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항일투쟁을 주목표로 중국 화북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한인청년을 결집하기 위해 만든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2. 결성
단체의 전신은 중국 공산당의 지원 아래 항일 투쟁을 하고 있던 각 전선 대표들이 모여서 만든 1941년 1월 결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 10일 제2차 대회에서 혁명 세력의 증대를 위해 명칭을 바꾸기로 했는데 그 명칭이 조선독립동맹이다.조선독립동맹은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하며 위원장으로 김두봉, 부위원장으로 최창익과 한빈을 선출하였으며, 휘하군대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개편한 조선의용군으로 두고 총사령관으로 김무정을 선출하였다.
3. 활동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무장부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의용군을 휘하 군대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을 도와 중일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국공내전에도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장력이 있었기 때문에 광복 이후 대부분 지도부들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며 연안파라 불리기도 하였다.이른바 사회주의 세력권에서는 대표 독립운동 단체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세력권에서의 대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들과 연계된 계획을 세우고자 하였으며, 국내 비밀단체인 조선건국동맹 역시 이들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4. 의의
1940년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명목상 독립운동 단체를 대표하던 단체였다면, 규모나 여러 측면에 있어서 가장 큰 단체는 조선독립동맹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괜히 이들과 연합작전을 펼치고자 한게 아니었다. 당장에 한국광복군의 규모가 1000명 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니 이 단체의 휘하부대인 조선의용군의 8000명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치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하지만 이들은 지도부 대부분이 북한 건국에 참가[1]하고 한국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남한 내에서는 잊힐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연안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는 뜻으로 북한에서 연안파로 불렸다. 또한 결속력이 약했기 때문에 구심점이 크게 부족했다. 당장에 군대를 이끌던 김무정이 한직을 전전하다 전쟁 중에 김일성에게 숙청당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결국엔 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 정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결국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버림 받은 단체가 되어버렸다.
사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으로 김원봉이 있긴 하지만 김원봉의 경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적도 있고, 이전에 의열단 활동으로 이름을 날린 적도 있기 때문에 의열투쟁, 노덕술에게 고문받았다는 일화 등의 극적인 스토리가 있어서 남한 내에서 굉장히 빨리 알려진 편이고, 재평가도 빠르게 이루어진 편이나 이 단체의 경우 아무래도 주요 지도자였던 김두봉은 사실 한글학자로 이름이 더 높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화할만한 건더기도 별로 없어서 그냥 당시 독립운동 3단체 중 하나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두봉은 처음부터 북한으로 귀국했고 북한에서 상징적인 직위이기는 했지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국가수반 직위까지 올랐던 인물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맡았던 역할도 김원봉보다 더 컸다. 즉, 만약 재평가 시도가 있다고 해도 6.25 전쟁에 대한 논란이 김원봉보다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재평가 가능성은 낮다.
5. 강령
一. 본 동맹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통치를 전복하고, 독립 자유의 조선민주공화국 건립을 목적으로 하여 아래의 제 임무를 규정한다.
(一) 국민 일반의 직접선거에 의거하여 민주 정권을 수립한다.6. 기타
조선독립동맹은 1940년대 주요 3단체 중 하나로 한국사 관련해서는 꽤나 중요하게 다루는 단체다. 이들의 건국강령(1942년 7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년 11월), 조선건국동맹의 강령(1944년 8월)과 함께 이 시기와 관련된 문제로 나오는 출제 포인트 중 하나다.
[1]
김두봉은 명목상 국가수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최창익은 부수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