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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함안 말이산 고분군 咸安 末伊山 古墳群 Ancient Tombs in Marisan Mountain\, Haman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484 등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 |
수량/면적 | 797\,282.5㎡ | |
지정일 | 2011년 7월 28일 | |
소유단체 | 함안군 등 | |
관리단체 | 함안군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가야고분군 Gaya Tumuli Tumuli de Ga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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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남도 함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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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666 | |
등재연도 | 2023년 | |
등재기준 | (ⅲ)[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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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전경[2] |
[clearfix]
1. 개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와 말산리 그리고 가야리에 일대에 위치한 안라국/아라가야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현재의 함안군 가야읍 일대는 옛 안라국의 중심지로 비정되며 인근에 안라국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함안 가야리 유적이 있고 이 중심지를 방어하는 산성들이 가야읍 주변으로 분포한다.1963년 1월 21일 함안도항리고분군(咸安道項里古墳群)과 함안말산리고분군(咸安末山里古墳群)이 각각 대한민국의 사적 제84호, 제8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같은 산의 능선에 안라국 세력이 순차적으로 조성한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현대의 행정구역이 다르단 이유로 두 고분군으로 나눴기에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결국 2011년 7월 28일 각 고분군을 사적에서 지정 해제한 뒤 하나로 묶어서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이 사적으로 지정하였다.[3]
또한 2021년 4월 27일에는 문화재청이 문화재청공고제2021-187호를 통해 경상남도 기념물 제226호로 지정된 함안 남문외 고분군(咸安 南門外 古墳群)을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 추가할 것을 예고했다. 이는 남문외 고분군의 발굴 조사로 인해 두 고분군 사이의 역사적 연관성이 확인되어 결정된 사항이다. # 이후 2021년 7월 29일 함안 남문외 고분군을 경상남도 기념물에서 지정해제하고 함안 말이산 고분군으로 편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말이산 고분군의 지정 구역을 25만 1596 ㎡ 정도 확대하여 지정 면적이 총 77만 8820 ㎡로 늘어나 규모로는 경남에서 최대, 전국에서는 두 번째인 고대 무덤 유적이 되었다.
2023년 9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개최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4]에서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북특별자치도 등에 소재한 여러 가야계 고대 국가의 고분군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1. 고분의 명칭
과거에는 연구자와 연구 단체에 따라서 고분에 제각기 다른 번호를 부여하여 고분마다 부여된 번호가 아주 난잡했다. 현재는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호칭체계를 통일했지만, 불과 2000년대까지만 해도 말이산 고분군과 관련된 고분을 공부하려면 먼저 고분 번호부터 암기해야 했다. 말이산 고분군 명칭을 난잡하게 붙였다가 정리한 대강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 1875-1932))가 조사하면서 말이산 고분군의 대형분에 처음으로 호수를 지정하였다. 舊 ○호로 부른다.
- 해방 이후 1981년에 함안군이 이마니시 류가 정한 번호의 역순으로 대형분에 새롭게 호수를 지정하였다. 現 ○호로 부른다.
- 1984, 86년 국립창원대학교 박물관이 말이산 북쪽 능선의 일부를 조사하고 새로운 고분을 일부 추가하여 昌 ○호[5]라고 이름을 매겼다.
- 90년대 들어 창원문화재연구소[6]이 대형분들을 발굴조사하며 文 ○호[7]라고 이름을 매겼는데, 現 자 명칭과 혼용되었다.
- 앞서 언급한 명칭들이 부여된 사건 사이사이에 주변의 필지 개발 및 정비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크고 작은 발굴이 있었다. 경남고고학연구소, 경남발전연구원, 경상문화재연구원,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등이 현재까지 말이산 고분군 일대의 발굴에 참여하였다. 물론 대부분 각 기관의 발굴범위 안에서 나온 중소형분들은 1호부터 번호를 매겼으므로 구분이 필요했다. 경남고고학연구소는 慶, 경남발전연구원은 경발연,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은 동[8] 등으로 구분했다.
