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Алекса́ндра Коллонта́й | Alexandra Kollont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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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1]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Alexandra Mikhailovna Kollontai |
출생 | 1872년 3월 31일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952년 3월 9일 (향년 79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혁명가, 정치인 |
정당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899~1918) [[소련 공산당|]] (1918~1925) |
학력 | 취리히 대학교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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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혁명적 연애관을 주장해서 독특한 이력을 남긴 러시아의 혁명가, 정치인, 소설가, 마르크스주의 여성 해방 이론가 및 운동가.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는 《붉은 사랑》,《날개 달린 에로스》,《성의 관계와 계급 투쟁》,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등이 있다.
2. 생애
러시아 제국 장군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핀란드인.당대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랐고 여러 외국어를 익혔다.
1차대전 시기에는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내부의 볼셰비키 세력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며 레닌의 신뢰를 쌓았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4월 레닌이 콜론타이와 함께 러시아에 귀국했을 때 레닌은 한동안 콜론타이와 함께 다니며 그녀를 정치적 동지로써 신뢰했다. 이는 당시 러시아 임시정부를 즉각 타도하자는 레닌의 강경한 주장에 동의한 인물이 콜론타이와 러시아 내부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을 이끌었던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였기 때문이다.[2]
3. 사상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들 중에서도 매우 급진적이고 자율적인 주장들을 많이 펼쳤다. 노동조합이 모든 경제를 관리해야 하고 당과 국가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크론슈타트 반란[3] 때도 수병들을 진압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고, 때문에 레닌, 트로츠키 두 사람 모두의 눈 밖에 나서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주로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1917년 12월의 인민위원평의회. 치체린(초대 외무인민위원), 레닌 등이 보인다. 레닌의 왼쪽(보는 사람 기준 오른쪽)에 앉아있는 것이 바로 콜론타이이며, 레닌과 콜론타이 사이에 서있는 사람은 스탈린, 콜론타이 왼쪽(보는 사람 기준 오른쪽) 뒤에 서있는 사람은 콜론타이의 남편이었던 파벨 디벤코. 이 인민위원 중 디벤코를 포함해 다섯 명이 대숙청 때 죽었다.
이렇게 완고한 사회적으로 굉장히 진보적 스탠스를 취했으며 볼셰비키 원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 체제에서는 의외로 천수를 누렸는데, 일단 권력의 핵심에서 이미 밀려났던(!) 것도 있고, 스탈린 눈 밖에 나지는 않게 행동했기에 '진보적이고 양성평등적인 소련'이란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쓸모 있는 간판이라 판단되어 스탈린이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이 생존이 얼마나 특기할 일이었냐면, 10월 혁명을 이끌었던 볼셰비키의 최고 원로이자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중앙위원 중 스탈린과 그 지지자인 무라노프를 제외하고 유일한 생존자였다. 러시아 혁명 때 수많은 사회주의 정파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있었지만, 여성으로서 이 정도 거물은 거의 없었다. 레닌의 아내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크림 당 위원회 비서로서 브란겔의 남러시아군 진압에 가담했던 로잘리야 제믈랴치카, 백군에 가담했다 체코로 망명 간 예카테리나 브레시콥스카야 등도 레닌의 바로 옆자리에 앉던 콜론타이만큼의 유명세를 유지하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었던 마리야 스피리도노바가 혁명가로써는 더 유명하긴 했지만, SR-L(좌파 사회혁명당) 전투단원에 속해 폭탄 테러 등으로 혁명을 이룩하려 했기 때문에 국가에게 탄압받아 생애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다 결국 스탈린에 의해 죽었다.[4][5] 결과적으로 콜론타이보다 더 유명한 건 1920년에 일찍이 타계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볼셰비키 대표이자 콜론타이의 선배 되는 프랑스 혁명가 이네사 아르망이나 아나키스트 옘마 골드만 정도인데, 아르망은 너무 일찍이 사망한데다 레닌과의 스캔들로 인해 기록말살을 당했고 골드만은 러시아 혁명에 참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콜론타이는 노동조합 통제 문제에 대해 토론이 발생해 레닌이 공산당 내 분파금지령을 내리는 시점까지만 해도 트로츠키와 정적이었지만, 스탈린 정권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고 트로츠키의 입장도 전향적으로 변하자 트로츠키파가 된다. 아닌게 아니라 남편인 디벤코, 그리고 소련내 노동계급의 대표였던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를 비롯해 비볼셰비키 좌파는 죄다 트로츠키를 지지했다. 그 중에 생존자는 거진 콜론타이 뿐이다.[6][7]
무엇보다 가장 많이 알려진 주장은 혁명적 연애에 대한 주장이다. 사회주의가 대체로 성개방, 자유 연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콜론타이의 주장은 그 중에서도 매우 독특하고 급격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 관계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경제적 단위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콜론타이는 가족이 혁명적 사회 안에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연애라는 감정을 통해서 서로를 소유하려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은 약탈적이고 불건전하다고 주장했다. 서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일부일처제를 넘어서는 연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날개 달린 에로스' 개념이다.
