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7:27:48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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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 장면 최두선 정일권 백두진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김종필 최규하 신현확 남덕우 유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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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김석수 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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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김부겸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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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장 (1961~1981)
<nopad> 장도영 내각 <nopad> 김현철 내각 <nopad> 박정희 정부
초대
김종필
제2대
김용순
제3대
김재춘
제4대
김형욱
<nopad> 박정희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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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서리)
이희성
제10대(서리)
전두환
제11대
유학성
국가안전기획부장 (1981~1999)
<nopad> 전두환 정부
제11대
유학성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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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노태우 정부 <nopad> 문민정부 <nopad> 국민의 정부
제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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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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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장 (1999~현재)
<nopad> 국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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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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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6대-7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
선거구 개편
이석기[A]
이종순[B]
제6-7대
김종필
제8-9대
김종익

파일:국회휘장(8대).svg 전국구 제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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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
29석
김종필 정일권 백두진 ~~~~ 길재호
김형욱 권오병 ~~~~ 황종률 이동원
이종우 유봉영 홍승만 모윤숙
최용수 이해랑 강병규 강성원
문창탁 권일 김성두 신광순
박태원 박철 전정구 장덕진
이도선 김현숙 편정희 김옥자
노진환
신민당
24석
유진산 김대중 홍익표 김홍일
김의택 유청 정헌주 이종남
이세규 편용호 김준섭 채문식
이상조 신도환 김재화 김용성
강필선 오세응 유성범 정규헌
이대우 오홍석 박종률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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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통일주체국민회의_휘장.svg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제9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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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우회 1기
73석
갈봉근 강문봉 강문용 고재필
구범모 구임회 구태회 권갑주
권일 권효섭 김기형 김동욱
김명회 김봉환 김삼봉 김성두
김성락 김성주 김세련 김영도
김옥자 김용성 김재규 김재순
김종필 김진만 김진봉 김창규
김태규 노진환 문태갑 민병권
박정자 백두진 서병균 서영희
서인석 송호림 안종열 안춘생
엄경섭 오정근 오주환 유민상
윤태일 이도선 이범준 이성가
이숙종 이영근 이종식 이진희
이해랑 임삼 장동식 장준한
장창국 전재구 정광호 정복향
정재호 주영관 지종걸 최영철
최영희 최용수 한태연 함명수
함재훈 함종빈 허무인 현오봉
황창주 송효순 김충수 이승복
남상돈
유신정우회 2기
73석
갈봉근 강문봉 강문용 고재필
구범모 구태회 권갑주 권일
권중동 권효섭 김기형 김도창
김동성 김명회 김삼봉 김성용
김세련 김세배 김신 김영도
김용성 김익준 김종필 김진복
김진봉 김창규 김충수 남상돈
노진환 문태갑 민병권 박동묘
박정자 박찬현 백두진 백영훈
서영희 서인석 송호림 송효순
신광순 신범식 신상초 안종열
안춘생 오정근 윤여훈 윤주영
윤태일 이도선 이범준 이성근
이숙종 이승복 이승윤 이영근
이정식 이종식 이종찬 이진희
장동식 전부일 전재구 정일영
정재호 주영관 지종걸 최영철
최영희 최우근 한태연 함명수
현오봉 변우량 마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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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 충남 제5선거구)[C]
제9대
김옥선
김종익
제10대
김종필
[D]
조중연
제11대
이상익
조중연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
선거구 개편
이상익[E]
김옥선[E]
제13-15대
김종필
제16대
김학원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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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21석
이회창 홍사덕 이연숙 강창성
신영균 서정화 이상희 박세환
전재희 조웅규 윤여준 이한구
김정숙 김락기 박창달 김홍신
이원창 황승민 임진출 이원형
손희정 김영선 유한열 장광근
송병대 김영구 박경섭 이만재
새천년민주당
19석
서영훈 <colbgcolor=#00AA7B> 최영희 <colbgcolor=#00AA7B> 장태완 <colbgcolor=#00AA7B> 이만섭
한명숙 김운용 박인상 이미경
박상희 이재정 허운나 최재승
김한길 김방림 김기재 김영진
윤철상 조재환 유삼남 김화중
최명헌 박양수 조배숙 오영식
구종태 안상현 황창주 박종완
한충수 양승부 박금자 이종성
안희옥
자유민주연합
5석
김종필 조희욱 김종호 조부영
안대륜 변웅전
민주국민당
1석
강숙자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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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신성모 백낙준 허정 이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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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진 이갑성 백한성 김도연 최규하
<nopad> 최규하 정부 <nopad> 전두환 정부
박충훈 남덕우 유창순 김상협 진의종
<nopad> 전두환 정부 <nopad> 노태우 정부
신병현 노신영 이한기 김정렬 이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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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훈 노재봉 정원식 김종필 이헌재
<nopad> 국민의 정부
이한동 장상 전윤철 장대환 전윤철
<nopad> 국민의 정부 <nopad> 참여정부 <nopad> 이명박 정부
김석수 이헌재 한덕수 권오규 윤증현
<nopad> 박근혜 정부 <nopad> 문재인 정부 <nopad> 윤석열 정부
최경환 유일호 홍남기 추경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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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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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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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제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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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대행
박준규
제4대
김종필
권한대행
정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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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835B38>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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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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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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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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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제7대
백남억
제8대(서리)
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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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제10대(서리)
박준규
총재 겸 의장대행
김종필
제11대(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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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59955e> 초대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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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rowcolor=#003990,#0070bb> 제1·2대
노태우
제3·4대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및 대표위원
<rowcolor=#003990,#0070bb> 초대
김영삼
제2대
김종필
제3대
이춘구
제4대
김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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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권한대행
김복동
제3대
박태준
권한대행·제4대
이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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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권한대행
이인제
비대위
조부영
대표최고위원
<rowcolor=#289020> 제6·7대
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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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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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 독립운동가
1969
이인
법조인· 독립운동가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1969
제헌국회의원
154명
1969
조동식
교육인
1970
김수환
추기경
1970
백낙준
교육인
1970
이상백
-
1971
유일한
기업인
1976
박일경
교육인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1982
권영대
교육인
1982
김상만
언론인
1985
이숙종
교육인
1987
이병철
기업인
1988
권이혁
교육인, 의사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1991
강영훈
국무총리
1991
김병관
언론인
1994
김호길
교육인
1995
곽윤직
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6
윤덕선
의사, 교육인
1996
정범모
교육인
1998
고흥문
국회의원
1998
주영하
교육인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2
백낙환
의학자, 교육인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박관용
국회의장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2009
김정수
정치인
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기업인
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2018
김종필
국무총리
2018
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법조인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8
정세균
국회의장
2019
윤한덕
의사
2019
이국종
의사
2020
이이화
사학자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2020
문희상
국회의장
2021
최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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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박병석
국회의장
2023
송창근
기업인
2023
김박
기업인
2023
자승
종교인
2024
이임성
법조인
2024
윤대원
의사, 교육인
}}}}}}}}}

}}} ||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대한민국 제11·31대 국무총리
김종필
金鍾泌 | Kim Jong-pil[7]
파일:김전총리.png
출생 1926년 1월 7일[8]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9][10]
사망 2018년 6월 23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사저 서울특별시 중구 청구동 다산로 142-15[11]
묘소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본관 김해 김씨[12]
운정(雲庭)
재임기간 초대 중앙정보부장
1961년 5월 20일 ~ 1963년 1월 6일
제11대 국무총리 ( 박정희 정부)
1971년 6월 4일 ~ 1975년 12월 18일
제31대 국무총리 ( 국민의 정부)
1998년 8월 18일[13] ~ 2000년 1월 12일
서명
파일:김종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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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부모 아버지 김상배, 어머니 이정훈[14]
형제자매 형 김종호, 김종익, 김종락, 김종소
남동생 김종관
배우자 박영옥
자녀 장녀 김예리[15], 장남 김진[16]
손주 김인영, 김지영, 김미영[17]
학력 부여공립보통학교 ( 졸업)
공주고등보통학교 ( 졸업)
주오대학 (예비과정 / 중퇴)
대전사범학교 (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 사회교육 / 중퇴)
미국 육군보병학교 ( 졸업)
육군보병학교 ( 졸업)
국방대학교 ( 행정학 / 학사)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 / 박사)
종교 불교 개신교 ( 감리회)[18]
신체 170cm, 75kg, A형[19]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6, 7, 8, 9, 10, 13, 14, 15, 16
약칭 JP[20]
취미 서예, 수채화, 검도, 골프, 미식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21]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9년 5월 ~ 1963년 1월
최종 계급 준장 (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중앙정보부장
주요 보직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장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

1. 개요2. 약력3. 생애4. 사건사고 및 논란5. 평가6.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7. 청구동계8. 기타9. 어록10. 소속 정당11. 선거 이력12. 저서13. 대중매체에서1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군인 출신 정치인, 제11·31대 국무총리.

