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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증식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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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계기3. 구분
3.1. 1차 증식계획3.2. 2차 증식계획
4. 결과
4.1. 조선 재래종의 '멸종'4.2. 일본 내부4.3. 김제 평야의 간척과 개간4.4. 빈부격차의 확대
5. 1920년대 조선인의 생활수준에 대한 논쟁

1. 개요

[ruby(産米增殖計劃 ,ruby=さんべいぞうしょくけいかく)]

1920년부터 1944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일본 제국이 식민지 조선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 정책. '산미 증산 계획'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2. 계기

일본의 식량 수탈은 꽤 역사가 깊은데 일제강점기에 수탈된 식량이 가장 많이 간 곳은 일본 본토였던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의외로 조선의 미곡 유출 행선지 1위가 일본이 된 것은 강화도 조약 이후다. 또 당시 일본이 다른 식민지에서 생산한 쌀보다 특히 조선의 쌀을 선호했던 것은 일본의 주된 쌀 수요 품종이 동북아시아에서 주로 소비되는 자포니카 쌀이고 자포니카 품종의 쌀은 당시 한국과 일본, 베트남, 중국 동부 지역, 러시아 지역에서만[1]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는 열강의 상품작물 공급처로 이용되기 마련이지만 사탕수수가 재배되던 대만과 달리 조선은 그게 안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식민지인 조선을 본격적인 식량 공급처로 키우고자 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8년 일본 농촌 인구의 이농(離農)현상과 도시집중현상으로 인해 쌀 재고량이 바닥나며 ' 쌀 소동(米騷動)'을 겪게 된 영향이 컸다. 이에 일본 정부는 쌀 재고를 충분히 확보함과 동시에 무제한 1:1 교환이 가능한 통화권 내에서의 쌀 유통을 촉진해 외화 지출을 줄이고자 하였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재정독립도 꾀할겸 일본 내 식량증산계획에 발맞춰 산미증식계획을 발표하였다.

개항기 무렵부터 조선에서도 일본의 쌀 시세가 조선 쌀 시세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쌀의 거래 권한을 가진 지주와 부농들이 조선 내부 시장보다는 일본 시장에 쌀을 파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일본 상인들 역시 조선의 쌀을 매입하여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쌀을 공정하게 샀다면 조선인 생활에 보탬이 되었겠지만, 일본 상인들은 실제로는 약탈에 가까운 방식으로 쌀을 쓸어모았다. 당시 조선 정부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의 공권력까지 등에 업은 이상, 일본 상인들 입장에서는 조선인들에게 공정한 거래고 뭐고 최대한 돈만 벌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곡물 매매는 원래 조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으로서, 먹을 목적으로 필요한 양 이상으로 일시에 곡물을 모조리 사버리는 일은 좋지 않은 문제를 만들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 열리는 날에 일본 경찰을 수 명 파견했으니, 만약 조선인이 쌀 팔기를 거부하거나 난동을 부리거든 직접 대응하지 말고, 조용히 상대방을 붙잡아서 순찰 경관에게 인도하라."

일본 영사가 이런 훈령을 내린 시점은 1882년이다. 개항으로부터 불과 6년 만이었다. 일본은 조선 땅에서 거리낌 없이 경찰력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들이 쌀을 제값 받고 팔고 있었다면, 거부하거나 ‘난동’을 부린다는 이유로 조선 땅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갈 이유가 있었을까?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침략사 60.

식민지가 된 후에는 이런 일본인들의 횡포가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으므로, 전체 농민의 80%에 달했던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쌀을 더 생산하면 잘살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다른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총독부 또한 보편적 생활향상 보다는 어디까지나 세수 확보를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했고 소작제를 확대하여 지주들이 헐값에 땅을 사들여 재산을 불리는 것을 방조하거나 부추겼다.

결과적으로는 조선에서는 일본으로 양곡 유출만 되었고 한반도에선 쌀 품귀가 일어났다. 쌀 생산량은 늘었으나 자급자족으로 사는 대다수 농민들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쌀값은 몇배씩 오르는데 임금은 그대로라, 먹고 살기도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많았다.[2] 결국 이득을 본 건 일부 지주와 자영농뿐이었으니 소작은 하는 일반 농민들은 춘궁민 혹은 세궁민이 되어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만주로 도피하거나 화전민이 되었다.[3]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수출한 8할 (80%)이 쌀과 곡물이어서 그 때문에 서울의 쌀값이 2~3배 정도 올랐다는 것은 일본 정부 측의 보고에도 나왔다.
러시아 제국 대장성, 한국지, 144.

