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01:28:23

정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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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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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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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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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 독립운동가
1969
이인
법조인· 독립운동가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1969
이종순
제헌국회의원
1969
조동식
교육인
1970
김수환
추기경
1970
백낙준
교육인
1970
이상백
-
1971
유일한
기업인
1976
박일경
교육인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1982
권영대
교육인
1982
김상만
언론인
1985
이숙종
교육인
1987
이병철
기업인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1991
강영훈
국무총리
1991
김병관
언론인
1994
김호길
교육인
1995
곽윤직
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8
고흥문
국회의원
1998
주영하
교육인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2009
김정수
정치인
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기업인
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2018
김종필
국무총리
2018
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법조인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8
정세균
국회의장
2019
윤한덕
의사
2019
이국종
의사
2020
이이화
사학자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2020
문희상
국회의장
2021
최종태
기업인
2022
박병석
국회의장
2023
송창근
기업인
2023
김박
기업인
2023
자승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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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c83><colcolor=#ffffff>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정몽구
鄭夢九|Chung Mong-koo
파일:정몽구(Chung Mong Koo).jpg
출생 1938년 3월 19일 ([age(1938-03-19)]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
직업 기업인
현직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학력 경복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 졸업 / 34회)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 공업경영학 / 학사)
재산 70억 달러 (한화 약 7조원)[1]
서명
파일:정몽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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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c83><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정몽필
남동생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여동생 정경희,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이정화(1939년~2009년)[2]
자녀 장녀 정성이(1962년생)[3]
차녀 정명이(1964년생)[4]
삼녀 정윤이(1968년생)[5]
장남 정의선(1970년생)
신체 177cm, 75kg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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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기업인 활동
3. 사회적 공헌4. 학력5. 경력6. 상훈7. 자동차 산업에서의 공로8. 가족 관계9. 두 차례의 옥고
9.1. 1978년9.2. 2006년
10. 여담11.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 초대 총수 겸 명예회장.

정주영 정몽헌 사후 명실상부한 범현대가의 수장이자 이건희 삼성 제2대 총수과 함께 대표적인 국내 재벌 총수 2세로 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이끈 기업이 국내 1위를 넘어 세계 정상권으로 성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2. 생애

1938년 3월 19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정주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6]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6.25 전쟁으로 인한 유급과 학사 부진 등 시국의 파도를 맞으며 학창 시절을 보내다 1959년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했다. 무지막지한 덩치와 인상에서 보이듯 다혈질에 성미가 급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7] 현장에서 몸을 부딪히며 하는 일을 중시하던 마초 타입이었다.

이 때문에 초졸이라는 짧은 학력을 평생의 컴플렉스로 여겼던 정주영은 정몽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8] 이후 육군에 입대해서 병장으로 전역한 후 미국 유학을 거쳐서 32세인 1970년에 현대자동차 과장으로 입사한다. 정몽구가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자식을 넷이나 두고도 정직원으로 발령받지 못하고 공사장에서 고생하는 걸 안타까워한 어머니가 정주영의 해외 출국을 틈타서 현대자동차 서울사무소장에게 부탁하여 입사가 성사된 것이었다.

2.1. 기업인 활동

아들 정의선이 태어난 1970년 처음 현대에 입사한 이후 현대자동차, 현대건설을 거치며 주로 현장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후술하는 특혜 분양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대신해 징역을 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조금씩 정주영에게 인정 받는다. 그리고 1982년 형 정몽필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로는 명실상부한 현대가의 장자가 된다.[9]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동생 정몽헌, 정몽준이 쉽게 높은 직위를 얻어낸 것과 달리[10] 정몽구는 현장에서 직접 실적을 보인 뒤에야 어렵사리 인정 받았고 아버지의 정계 진출 이후 그 공백을 메우던 삼촌 정세영을 보좌하다가 1996년, 마침내 현대그룹 회장직에 오른다.