6· 7· 8· 9· 10· 13· 14· 15· 16 국회의원이자, 민주공화당 제4대, 신민주공화당 초대, 자유민주연합 제1·2·5대 총재를 맡는 등 삼김시대의 주역이자[22]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계의 거물이었다.

2. 약력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일생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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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사건사고 및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사건사고 및 논란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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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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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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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청구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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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국무총리로서 IMF를 대체할 아시아통화기금을 제안하기도 했다.[28] 당시 정부는 아시아통화기금을 김종필 국무총리의 사견으로 여기면서도 현 상황에서는 한중일 금융협력이 최우선이나 장기적으로는 검토할 만하다는 입장을 밝혔다.[29]
  • 5.16 군사정변의 경우, 김종필이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이를 박정희가 실행하도록 밀어주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은 전적으로 김종필의 설계대로 흘러갔다. 박정희는 굳이 여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창당 과정에서 일본의 사례를 최대한 참고했다고 한다.
  •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는 박정희의 뒤를 이어서 직선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 이후로 대권에서 멀어지면서 이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의원내각제를 추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의원내각제를 추진한 까닭은 김종필의 지역 기반인 충청도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소수의 국회의원으로도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의원내각제 쪽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30] 그와 연대한 다른 정치 세력 모두 자신이 당선된 후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현행 대통령제의 개선 방향으로 대통령제에 내각제를 결합한 이원 집정부제나 순수 의원 내각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김종필로서는 소회가 남다를 듯. 장도리 같은 만평에서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매번 김종필을 속이고 뒤통수를 때리는 일을 묘사하기도 했다. 부인 박영옥의 묘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의원 내각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31]
  • 12.12 군사반란 주도자들에 따르면 처음엔 김종필을 전면에 내세워 정국을 안정시킬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의 봄 당시 양김에게 세력이 밀리던 김종필이 박정희와 유신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자,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이 이를 패륜적으로 받아들이며 다른 대안을 찾다가 결국 본인들이 직접 정권을 잡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견제로 군 영향력을 상실한지 오래되어 군부에서 지지세력이 없었다.
  • 흔히 3김이라 불린 세 거물 정치인 중 김영삼, 김대중이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김종필도 대통령 한번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여긴 이들도 있으나, 이러한 김종필 대망론에 회의적이었던 이들은 김종필 대망론 자체가 실제의 정치적 상황을 기반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삼김시대라는 조어에 의한 착시 현상을 통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삼김시대라는 표현 못지 않게 양김시대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애초에 김종필 자체가 김대중이나 김영삼과 동등한 지지 기반이나 영향력을 가진 대선 후보였던 적이 없다는 것. 실제로 1노 3김이 대격돌하여 전체 표의 99.8%를 나눠가졌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보더라도 김종필은 득표율 8.1%로 득표율 0.2%의 신정일 후보를 제외하면 꼴찌나 다름없는 4위를 기록했고 이는 각각 28%, 27%의 득표율을 기록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1/3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양김의 경우 민주화 운동 지도자라는 공통점에 기반하여 단일화를 거쳐 지지 기반을 통합할 경우 안정적인 1위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던 데 비해 김종필에게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었다.[32] 김종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인식하여 13대 대선 이후부터는 직접적인 대선 도전을 포기하고 캐스팅 보터로써 입지를 다지는 데 매진하였으나 결국 자민련(과 그 후계격인 정당들)이 사실상 몰락하여 거대 양당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점까지 생각해야 한다.[33] 즉, 3명의 대권 수권 후보를 묶어 3김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수권 후보였던 양김과 수권 후보는 못 되지만 캐스팅 보터의 역할을 하던 김종필을 묶어 3김이라고 부르다 보니 같이 묶여 불리는 김종필까지도 나머지 둘과 같은 주요 수권 후보라는 착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 실질적인 권력에서야 당연히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권력이 박정희 정부로부터 탄압당한 김대중이나 김영삼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고 5.16 군사정변을 통해 단숨에 정권의 핵심에 진입한 김종필이 3김 중에서 가장 먼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YS, DJ와 달리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1960년대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보다 인지도는 훨씬 높은 편이었고 1970년대 국무총리 사임 이후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박정희의 잠재적 후계자나 잠재적 라이벌로 보일 정도로 영향력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YS와 DJ 역시 야당의 주요 정치인으로 성장했는데,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경쟁했고 김영삼은 그 제7대 대선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과 결선 투표까지 가는 팽팽한 대결을 벌인 바 있어서 제3공화국 후반기 시점부터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당의 지도자급 인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34] 그런 상황에서 10.26 사건 이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로 올랐으며 제10대 대통령 선거 출마와 함께 포스트 박정희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 전두환 정부 시절에 김종필은 강제 정계 은퇴를 당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은둔 생활을 보냈는데 이에 반해서 1983년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고 단식 투쟁을 전개한 바 있으며 1985년에는 이민우, 김대중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정권에 대항하였다. 김종필이 여당도 아닌 야당도 아닌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을 치열하게 해온 김영삼, 김대중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삼김시대가 확실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김영삼, 김대중 양김은 여전히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반면 김종필은 미국에 있었으며 어쩌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민주화 참여를 거부하면서 3김이기는 하나 레벨이 떨어지는 급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 활동은 제한적이고 전면에서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85년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6년 신한민주당 상임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그의 계파라고 할 수 있는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박정희와는 정말 친했고 군 복무도 같이 했으며 심지어는 박정희의 셋째 형인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다.[35] 그리고 상당한 애처가였고 아내가 세상을 뜨자 정말 크게 슬퍼했다. 그리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같이 한 자리에 묻히겠다고 하면서 현충원 안장을 거부하기도 했다.[36]
  • 2015년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봐도 한국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이해 속에서 양국간 우의를 다져야겠다는 마음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고 "예전에 상대했던 일본 정치인들은 그래도 도량이 있었다."며 "스가 요시히데는 위안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 참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지적했고 "짓밟힌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는데 일본 입장이 어떻든 간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 이회창의 선배 격인 인물로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는 매우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다. 다만 이회창과의 관계는 냉랭했던 편. 김종필은 9선 국회의원에, 대한민국 행정부 2인자인 국무총리를 2번 역임했으며[37], 군사정권 시절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38]초대 중앙정보부장까지 했던 것을 감안하면 대통령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고 권력을 휘둘러 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39]
  • 일본어에 능하여 일어로 연설이나 인터뷰를 소화한 적도 많았다.[40] 한 예로 한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일본 NHK에서 제작한 한일 협약에 대한 다큐멘터리 출연 일본어로 인터뷰한 사례가 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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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인문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히 그림을 그렸고[42] 만돌린, 아코디언 등을 연주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택시회사를 경영하며 직접 운행을 한 경력 덕분에 당시 고위층 중에서는 가장 운전을 잘 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패셔니스타[43]이자 미식가로 알려져 체스타필드 맞춤 양복을 입고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겼다. 미식가라고 해서 늘 사치스러운 산해진미를 고집한 것은 아니지만[44] 1990년대 초반에 한끼에 20만 원어치의 중식 정찬을 즐겨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것도 여럿이서 먹은 거라 테이블당 계산 가격은 100만 원이 넘었고 술도 두주불사였는데 발렌타인 17년을 특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 아래 단락에도 나오지만 취미도 부유층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는 골프였다.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 외환위기 상황이였음에도 꿋꿋하게 골프를 쳤는데 그럼에도 JP가 워낙 거물이다 보니 감히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다고.[45] 우스갯소리로 JP는 고급 취향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예술에 조예가 깊은 만큼 미술품 수집에도 열성이었는데 심지어 렘브란트, 르누아르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심계도 깊은 김종필이었기 때문에, 취재하는 기자들이 JP의 말을 나름 유추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운치있게 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 또한 김종필의 멋들어진 휘호 정치와 예술에 대한 일가견 있는 면모가 중국 언론이나 정가에서 줄곧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중화권 외교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