문제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프리츠 하버가 발견한 화학비료가 대거 보급되어 맬서스 트랩이 깨지고 전세계에 다량의 농산물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장 미국산 농작물 생산량과 국제시장유통량이 줄지 않은 상황에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아일랜드를 비롯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유럽 국가들이 경기 부양과 외화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농업 생산물들을 국제 시장에 풀기 시작하고 여기에 영국으로부터 대규모 자치권을 획득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의 농업 생산물들이 세계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국제 식량 가격의 대폭락이 일어났는데 이 대공황의 영향이 대규모 곡물 증산을 진행 중이던 일본 제국의 내에 쇼와공황이 시작된다. 이는 일본 제국 농촌 사회 전역에 큰 경제적 충격을 야기했고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변한 조선 또한 타격을 입는다. 결과적으로 총독부의 재정독립을 위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대한 강구책으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전시경제 바람을 탄 일본 본토를 따라 병참기지화 노선으로 정책을 전환한다.[4]
아산에서 온 사촌 치병(致昞)이 방문했다. 치병이가 말하길, 쌀이 제물포에서 3.5전에 팔리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3.2전에 팔린다고 한다. 끔찍하다. 농민이 겪는 고통이 극심하다. 총독부가 나라 전역에 설립한 수리조합이 조선인 토지 소유자를 수백 명씩 파산시키고 있다. 이는 모든 사람, 심지어 일본인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총독부는 조선의 부자들 재산이 모두 일본의 탐욕자들, 동양척식회사와 산업은행, 그 외에도 땅을 강탈하고 있는 회사들에게 억지로 헐값에 팔려 나갈 때까지 수리조합을 계속 늘려갈 것이다.
윤치호 일기, 1931년 1월 9일

3. 구분

3.1. 1차 증식계획

1차 증식 계획은 1920년부터 실시하게 되었는데 화학비료 사용을 늘리기 보다는 치수사업을 통해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쌀 920만석을 증산한 다음 그 중 460만석을 기준으로 일본으로 보내는게 총독부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제 여건상 열악한 조달 방식과 농민들의 반발 때문에 결과는 부진했으며 오히려 일본인들과 조선인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한 지주들만 이득을 보았다.

1차 증식계획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일제의 방만한 정책 설계가 지적된다. 우선, 수리조합의 실패를 들 수 있다. 수리조합이란 보, 물길, 저수지 등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 농장주들이 드는 조합이다.

벼 농사에는 수자원 확보가 가장 핵심이고 따라서 계절에 따른 하천의 수위 변동 등 하천 환경은 벼 농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한강을 기준으로 보면 하상계수가 180~190에 이르는데 즉, 1년간 최대 유량이 최소 유량의 180배~190배에 이른다. 심지어 낙동강 금강은 300 이상이다. 한편 일본 하천의 경우 하상계수가 40~100 정도로 이 역시도 서구의 하천에 비하면 큰 수치지만 한반도에 비해서는 하천환경이 크게 양호한 편이었다. 결국 한반도에서 안정적인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안정적으로 수자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렇게 계기는 좋았지만 방법에는 문제가 많았다.