1997년 외환 위기 후 셋째 동생 정몽헌이 공동 회장으로 승격되자 정몽헌과 그룹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면서 그와 틀어졌고 각각의 가신들과 황색언론의 이간질까지 겹쳐지며 이는 결국 2000년 대한민국 기업 역사상 최악의 경영권 다툼인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정몽구는 2000년 8월,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경질 당해 그룹의 자동차와 제철 및 철도 등의 부분을 갖고 현대기아자동차그룹으로 독립한다. 이때만 해도 왕자의 난은 동생 정몽헌의 승리로 쉽사리 귀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현대그룹 적통을 정몽헌에게 내준 것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는데 이후 정몽준이 자신의 지분을 정리하여 이듬해 현대중공업과 조선 분야를 가지고 이탈했고 그룹의 상징이자 가장 알짜였으나 부실이 감춰진 건설과 전자가 경영난에 빠져 버린 것이다. 결국 정몽헌은 두 회사를 채권단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분쟁을 거쳐 주가가 폭락한 종합상사와 금융 부분 및 상선, 게다가 당시 새 정권 출범 이후 대북송금 사건까지 터지며 정치적으로 엮여 고초를 겪던 대북 사업 부분마저 부진했다. 이 상황에서 정몽헌 회장은 결국 아버지 정주영의 타계 2년 후 특검 수사까지 받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정몽구는 부채도 낮고 미래 가치가 풍부하며 탄탄한 현대자동차, 기아를 받아 키우며 동생 정몽헌이 뱉어낸 그룹의 모태 현대건설까지 2011년에 다시 받아내며 재계 2위까지 그룹을 크게 일궈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2000년 3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다툼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정몽구는 같은 해 9월,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후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인수, 현대제철 출범, 일관제철소 준공, 현대건설 인수 등을 통해 자동차, 철강, 건설이라는 세 축을 뚜렷이 만들어 현대자동차그룹의 틀을 구축했다.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정몽구 회장을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에 선정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청문회에 불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이게 마지막 공식 일정이 됐다. 이후 2018년에 현대자동차 시찰 및 회의를 끝으로 건강 문제, 고령 등으로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실 2016년 청문회 때 이미 만 78세의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였고 말도 논리적으로 하기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됐다.

2020년 10월 14일부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며 명예회장으로 남게 된다. 어느덧 팔순을 넘어 아버지가 별세 당시 나이인 85세까지 넘어선 고령이다 보니 대외적으로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한남동 자택에서 칩거하며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3. 사회적 공헌

  • 2004년 12월 2일 정몽구 회장 및 임직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70억 원 기탁(2004년 당시 국내 주요 대기업 중 연말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공공 단체에 기부한 것은 현대차그룹이 처음)
  • 2009년 12월 7일 6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
  • 2011년 9월 5,0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 지원 등을 위한 정몽구재단에 사재 출연)
  • 2021년 10월 31일 고려대학교에서 기부금 약정 체결식(코로나19 백신 센터 설립에 사재 100억 원 기부)

4. 학력

5. 경력

6. 상훈

  • 1979년 11월: 수출산업포장
  • 1981년 12월: 새마을지도자상
  • 1985년 8월: 철탑산업훈장
  • 1986년 12월: 체육훈장 맹호장
  • 1989년 4월: 체육훈장 청룡장
  • 1989년 11월: 동탑산업훈장
  • 1996년 5월: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
  • 1997년 5월: 한국경영학회 한국경영자 대상
  • 1998년 3월: 제25회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
  • 2001년 2월: 올해의 자동차산업공헌상, 미국 자동차명예의 전당 미국 자동차산업 공헌상
  • 2004년 7월: 몽골정부 북극성 훈장
  • 2004년 12월: 2004년 자동차부문 최고의 CEO (미국 비즈니스위크 선정)
  • 2005년 7월: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 2005년 10월: 인촌기념회 산업기술부문 인촌상
  • 2005년 11월: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인 42위
  • 2009년 6월: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밴플리트상
  • 2010년 7월: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 2011년 11월: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 2011년 12월: 미국 모터트렌드 세계 자동차업계 파워리스트 2위
  • 2012년 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
  • 2012년 3월: 이탈리아 인터오토뉴스 글로벌 최고 경영인상
  • 2012년 12월: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CEO 6위
  • 2020년 2월: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13]