  • 조갑제의 증언에 의하면 JP는 만남이 기다려지는 인물로 사석에서 만났을 때 정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고 한다.[46] 문화예술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부드럽고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는 인물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예술가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아무래도 일본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인지라 일본의 상류층 사회에서 중시하는 풍류(風流)[47]가 체화(體化)된 것 같다는 평이었다. 일례로 박관용 전(前) 국회의장은 야당 의원이던 시절 국무총리였던 JP에게 항의하러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JP가 국무총리실 입구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다독거리는 바람에 끝내 항의를 못했던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 2015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거물급 정치인답게 오자와 이치로를 비롯, 한일 양국의 정치 거물들로 구성된 조문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5년 4월에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의 원인은 자체 수사권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체 수사권을 검찰에 양도하고 대북정보 수집 등 정보기관 업무만 수행하도록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 하하 무한도전 짝꿍 특집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독일에서 한창 잘나가던 아버지가 귀국한 건 김종필이 불러서 온 것이라고 한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해외 유학 간 인재들을 귀국시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동훈이 독일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으로 온 것 자체는 사실이다. 박명수가 하하에게 눈총을 준 뒤 하하를 애써 옹호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49] 그 뒤로 무한도전에서 간간이 언급됐으며,[50] 박명수는 김종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김종필의 성대모사를 했다. ‘내각제, 3김정치는 이어져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하는데 워낙 성대모사를 잘하는 데다가 말투가 웃겨서 유재석도 제지를 안하고 같이 웃는다.
  • 초록색을 좋아한다.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당 색이 초록색인 것도 이 때문이다.
  •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김종필이 1968년 잠시 정계를 떠났을 당시, 정부로부터 현대의 서산시 지역의 토지를 불하받아서 ‘삼화목장주식회사’라는 대규모 축산 농장을 개발했다. 그런데 전두환 정부 시절 신군부에게 부정 축재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강제 헌납할 때 이 농장도 포함된 것. 그리고 농장의 부지 및 설비는 한우 종자를 개량하는 한우개량사업소로 바뀌었다. 민주화 이후 소송을 통해 개인 재산으로 돌려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포기했다.[51]
  • 골프를 매우 좋아했는데, 특이한 점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국산 골프채의 성능 및 품질 수준은 조악했는데, 당시 김종필 총리는 드라이버 및 페어웨이 우드는 국산 랭스필드 제품만을 고집했다. 당시 랭스필드는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였는데, 김종필의 비서를 통해 국산 골프채 사용을 촉구하면서 자사의 최고급 골프채를 협찬한 후 한동안 "김종필 골프채"로 유명세를 떨쳤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종필은 혼마 회장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5스타 드라이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52] 아마도 당시 국산 장려 풍조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 * 또 1998년 7월 US 오픈에서 우승한 박세리를 격려하기 위해 그녀의 부모, 동료 프로골퍼들을 함께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으로 초청해서 노고를 치하한 바 있다.
  • 축구계와도 의외로 인연이 있는데, 1966년도에 자신의 약칭을 따서 JP컵 쟁탈 한중일 축구대회라는[53] 축구대회를 만든 적도 있었다. 당시 한국, 대만, 일본의 실업축구 우승팀이 맞붙어서 치르는 대회였다. 하지만 JP의 약칭을 딴 축구대회에 대해 박정희가 불쾌감을 표시하는 바람에 대회는 딱 한 번만 개최되고 그 이후로 폐지됐다.
  • 김종필의 사망일인 2018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공개 경쟁 임용 시험이 치러졌는데, 그중 9급 한국사 과목에서 김종필에 관한 문제가 출제돼 우연의 일치로 화제가 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위해 김종필이 먼저 일본에 특사로 파견됐는데 이를 이후락으로 바꾼 선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험을 끝내고 휴대폰을 켜니 김종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있는 것을 보고 그날 시험 문제 때문인 줄 안 수험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하였다. # 여담으로 무궁화대훈장 추서란 오보가 퍼졌었는데, 이는 정진석 측에서 낸 이야기였다.
  • 평생의 한이 하나 있다. 박정희 쿠데타 대통령이 되었기에 김종필 본인은 깨끗하게 지도자가 되어 이를 만회하고 싶어했다.[54] 하지만 국민들은 권위주의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전직 장성급 장교라는 신분과 지역주의는 김종필에게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고, 대선 때마다 당락을 좌우하는 킹메이커로서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는 했으나 끝내 킹은 되지 못하고 80살을 넘겼다.
    •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연출되는데, 6.29 선언 이후 정계에 복귀한 JP에게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모두 접촉을 시도한다. YS를 대통령의 자리에 밀어올린 3당 합당도 처음부터 JP가 노태우에게 먼저 합당을 제의했고 이후 JP와 YS의 골프 회동 끝에 YS가 합당에 합류했으며 JP가 YS를 지원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으면서 YS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기존의 4당 체제에서 YS가 대통령이 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DJP 연합은 DJ가 직접 JP의 자택으로 찾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한번만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성사되었으며 DJP 연합 덕분에 충청권의 표를 대거 흡수하고 그동안 DJ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사상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TK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했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탈당은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이고[55] JP는 DJ의 당선 이후 헌정사에 있어서 손에 꼽히는 실세 총리로 활동했다. 물론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선 주자로 격돌하던 인물인데 비해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 레벨이었기 때문에, 김종필 자신도 이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알아서 80년대 말 정계에 복귀한 뒤로는 3당 합당이든 DJP 연합이든 캐스팅보터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즉 변수로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 한계 역시 뚜렷했던 것. 그래서 후일 노무현에서 석패한 이회창 또한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 상징성이 보수 결집의 부스터 효과를 내어 무난하게 대선에서 승리했으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하 문단에서 반론되었듯, 이는 드라마 등 창작물의 연출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김종필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과장되게 받아들인 이들의 착각이다.
      • 이전 문단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것처럼, 김종필이 한국 현대(특히 민주화 이후) 정치계를 대표하는 캐스팅보터이자 킹메이커라는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인 것은 분명 사실이나, 그 위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적절한 분석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6.29 선언 이후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모두 접촉을 시도하고, 3당 합당 역시 김종필이 먼저 노태우에게 제안한 것>은 드라마 제 5공화국의 연출이지 실제 역사가 아니고, 실제 역사에서 3당 합당은 여소야대 구도로 약해진 정국 장악력을 보충하기 위해 민정당이 먼저 야당 지도자들에게 합당을 제안한 것이었으며, 그 핵심 입안자는 박철언이라고 이미 알려져 있고, 제1 교섭 대상은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에게 거절당한 후 제2 교섭 대상은 김영삼이었다. 그 후 합당 전개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의 골프 회동이 4차례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민정당(노태우)의 제안에 응한다는 전제로 그 조건을 교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14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김영삼을 지원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으면서 김영삼이 당선되었으며, 기존의 4당 체제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같은 부분은 거의 김종필을 띄워주기 위한 대체역사적 상상에 가까운 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에 김영삼이 노태우의 합당 제의에 응하면서 4당 구도는 이미 깨진 것이다. 1강 2중 1약 구도에서 1강과 1중이 이미 손잡기로 결정한 마당에 "거기에 1약이 힘을 합쳐주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분석은 전혀 상식적이라 할 수 없으며 게다가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내에서 김종필과 공화계의 행보 역시 김영삼 지지를 위해 내부 의견을 모은것과는 거리가 멀다. 민자당 내의 주도권 다툼은 주로 민정계와 민주계 사이에서 벌어졌고, 여기서는 사실상 깍두기 처지였던 공화계는 (노태우 이후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던) 민정계와 함께 내각제 개헌을 주장했지만 결국 김영삼과 민주계에게 밀려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던 것.[56] 또한 그 직전 13대 대선의 예를 보더라도 김종필이 확보한 표는 4자 구도에서 어디로 움직여도 승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14대 대선의 상황에 비교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김종필의 지지 기반은 이념적으로는 강경보수, 지역적으로는 충청 지역인데... 13대 대선 이후 민정당이 보수 주류의 입지를 차지했음이 명확해 진 상태에서 이미 민정당과 손잡은 김영삼에게 김종필이 몰아다 줄 수 있는 보수 표심이 그리 컸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지역 표심을 따지더라도 14대 대선에서 지역 기반도 없던 정주영이 충청권에서 돌풍을 일으켰음을 생각하면 김종필은 충청 지역 표심조차도 철저히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14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김영삼을 "권좌에 밀어올렸다."는 분석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꾸로, <만약 김종필이 김영삼에 반대했다면, 김종필이 움직인 표를 받아 이득을 볼 수 있는 다른 후보가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김종필이 움직일 수 있는 표심의 최대치는 대략 그의 전성기였던 13대 대선 당시 자신이 직접 득표했던 8% 정도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4대 대선에서 8% 이내의 표 이동으로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바로 김대중의 당선, 즉 5년 빠른 DJP 연합뿐이다.[57] 말하자면 대통령 직선제 이후 거대여당과 (사실상의) 유일 수권야당이라는 양당 구도가 고착되었고, 이 구도에서 군소 세력화된 김종필(및 김종필계-이후의 자민련)이 캐스팅보터로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김대중(및 민주당)과의 연합이었으며 이 외의 다른 상황에서는 캐스팅보트를 쥘 수 없었다는 것. 노련한 정치인인 김종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정확히 파악했기에 한때 상극이나 다름없던 김대중을 상대로 사실상 자신이 숙이고 들어가는 형태의 연합을 받아들인 것이다.
      • 16대 대선의 이회창-노무현 구도에서 이회창이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낙승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더욱 허망하다. 애초에 16대 대선은 보혁(保革) 대립 구도가 완전히 정착된 상태에서 차리리 노무현 / 권영길의 혁신 / 진보 진영 내 분열이 있었을 뿐 보수 결집은 이미 이뤄진 선거였다. 김종필에 대한 호감으로 표심에 영향을 받을만한 보수주의자가 이회창을 놔두고 노무현이나 권영길을 찍었을 가능성은 정말 희박해보이고, 그 외에 이 선거에서 이회창이 가져가지 못한 보수 진영 표는 이한동의 0.3%뿐이다. 물론 이걸 다 결집시켰다고 가정하더라도 선거 결과는 뒤집히지 않는다. "노무현에서 석패한 이회창 또한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 상징성이 보수결집의 부스터 효과를 내어 무난하게 대선에서 승리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면, 그 사람들은 16대 대선 당시의 선거 결과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 킹메이커 김종필이 지지하면 반드시 이긴다! 보수 결집으로 낙승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외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물론 김종필이 16대 대선에 개입해 이회창을 지지했을 경우 선거 결과가 뒤집혔을 가능성을 가정해 보자면 소위 충청권 맹주로써 16대 대선의 승패를 가른 요충지 중 하나였던 충청 지역의 표심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기는 하다[58]. 하지만 이쯤 되면 위 문단에서 제시한 보수결집의 상징성과는 아득히 머나먼 차원의 문제가 된다. 결국 김종필이 킹메이커, 또는 게임 체인저로서의 영향력을 보여준 사례는 딱 한번, 15대 대선의 DJP 연합뿐이었다. 물론 15대 대선의 수평적 정권 교체가 한국 정치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김종필이 가진 캐스팅 보터로써의 의미를 결코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캐스팅 보터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그 영향력이란 이미 대등한 대결 구도가 팽팽하게 형성된 상황에서 승패의 추를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의도대로 구도를 짜 나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59] 이를 6공 초기 대통령들은 다 김종필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일 수밖에 없다.