수리조합은 지역 농장주들에게 돈을 걷어 수리시설에 쓴다는 구조였는데, 자기 논에 이득이 된다면 당연히 농장주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물길이나 구체적인 사업 시행은 일본인 대지주들과 조선 총독부가 결정하였고, 조선인 참정권 문제가 보여주 듯, 발언권이 높은 이들의 농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건설이 이루어질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조선인들은 자급자족하는 소규모 자영농이 대부분이라, 건설비는 엄청 뜯기고 물길은 몇몇 일본인 농장에게만 가는 어처구니없는 사례가 많았다. 결국 수리조합이 생긴다고 하면 다들 땅을 팔고 도망치려고 했으며 지주들은 토지개량에 수익보다 헐값에 땅을 사들여 소작지를 늘리는게 더 이익이라는 판단하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최근 수리조합에 속한 땅은 파는 사람 뿐이므로… 땅값도 점차 내리는 추세에 있다.]
동아일보, 1927년 8월 5일자,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침략사 발췌.
[한번 수리조합이 설립되면 구역 내의 작은 토지 소유자는 조합비의 부담 때문에 즉시 몰락의 심연에 빠진다.]
히사마 겐이치, 1935, 조선농업의 근대적 양상, 22쪽,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침략사 발췌.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이 천황의 어여쁜 자식인 조선인을 위한 개혁을 하겠다며 온갖 약속과 광고를 하면서 부임한 지 거의 1년이 지났다. 그동안 폐단이 조금이라도 제거되었는가? 일본인 농민들이 거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 수백 가구를 만주로 내몰아 궁핍과 죽음에 이르게 만들면서 식민화가 열광적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수리조합은 말 그대로 토지수용권이라는 미명 아래 비옥한 농지들을 징발하고 있다. 관료주의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개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윤치호 일기, 1920년 8월 1일
총독부의 가장 교활하고 잔인한 시책은 수리사업을 통해 조선인의 논을 빼앗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저수지를 만들 때 가장 좋은 논 중에서 수백만 평을 골라 공시지가로 징발한다. 그러고 나서 조선인 지주에게 터무니없이 과도한 수리조합비를 부과한다. 결국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에게 논을 팔거나 무상으로 주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은 모두 가난한 조선인을 구제하려고 농업을 진흥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진다. 사악하면 득 될 것이 없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일본의 이런 비정함이야말로 영악함과 권력만 있으면 불의도 화려하게 치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충남 예산에 사는 성 씨의 비옥한 논은 저주받을 수리조합 영역 안쪽에 있었다. 성 씨는 예전 같으면 평당 60전을 준다 해도 논을 팔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논을 평당 15전에 내놓았다. 그런데 평당 15전이라고 해도 조선인은 감히 이 논을 매입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일본인도 이 논을 매입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수리조합비와 가혹한 세금을 견디다 못한 성 씨가 조만간 자신들에게 이 비옥한 논을 공짜로 인수해달라고 애걸복걸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윤치호 일기, 1931년 1월 10일

그러면서 주변 소작농들에게는 너 먹고 사는 땅에 중요한 공사하는데 협조하라면서 강제로 저수지 공사 등에 투입하곤 했다. 그러니 땅주인이고 소작농이고 반발과 비협조가 잇달았고 제대로 된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공사가 이루어진곳은 전라북도였는데, 여기는 일본인 대지주가 몰려있는 곳이었다.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 지주들의 숫자는 5분의 1이었지만 보유한 총 토지량은 비슷했다. (조선농회, 조선농업발달사) 그러니 이들 일본 대지주들이 나서서 공사를 진행했다. 일단 지어 놓으면 자기들 이익이 확실하고, 총독부에서 지원금 타내기도 가능했다.

종자 선택 또한 잘못되었는데, 일본은 당초 정책 설계 당시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기후 여건 등 농업을 위한 환경이 유사할 것으로 막연히 계획하고 일본에서 사용한 쌀 종자를 그대로 조선에 가져와 이를 재배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다른 기후 환경을 반영하여 한반도에서 재배하기 적절한 종자 개발 역시 선행돼야 했다.[5]

일제는 방만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미곡 증식을 하기는 하였으나 당초 목표량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 결과를 냈다.[6] 반면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연평균 174만석에서 369만석으로 약 200만석 정도 증가했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이 이전에 비해 많이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쌀이 부족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3.2. 2차 증식계획