봉건제적 연애는 기사와 귀부인의 사랑처럼 정신적인 사랑이 강조된 나머지 육체적인 부분이 간과되고, 자본주의적 연애는 그와 반대로 정신적인 부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인 예가 성매매이다. 콜론타이는 따라서 사회주의적 연애는 정신과 육체가 공존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선 육아의 완전한 사회화가 필요했다. 또한 성욕은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성욕의 충족은 물 한 잔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다. '물 한 잔 이론'이라고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저 주장 때문에 회의장이 난리가 나자, 레닌이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잖아!"라고 외치며 모두 침묵시켰다.
인간이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로서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것, 또한 질투라는 감정을 부르주아적 감정으로 규정하고 자유로운 급진적 연애관에 대해서 얘기한 것은 후대의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8]나 좌파들에게 많은 영감을 남긴다.
다만 여기서 콜론타이에 대한 가장 큰 비판 또한 발생하는데, 후일 스탈린이 소련의 절대권력자에 등극하고 트로츠키와 부하린의 흔적을 쓸어내면서 가족의 해체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상 또한 전부 금지시켰다. 따라서 소련에서는 소련 인민은 남성은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써, 여성은 '그 동반자로써'의 위치가 되어 100% 평등하다고 보긴 어렵게 되었는데, 콜론타이는 이를 비판하지 않고 적극 지지했다.
[1]
개성 전의 성씨는 도몬토비치(Домонтович, Domontovich)
[2]
후일 실랴프니코프와 콜론타이는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결성, 독재적으로 변하는 공산당에 맞서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자는 주장을 하나 묵살당하고 거의 출당당할 뻔한다. 이후 실랴프니코프는
대숙청 시기 처형되었다.
[3]
잔존 SR-L(좌파 사회혁명당. 아래의 스피리도노바가 여기 당원이다.), 일부
아나키스트 혹은
볼셰비키지만 레닌의 전시공산주의와 반볼셰비키 탄압에 반대한 이들이 연대하여 일어난 혁명.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파업에 대해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가 강력진압을 택하자 크론슈타트 항에서 궐기하였으며
좌파공산주의성향을 띄었다.
[4]
원래 SR-L는 폭탄 테러 등을 통한 혁명을 주장했다. 계급투쟁적 성격 대신
허무주의적 폭탄테러와 계몽주의적 사고관이 이들의 특징이였으며 이때문에 레닌의 독재적 행각에 반대해 레닌 암살까지 조직하였을 정도였다.
[5]
넬슨 만델라나
안토니오 그람시 부럽지 않게 지옥같이 긴 옥살이를 한 여성혁명가가 소련과 러시아 제국엔 여럿 있었다. 스피리도노바의 동지 카홉스카야도 73세의 일생 중 4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스피리도노바는 56 평생 중 15년을 감옥, 14년을 유배생활하며 보냈다.
[6]
남편인 디벤코도
대숙청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
[7]
사실 콜론타이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의 집권 공산당 내에서 (부하린을 제외한) 좌파공산주의나 평의회 민주주의, 노동자 반대파, 좌익 반대파 및 기타 급진적 지향을 보인 이들의 대부분은 소련 탄생 직후 소련 정권이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권'이라 불리던 시기에는 트로츠키에 맞서던 입장이었지만 이후 당내 주도권이 스탈린으로 넘어가면서 반대로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스탈린에 맞서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는 자신이 당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절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당내 급진주의 정파들을 앞장서서 때려잡던 트로츠키였지만 스탈린에게 밀려 세력을 잃은 이후에는 당내 민주주의 및 노동자 계급에 기반한 평의회 민주주의 떡밥을 들고 나오며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입장이 유화적으로 변하였으며 그런 트로츠키 이외에는 볼셰비키의 대권주자급 수뇌부 내에서 다른 협력자를 찾기 힘들었던 급진주의 정파들의 입장 때문이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정적들을 조롱하고 비난, 매도하는 것이 특기였던 트로츠키에 비해 정적들을 깨끗하게 숙청해버리는 스탈린이 더 매운맛으로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간 콜론타이 역시 노동조합의 독립적 권한을 주장하고, 크론쉬타트 수병 봉기의 진압을 반대했으며, 평생동안 (좌파) 자유의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음을 종합해보면 전형적인 공산당 내 급진 좌파의 태도를 견지해 온 것이고, 한때 반 트로츠키파에서 이후 트로츠키파로 입장을 바꾼 것 역시 그런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정치적 궤적을 거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히려 신기한 것은 (말년에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그러고도 유독 콜론타이가 대숙청의 칼날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 쪽이다.
[8]
다만 콜론타이 본인은 어떤 노선이 되었든 부르주아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 바 있다.
클라라 체트킨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