7. 자동차 산업에서의 공로

단순히 국내 시장 1위로 만족해야 했던 현대차그룹을 도요타, 폭스바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자동차 명문 기업으로 도약시킨 주역이다. 재벌 2세였지만 창업 경영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계열 분리 당시만 해도 계열사 10개, 자산 34조 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20년에는 계열사 54개, 자산 248조 원을 보유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생산 혁신, R&D 혁신, 공급망(Supply Chain) 혁신 등 공학과 경영을 결합한 과감한 시도와 성취는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또한 자동차 산업과 소재, 전기, 전자, IT 분야의 창조적 융복합을 선도하고 있으며 R&D를 중심으로 미래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품질경영’ ‘현장 경영’으로 대표되는 경영 철학이 대변하듯, 품질을 중시하고 현장에서 답을 찾고 있다. 이는 산업공학 전공자들에게 교과서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14]

자동차 생산 공정 과정에서 최적화된 부품 공급 모듈화 체계를 도입, 효율성을 최대화했으며 전 세계 균일한 고품질의 생산 공장을 적기에 건설할 수 있는 표준 공장 건설 체계를 확립했다. ‘쇳물에서 자동차까지’의 수직 계열화를 완비, 그룹 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세계 최초로 친환경 자원 순환형 사업 구조를 갖춰 경제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에 대한 책임과 지속 가능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연구 역량 집적화와 고도화도 전 세계 산업계가 주시한 혁신이었다. 남양에 세계 최대 규모의 R&D 센터를 설립, 연구 개발 역량을 집중해 미래 성장 기반을 확보했고 이는 독자 엔진 개발과 수소연료전지 파워트레인 체계, 5.0 타우엔진, 1.6 감마엔진이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되는 쾌거로 이어졌다. 현대기아만의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체계를 개발,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으며 궁극의 친환경차로 평가 받는 수소연료전지차를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 결실을 낳았다.

해외 공장 건설 시 국내 부품 업체들의 대규모 동반 진출은 사실상 현대기아차에서 최초로 시도한 독창적 협력 체계로 산업사적 의미가 지대할 뿐 아니라 동반성장 의지의 일환이었다. 정몽구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는 통찰력과 전략적 결단으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역발상 경영인으로도 평가 받고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의 ‘10년 10만 마일’ 보증 실시 승부수는 현대·기아차가 세계 자동차 시장의 강자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전례가 없는 최단 기간 내에 국제 생산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 현대·기아차를 내수 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경쟁 업체들과 겨루는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세계 언론이 관용어로 사용하는 ‘현대 스피드’는 이 같은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에 대한 평가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브랜드 40위, 기아는 74위를 기록하는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미국 품질 조사 기관의 신차 품질 조사에서도 현대자동차는 일반 브랜드 부문 1위를 획득했다.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회공헌 철학도 실현하고 있다. 사재를 출연해 ‘현대차 정몽구 재단’을 설립하고 저소득층 미래 인재 육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한국의 경영자상, 1998년 금탑산업훈장, 201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해외에서도 2001년 자동차업계의 노벨상인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선정 ‘자동차산업공헌상’ 수상, 2004년 미국 비즈니스 위크 ‘2004 최고경영자’, 2005년 미국 오토모티브 뉴스 ‘2005 자동차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09년 미국 벤플리트상 수상,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 미국 모터트렌드 ‘자동차산업 영향력 있는 인물’ 2위에 선정됐다.