  •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김종필이 사망한 이후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룬 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 장례식으로 패러디했다. 처음에 그가 맡았던 직위들, 뒤이어 그가 받은 훈장들과 그가 쌓은 업적들을 줄줄이 읊어도 안으로 들여주지 않다가, 마지막에 그가 쌓은 악업들을 말하자 그제서야 문을 열어주는 데서, 해당 작품을 그리는 굽시니스트가 반보수 성향의 시사 만화가임을 잘 알 수 있다. 원본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장례식은 생전의 악업을 읊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 ‘하나님의 종’임을 강조하는 데에 그 취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국민의 정부 국무총리 시절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한 명이 현재 모 대학 교수를 맡고 있는데,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부드러웠고 농담도 자주 던졌다고 했다고 한다. 기분 좋은 날에는 저녁을 사기도 했다는 듯.
  • 국민의 정부 국무총리 재임 시절인 1998년 12월 11일에 방영한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1937년 개구장이였던 부여보통학교 3학년생 시절 은사였던 이종순(李種順) (1916년 ~ 1972년) 선생님을 그리워하다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출연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1972년에 위암으로 사망해 60여년 만에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선생님의 장녀와 차녀를 만났다. 선생님이 작고한 1972년은 김종필이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1971년 ~ 1975년)를 지내던 시절인데, 이종순 선생님이 김종필을 기억하였고 똑똑한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이종순 선생님을 흰 저고리, 까만 치마를 입고 흰 양말에 뾰족 구두를 신고 다녔던 선생님이 어린 시골 아이에게 선녀처럼 다가왔다고 기억하였다. 그래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친 개구쟁이였으며, 선생님 말씀이 "예절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잊지 못한다며 회고했다.
  • 자기 사람에 대한 신뢰가 커서 한 번 자기 사람으로 들이면 어지간해서는 내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1997년 대선 어간의 한 신문기사를 보면, 운전기사로 20년째 한 사람이 맡았는데, 그 사람이 나이가 들어 자신이 사임하겠다는 이야기가 실려있었을 정도. 실제로 JP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정치적 공과는 엇갈린 평이 나올지 몰라도 인간 김종필에 대한 평 자체는 좋았다고 한다.
  • 스스로 속에 구렁이가 몇 마리 들어 있다고 할 정도로 속내를 알기 어렵고 모략에 강한 인물이었다. 그의 증언록도 상당한 자기검열 거치고 썼기 때문에 읽을 때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편. #
  • 삼김 중 가족들의 존재감이 가장 옅은 인물이다. 삼김의 다른 구성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배우자와 자녀들 모두 정치나 사회 분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반면 김종필의 가족들은 눈에 띄는 대외 활동이 많지 않다. 아내인 박영옥 박정희의 조카이자 박근혜의 사촌언니이지만 평생 가정주부로만 생활하면서 부부동반 행사에 남편과 함께 가끔 참석한 것을 제외하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두 자녀 중 딸인 김예리 역시 개인 사업을 할 뿐 눈에 띄는 대외 활동이 딱히 없다. 아들인 김진은 아버지가 세운 운정장학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했고, 과테말라 출신 여성과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지만, 마찬가지로 정계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까지 국내에 홀로 있다가 2023년 12월 4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했다는 보도가 뒤늦게 나왔다.( #)
  • 언론은 유독 김종필을 그릴 때 치아를 강조해서 앞니만 튀어나온 쥐 또는 토끼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심하다. 과거 동아일보의 나대로 선생이 대표적이었고 한겨레 만평, 백무현 만평, 국민일보 서민호 만평 모두 김종필이라는 이미지를 하면 쭉 찢어진 실눈에 커다란 뻐드렁니 앞니로 쥐와 같이 묘사한다. 하지만, 김종필은 돌출입은커녕 치아 자체가 가지런한 편이었고 잘생겼다.
  • 아침 식사를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로 때우는 독특한 식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조찬 행사 때도 카메라맨들이 없으면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남은 시간은 말로 때웠다고.[60]
  • 평소 헬기를 자주 타고 다녔으며 담력이 강했다. 헬기에 오르는 모습도 잘생겼고 미소가 아름답다.
파일:김종필 총리 헬기.jpg }}} ||
  • 젊은 시절 모습이 상당히 훈내나는 미남이었기에 여성들이 엄청나게 많이 따라다녔고 공부를 잘해서 엄친아였다. 하지만 정치인이 된 이후에 너무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전 애인들이 김종필 국무총리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 젊은 시절 외모 덕에 여자관계가 꽤나 복잡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의외로 깨끗하다. 박정희, 정일권은 물론이고 라이벌 김영삼, 김대중이 세컨드와 혼외자 논란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61] 김종필은 단 한번도 이러한 논란이 없었다.
  • 김종필 국무총리의 사망에 이건희가 "큰 형님이셨는데, 마음이 아프다."하며 울었다고 한다.
  • 손주 바보였다. 그렇게 지인들하고 술자리를 갖는 것을 좋아했는데, 손주가 태어난 이후로는 그 술자리도 마다하고 바로 청구동 자택으로 가서 손주들 재롱 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 김종필에게는 지금 기준에서 보면 매우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가까운 친구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나면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대신 남자 지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꼭 잡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종필의 친구인 평양사범학교 출신 육사 8기생 석정선이 김동길에게 증언한 내용이다. 2010년대 이후로 이런 행동은 당연히 동성간 성추행으로 여겨지나, 저 당시에는 친근함의 뜻에서 동성간 성기를 만지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있었다. 빙그레 이글스 감독 배성서도 같은 이유로 제자 장종훈 등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고환을 주물거리는 행위를 하거나, 일본 만화에서도 시모네타로 손 대신 성기를 먼저 툭툭 치는 인사를 하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걸 보면 동성간 성추행 개념이 없던 옛날 사람들의 버릇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9. 어록[62]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구절 인용[63]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64]
김종필 총재의 좌우명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
1963년. 일본과의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자
자의 반 타의 반
1963년 02월 25일, 4대 의혹 사건과 관련한 외유에 나서면서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
1987년 저서《새 역사의 고동》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중략..)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65]
신임 보안사령관 전(前) 정권 부정부패의 "책임"을 진 김종필을 위로차 방문한 자리에서 조언을 구하자 건넨 말.[66]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
1987년 11월 03일, 관훈토론회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1990년 10월, 노태우 민주자유당 총재 후보로 추대하며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다. 5·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
1993년 5월 16일, 5·16 민족상 시상식
있는 복이나 빼앗아가지 마시라.
1995년 1월 1일, 민자당 대표 시절, 민주계의 대표 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덕담하자
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 사람들은 핫바지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 이런 뜻으로 그 사람들이 우리를 평한 겁니다.
1995년 6월 13일, 지방선거 천안역 지원 유세
역사는 끄집어 낼 수도, 자빠트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이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
요즘 세대 교체를 자꾸 말하는데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총리는 74세에 총리가 돼 4차 중동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6년 5월 18일, 대구 신명여고 강연
줄탁동기(啐啄同機)
1997년 자신의 대선 후원 조직인 민족중흥회 회보에 사용한 신년휘호.[67]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
1997년 5월 29일,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
이인제 후보가 우리를 늙었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씨름 한 번 했으면 좋겠다. 내가 결코 이 후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젊다.
1997년 12월 3일, 충북 괴산 정당연설회에서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1998년 6월 27일, 총리 서리(署理) 당시 "서리 꼬리가 언제 덜어질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시인 프로스트가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고 한 것처럼 저도 앞으로 가야 할 몇 마일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겠다.
1998년 10월 16일, 동의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특강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총리의 위치라는 게, 아무리 공동정권이라지만 델리키트하다.
1998년 10월 25실, "총리가 안다고 앞장서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미리 왕성한 상상력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행보를 좁히거나 의지를 약화시키는 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때를 맞춰야 하고 그러고도 안 될 때 몽니를 부리는 것이다.
1998년 12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약속 불이행 우려 관련 자민련 중앙위원회 연수에서
백날을 물어봐, 내가 대답하나
2000년 5월 2일, 일주일만에 당사에 출근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저물어 가는 사람이지 떠오르는 사람이냐. 다만 마무리할 때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어갔으면 하는 과욕이 남았을 뿐이다.
2001년 1월 9일,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4·13 총선 때 자신을 서산에 지는 해로 표현한 것을 두고
43년 동안 정계에 몸 담으며 나름 재가 되도록 탔습니다. 일찌감치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세워놓고 떠나려고 욕심을 부렸던 건 뿐이지요. 노병은 죽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겁니다.
2004년 4월 19일, 17대 총선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깎아내리려는 못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오늘날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박 대통령이 기반을 굳건히 다져 그 위에서 마음대로 떠들고 춤추고 있는 것이라고
2005년 10월 28일, 박정희 전 대통령 26주기 추도식
정치는 단념의 기술이다. 정치란 해야 할 일은 어김없이 해내고, 해서는 안 될일은 단념하는 기술이다.
역사란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저지르는 과오들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빚어지는 잘못들의 기록들이며, 일의 완급과 선후를 가려 순리에 맞게 다스리는 것이 정치의 기술이다.
결국 어제는 어제의 논리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탕이 돼 오늘이 이뤄진 것이므로 과거를 그대로 두고 공으로든, 과로든, 받아들여 전승하거나 또는 배척하거나 둘 중 하나로 판단하고 행동해야한다.
보수가 늘 보수 그대로 있으면 연못이 썩는다. 이념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를 때 보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옛 전통, 즉 보수를 가지고 지신(知新)하는 것을 취하면 여기서 개혁적 보수라는 말이 나온다. 보수에는 항상 새로운 것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초심을 품고 과거 정치인들로부터 다시금 지혜를 배울 때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과오로부터 냉철함을 배우고, 해리 트루먼에게서 시대의 지도자상을 깨닫기를 바라며, 존 F 케네디에게서 불꽃같은 열정과, 윈스턴 처질의 위대한 봉사의 의미를 새기고, 샤를르 드 골에게서 애국의 길을 들여다보라.

