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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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인민공화국 Народна Република България People's Republic of Bulg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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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1] | |
Съединението прави силата 통합이 힘을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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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15일 ~ 1990년 11월 15일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불가리아 왕국 | 불가리아 공화국 | |
국가 | 친애하는 조국 | |
위치 | 중부 유럽, 발칸반도 | |
수도 | 소피아 | |
정치체제 |
일당제
공산주의 국가(1946-1989) 다당제 의회정 공화국(1989-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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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주석 | |
정부수반 | 총리 | |
주요 서기장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토도르 지프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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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불가리아어 | |
종교 | 국가 무신론 | |
민족 | 불가리아인, 튀르키예인 등 | |
주요사건 |
1946년 건국 1990년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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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불가리아 레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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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왕국이 멸망한 후 세워진 인민 공화국.발칸반도에서 가장 러시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국가였으며 동유럽 블럭 중에서도 무역총액 중 소련과의 무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오죽했으면 소련과 불가리아의 우애를 주제로 한 군가인 "불가리아 - 러시아"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웃나라인 그리스나 튀르키예에서는 때로는 민주정부가, 때로는 군사독재정부가 들어서고 루마니아나 유고슬라비아는 개인의 통치 하에 소련과는 독립적인 정치를 했지만 불가리아는 소련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불가리아가 알바니아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발칸에서 잠깐이나마 잘사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원자재나 소비재를 소련으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이었던 디미트로프와 체르벤코프, 지프코프에 이르기까지 역대 공산당 수뇌부들은 매우 억압적, 보수적인 통치를 했다. 불가리아인들은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위성국가(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들의 인민들이 소련에 대항해서 자유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공산정권에 충성을 바쳤으며 정권도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시위나 시민봉기가 아니라 공산당 내 반대파들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2. 역대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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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48 | 1948 -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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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971 | 1971-1991[2] |
3. 역사
1944년 소련군이 불가리아로 진입하자 불가리아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으며 대량 숙청을 거쳐 1946년 9월 15일 당시 9세였던 시메온 2세를 몰아내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초대 서기장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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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로프가 1949년에 사망하자 시신을 엠버밍 처리하고 영묘를 조성했는데 불가리아가 민주화되면서 시신은 화장되었고 영묘 자체도 1999년에 헐렸다.
벌코 체르벤코프의 뒤를 이어 1954년 집권한 토도르 지프코프는 불가리아의 공산체제가 무너진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장기 집권을 했다. 1955년에는 국제연합에도 가입했으며 1971년에는 지프코프 헌법을 채택해 민주화될 때까지 사용했다.
지프코프 정권이 친소 정책을 유지하면서 소련이 주장한 ' 사회주의 국제분업'에 적극 협력해 농업 성장에 집중했는데 소련의 총괄 아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은 중화학 공업을, 헝가리 인민공화국은 경공업을, 나머지 나라들은 1차 산업을 집중 육성했다. 당연히 북한, 루마니아와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큰 반발이 일어났지만 농업을 집중 육성하는 국가로 지정된 불가리아는 군말없이 이 계획을 정말 열심히 수행해서 지금도 먹는 것 하나는 풍족하고 물가도 크게 저렴하다.
여하튼 이 시기에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그럭저럭 먹고사는 나라가 될 뻔했지만 소비재의 질이 낮다는 문제점에 시달렸다. 당시 불가리아는 이탈리아 다음으로 남유럽에서 잘 살던 나라였던 덕택에 1970년대 들어서 상당한 액수의 외채를 빌렸는데 이는 1980년대 경제 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 불가리아는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소련과의 관계가 밀접했다. 지금도 러시아와 관계가 나쁜 건 아니지만 공산주의 시절에 비하면 미적지근하다. 다만 이 시대에는 불가리아 정부가 자국의 소수민족인 튀르키예인들을 탄압하고 이들을 튀르키예 국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동유럽 혁명으로 지프코프는 실각했고 페터르 믈라데노프가 집권하면서 다당제를 도입하였으며 불가리아 공산당도 사회당으로 당명을 바꾸어 오늘날의 불가리아가 되었다.
여담으로 지프코프는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된 후 체포되기도 했지만 건강 악화를 이유로 연금 상태로 사는 것이 허락되었다. 1996년 불가리아 대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고 1998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불가리아 정부는 지프코프의 국가장을 거부했다.
4. 사회
1980년대 들어서는 소수민족인 튀르크계 불가리아인에 대해 루멜리아 튀르크어식 성씨를 불가리아어식으로 바꾸게 하는 이른바 '재생과정(Възродителен процес)'이라는 이름의 동화정책이 실시되었다.[3] 튀르크계 불가리아인은 90만 명으로 인구의 10%를 차지했다. 그 결과 1989년 국경이 개방되자 이 정책에 반대하는 30만 명의 튀르크계가 튀르키예로 이주하였다.[4]
[1]
리본에 적힌 숫자 중 '681'은 역사상 최초의 불가리아인 국가인
아스파루흐의
불가리아 제1제국이 성립한 연도를, '1944'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이끄는
불가리아 조국전선의 공산주의 쿠데타가 성공한 연도를 뜻한다.
[2]
공산정부 붕괴 이후 임시로 이듬해 1월 11일까지 쓰였다.
[3]
왜 이름이 재생과정이냐면, '튀르크계 불가리아인은 사실 튀르크인이 아니라 강제개종당한 불가리아인의 후손들이므로 본래 정체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 정교회 튀르크인은?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튀르크계 불가리아인 입장에선 그냥 창씨개명이나 다름없는 문화탄압이었다.
[4]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크계 불가리아인은 여전히 적지 않게 불가리아에 남아 있다. 사실상 무신론자에 가깝거나 완전히 무신론자가 된 튀르크계 불가리아인들, 정체성은 튀르크계이지만 정작 종교는
정교회인 이들은 대부분 튀르키예로 이주하지 않고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았으며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튀르크계 불가리아인들 중에도 재생과정에 대한 불만과 별개로 고향인 불가리아 땅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은 이들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