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24 23:32:18

군사영어학교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국군 장교 임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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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英語學校
Military Language School
1. 개요2. 역사3. 특징4. 군번 1번 문제5. 졸업생

1. 개요

미군정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장교 생활을 경험한 한국인 군경력자를 대상으로 영어를 교육한 학교로 당시엔 육군사관학교 역할을 했다. 졸업자들은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2. 역사

미군정 초대 국방사령관이었던 미 육군 중장 L.E. 쉬크 장군의 지시로 통역관 및 군간부요원 확보를 위해 1945년 12월 5일에 개교하였다. 초창기에는 감리교신학대학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건물을 활용했다.[1] 1946년 2월 27일엔 태릉으로 옮겼다. 초대 교장은 리스 육군 소령이였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꼴랑 6개월 설치한 사이에 4번이나 교장이 바뀌었다. 일본 육군 지원병훈련소 건물에 조선경비대가 1946년 1월 15일부터 주둔한 탓이었다. 1946년 4월 30일 폐교하였다.

조선경비대는 1946년 6월 15일에 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를 설립하였고 이는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이다.

3. 특징

설치목적 자체가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하였기 때문에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출신 장교 및 준사관 중에서 중등학교 이상을 졸업하고 영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구비한 자로 제한했다. 주로 군사영어(Military English)와 한국사, 참모학, 화기훈련, 자동차 교육 등이 실시됐다. 웨스트포인트의 교육방식을 따랐으며 사관생도 들에겐 통역관에 준하는 급료가 지불되었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에는 사열 분열도 했다고 한다. 단 이는 위관급 장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고 상당한 군경력자 대위 영관급 장교 출신의 군경력자들은 그냥 군사영어학교에서 하루나 이틀 연수시키고 바로 특별임관시켰다.

조선인 일본 육군 출신자는 39만명이라는 대병력인데 비해, 광복군 출신자는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도망친 사람까지 합쳐서 3만 5천명밖에 안되었다. 사실 한국군 초기에 3만 5천명이라면 6.25 당시를 기준으로 1/3을 감당할 만큼 충분한 병력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입장이였고 광복군 역시 그대로 한국군을 창설할 예비 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군, 만군, 중국군(팔로군 , 광복군, 독립군 출신 포함)등을 안가리고 받아 들였다. 이는 광복군 출신자들에게 대단한 모욕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학교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이 중국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이응준이 추천하기로 했는데 중국군, 즉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광복군들은 나중에 1946년 9월에 통위부 장관에 자군 출신인 유동열이 오르자 입대하였다.

이후 110명의 교육수료자 가운데 87명은 일본군 출신이었고(일본육사 13명, 학병 68명, 지원병 6명, 관련기사 ) 21명은 만주군(일본육사 편입자 5명), 2명은 중국군 출신이었다. 결국 110명 중 108명이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이들이었다. 광복군 역시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종사한 이들과 같이 교육을 받을 수 없단 방침이었다.

결국 이들이 창군이 주역이 되었고, 6.25 전쟁을 이끌어 갔다. 1948년 12월 15일 이응준이 최초로 장성으로 승진되었고 뒤를 이어 중간에 유고자를 제외하고 딱 5명만 별을 달지 못하고 남은 78명이 장성으로 승진하였다.(대장 8명, 중장 26명)

여담으로 110명이란 수치는 실질 참여자 170명 가운데 군으로 간 인원이 110명이라 그렇게 나온 것이다. 실제 건군기에 참여한 초기의 육군 장교들은 17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학교 자체의 입교자 전체는 200명이었다. 90명이 중간에 이탈한 셈. 근데 김웅수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졸업생은 110명보다 더 많았는데 초과 인원은 전부 조선해안경비대로 쫓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개편된 뒤 제독까지 진급했다(...)고 한다. 새옹지마

1기는 60명이었고 평균 연령은 23-24세 수준이었다. 입학시험은 미군정청 내의 군사국에서 면접과 신체검사, 군경력을 확인하는 절차로 이뤄졌으며 입교 후에 영어 실력에 따라 네 개 반으로 나눠 편성되었다. 건군기에 졸업한 이들은 고위 장교가 없는 한국군의 당시 특성상 아주 빠르게 진급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에 대령으로 사단장을 하기도 했고 30대에 중장을 달기도 했다. 졸업생 110명 중에 78명이 장군으로 진급하였고[2] 대장까지 오른 이는 8명이었고 참모총장도 13명을 배출하였다.[3] 별들의 기수 이상 수준이다.