10.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0 - 1963 정계 입문


1963 창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63 - 1968 합당[68]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8 - 1969 탈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69 - 1973 복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3 탈당

[[유신정우회|]]
1973 - 1978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8 탈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78 - 1980 복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0 - 1987 정당 해산
정계 잠정 은퇴


[[신민주공화당|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
1987 - 1990 창당
정계 복귀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69]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5 탈당[70]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2004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4 - 2007 탈당[71]
정계 은퇴


2007 - 2012 입당[72]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2 - 2018 탈당[73]
사망

11.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3478><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c39335><rowbgcolor=#003478>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74]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45,999 (68.15%) 당선 (1위)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69,961 (91.06%)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460,581 (48.77%) 당선 (1번) 3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당선 4선[75]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76]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34,513 (66.63%) 당선 (1위) 5선[77][78]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신민주공화당|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
1,823,067 (8.06%) 낙선 (4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 53,967 (81.88%) 당선 (1위) 6선[79]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42,358 (72.53%) 7선[80]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35,292 (66.35%) 8선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최종 미등록 예비후보 [81]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1,859,331 (9.83%) 당선 (1번) 9선[82]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600,462 (2.82%) 낙선 (1번) [83]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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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p1.jpg
파일:8대 총선 민주공화당 전국구.jpg
7대 총선 (충남 5)[84] 8대 총선 (민주공화당 전국구 1번)
파일:jp2.jpg
파일:jp3.jpg
10대 총선 (충남 5)[85] 13대 대선
파일:jp4.jpg
파일:jp5.jpg
13대 총선 (충남 부여군) 14대 총선 (충남 부여군)
파일:jp6.jpg
파일:16대 총선 전국구 자민련1.jpg
15대 총선 (충남 부여군) 16대 총선 (자유민주연합 비례대표 1번)
파일:17대 비례대표 자민련.jpg
17대 총선 (자유민주연합 비례대표 1번) }}}}}}}}}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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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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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민주정의당 노태우 당선
2 통일민주당 김영삼
3 평화민주당 김대중
4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5 사회민주당 홍숙자 등록 무효*
6 일체민주당 김선적 사퇴
7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
8 무소속 백기완 사퇴
1: 당적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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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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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1B5B40,#289020> 기호 정당 이름 비고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아이콘.svg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당선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아이콘.svg 자유민주연합 한영수 낙선
}}}}}}}}}}}}

12. 저서

  • <새 역사의 고동>, 서문당, 1987년 8월 1일 #
  • <J.P.화첩>, 서문당, 1987년 10월 1일 #
  • <JP 칼럼>, 사공, 1997년 4월 9일 #
  • 공저, <신문인 방우영: 미수 문집>, 21세기 북스, 2016년 1월 28일 #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와이즈베리, 2016년 3월 4일 #
  • 저서,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 스노우폭스북스, 2018년 7월 2일 #

13. 대중매체에서

배우 이정길이 사실상 전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파일:KimJP-4.jpg
  • 1998년 SBS 드라마 <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정동환이 연기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배우 특유의 허무주의적 인텔리 느낌을 지우지 못해서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야인시대의 최동열 역할을 생각해 보면 될 듯.
  • 2002년 SBS 드라마 <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한창호가 연기했다. 다만 실존 인물과는 외모에서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평가.
  • 2004년 MBC 드라마 < 영웅시대>에서는 배우 정재곤이 연기했다. 박정희의 참모 역할로 나왔는데 너무 젊은 느낌이라 별로 닮아보이지 않았다.

