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21:26:57

벽골제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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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 농업 / 관개시설
면적 303,843㎡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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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특징4. 벽골제 전설
4.1. 벽골제 단지 조성4.2. 지평선 축제4.3. 용도 논쟁
5. 외부 링크6. 사적 제111호7. 관련 문서

1. 개요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는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에 위치한 저수지 유적으로, 《 삼국사기》에 따르면 330년에 축조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한반도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2. 역사

벽골제의 이름은 김제 지역에 위치했던 마한의 구성국 벽비리국과 김제의 백제 시절 지명 벽골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벽골'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우리말 '벼골'[1]을 음차한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지만, 워낙 오래된 지명이라 그 의미를 정확히 추적하기는 어렵다.

한편 한자 의미 그대로 '푸른 뼈(碧骨)의 둑'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유홍준 교수의 저서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실린 전승에 따르면, 축조공사가 순조롭지 않아 고민하던 공사감독관의 꿈에 선인이 나타나 '푸른 뼈'를 넣어 다지면 무너지지 않을거라고 하여, 말의 뼈를 넣어 지으니 둑이 완성되었다고 하여 벽골제라 이름지었다 한다. 그러나 '푸른 뼈'라는 해석은 순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표기하는 과정에서 민간어원이 붙고 그에 끼워맞추기 위한 설화가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벽골은 한자가 다른 벽골(辟骨)로 음차되기도 했으며 벽성현(辟城縣)으로도 불렸는데, 이 기록을 통해 골(骨)이 뼈가 아니라 성(城)을 뜻하는 단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2]

한국 최고(最古)의 저수지 둑으로,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둑의 길이 1800보 규모로 처음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원문 삼국사기에는 백제본기가 아니라 신라본기 흘해 이사금 21년조에 기록되어 있으나, 학계에서는 벽골제가 있는 전북 김제 지역이 당시에 신라 땅일 수가 없으므로, 백제의 기록이 신라본기에 오기되었다고 보고 비류왕 27년으로 적는다.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 증축. 이후 11세기 초 고려 현종, 12세기 초 인종, 15세기 초 조선 태종 재위기 등 4차례에 걸쳐 개축하였는데, 세종 2년(1420)에 홍수로 무너졌다. 일제강점기 1925년에 동진수리조합이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1975년에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되어 현재에 이른다.

3. 특징

현존하는 둑의 길이는 2.53 km, 확인된 둑의 길이는 북으로 김제 장화동에서 남으로 월승리 사이 3.8 km에 달하며 이 곳이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석주(石柱)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5개 수문이 있었다고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2개소만 남았다. 벽골제 유적지에 있는 수문은 장생거다. 2012년에 중심거, 2020년에는 제 1수문(수여거)로 추정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제방 너머로 수로가 지나지만 수문 바로 뒤에도 제방을 쌓아 실제 수리시설로 가동할 수는 없다. 벽골제 중수비에 따르면 벽골제가 운용되던 시기에는 수문 양쪽의 석주에 느티나무 널을 놓고 그 위에 도르래를 설치하여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다.

파일:PAPPFvwr.jpg

4. 벽골제 전설


축조 당시 해수가 유입되어 사람들이 난관에 빠지자 신령이 푸른 뼈를 묻으라고 조언한 덕에 벽골제를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제에 살던 벽골제 하류의 수호신 백룡과 중류에 살던 재앙신 청룡은 서로 대립하는 사이였는데, 두 이 다투는 탓으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벽골제가 무너져갔다. 벽골제가 무너지면 농민들의 생명줄이 끊길 판, 이때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가 스스로를 벽골제에 바쳤는데, 이 광경을 보고 청룡이 탄복하여 물러나 평화가 도래했다는 전설이 있다.

