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6:35:40

김해 봉황동 유적

대한민국 사적
<colbgcolor=#315288><colcolor=#fff> 김해 봉황동 유적
金海 鳳凰洞 遺蹟
Archaeological Site in Bonghwang-dong\, Gimhae
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253 외
분류 유적건조물 /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 육상유물산포지 / 선사유물
면적 133,201㎡
건축시기 청동기 시대, 삼국시대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유 김해시
관리 김해시
파일:김해봉황동유적.jpg
<colbgcolor=#3d428b> 김해 봉황동 유적
1. 개요2. 상세
2.1. 회현리 패총2.2. 봉황대
2.2.1. 황세와 여의 이야기
3. 외부 링크4. 사적 제2호5. 여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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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위치한 1~4세기경 청동기 시대, 금관가야 유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

2. 상세

파일:봉황동유적.jpg
<colbgcolor=#3d428b> 김해 봉황동 유적 항공 전경
원래 사적 제2호는 김해 회현리 패총이었다. 바로 옆에 봉황대 유적(과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이 있었는데, 이 두 유적이 서로 관련이 크다는 지적이 있어왔고 2003년에 둘을 합쳐서 사적 제2호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재지정했다. 패총( 조개무덤)과 봉황대는 김해 봉황동 유적의 일부분이 되었다.

2.1. 회현리 패총

패총, 즉 초기 가야 사람들이 조개를 까 먹고 조개껍데기 등 각종 쓰레기를 버린 구덩이로 수많은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어 주목받았다. 수많은 김해식 토기(주로 취사용), 각종 철기, 잡아먹은 동물뼈, 일본계 수입품 등. 중국 신나라 동전이 나와 당시 시대의 국제교역 상황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 농사 기원 연구에도 도움이 됐다. 패총 전시관이 있다.

또한 1907년 대한제국 시기,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고고학 조사를 실시한 곳이기도 하다.

2.2. 봉황대

본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였는데, 사적 제2호로 통합되었다.

금관가야권 최대의 생활 유적지. 가야시대 주거지가 발굴됐고 2005년 망루, 가옥 등을 복원해 가야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옛날부터 가라대, 망해대, 여의현, 독현, 회현 등으로 불려왔다. 조선 고종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봉황대란 이름을 지은 뒤로 봉황대로 불린다.

경주시 신라왕릉급 거대무덤 봉황대와는 이름만 같고 관련은 없다.

2.2.1. 황세와 여의 이야기

봉황대에는 황세와 출여의의 못 이룬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가락국 제 9대 겸지왕 때 남대정동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하였다. 황정승은 아들 황세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를 낳았다. 그러나 황정승의 집안이 어려워 지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서 자신은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다.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으나 티가 났다. 황세는 이를 수상히 여기고 여의에게 황세바위에 올라가 오줌 멀리 누기 대결을 하자고 하였다.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다 마침 그곳에 있던 삼대로 오줌을 누어 정체가 탄로나는 것을 피했다.

여름 어느 날 여의는 거북내에서 목욕을 하다 상류쪽에서 황세와 마주치게 되었다. 더 이상 여의는 숨길 수 없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워 황세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고 이후 둘은 연인이 되었다. 출정승도 결국 결혼을 허락하였다. 얼마 후 신라군이 가락군을 침범해 오자 겸지왕은 군사를 모집했는데, 황세는 자진해서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주었고 자신의 딸인 유민공주와 결혼을 시켜 부마로 삼고자 하였다.

이미 약혼한 사이였던 황세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왕은 출정승을 불러 파혼하라고 요구하였고, 결국 황세는 유민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 여의의 부모는 딸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였으나 여의가 거부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자 여의는 더욱 슬퍼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황세는 이 소식을 듣고 여의를 잊지 못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찬가지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사람들은 둘 연인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여의와 황세가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었는데 서남쪽의 것은 황세바위, 동남쪽의 것은 여의바위라 불다. 한편 홀로 남은 유민공주는 황세와 여의의 영혼을 기리며 평생을 살겠다고 하여 경운도사와 함께 임호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위의 이유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5년 여의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여의각을 설치하였다. 봉황동 황세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3. 외부 링크

4. 사적 제2호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5. 여담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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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