파일:KimJP-L.jpg

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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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1b5b40,#ddd> 일생 <colbgcolor=#fff,#1f2023> 일생 · 평가
가족 아내 박영옥 · 형 김종락 · 형 김종익
역대 선거 제13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사건사고 및 논란 · 5.16 군사정변 · 4대 의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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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
전임자: 진형하
김용태 박찬 양순직 김종필
보령·서천 청양·홍성 예산 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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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아산 천안·천원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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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충청남도 휘장(~1998)_White.png 충청남도 제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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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박병배 김용태 김달수 양순직 김종익
서천·보령 청양·홍성 예산 서산
김옥선 장영순 공석 길재호 이상희
당진 아산 천안·천원
김두현 이민우 김종철
* 부여 김종필 자격 상실 (1968.6.2.)
* 서천·보령 이원장 자격 상실 (1968.6.3.)
* 예산 박병선 자격 상실 (197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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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8대).svg 전국구 제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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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민주공화당
29석
김종필 정일권 백두진 ~~~~ 길재호
김형욱 권오병 ~~~~ 황종률 이동원
이종우 유봉영 홍승만 모윤숙
최용수 이해랑 강병규 강성원
문창탁 권일 김성두 신광순
박태원 박철 전정구 장덕진
이도선 김현숙 편정희 김옥자
노진환
신민당
24석
유진산 김대중 홍익표 김홍일
김의택 유청 정헌주 이종남
이세규 편용호 김준섭 채문식
이상조 신도환 김재화 김용성
강필선 오세응 유성범 정규헌
이대우 오홍석 박종률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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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통일주체국민회의_휘장.svg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제9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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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유신정우회 1기
73석
갈봉근 강문봉 강문용 고재필
구범모 구임회 구태회 권갑주
권일 권효섭 김기형 김동욱
김명회 김봉환 김삼봉 김성두
김성락 김성주 김세련 김영도
김옥자 김용성 김재규 김재순
김종필 김진만 김진봉 김창규
김태규 노진환 문태갑 민병권
박정자 백두진 서병균 서영희
서인석 송호림 안종열 안춘생
엄경섭 오정근 오주환 유민상
윤태일 이도선 이범준 이성가
이숙종 이영근 이종식 이진희
이해랑 임삼 장동식 장준한
장창국 전재구 정광호 정복향
정재호 주영관 지종걸 최영철
최영희 최용수 한태연 함명수
함재훈 함종빈 허무인 현오봉
황창주 송효순 김충수 이승복
남상돈
유신정우회 2기
73석
갈봉근 강문봉 강문용 고재필
구범모 구태회 권갑주 권일
권중동 권효섭 김기형 김도창
김동성 김명회 김삼봉 김성용
김세련 김세배 김신 김영도
김용성 김익준 김종필 김진복
김진봉 김창규 김충수 남상돈
노진환 문태갑 민병권 박동묘
박정자 박찬현 백두진 백영훈
서영희 서인석 송호림 송효순
신광순 신범식 신상초 안종열
안춘생 오정근 윤여훈 윤주영
윤태일 이도선 이범준 이성근
이숙종 이승복 이승윤 이영근
이정식 이종식 이종찬 이진희
장동식 전부일 전재구 정일영
정재호 주영관 지종걸 최영철
최영희 최우근 한태연 함명수
현오봉 변우량 마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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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충청남도 휘장(~1998)_White.png 충청남도 제10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대전 동·중 천안·아산·천원 대덕·금산·연기 논산·공주
임호
김용태
김종철
정재원
이준섭
유한열
정석모
박찬
부여·서천·보령 홍성·청양·예산 서산·당진
김종필
조중연
장영순
한건수
심현직
한영수
* 부여·서천·보령 김종필 사퇴 (1980.7.4.)
* 대전 동·중 김용태 사퇴 (1980.8.27.)
* 홍성·청양·예산 장영순 사퇴 (19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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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충청남도 휘장(~1998)_White.png 충청남도 제13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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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김현 윤성한 김홍만 박충순 정일영
공주시·군 대천·보령 온양·아산 대덕·연기
윤재기 김용환 황명수 유한열 이인구
논산 부여 예산
김제태 김종필 이긍규 조부영 박병선
서산 당진 천원군
박태권 김현욱 김종식

