 분들이 저평가 됐다면서 “독립운동 평가에서도 외제가 국산보다 좋은 모양”이라며 “어쩌면 무의식적인 사대주의일 수 있는데 외국에서 독립운동 했다고 하면 더 쳐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다섯 그룹 정도 있는데 처한 입장은 달라도 모두 독립을 위해 희생한 분들”이라고 평가했다. #

2024년 3.1절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어느 누구도 역사를 독점할 수 없다. 모든 독립운동의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외교와 교육, 문화 분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선각자', '실천가'로 표현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언론에 "과거에는 무장 독립운동만 진정한 독립운동으로 평가한 채 나머지 독립운동들은 친일파로 몰아간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균형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 발언에 대해 연합뉴스에서는 "과거 이른바 진보 성향의 정권과 일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운동 활동만 지나치게 부각하면서 사회적 논쟁이 벌어졌던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연합뉴스

6. 관련 어록

3.1 운동은 3천 년간 이어진 봉건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국가 건립의 개시를 알리는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뒤엎고 대한민국의 건립을 알리는 운동이었다.
독립운동가 조소앙
한국인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풍습,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인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지만 그들의 혼은 결코 꺾지 못했다.
리콴유
그 나라(한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와 그 손자를 전혀 구분짓지 않고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그런 감정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매우 비슷합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서독)에서 나치인 할아버지를 가졌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위르겐 힌츠페터, 1987년 FAZ와의 인터뷰


[1] 예를 들어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팽창을 지지했다. [2] 반외세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핵심은 아니었다. [3] 반봉건적인 부분이 사라진 게 아니다. 아울러 본래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의 개입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었다. [4] 부산 절영도 조차, 한러은행 설치 등 [5] 당시 세도가문이던 여흥 민씨 집안 인물이다. [6] 박종효, 2002,101 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101쪽 [7] 박종효,2002,73 박종효 편역,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3쪽 [8] 박종효, 2002, 74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4쪽 [9] 외교통상부, 2003, 223~224 외교통상부, 『이범진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2003년, 223~224쪽 [10] 이후 대한제국의 장교이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는 10년만에 러시아 제국의 대령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인수는 러시아인 여성과 결혼하여서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으로까지 진급하게되었으며 김인수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연해주 지역의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됐다. 지금도 러시아에는 김인수 참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후손들도 할머니(김인수의 손녀)에게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조상님이 한국인이고 심지어 제정 러시아의 대령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 이유가 일단 본인들 외모는 100% 백인 외모이고 제정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에 제정 러시아의 장교이자 간부였던 김인수의 성을 계속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모두 바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11] 1919년 11월 9~10일의 일. 기록에 따라 날짜, 체포된 위치(신의주역, 혹은 중국 안동역) 등이 조금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의친왕 문서 참조. [12] 이후, 구라파( 유럽)으로 신혼여행길에 오르던 영친왕& 이방자 내외가 중국 항에 기항했을 때 임시정부에서 황태자 부부의 신변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 발각으로 무위에 그친 바 있으나, 이 사건을 복벽주의로까지 확대해석하기는 어렵다. 2010년대 현재 존재하는 우리황실사랑회 등 복벽주의 단체 역시 이 당시 복벽주의 세력의 오롯한 후신이라 보기 어렵다. [13] 다만, 우리황실사랑회는 엄밀히 따져서 복벽주의 단체가 아니라 황실복원론 단체이다. [14] 다만 훈춘 사건이 실제 일본군이 조작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독립군이나 당대 중국 자료들에서 일본군의 조작이 아니라고 적힌 사례가 있기 때문. [15] 이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부분에는 논란이 있다. [16] 만주에 존재하던 한국독립당과는 다른 조직이다. [17] 이승만은 이때 팔린 책의 인세로 워싱턴에 집을 사고 미국정치인과 인맥을 쌓고 로비할정도의 돈을 벌게 되었다. [18] 주요인물인 송수만은 무과출신에 보수파 중추원 의관, 심상진은 참정 심상훈의 인척, 원세성은 황국협회측 인사로 역시 중추원 의관, 회장 신기선은 원래 갑신정변 시기 대신으로 추대된 인물이지만 이후 온건개화파로 돌아서서 주요대신직을 거치는가 하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중추원 부의장으로 중추원의 파행을 고종에게 보고한 인물이기도 하다. [19] 고종이 부려 먹기 위해 아래에 명하여 만든 단체이다 [20] 한국은행의 전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행과 다르다!! 이 조선은행은 운영 미숙으로 1901년 폐지되었다. [21] 혈의 누는 읽어보면 알겠지만 친일 문학이다. 게다가 작가 이인직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22] 기미독립선언서를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훗날 변절하여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이 되었다. [23]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 중 하나이다. [24] 자세한건 문서 참조. 많은 역사 교과서에서 잘못 가르치는 내용이다. [25] 김희곤 외 4인, <경북독립운동사 5>,청솔,2014 [26] 실존하지 않은 가공의 군대다. [27] 여기에는 심지어 이민 내지 강제동원으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식민지 조선인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