1차 증식계획의 결과가 부진했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26년부터 2차 증식계획을 발표하여 계획된 재고량보다 더 많은 쌀을 유출시켰다. 이것은 일본 본토의 공업화를 위해서 일본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유지하고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미곡가를 유지해 일본 내 일본인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철저한 차별주의로 무장해 제국을 넓히던 일본이 그토록 경기를 일으키던 만민평등사상과 반식민주의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가 일본 본토에 확산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총독부는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사업의 방향을 틀어 본토에서 알선비용을 충당하여 수리조합을 지원하였으며 그중 대부분을 화학 비료 구입에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원래 계획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화학 비료 투입과 개량 품종으로 이전보다 쌀생산량이 1.4배 증가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이 종료될 당시인 1934년에는 조선의 미곡 총 생산량을 조선 인구 1인당으로 나누면 1석 2두정도 분배가 되는데, 이는 216kg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60~70년도에도 1인당 쌀 소비량이 130kg을 넘지 못했던 걸 보면 당시 조선 사람들이 쌀밥만 먹고도 될 정도이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쌀 생산량 자체는 증가일로에 조선인 지주들의 자산이 이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상승하는 등 1차보다 보이는 결과물은 성공적이었다만, 문제는 하필 대공황이 발생하고 일본에 조선쌀이 대량 유입으로 인해 쌀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오히려 일본 농촌경제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자 일본 내 농민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더욱이 1930년부터 조선의 쌀값이 일본을 역전하였고. 1931년부터는 연이어서 풍작을 맞이하여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쌀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조선쌀의 이출부진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기록된다. 1933년에는 일본 농림성이 생산과잉으로 인한 쌀가격 폭락이 너무 심해지자 '이출미허가제도'를 만들어서 일본 내로 유입되는 조선쌀을 제한하였다. 이출을 제한하니 좋은쌀만 일본으로 가서 조선 내의 쌀가격이 폭등을 하기 시작하는데 덕분에 인천항에는 이출용 정부 소유의 쌀이 한가득인데 4등급 쌀은 전혀 보이질 않고 쌀값이 너무 올라서 조선 영세민의 생활을 위협한다는 기사가 나올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현지와는 반대로 일본에서는 쌀 가격 폭락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가격이 높아진 조선, 대만에서 이입되는 쌀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게 된다. [7]

추가로 위에서 지적한 조선 내부의 조선인 미곡 소모량은 더 감소해 신간회 해체 시도, 광주학생항일운동 등으로 서서히 생겨나던 조선총독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조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934년 일본은 대규모 산미증식계획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조선쌀이 일본 이출 판로가 막히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는 쌀이 넘쳐나게 되었다. 신문에는 조선쌀을 주정재료 같은 화학적 이용 방법을 연구하자는 기사도 있을정도. 그러나 이렇게 일본으로 가는 조선쌀의 이출이 줄어들어 조선에 조선쌀의 공급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쌀값은 폭등을 계속 했는데, 이것은 산미증식계획이 일본에게로만 이출되는 목적으로 이용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세금은 쌀로 세금을 거두는 조세제도가 운영중이였고,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에 맞추어 일본에 보낼 쌀과 조선에 풀 쌀을 구분해서 매수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서 쌀 공급이 과잉 초과 되기 시작하고 이는 연이은 풍작으로 인해 쌀 가격 폭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미곡통제법'을 시행하여 조선총독부가 시장에 개입해 쌀을 매수하여 쌀의 시장 가격 통제와 쌀의 과잉 공급을 막으려 했다. 이는 시장최고가와 시장최저가의 중간가격인 '공정가격'을 사장가로 통일하여 시장의 안정을 꾀하였다.

하지만 통제의 실패로 오히려 조선 민간 시장에 풀려야 하는 쌀마저 조선총독부가 과도하게 매수해 버린 까닭에 조선 민간시장으로 쌀이 너무 안 풀려 버려 수요가 폭증하고 쌀값이 폭등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세율도 높았기 때문에 산미증식계획이 중단이 되어버리자 물가상승으로 인한 조선인의 가처분소득이 저하하여 조선쌀의 소비 감소를 촉진시켰고 만주산 조(粟)의 수입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일본 국회에서는 미곡통제법을 제정하고 조선 현지의 쌀 소비 촉진을 유도 하였지만 오히려 만주산 조(粟)에 관세가 붙어 조선의 서민들은 더 비싸게 밥을 먹게 되어버렸다.

1934년부터 일본은 조선, 대만에 미곡생산통제를 실시하면서 사실상 산미증식계획은 종료되었다.