- 물론 現 6호분이 발굴되는 시점까지 도항리와 말산리로 나뉘었기 때문에 도항리 ○호와 말산리 ○호는 다른 고분이었고 관련 분야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용하는 명칭이 갈렸기 때문에 눈치껏 알아듣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말이산 고분군 발굴은 말이산 100호와 101호 부근으로 말이산의 남단까지 내려갔는데[9] 명칭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하였기 때문에 이후의 고분에는 호칭 문제가 거의 없다.
2. 상세
함안군 가야읍 일대 유적 분포도 |
특히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한 안라국의 영역 또는 영향력 아래의 지역이었던 곳의 유적에서는 안라국 특유의 화염문투창고배로 대표되는 안라국 양식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말이산 고분군에서도 화염문투창고배가 많이 나왔다.[10] 그뿐만 아니라 안라국 특유의 오리나 새 모양 장식이 있는 유자이기(有刺利器)[11]가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며 말이산 고분군의 대형분들을 비롯한 일대의 상위 신분의 무덤에서만 출토된다. 이 일대의 지명을 비롯해 왕릉급의 고분, 왕성의 존재[12], 양식화된 토기들, 정체성을 표상하는 유물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안라국의 중심지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고, 그 중심에 말이산 고분군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말갑옷, 배모양토기, 집모양토기 등 가야를 대표하는 유물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3. 주요 고분
- 마갑총 - 과거 말이산 고분군의 최북단이었지만 개발로 인해 고분이 사라졌고 현재는 해동 아파트 단지 속에 마갑총 자리라는 표지석만 남아있다.[13] 말이산 고분군의 고분들 가운데서 비교적 빠른 4세기 후엽에 해당한다. 무덤에서 말갑옷(馬甲)이 나와 '마갑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 말이산 4호(舊 34호)[14] - 말이산 고분군의 최대분. 이마니시 류가 조사했기 때문에 '말이산 4호'보다 '舊 34호'로 기억하는 경우도 제법 있다. 이때 처음으로 안라국의 고분에서 확인되는 감실(龕室)[15]이라는 시설이 확인되었다.
- 말이산 6호[16] - 말이산 4호에서 서쪽으로 나온 구릉에 위치한다. 5세기에 조성된 왕릉이라고 추정한다.
- 말이산 8호[17] - 말이산 4호에서 서쪽으로 나온 구릉 상에 위치한다. 5세기에 조성된 왕릉이라고 추정한다. 조사를 통해 다섯 사람의 순장 인골이 확인되었다.
- 말이산 13호 - 말이산 구릉의 남단에 위치하며, 2018년 무덤의 덮개석 하나에서 별자리판이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되었다. 2021년 KBS 1TV 역사스페셜에서 관련 내용을 다루었다.
- 말이산 100호 - 말이산 구릉의 남단에 위치한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왕릉급 대형분
- 말이산 101호 - 말이산 구릉의 남단에 위치한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왕릉급 대형분
- 암각화고분 - 암각화가 새겨진 돌을 석곽의 뚜껑돌로 사용하여 '암각화 고분'으로 명명했다.
4. 사적 제515호
Ο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본래 함안도항리고분군(사적)과 함안말산리고분군(사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을 2011년 7월 28일 역사적 특성을 고려하여 같은 산자락에 걸쳐 있는 두 고분군을 통합하여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으로 재지정한 것임
Ο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37기의 대형 고분들이 높은 곳에 열을 지어 위치하여 있는 이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 때 처음 조사되었는데, 당시 34호분(현 4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39.3m, 높이가 9.7m나 되는 큰 규모의 무덤이었음. 최근에는 8호분 조사를 통해 다섯 사람의 순장 인골이 확인되었음
Ο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37기의 대형 고분들이 높은 곳에 열을 지어 위치하여 있는 이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 때 처음 조사되었는데, 당시 34호분(현 4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39.3m, 높이가 9.7m나 되는 큰 규모의 무덤이었음. 최근에는 8호분 조사를 통해 다섯 사람의 순장 인골이 확인되었음
4.1. 사적 제84호(지정해제)
삼한시대에 함안을 중심으로 한 변진의 안야국이 있던 이 일대는 낮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그 뒤의 높은 지대로부터 남쪽과 동쪽으로 낮은 산등성이가 여러 갈래로 부채살같이 퍼져 있다. 그리고 낮은 산등성이에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말산리·산음리·가야리에,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큰 무덤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1917년 일본인이 처음으로 조사한 뒤에 1992∼1994년까지 창원 문화재연구소가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내부구조를 하고 있는 113여 기의 무덤 안에서 많은 양의 각종 토기·철기·장신구와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발굴된 무덤의 내부구조는 덧널무덤(목곽묘)이 대부분인데, 덧널무덤의 중심연대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후반까지로 추측할 수 있다. 