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3 23:03:18

강영훈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제 4/5대 국회의원에 대한 내용은 강영훈(1927)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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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양군 이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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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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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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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서

※29대 부터는 총재에서 회장으로 변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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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사진

강영훈(姜英勳)
1922년[1] 5월 30일 ~ 2016년 5월 10일

1. 개요2. 총리 시절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 군인, 정치인이다. 아호(雅號)는 청농(靑農), 종교는 원래는 불교였으나,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서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났다. 오산고등학교, 1940년 영변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하여 1944년 경제과를 수료하였다.

8.15 광복 후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했다.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관리국 국장, 육군 제3군단 부군단장을 지냈다.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

196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제6군단장 시절 4.19 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내려졌으나 강 전 총리는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는 반대하였다. 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군정 치하에서 반혁명죄로 숙청된 이한림, 장도영, 김웅수 등과 미국 각 지역에 뿔뿔히 유학을 떠난다.1962년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이듬해인 1963년 서던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을 용납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도 계속 밝혔듯이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은 그의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학교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외교안보연구원장(현 국립외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부터 주 영국 대사 및 주 아일랜드 대사, 주 로마 교황청 대사, 외무부 본부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첫 남북총리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등 국무총리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고 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이후 7년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했다. 또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시 긴급구호 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 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 외교관의 영국이야기』,『소련견제이론』,『한국통일문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등이 있다.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2016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2. 총리 시절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기도 했다.

이 책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았으며, 여러 인터뷰에서도 역대 총리 가운데 제대로 권한을 행사해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한 총리로 평가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국무총리 시절 그는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졌다.

특히 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9년 일본 쇼와 덴노의 장례식에 조문을 하러 갔던 적이 있다. #(1: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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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훈 국무총리가 1990년 12월 11일 저녁 제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쉐라톤 호텔에서 베푼 만찬회장에서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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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8일 남북총리 회담차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한 장면. 뒤에 서있는 사람이 북한 연형묵 총리이다.

여담으로 이 당시 국민 감정과 상호 존중을 모두 고려하여 '주석님'이라는 가벼운 존칭으로 부르려 했으나 김일성이 인사말 도중 강영훈 총리 각하라는 더 높은 존칭으로 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석 각하로 격상시켜 호칭했다고.[2] 이 부분은 신문 지상에서 대거 보도되었으나 매스컴을 통해서는 KBS 뉴스 9에서만 보도되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사진으로조차 국내 언론에 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TV에 김일성의 실제 모습과 육성이 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전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으며, 당연히 강영훈 총리가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걸 그대로 내보내는게 어찌보면 시기상조였던 셈. 물론 당시의 KBS가 사실상 정부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영방송이었음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정도의 해프닝(?)은 정부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정도로 남북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면담 도중 김일성이 “우리 민족이 6000만”이라고 하자 “6000만이 아니고 7000만 명입니다”고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고. 다만 당시 김일성의 나이가 78세로 팔순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 정도의 착각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라 수용소에 1000만명이나 보낸걸 제외하고 얘기한거 아냐?

3. 여담

  •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 벽창호’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집 센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전 총리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이다.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이다.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동 주택가 골목에 살았다. 1953년 휴전 이후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강남개발 등 부동산 광풍이 몇 차례 휩쓸었어도 꿈쩍 않고 동네를 지켰다. 그래서 ‘부동산의 대가’보다 한 수 위인 ‘부동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십년간 찾는 단골 이발소가 있었는데, 이발사가 강 전 총리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발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발사가 강 전 총리에게 더 이상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였다는 일화가 있다.
  • 바티칸 대사 시절 바티칸을 찾은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에게 국정방향에 대해 쓴 소리를 했는데, 노태우가 이때부터 그를 마음속으로 존경하게 돼 후일 총리로 기용했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에는 민정당 당대표직을 제안받았으나 초선 의원이 대표를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고사했다. 그랬더니 노태우 대통령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명 물태우에 대해서는 “물은 세상의 근본이니 나쁜 뜻이 아니다"라고 했다. 노태우에 대해서는 전임 대통령과 비교해 유하게 정국을 이끌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은데 사실은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총리에게 맡긴 일은 일절 간섭하지 않았고, 자신 역시도 언제든지 그만둘 각오로 소신껏 일했다고 회고했다.
  • 총리 재임 시절 북한과의 회담에서 북한 측은 강영훈 총리가 자신들에게 의외로 강경하다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강영훈 총리는 퇴임 후 인터뷰에서 북한은 정상국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한 인터뷰에서 인도적인 대북지원은 최대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 17대 대통령 후보를 지낸 문국현이 인생의 사표라고 밝혔다. 기사 .1995년 UNEP 한국위원회의 총재로 활동하였으며, 문국현과 함께 “북한에 나무를 심는 ‘평화의 숲’ 운동을 전개했다.


[1] 실제로는 1921년 [2] 이 때 김일성은 말년에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렸는지 남북 대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으며 심지어는 김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일부 온건파가 자본주의 도입을 건의하자 옆에서 광분해 쏴죽이라고 지랄하던 아들 새끼를 제지하고 일단 들어보자며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 정도로 자신이 공들인 남북 대화 덕분에 대한민국의 2인자나 다름없는 국무총리를 만났으니 각하라는 호칭까지 쓴건 어찌보면 그렇게 놀라울 일도 아닌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