이후에도 일제는 산발적인 소규모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다만 이것은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이때부터는 경성공립농업학교에 농업토목 전수과를 설치하는 등 농법 개량과 더불어 농지개간과 수리(水利)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시에 투입할수 있는 화학비료 량이 줄고 중일전쟁이 터진 데다가 1939년 대가뭄으로 인해 수확량이 반토막이 나면서 그 이후로는 전시 식량확보에만 집중하게 된다.

4. 결과

산미증식계획은 식량 총생산량을 늘려 식량 자급 요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실시되고 치수사업으로 다수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식량 생산 증대의 대상이었던 한반도에서는 쌀값만 잔뜩 오르고 임금은 동결 내지 하락이라 조선 사람은 쌀 사먹기도 어려운 기형적인 면을 보인다. 결국 증산은 한다고 난리는 난리대로 치면서 조선에는 굶주림만 심해지니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인구의 80%를 차지한 농민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아직까지는 추상적 숫자로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더니, 이번에 총독부 농무과에서 전 조선에 걸쳐 세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 완료한 5 개 도만 보더라도 궁민 窮民 (보릿고개에 먹을 식량이 다 떨어지는 농민)의 비율이 다음과 같다.
경기도 53.5%
충청북도 57.0%
전라북도 62.0%
경상남도 46.5%
경상북도 20.5%
동아일보, 1931년 8월 5일자, 김석원, 일본의 조선경제 침략사 발췌.

수리조합이 제대로 작동한다던 전라북도가 제일 굶주리고 있음이라고 적혀있다.

한편, 일본 본토의 농가에게도 조선산 곡물로 인한 미가 하락으로 인해 막대한 수입 감소를 초래했고 이들의 분노로 1930년에는 결국 조선산 곡물에 대한 수입금지를 의결하는 등 성공적인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4.1. 조선 재래종의 '멸종'

일본 내에서 평가가 높은 일본품종을 조선에 가져가도, 조선 재래종과 교잡돼서, 평판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관청과 법규를 동원해 조선 재래종의 쌀의 재배를 그만두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1910년대 무단 정치기에 자주 보였다. 이로인해, 일본 종의 경작률은 0.7%(1911년)에서 52.8%(1919년),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1912년)에서 70%(1922년)로 급증한다. 이는, 조선 농업의 본연의 방법을 부정하고, 조선산의 「쌀」종조차도 부정해, 제국주의 본국・일본의 시장이 요구하는 쌀을 공급하는 식민지 농업에의 이행을 의미했다. #

4.2. 일본 내부

산미증식계획은 실상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지만 정책적인 효과와 별개로 조선 내부에서는 쌀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이출하는 것이 인기였으므로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고 이 시기를 거쳐 조선에는 기계를 이용한 도정이 자리잡으면서 쌀의 도정 상태가 매우 좋아졌다. 이 때문에 벼를 주로 가정에서 도정하던 일본산 쌀보다 조선 쌀은 더 값이 낮고 품질은 더 좋았다. 이런 이유로 일단 일본 내부의 쌀 부족 현상은 해소되었지만 반대로 조선산 쌀이 유입되어 일본 농가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일본의 제국 의회에서는 쌀의 이출을 두고 일본 농림성과 조선총독부가 매번 갈등을 빚었다.

쌀 농사를 짓지 않는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쌀값이 낮아져 물가 안정에 보탬이 될법 싶으나, 쌀값 폭락기가 경제 공황 시기와 맞물려 있을 때는[8]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라고 할지라도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의 쌀 유입으로 인한 일본 내 미가 하락/일본 농가 소득 감소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산미증식계획의 정책 신뢰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조선총독부 박춘금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은 조선산 곡물에 대한 수입 금지를 의결하게 된다.

4.3. 김제 평야의 간척과 개간

산미 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논 농사의 물을 대는 수리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수리 조합 개설 운동이 벌어졌다.

그 중 논 농사의 보급이 가장 원활한 지역은 현 전라북도로, 조선 시대 초기와 중기에는 유명한 곡창 지역이자 풍요 지대로 명성이 높았지만 조선 말기 혼란에 황폐해졌다.