벽골제 근방에 '신털미산'이라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벽골제를 만들던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내다가 점점 쌓인 흙더미라고 한다. 신털미산 외에 벽골제와 연관된 지명으로 '되배미'가 있다. 벽골제 공사를 위해 온 인부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기 힘들자,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논을 만들고 이걸 기준으로 를 세듯이 사람의 수를 계산했다고 해서 '되배미'이다. 신털미산과 되배미 모두 벽골제의 큰 규모에서 나온 설화이다.

4.1. 벽골제 단지 조성

벽골제를 중심으로 벽골제 농경문화 박물관, 단야각, 단야루 등이 있으며 무자위, 용두레, 방아, 농악같은 전통 농경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김제를 배경으로 아리랑이라는 소설을 쓴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과 문학비가 있으며 그외 지역 예술인들의 서화들도 전시되고 있다. 김제시는 벽골제 유적 발굴과 세계유산 등재에 장애요인이었던 용수로 이전을 고려 중이다.

4.2. 지평선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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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축제 홈페이지

1999년 1회를 시작으로 매년 가을(9~10월)에는 벽골제에서 지평선 축제를 연다. 주된 테마는 드넓은 지평선과 어우러지는 김제의 전통 벼농사문화. 지역 신화를 재구성한 대규모 야외공연과 농경축제다운 먹거리 장터가 메인이고 농촌에서 행해져오던 줄다리기, 쥐불놀이, 연날리기, 농악 등의 풍년 기원행사들이 이벤트로 마련되어있다. 언제부턴가 규모가 커지면서 시내 크고 작은 단체, 학교들의 행사나 대회도 같이 하고 지역축제의 격을 상징한다는 마라톤 대회도 연다.

초기에는 허허벌판에 돌 두 개만 서있는 3일짜리 허전한 축제였지만 해가 지나고 지역문화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벼농사라는 컨셉에 걸맞는 컨텐츠들이 하나 둘씩 추가되어왔다. 지금은 질도 규모도 성장한 나름 유니크한 개성을 지닌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김제가 그리 화려한 도시는 아니기 때문에 축제와 하나된 도시를 기대하고 즐기려는 기대는 하지 않는것이 좋다. 축제장을 벗어나면 말 그대로 지평선 너머 쭉 펼쳐진 깡촌을 볼 수 있을 것이다.[3] 사실 관광이나 여행 측면에서는 인근 군산시 전주시라는 강력한 상대가 있는 이유도 있다. 축제의 세일즈 포인트가 '농촌에 대한 향수'다 보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인듯 하다. 주차장은 넓은 편이지만 피크때는 역시 자리가 없다. 2014년 축제부터 주차장을 유료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벽골제까지 가는 도로도 좁은 편이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통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차량이 막히는 곳으로 줄지어 이동하지, 그 반대 방향으로 죽산면을 지나 산업도로를 타고 나가면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마을마다 격자형으로 도로가 이어져있다보니 가능한 점.

4.3. 용도 논쟁

벽골제의 크기가 그 시대 저수지 치고는 너무 크기 때문에 사실은 바닷물을 막는 방조제가 아니었는가 하는 가설도 제기되었다. 벽골제 일대가 농업 가능한 평야지대가 된 것은 일제가 간척사업을 벌이고 난 다음부터고 축조 당시에는 해안가였다는 것. 하지만 방조제라면 수문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능성일 뿐이다.

5. 외부 링크

6. 사적 제111호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최고의 고대 저수지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그러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고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제방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제방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김제벽골제비및제방 → 김제 벽골제)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7. 관련 문서



[1] 간혹 '벼고을'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고을'은 고대 한국어 기록에서 '거벌(居伐)', '기부리(己富里)' 등 어중에 ㅂ이 있는 형태로 문증되므로 삼국시대부터 그대로 문증되는 '벽골'이라는 지명과 연관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2] 이는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지명 접미사 구루(溝漊), 홀(忽)과 동계어인 것으로 파악된다. [3] 김제의 논 면적율은 전국 1위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농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