}}}
}}}}}}

파일:충청남도 휘장(~1998)_White.png 충청남도 제14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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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공주시·군 대천·보령 온양·아산
성무용 이상재 김용환 황명수
금산 부여 서천 청양·홍성
정태영 김종필 이긍규 조부영
논산 연기 예산 서산·태안
김범명 박희부 오장섭 한영수
당진 천안군
송영진 함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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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충청남도 휘장(1998-2012)_white.svg 충청남도 제15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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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천안 갑 천안 을 공주 보령 아산
정일영 함석재 정석모 김용환 이상만
서산·태안
변웅전 김범명 김현욱 김종필 오장섭
청양·홍성 연기 서천
이완구 김고성 이긍규
* 예산 조종석 당선 무효 (1997.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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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한나라당
21석
이회창 홍사덕 이연숙 강창성
신영균 서정화 이상희 박세환
전재희 조웅규 윤여준 이한구
김정숙 김락기 박창달 김홍신
이원창 황승민 임진출 이원형
손희정 김영선 유한열 장광근
송병대 김영구 박경섭 이만재
새천년민주당
19석
서영훈 <colbgcolor=#00AA7B> 최영희 <colbgcolor=#00AA7B> 장태완 <colbgcolor=#00AA7B> 이만섭
한명숙 김운용 박인상 이미경
박상희 이재정 허운나 최재승
김한길 김방림 김기재 김영진
윤철상 조재환 유삼남 김화중
최명헌 박양수 조배숙 오영식
구종태 안상현 황창주 박종완
한충수 양승부 박금자 이종성
안희옥
자유민주연합
5석
김종필 조희욱 김종호 조부영
안대륜 변웅전
민주국민당
1석
강숙자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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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7px -10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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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민관식 박준규 조시형 예춘호 이종순
김임식 최두고 양극필 류승원 이병희
이백일 서상린 권오석 이돈해 옥조남
신옥철 이승춘 김재순 김종호 황호현
김진만 정태성 신관우 육인수 안동준
김종무 김용태 양순직 김종필 김종갑
이상희 이영진 길재호 김성철 최영두
전휴상 한상준 류광현 이병옥 장경순
정래정 이우헌 조경한 김선주 신형식
길전식 최서일 배길도 박종태 정헌조
이남준 송관수 이원만 이효상 김종환
김장섭 백남억 이상무 김성곤 김봉환
오상직 권오훈 김중한 이활 김준태
송한철 김정근 이동녕 정진동 김창근
구태회 최석림 김주인 김용순 방성출
신영주 변종봉 이재만 노재필 김택수
최치환 민병권 임병수 현오봉 정구영
김성진 이종극 민병기 김동환 신윤창
오치성 박현숙 강상욱 조창대 이종근
오학진 김우경 김병순 서인석 이만섭
조남철 한태연 최정기 차지철 박규상
김호칠 강문봉 최희송 }}}
민주공화당 · 신민당 ·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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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0px -1px; display: inline-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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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장덕진 김임식 양찬우 류승원 김숙현
이병희 이윤학 차지철 오치성 서상린
최영희 박명근 김유탁 김재춘 오학진
김용호 최돈웅 이교선 장승태 김재순
한병기 이우현 김진만 민기식 육인수
김원태 정구중 이정석 이해원 김용태
김제원 이병주 김종익 이상익 최종성
장영순 박승규 김세배 김종철 박성호
유기정 전휴상 길병전 이정우 이병옥
장경순 김상영 김중태 고재필 문형태
박준호 길전식 윤재명 정간용 임충식
정판국 오중열 박종진 윤인식 손재형
강재구 김병윤 정무식 백남억 박준규
김봉환 김상년 문태준 오준석 정진화
박숙현 김인 고우진 김창근 권성기
구태회 최재구 이학만 최세경 엄기표
정우식 김영병 신동관 민병권 홍병철
현오봉 김종필 정일권 백두진 김형욱
권오병 이동원 이종우 유봉영 홍승만
모윤숙 최용수 이해랑 강병규 강성원
문창탁 권일 김성두 신광순 박태원
박철 전정구 장덕진 이도선 김현숙
편정희 김옥자 노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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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갈봉근 강문봉¹ 강문용 고재필 구범모
구임회¹ 구태회 권갑주 권일 권중동²
권효섭 김기형 김도창² 김동성² 김동욱¹
김명회 김봉환¹ 김삼봉 김성두¹ 김성락¹
김성용² 김세련 김세배² 김신² 김영도
김옥자¹ 김용성 김익준² 김재순¹ 김종필
김진만¹ 김진복² 김진봉 김창규 김충수
김태규¹ 남상돈 노진환 마달천² 문태갑
민병권 박동묘² 박정자 박찬현² 백두진
백영훈² 변우량² 서병균¹ 서영희 서인석
송호림 송효순 신광순² 신범식² 신상초²
안종열 안춘생 엄경섭¹ 오정근 오주환¹
유민상¹ 윤여훈² 윤주영² 윤태일 이도선
이범준 이성근² 이숙종 이승복 이승윤²
이영근 이정식² 이종식 이종찬² 이진희
이해랑¹ 임삼¹ 장동식 장준한¹ 장창국¹
전부일² 전재구 정광호¹ 정복향¹ 정일영²
정재호 주영관 지종걸¹ 최영철 최영희
최용수¹ 최우근² 한태연 함명수 함재훈¹
함종빈¹ 현오봉 황창주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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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강보성 강삼재 강성모 강신옥 강우혁
강재섭 고세진 구자춘 권달수 권오석
권해옥 김근수 김기배 김길홍 김남
김덕룡 김동규 김동인 김두윤 김문기
김문원 김병용 김봉조 김성룡 김영구
김영삼 김용채 김용태 김용환 김우석
김운환 김윤환 김인기 김인영 김일동
김일윤 김장숙 김재광 김재순 김정수
김제태 김종곤 김종기 김종필 김종호
김중권 김중위 김진영 김진재 김태호
김한규 김현욱 김홍만 나웅배 나창주
남재희 노인환 노흥준 도영심 류돈우
류승규 문정수 문준식 문희갑 박경수
박관용 박승재 박용만 박우병 박재홍
박정수 박종률 박준규 박준병 박철언
박충순 박태권 박태준 박희태 백남치
백찬기 서상목 서울
서정화
인천
서정화
서청원
석준규 송두호 신경식 신상식 신상우
신영국 신영순 신오철 신재기 신진수
신철균 신하철 심명보 심완구 심정구
안병규 안영기 안찬희 양경자 오경의
오용운 오유방 옥만호 유기수 유기준
유기천 유수호 유승번 유학성 유한열
윤길중 윤성한 윤재기 이강희 이광노
이긍규 이기빈 이대엽 이도선 이동진
이민섭 이병용 이병희 이상득 이상하
이상회 이성호 이승윤 이영문 이웅희
이원조 이윤자 이응선 이인구 이인제
이자헌 이재황 이정무 이종근 이종찬
이진우 이춘구 이치호 이태섭 이택석
이한동 이해구 이행구 임무웅 임인규
장경우 장영철 전용원 정동성 정동윤
정동호 정석모 정순덕 정시봉 정일영
정재문 정정훈 정종택 정해남 조경목
조남욱 조만후 조부영 조영장 지연태
채문식 최각규 최기선 최무룡 최상진
최운지 최재욱 최형우 한승수 함종한
허재홍 홍세기 홍희표 황낙주 황대봉
황명수 황병우 황병태 황윤기 황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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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환 정상천 유수호 김복동 현경자
최재욱 강창희 박규식 박제상 류종수
김정남 조일현 김진영 이종근 박준병
김용환 정태영 김범명 김종필 이긍규
조부영 한영수 함석재 이상두 이학원
배명국 박구일 문창모 양순직 강부자
이용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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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원 노승우 백남치 정한용 이상현
이정무 박철언 박구일 이양희 강창희
이원범 이재선 이태섭 오세응 김일주
허남훈 이택석 박신원 김의재 이한동
김영진 김기수 구천서 오용운 김선길
정우택 김종호 정일영 함석재 정석모
변웅전 김범명 김종필 이긍규 이완구
오장섭 김현욱 박태준 박세직 김종학
차수명 정상구 한영수 이건개 김허남
김광수 이동복 강종희 주양자 박상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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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김종필 김학원 변웅전 안대륜 이인제
이한동 정진석 조부영 조희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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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김