이영훈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산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계속되는 김제 평야 지대에 지주들과 농민들의 주도로 개간과 수리 시설의 정비 등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넓은 갯벌에 대한 대대적인 간척 사업이 벌어지면서 광활면 등이 생겨났다. 조선총독부에서도 관용 수리 시설의 개설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참여도나 추진력이 낮아 실패하였고 되려 민간에서 주도된 수리 조합 개설이 활발해지면서 논 농사를 위한 수리 시설의 정비와 개설 끝에[9] 전라북도 일대에는 광범위한 논농사 지대가 형성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쌀을 일본에 이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대지주들이 형성되었다. 현재 한국 최대의 미곡 생산 지역이 전라도인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10]

한편 이에 낙성대경제연구소 출신이자 동기인 허수열 교수가 반박하면서 이영훈 교수와 허수열 교수가 소위 벽골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허 교수는 김제, 만경평야가 지금처럼 생산성이 높은 지역은 아니었지만 이영훈 교수의 주장처럼 수리시설 하나 없는 황무지는 아니었으며 일본이 간척 사업을 벌여 토지를 확보했다는 근거로 드는 벽골제는 방조제가 아닌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저주지 시설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더해 기존에 있던 토지들을 세금 많이 걷으려 측량하다보니 조선 왕조 시대에 토지 대장에 넣지 않았던 토지들이 통계에 들어간 것 뿐, 간척으로 인해 토지가 늘어났다는 주장은 사료나 문헌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일본인들이 개간을 했다는 추측일 뿐이라고 지적하고있다. # 이영훈/비판 및 논란 참고

4.4. 빈부격차의 확대

정책의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이 시기의 대지주(일본인과 조선인)들은 확실히 이득을 보았다. 당시의 소작 제도 하에 지주들은 땅을 소작 내 준 농민들에게 수확한 벼의 절반을 수취하였고 이렇게 쌀을 축적한 지주들은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일본으로 판매하고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자작 / 소작, 자소작 농민은 식량의 자급과 판매를 조선 내부에서 거래에 의존하는 데 반해 지주는 도정 설비를 갖추고 벼를 도정하면서 직접 유통하여 시장에 내다 파는 등 유통과 판매를 겸하여 더 큰 수익을 얻었다.[11] 더불어 수리 조합 개설이나 수리 시설 확충 등 농촌 기반 시설을 투자하기 위한 예산도 농민에게서 수리 조합비를 별도로 거둬서 부담을 전가하여 농민의 세부담이 증가되어 농촌 빈부격차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러한 지주의 성장은 일본의 의도였고 결국 일본은 지주층을 식민지 체제에 대한 지지자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산미증식계획의 과실은 지주층이나 화이트 컬러 인텔리층, 그리고 아직 소수에 불과한 도시 노동자층에게만 돌아갔다. 조선의 인구 중 많은 비율을 차지하던 농민들 사이에서는 정책의 혜택보다 부작용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였고 이로 인해 산미증식계획 이후 조선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세를 보였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일본인 1인당 쌀소비량은 항상 1.1석 내외이지만 조선인 1인당 쌀소비량은 12년 0.77석에서 32년에 0.40석으로 격감한다. 농민의 쌀 섭취는 고율 소작료 및 고리대의 의해 얼마 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세 부담 등을 이유로 그 얼마 안 되는 벼를, 유일한 환금작물로서 출회기에 마당 앞에서 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30년대에 들어서 더더욱 심각해지는 농민들의 생활을 위해서 식량자급·경제적 향상을 위한 '밭농사개량증식계획'(31년), '농촌진흥운동'(32년)을 세우고, 또 '조선농지령'(34년)을 발포하는 등 그동안의 '지주적 농정'에서 '농민적 농정'으로 어느 정도 전환하려는 시늉을 하려 했으나, 조선농민들의 식량문제의 해결이나 「농가 경제 갱생」의 달성은 자본·기술의 부족, 경영 규모의 영세성, 식민지 지주제의 견고한 존재하에서는 불가능했다. 또한 식민지 지주제도 1930년대 이후의 일제의 거듭된 조선 쌀 이입정책의 변경이나 쌀값 하락으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됐다.