8.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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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두 차례의 옥고

9.1. 1978년

1978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건축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에 의해 구속수감되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 대신 책임을 지고 옥살이[15]를 하기도 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당연히 사법 부정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9.2. 2006년

2006년 4월,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61일만에 보석보증금 10억원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에서 징역 3년, 이후 파기환송심에서 사회봉사명령 300시간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기소 이유는 정 회장이 회삿돈 900억여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2100억원이 넘는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특경법상 횡령 및 배임)

구속 직후 '대국민 사과 및 사회공헌 방안'을 발표 했는데 정몽구 정의선 부자의 글로비스 주식 2250만 주(당시 주당 4만4550원으로 시가 1조23억원)를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내용을 넣었다. 하지만 사회환원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현대차 측은 "주식을 내겠다고 했지 1조원을 못박아 헌납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측은 재판을 거치면서 최종 8400억 규모가 확정되었고 2013년 완납했다고 밝혔다.

10. 여담

  •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과(現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서비스, 현대정공(現 현대모비스) 등의 계열사에서 근무했다. 현대정공 시절에 컨테이너 사업을 성공시켜 아버지 정주영으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게 됐다.
  • 동생인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는 경영권 분쟁 등으로 인해 겉으로 형제 간 갈등이 부각되지만 사적으로는 형제 간 우애가 깊었으며 이후 어느 정도 진전되기도 했다. 2003년 정몽헌이 불법 대북송금 사건으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을 때도 형 정몽구가 직접 검찰 측 인사들을 만나 동생의 선처를 부탁하기도 했으며 결국 정몽헌이 자살하자 당시 고등학생이던 상주[16]를 대신해 또다른 동생 정몽준과 함께 정몽헌의 장례식을 주도했다. 실제 정몽구는 동생의 발인 당시 결국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실제 형제 간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사업가로서는 피나는 경영권 분쟁을 했던 사이지만 가족으로서 형제애는 놓지 않았던 것이다. 삼촌 정세영도 열심히 키운 현대자동차를 정주영의 지시로 정몽구에게 넘긴 것에 한을 품은 것과 별개로 경영자로서 형을 존경한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몽헌 사후 현대그룹 회장직에 오른 제수 현정은과는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걸로 보인다.
  • 양궁에도 조예가 있고 관심을 많이 뒀는지 대한양궁협회의 제2-5대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대한양궁협회 명예 회장으로 있다. 한국 양궁을 키워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미있게도 현임 대한양궁협회의 회장은 그의 아들인 정의선이 맡고 있다. 1986년부터 1997년까지 아시아 양궁 연맹 회장을 맡았고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세계 양궁 연맹의 부회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세계 양궁 연맹의 명예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런 영향으로 현대차그룹에서 남녀 양궁단[17]을 운영 중이다.
  • 경복고 재학 시절 럭비부 주장 출신으로 또래 중에 가장 힘이 셌다고 한다.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과 경복고 동기로 공부에만 열중하던 갸날픈 체구의 고교생 손병두를 불량서클 학생들로부터 고교생 정몽구가 지켜 주곤 했다. 럭비부 출신이다 보니 젊었을 적부터 거구에 강골을 자랑하며 팔순 고령인 지금도 어깨가 떡 벌어져 덩치가 있는 편이다. 기사에 의하면 키는 칠순 넘겼을 당시 177cm 정도라고 한다. 나이 들어 키가 줄어드는 것을 생각하면 젊었을 때는 더 장신이었을 것이다. 사실 부친 정주영(175cm)이나 형제 정몽헌(175cm), 정몽준(182cm)도 키와 덩치가 크니 집안 내력이다. 키 출처
  •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해 군 복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다만 특유의 다혈질적 성격으로 인해 훈련병 시절 조교와 현피를 뜨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는 자대 배치도 받기 전에 영창행이었다. 형제들 또한 ROTC 장교나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고 하니 최소한 병역 문제에 관해서 범현대가는 떳떳한 셈이다. 아들 정의선 회장은 담낭염 수술로 면제를 받았는데 이는 담낭암으로 타계한 정몽구 명예 회장의 부인이자 정의선 회장의 어머니 이정화 여사의 영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족력이 있는 질병인데다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병의 수준이 심각했기에 정의선의 병역 면제를 비난하는 여론은 사실상 없다.
  • 현대차의 여러 비판과는 별개로 정몽구 회장의 경영 능력은 부정적 평가보다 긍정적 평가가 훨씬 더 많다. 현대정공을 성공적으로 키워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도 했고 갈기갈기 찢어진 현대를 다시금 재계 서열 2위로까지 끌어올린 공적만 봐도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정한용이 정몽구 회장 역할을 맡았는데 정한용의 외모가 정몽구와 정말 많이 닮았다.
  •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마지막화에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렀던 김두한이 출소 후 이동하던 차 안에서 김두한의 청년 참모였던 이찬오와 대화하던 도중 이찬오가 "저는 현대그룹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럭비하는 친구가 있어서요"라고 말한다. 여러 정황상 정몽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 세계 자동차 업계 5위 진입, 현대가 적통 계승, 고로 제철소 준공, 그리고 통합 사옥 건립을 4대 숙원으로 삼고 있다. 이 중 앞의 3개는 달성했고 마지막 숙원으로 통합 사옥 건립이 진행 중이다.
  • 경복고의 2021년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 준비 비용으로 5억 원을 기부했는데 이는 행사 필요 비용의 절반에 해당한다. 모교의 행사마다 기부를 아끼지 않는다.
  • 왕자의 난 당시 언론에서는 MK(몽구), MH[19](몽헌)이라는 이니셜로 불렸다.