교장은 미 육군인 리스 소령이었고 부교장은 원용덕[4] 참령(소령)이었다. 교직원의 숫자는 미군 셋, 한국군 셋으로 6개월 동안 교장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여담으로 부교장인 원용덕은 부교장이면서 교육생이어서 군번 47번을 받았다고 한다(...). 근데 군번은 없고 등록번호만 있다는데 군번이 있다는 썰은 이형근이 자신이 군번 1번을 받은 것을 정당화하려고 그랬다는 말이 많다. 채병덕보다 앞선 군번을 받으려고.

졸업자 명단은 블로그를 참고할 것. 이색 경력자에 대한 얘기는 블로그를 볼 것.

4. 군번 1번 문제


좀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조선이 일본과 통합되는 과정에서 일본육사에서 위탁교육중이던 조선인들은, 지청천, 김경천처럼 중국으로 도망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자들도 있고, 지청천의 설득을 거부하고 남은 홍사익, 이응준(이상 일본 육사 26기) 같은 자들이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조선인 입교자가 없다가 1930년이 되서야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져서 채병덕, 이종찬이 49기로 졸업 후 임관 하였다. 그바람에 조선시대의 이응준 같은 원로들과 차이가 많이 난다.(이응준은 대령, 채병덕은 소좌) 이응준, 지청천 등의 원로들은 한국군 창군기에 대령등으로 특별임관 하였다. 그에 비해 채병덕 소좌 이하로는 전부 군사영어학교를 거쳐서 소위부터 공평하게 시작하였다.

만주군의 경우 2년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1932년에 세워졌고, 일본계는 전원 일본 육사에 편입하였고, 비일본계는 성적 우수자에 한해 일본육사에 편입했는데[5] 여기에 최선임인 김석범이 일본 육사 54기 상당, 동기생이였던 정일권이 55기 상당으로 일본 육사로 편입되었다.

즉 특별임관한 대한제국 출신 장교들을 제외하면 채병덕과 이종찬이 최선임이고, 특히 채병덕은 소좌, 이종찬은 대위로 채병덕이 최선임, 최고참 군사영어학교 수료자이다. 그런데 난데 없이 이형근이 군번 1번을 가져가버렸다. 채병덕은 일본49기의 선배이고, 이형근은 56기이다. 특별임관한 광복군 출신의 원로들에게 군번1번을 안 준것은 미군정에서 그딴거 인정 안하니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채병덕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군번1번을 안준 것은 환장할 노릇. 그바람에 이형근이 장인 이응준 백으로 군번 1번을 받았다고 비난하고, 이형근은 시험을 보고 성적순으로 군번을 매겼다고 하다가, 시험 자체가 없었던 것이 들통나니, 말을 바꿔서 일본군에서 보내준 자료를 검토해서 미군정에서 군번 1번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육사 기수로 군번 뽑을꺼면 이응준이 1번 아닌가?

왜 군번1번 문제를 언급하냐면 이것이 결국 채병덕과 이형근 사이의 한국군 최초의 파벌 싸움 문제로 번지게 되었고, 이것은 6.25 당시 까지 연관이 되어 파벌 싸움 때문에 6.25 직전에 참모총장 및 각군 주요지휘관을 바꾸던 이유가 되었다.

5. 졸업생



[1] 감신대는 1944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상태였기 때문에 잠시 건물을 활용한 것이다. [2] 추서자 5명까지 포함하여서다. [3] 당시엔 소장이나 중장이 참모총장을 맡기도 했다. [4] 만주군 중령 출신으로 한국군 육군 중장을 지냈다. [5] 일본육사 떨어져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온 일본인은 아무래도 공부를 잘 못해서, 조선인들이 성적 우수를 휩쓸었다. 그바람에 조선일 출신자중 반정도는 일본 육사로 편입되었고, 대만계/만주계는 일본 육사 갔다온 즉시 독립군에 투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조선인의 경우 그런 일이 단 1건도 없이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했다. 그에 대한 보답인지 1942년 입교자 부터는 일본인으로 계산되어 전원 일본 육사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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