5. 1920년대 조선인의 생활수준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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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증식계획 시기에는 쌀 생산량이 늘었지만 쌀의 거래 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들은 금전적 이득을 위해 대부분의 쌀을 일본에 갖다 팔았다. 그로 인해 한반도에 거주하는 식민지인들의 쌀 섭취량은 크게 감소하였으며, 쌀 거래 대금으로 일본에서 유입된 현금으로 인해 물가까지 상승하며 식민지인들의 생활수준은 악화되었다.

통상적인 학설은 산미증식계획이 유발한 미곡의 이출로 인해 농민의 섭식은 오히려 악화되고 농작 상황의 악화로 유랑민이 증가하여 만주로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산미증식계획 이후 반토막난 조선인 미곡 섭취량이나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수가 1930년대부터 급증한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일부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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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익종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일제강점기는 1인당 미곡 소비량은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으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료 구입비의 총량이 증가하였다. 재래 조선의 농업은 1년의 절반 이상이 맑은 날씨인 기후적 특성상 논농사보다 감자와 고구마를 중심으로 하는 밭농사의 비중이 높았고 쌀보다 수수, 등 잡곡의 섭취량이 많았으므로[13] 다른 식품군의 섭취를 제껴두고 쌀의 섭취량 감소만 두고 식생 수준이 악화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화권은 전통적으로 쌀밥을 잡곡밥보다 훨씬 귀한 음식으로 취급했으며, 1910년 기준 한반도 남부 기준 60%, 한반도 전체 기준 44%의 농업 생산이 미곡인 것을 감안하고 쌀의 생산량이 보리, 조보다 세 배나 생산량이 많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쌀보다 잡곡의 섭취량이 많았다"는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또 미곡의 소비량이 1930년대에 급격히 감소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주익종 박사는 "육류, 어패류 등의 소비량이 증가하였다"라는 주장을 통해 쌀의 소비량이 감소했어도 조선인의 삶의 질이 증대되었다고 평가했지만 허수열 교수는 이에 대해 1910년대 초반의 통계적 오류를 이와 같은 결과의 원인으로 지적하면서[14] 1914년 ~ 1918년의 평균값과 1934년 ~ 1938년의 평균값의 비교를 통해 어패류를 제외한 모든 식품의 소비량이 감소 또는 정체되었다는 주장을 폈다.[15]

동시에 약 2,000여명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와 2,100여명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사할린 한인 기록물을 통해 조선인 신장 변화를 연구한 조영준 교수의 연구[16]를 보면 1890년대에 출생된 남성보다 1920년대에 출생된 남성의 신장이 약 3cm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국민 대상 병역판정검사와 교육 과정에서의 신체검사가 실시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전 한국 지역의 신장 통계는 각각의 통계가 어떤 조사기관이 어떠한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통계를 수집했는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는지, 그리고 표본 집단의 대표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산미증식계획 실시로 인해 미곡의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맞으나 농촌의 빈부격차는 확연하게 커졌고 평균적인 영양 상태의 개선도 물가 상승과 인구의 증가로 말미암아 이뤄지지 않았다. 종합하면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증가한 생산량으로 말미암은 수혜는 주로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지주들에게 돌아갔고 절대다수의 조선 중층~하층 농민들은 충분한 1인당/가구당 소득의 증가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구의 증가와 상류층 소득의 급격한 증가로 시장의 총 구매력이 기형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뛰어오른 물가에 고통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빈부격차는 다수 민중의 절대 소득이 떨어져서 벌어졌다기보다는 재조선 일본인들과 지주들, 도시민들의 소득이 가파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반 농촌 민중의 소득은 답보 상태였기 때문에 벌어졌다. 결국 경제적 중층과 하층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는 조선인 대다수의 소득은 그대로였지만 총 인구의 증가와 맞물려, 조선인/일본인 지주들을 비롯한 상류층의 소득은 크게 늘어나 전체적인 구매력과 시장 수요의 상승으로 인한 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아 중류층과 하류층 조선인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졌다.