11. 참고 문헌



[1] 2021년 10월 포브스 기준. 대한민국 부자 순위 7위. [2] 2009년 담낭암으로 별세했다. [3] 이노션 고문. [4]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현대커머셜 사장. [5]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사장. [6] 어머니 변중석에게는 장남이지만, 이복 형 정몽필이 있고 어머니 변중석의 호적 밑으로 넣었기 때문에 호적상으로도 차남이다. [7] 정몽준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보면 정몽구는 싸움도 굉장히 잘했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에 불량한 고등학생 무리를 압도하여 동네에 난리가 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8] 정몽구와 대조적으로 6남인 정몽준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정주영의 자랑이었다. 정주영은 만나는 동료 총수마다 "우리 몽준이가 서울대에 갔소이다."라며 자랑하였다. [9] 정몽필이 일찍 죽었고 살아생전에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아내 이양자 사이에서 만 둘을 얻었기에 그의 사후 현대가의 장자 적통은 정몽구-정의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0] 정몽준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아버지의 평생의 한을 풀어 줬고 정몽헌은 아버지를 가장 닮은 자식이란 평을 들었다. [11] 2020년 3월부터는 등기이사직 사임, 같은 해 10월에 회장직도 사임. [12] 기아 회장직은 2009년에 이미 그만 둔 상태였다. [13]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다. Automotive Hall of Fame(AHF) - Mong-Koo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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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한양대학교 산업공학(당시 공업경영학) 전공자다. [15] 매우 큰 뇌물 스캔들이였으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봐주기 수사의 전형이라서, 1심 판결전 75일 구속된 게 전부다. 책임자 정몽구를 포함, 대부분 선고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관련자 수백 명 중에 중형은 한 명도 없다. [16] 정몽헌 회장 외아들인 정영선 현대투자파트너스 이사를 말한다. [17] 현대제철 남자 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 양궁단 [18] 실제 이 당시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유니콘스 구단을 인수하려고 했으나 당시 구단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반도체가 인수 대금으로 무려 900억 원을 부르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 대신 싸게 매물로 나온 해태를 인수하게 됐다. [19]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니셜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