무덤의 규모와 내부구조, 발견된 유물의 차이에 의해서 소형무덤과 대형무덤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무덤은 소형무덤이 먼저 만들어지다가 이후에 큰 규모의 대형무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함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가야국에서 보다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아라가야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1917년 일본인이 처음으로 조사한 뒤에 1992∼1994년까지 창원 문화재연구소가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내부구조를 하고 있는 113여 기의 무덤 안에서 많은 양의 각종 토기·철기·장신구와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발굴된 무덤의 내부구조는 덧널무덤(목곽묘)이 대부분인데, 덧널무덤의 중심연대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후반까지로 추측할 수 있다. 무덤의 규모와 내부구조, 발견된 유물의 차이에 의해서 소형무덤과 대형무덤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무덤은 소형무덤이 먼저 만들어지다가 이후에 큰 규모의 대형무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함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가야국에서 보다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아라가야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4.2. 사적 제85호(지정해제)
함안지역은 삼한시대에 아라가야가 있던 곳으로 이 지역에 있는 무덤들은 5∼6세기경에 만들어졌다.
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과는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 도항리고분군과 말산리고분군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항리고분군에 속하며, 이 고분군에 속하는 무덤은 1·4·9·10호의 4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높이 9.7m, 지름 39.39m의 4호무덤은 가야읍 아라공원 안에 있는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으로 1917년에 발굴조사되었다. 내부구조는 장방형의 반지하식 돌방을 가진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이다.
발견된 유물 가운데 수레바퀴 모양의 토기와 새모양 토기·말띠드리개가 특징적이며, 그밖에도 각종 토기류와 철제무기, 말장식류, 사람의 뼈 등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함안지역 문화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된다.
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과는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 도항리고분군과 말산리고분군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항리고분군에 속하며, 이 고분군에 속하는 무덤은 1·4·9·10호의 4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높이 9.7m, 지름 39.39m의 4호무덤은 가야읍 아라공원 안에 있는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으로 1917년에 발굴조사되었다. 내부구조는 장방형의 반지하식 돌방을 가진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이다.
발견된 유물 가운데 수레바퀴 모양의 토기와 새모양 토기·말띠드리개가 특징적이며, 그밖에도 각종 토기류와 철제무기, 말장식류, 사람의 뼈 등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함안지역 문화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된다.
4.3. 경상남도 기념물 제226호(지정해제)
함안 남문외 고분군은 가야읍 가야리 17-9번지 일원으로 남문마을의 맞은편 구릉지에 크고 작은 고분들이 20여기 이상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들은 지방도로로 인해 두 무리로 갈라져 있으며, 대부분의 땅이 개인소유로서 경작되어 봉토가 많이 깍인 상태이다.
대부분 삼국시대의 석실묘(돌방무덤) 및 석관묘(돌널무덤)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도항 · 말산리 고분군과 봉화산성, 전(傳) 아라왕궁지 등이 분포하고 있어 삼국시대 함안지역의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2000년 8월 31일 기념물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들은 지방도로로 인해 두 무리로 갈라져 있으며, 대부분의 땅이 개인소유로서 경작되어 봉토가 많이 깍인 상태이다.
대부분 삼국시대의 석실묘(돌방무덤) 및 석관묘(돌널무덤)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도항 · 말산리 고분군과 봉화산성, 전(傳) 아라왕궁지 등이 분포하고 있어 삼국시대 함안지역의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2000년 8월 31일 기념물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5. 여담
- 현재 이 고분군이 위치한 산을 끝 말(末) 자를 써서 말산(末山)이라 부른다. 그러나 말산은 옛날에 말이산으로 불렸으며 말이산(末伊山), 또는 마리산은 '머리산'을 뜻한다고 한다. 원래는 안라국의 시조가 등장하고, 역대 왕들이 묻혔던 우두머리의 산이었다.