다른 한 편 이 시기 동안 조선 내 지주[17]들의 재력과 발언권이 강해졌는데 이는 관습적으로만 행해지던 전통적인 고율의 소작료율이 명시적으로 굳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영양 섭취량은 1920년대부터 이미 약하게나마 하락하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18]도 있다. 주익종과 김낙년은 1912~1239년에 조선인 1일당 (총)곡물 소비량이 14% 줄어들었으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변화가 없으며 이는 쌀 팔아 번 돈으로 타 식품, 곡물의 소비가 늘어난 덕택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허수열은 주익종의 조사 시점(1912)과 종점(1939)은 1910년대 농업생산량을 과소하게 잡은 조선총독부 통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으며 1940년대의 생산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시점을 1914년 종점을 1944년으로 곡물, 야채, 과일, 육류 등 농산물 1인당 소비량을 다시 추정한 결과 주익종의 주장보다 곡물과 타 식품 소비량이 더 많이 감소했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허수열 교수의 지도하에 육소영은 이에 더해 영양 섭취량도 갈수록 하락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1] 이는 극동의 중국인과 고려인의 영향이 컸다. [2] 이러한 상황속에 암태도 소작쟁의와 같은 저항이 일어나기도 했다. [3] 한국은 독립직후 토지개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식민지에서 독립한 개발도상국 상당수가 이시기 형성된 지주제를 개혁하지 못하여 정경유착과 민주주의 훼손의 악순환을 겪는다. 대표적으로 필리핀이 그렇다. [4]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시도조차 한계가 오며 1941년 조선내에 스태그플레이션이 터진다. [5] 반면 일본 본토와 기후가 판이하게 다른 타이완섬에서는 일본 품종을 그대로 재배할 수 없었기에 아열대 기후에 맞는 개량종을 새로 개발해 보급했다. [6] 사업 시행 전 5년(1920-1924)과 이후 5년(1925-1929)을 비교하면 꼴랑 2.7% 증산이었다. [7] 특히 쌀값 폭락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된 일본 농민들의 반발이 컸다.1930년 동아일보는 '금년엔 작년보다 300백여만 석을 더 생산했으나 일본에서 조선 쌀 배척으로 인해 쌀값 폭락으로 농민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8] 하필 쌀값이 크게 폭락할 때 경기도 함께 폭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쌀값은 전체적으로 상승하다가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간 수출을 안 하던 동유럽 국가들이 곡물 수출을 재개하자 쌀을 비롯한 곡물 가격이 급락함과 동시에 유럽 각국이 공산품도 자급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산업도 같이 침체되었다. 또한, 1930년대 쌀값 하락기에는 대공황이 겹치면서 쌀값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일어났다. [9] 이영훈ㆍ장시원 외, <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 일조각, 1992년 [10]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업 생산량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량에서 경상도가 더 높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낙동강 일대 지역의 땅의 질이 좋기 때문이다. 단, 경상도가 애초에 전라도보다 산이 훨씬 많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또 경상도는 세곡으로 불리는 미곡보다는 보리의 생산량이 많았으므로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전라도가 한국 최대의 미곡 생산 지역이었다. [11] 이때 얻은 수익으로 재화와 사치품을 구입하고 주식 투자를 병행하여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 참조 [12] 해당 그래프의 세로축은 무게가 아니라 식료비, 즉 가격이다. 가격은 크게 변동이 없었으나 실제 쌀 소비량 자체는 1912년 0.77석에서 1936년 0.38석으로 반토막이 났다. 결국 미곡 섭취량은 반토막이 났지만 가격이 배로 뛰어서 더 적게 먹고도 식료품비 지출은 그대로거나 더 늘었다는 얘기다. [13] 조선인의 식사량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잡곡을 주로 섭취해서라고 한다. [14] 대표적인 예로 육류 소비량 증가의 근거가 되는 소의 숫자가 1913년 ~ 1914년 단 1년 사이 두 배 증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직 총독부의 행정력이 미비했던 일제 초기, 통계를 재집계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15] <식민지근대화론의 쟁점(2007)>, <개발 없는 개발-허수열 저>, <한일공동역사연구보고서(제1기)-日帝下朝鮮における国家総力戦体制と朝鮮人の生活―「皇国臣民の錬成」を中心に #> [16] 조영준(2016),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를 활용한 身長 연구의 재검토 -자료의 비판적 이해와 가공 문제를 중심으로- [17]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까지 포함. [18] 육소영(2017), 식품수급표 분석에 의한 20세기 한국 생활수준 변화에 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