- 함안박물관이 말이산 고분군 인근에 위치한다. 옛 남문외 고분군 권역을 제외하면 바로 지척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이 위치한다.
- 말이산 고분군을 포함한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되는 9월 이전에 함안군은 이미 등재가 사실상 확정인 것으로 여겨 2023년 9월 초 미디어 아트를 열어 축하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 2018년 13호분에서 별자리가 새겨진 덮개돌이 발견된 이후 별을 관찰하는 행사가 수시로 열린다. 또한 2019년부터 함안군은 말이산 별축제를 매년 개최 중이다.
- 낮은 구릉이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어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야생화와 들풀을 관찰할 수 있다.
- 함안군 가야읍, 특히 아라초등학교를 나온 학생이라면 높은 확률로 이곳에서 비료포대 깔고 천연 썰매를 즐기다가 함안군청 직원에게 혼난 경험이 있거나, 혹은 그런 학생이 주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안 탔어도 우리 반에 그렇게 혼난 놈은 있었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18]
6. 관련 영상
- #KBS1TV UHD역사스페셜 5편 l 한국의 폼페이, 아라가야 l 1부 말이산고분군 편 방송본 - 함안군-유튜브 TV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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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가야 ■ 6가야 이외의 가야 ■ 가야권 국가 자체의 논란이 있는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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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2]
왼쪽의 가장 큰 무덤이 현재 4호분(舊 34호)으로 불리는 무덤이고 그 오른쪽 능선으로 8, 6, 6-1호가 위치한다.
[3]
지정될 당시 사적 제51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
[4]
2023년 9월 10일~9월 24일
[5]
창원대(昌原大)의 昌
[6]
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2005년 8월 16일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로 개편되었다가 2007년 11월 30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 개편되었다. 이후 2024년 7월 1일 문화재 명칭이 국가유산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7]
문화재연구소(文化財硏究所)에서 발굴했다는 의미
[8]
現 6호분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했는데 대형분이므로 굳이 동 6호로 부르진 않았다. 다만 현 6호분 앞에 또 작은 무덤들(...)이 있는데 그런 고분을 말할 때 동 ○호라는 식으로 부른다.
[9]
어쩌다 보니 말이산 고분군의 발굴조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10]
사실 화염문투창고배보다 다른 안라국 양식 토기들이 훨씬 많이 출토되었다. 다만 화염문투창고배 그 자체만으로도 안라국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할 만큼 대표성이 있다.
[11]
정확한 기능을 몰라서 '찌르기 용이한 철기'라는 뜻으로 한자를 조합해 명칭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한자의 의미를 무시하고 관용적으로 이러한 유물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순우리말 용어로는 '미늘쇠'라고 하는데, 아마 태극기의 국기봉 같은 기능을 했으리라 추정한다. 참고로 옥전 고분군에도 특유의 유자이기가 출토된다.
[12]
실제로 왕성인지는 다소 재론의 여지가 있다. 토성이라고 여긴 흙무더기를 조사해보았더니 일제강점기에 만든 제방이었다.
[13]
또한 남문외 고분군이 말이산 고분군에 포함되면서 설사 마갑총이 보존되었다고 하더라도 최북단이 아니게 되었다.
[14]
문서 상단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전경' 사진 속 왼쪽에 있는 대형분이다.
[15]
원래 '감실'은 유교에서 위패를 모셔두는 작은 나무장을 말한다. 여기서는 정말로 위패는 아니겠지만, 뭔가 작은 것을 올려놓거나 보관하기 딱 좋은 어떤 공간을 현대의 학자들이 임의로 감실이라 부를 뿐이다. 실제로는 개석을 받치는 시설을 위한 공간이라는 견해가 많다.
[16]
문서 상단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전경' 사진 속 4호분 뒤 산등성이 가운데에 있는 고분이다.
[17]
문서 상단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전경' 사진 속 4호분 뒤 산등성이 좌측 고분이다.
[18]
비슷하게 유적 관리가 허술하던 과거에는 고대 국가의 고분이나 토성 등의 인근에서 학교를 나온 경우 흔하게 경험하는 일이었다. 최근들어 유적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면서 점차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풍납토성과
서울풍납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