[A] 부여군 갑 [B] 부여군 을 [C] 부여군, 서천군, 보령군 [D] 1980년 7월 4일 의원직 상실 [E] 부여군·서천군·보령군 [E] 부여군·서천군·보령군 [7] 은 '샘물 흐르는 모양 필', '분비할 비' 두 가지 훈음이 있다. '비'는 완성형에서나 입력이 되고, '필'로 입력해서 변환해야 유니코드에서 호환이 된다. [8] 음력 1925년 11월 23일 [9] 김해 김씨 경파 집성촌이다. [10] 규암면 외리가 출생지라는 설도 있다. #, # [11] 사후 매각 후 철거, 2021년에 새로 빌라를 건축했다. [12] 경파-안경공파 16세손 종(鍾)○ 항렬. 조부 김현택(金顯澤), 아버지 김상배(金相培), 본인과 형제가 각각 경파(京派) 20세손, 21세손, 22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 [13] 국무총리 서리기간까지 포함하면 1998년 3월 3일 부터 1998년 8월 17일 까지다. [14] 전북 군산 출신. [15] 주민등록(호적)상으로는 1951년 12월 27일생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1951년 9월 7일생([age(1951-09-07)]세)이다. [16] 1961년 9월 3일~ 2023년 12월 4일(향년 62세). [17] 세 사람 모두 장남 김진의 2남 1녀로서 아들들은 1991년 '이코노미 퀸'의 보도에서 각각 4세, 2세로 언급되었고, 외동딸 김미영은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녀 김예리의 자녀들, 즉 김종필의 외손주들은 아직 언급된 바가 없다. [18] 결혼식도 대구중앙교회에서 거행했다. 다만, 모친과 형제들, 장모, 장녀가 불자인지라 불교계와도 인연이 있었고, 불교 사상에도 정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인터뷰에서는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이 삶의 바탕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2015년에 개신교 쪽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하였다. [19] 출처 [20]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들이 김종필의 이름인 '종필'의 발음이 어려워서 붙여준 별명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별명으로 굳어졌다. [21] 당시에는 군사학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다. [22] 다만 김종필은 나머지 둘과 다르게 대통령 자리에 앉지 못했다. [23] 국회부의장 격 [24] 총재급 위상을 가진 대표로 김영삼 정부 초반에는 사실상 실세이자 2인자로 행정부에 영향을 주는 어느정도의 정권 지분을 가졌다. [25] DJP연합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야권단일후보로 확정되자 자동적으로 후보사퇴하였다. [26] 역대 최다선 [27] 통일뒤 땅 소유권 북 주민 우선 [28] 김종필총리 아시아통화기금 제안 [29] AMF 아시아통화기금 계획 사실상 백지화 [30] 의원 내각제는 국회의 다수당이 내각 구성권을 갖게 되고 그 다수당의 수장이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다. 21대 총선 이전만 해도 한 정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니 김종필이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집권 여당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각제를 할 경우 제3당의 수명이 늘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에 민주화 이후 상당기간 제3지대에 있던 김종필이 내각제를 추진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이것이 20대 총선 전후로 호남 정가를 중심으로 의원 내각제 개헌 논의가 활성화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31] 재밌게도 본인이 군사정변으로 전복시킨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내각제였다. 내각제를 무너뜨린 사람이 훗날 내각제를 추진하게 됐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32] 무엇보다 상징적인 것이 4위 김종필의 8.1% 1,823,067표를 그대로 2위 김영삼의 28.0% 6.337,581표에 더해도 당선자 노태우의 36.6% 8,282,738표에 미치지 못한다. 즉, 당시 1노 3김의 대한민국 정치 4강 중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이 바로 김종필이었다. 당선자 노태우야 말할 것도 없고 양김 역시 '두 사람이 단일화했으면 노태우를 꺾었을 것이다'라는 단일화 필승론이 당시 한국 정치와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떡밥으로 자리잡은 입장이다. 당대의 정치적 구도로 보건 득표율이라는 결과로 보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3인은 그 사람이 선거에 불참한다면 선거 결과가 바뀔 가능성이 아주 높은 입장이었던 데 비해 김종필만은 선거에 참여하든 불참하든 선거 결과는 그대로인 셈이다. [33] 13대 대선 이후 3당 합당에 합류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지만 당내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한 민정계/민주계( 상도동계)와는 달리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계( 청구동계)는 당내 주도권은커녕 제대로 된 지분도 인정받기 힘든 처지에서 계파의 핵심인 김종필 자신이 퇴진 요구에 몰리는 처지로 전락했고 결국 자민련을 세워 독립하게 된다. 다만 김종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아서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DJP연합으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면서 캐스팅 보터로써 정치적 의미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시점이 되면 그나마 김종필의 잠재적 지지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던 (군사정권에 거부감이 없는) 강경 보수층이 신한국당에 완전히 흡수되어 주요 대선 후보로써 성장할 지지 기반 확장력 자체가 거의 상실된 상태였다. 그리고 승자 독식형 선거제도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거대 양당화의 흐름에 따라 수권 정당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상실하고 캐스팅보터의 입지밖에 기대할 수 없게 된 자민련과 그 후계 정당들은 예정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 [34] 양김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바 있는데 조갑제는 "그 때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확고한 상징성을 확보했다. [35] 법적으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된다. [36] 사실 한국 국립현충원은 20년간 함께 한 배우자는 자리 상관없이 합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국가원수, 국가사회유공자 등 일반 안장되는 무덤은 옆에다 땅을 파고 같이 넣는 형식이며 그 외 화장 후 안장되는 무덤은 분골함을 같이 넣는다. [37] 박정희 정부, 김대중 정부 [38] 국가정보원의 시초였다. [39] 다만 독재 정부 시절이었던만큼 상관인 박정희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그 대단한 위세와 영향력에 비해서는 그렇게 큰 힘을 갖지는 못했다. 내부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김대중 김영삼은 박정희의 반대파였고 전두환은 군대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을 뿐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전이었으며 그 외에 그들의 영향력에 대등하게 필적할만한 인물은 드물었다. [40] 그가 학창 시절 다녔던 고등보통학교는 현재 중-고등학교에 대응하는 학교로, 모든 수업이 일본어로 이루어졌다. 일본어를 배우지 않으면 학교 과정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 유학 경험도 있어 일본어에 매우 능했을 것이다. 한일 협상의 기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역시 일본어로 적혀 있다. [41] 다만 이때의 인터뷰를 보면 나이 탓인지, 유창하게 곧바로 회화한다기보다 머릿속에서 우리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뒤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어휘 선택이나 억양 등이 거의 현지인 급이다. [42]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유화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좀체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43] 실제로 1995년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가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44] 남재희가 JP와 빈대떡에 소주를 마시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의 소탈함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45] 한나라당 의원들도 선배 정치인인 JP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었고 언론에서 종종 수군거리기는 하였으나 "내가 근무 시간에 골프 치는 것도 아니고 나이 칠십 넘은 사람이 골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몸져누우면 대신 앓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간섭하느냐?"고 받아쳤다고 한다. [46] 정반대가 김영삼인데 김영삼은 사석에서도 단순한 생활 차원의 신변이야기를 제외하면 정치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박준규는 김영삼을 가리켜 대화주제가 빈약해 딱해 보였다고 평한 적도 있다. [47] 그냥 멋스럽게 즐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도 인간의 희노애락 전반을 뜻한다. [48] "웃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다."는 의미로, 당나라 이백의 시 < 산중문답>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 [49] 박명수가 진보 성향 연예인이라 김종필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의도는 좋았다 정도로 포장해 하하를 옹호하려 해준 것. [50] 명수는 12살 특집 등. [51]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서산시 근처에서 갑자기 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다. [52] 2000년 당시 가격으로 약 2,000만원 수준의 채였다. 현재는 700만원 ~ 1,200만원의 가격대 [53] 당시 한국에서는 중화민국자유중국이라고 했고,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이라고 해서 교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54] 이 때문에 박정희의 종신집권에도 부정적인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55] 이를 두고 유시민은 "꼭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해야만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56] 특히 위의 주장에서 '킹메이커 김종필'의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한 창작물의 연출을 실제 역사로 착각하는 오류가 가장 심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 내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갈등은 노태우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되던 '6공 황태자' 박철언 사이에서 벌어졌다. 민정계 핵심인사인 박철언의 입장에서는 한때 최대의 정적중 하나이던 김영삼에게 차기 대선 후보의 자리를 내주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대항할 만한 존재감을 가진 정치인도 없었기에 김종필, 박태준 등을 끌어들여 (김영삼에게 대통령 자리는 내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여당 지위는 유지할 수 있는) 내각제 개헌 카드를 흔들어 보였던 것. 그리고 이에 김영삼은 "그따위로 나오면 나는 통민계를 이끌고 탈당해서 김대중 지지선언을 해버리겠다"(=야당 출신인 나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기 싫다고 야료를 부리다가 진짜 야당으로 대통령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 줄 알아라)라고 압박했고, 결국 박철언(과 노태우)는 이에 굴복하여 김영삼이 민자당의 대선후보가 되었던 것. 결국 14대 대선에서 JP의 역할은 YS 지지를 위해 내부 의견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반대하여 맞서는 것이었고, 심지어 본인이 직접 맞설 체급도 못 되어 남이 맞서는 것을 거들어주면서 떡고물이나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처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57] 당시까지 김종필과 김대중의 정치적 입장 및 지지층의 괴리가 컸다는 점에서 김종필 지지표가 정주영으로 가는 경우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이 경우는 표의 이동이 상정 최대치인 8.1% 가 되어야 겨우 아슬아슬하게 선거 결과가 바뀔까 말까한 수준이 된다는 한계가 있다. 14대 대선 당시 정주영이 충청권에서 상당한 표몰이를 했음을 생각하면 이전 대선에서 확인된 소위 김종필 지지표의 상당 부분은 이미 정주영에게 가 있는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김종필이 정주영을 지지한다고 해서 김종필이 가졌던 보수표가 전부 정주영에게 가리라는 보장도 없음을 생각한다면 8%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자체가 무리한 것. 게다가 정말 그만한 표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를 통해 바뀌는 결과는 정주영의 대통령 당선이 아니라 김대중의 어부지리 당선일 뿐이다. 김종필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이득도 없이 괜히 헛일을 하게 되는 셈. [58] 사실은 이 가능성조차 애매한 면이 있다. 이회창은 충남 예산이 연고지임을 내세워 새로운 충청권 맹주의 자리까지 노리던 인물이고, 노무현은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역대급 승부수를 던져 충청권에서 그런 이회창을 상대로 승리한 인물이다. 즉 16대 대선이 명확한 양강구도로 흘러감에 따라 양 후보 모두 승패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칠 충청권 표심을 잡기 위해 격렬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 물론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는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아무리 김종필이 충청권의 유력 정치인이라고 해도 바로 그 김종필의 수사를 빌리자면 충청도 사람들이 핫바지도 아닌데 단지 '김종필이 지지한다'는 이유로 큰 기대감을 품을만한 개발이슈를 버리고 이회창 지지로 돌아섰을지는 의문인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 표의 규모가 작은것도 아니었다. 당시 대선에서 노무현의 우세는 약 57만표이고, 이중 25만 6천표 정도가 충청권에서 얻은 우세였다. 그리고 충청권 표 중에서 다른 후보들의 표를 빼고 양 후보의 득표비만 보면 56:44 정도가 되므로, 충청표로 선거결과를 바꾸려면 이를 완전히 뒤집어 44:56으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많은 표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김종필이라지만 본인이 직접 출마한 것도 아니고 단지 이름값만으로 10% 이상의 표를 움직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게다가 김종필의 전성기인 13대 대선을 보면 충청권에서도 김종필이 압도적 지지를 얻은곳은 충남(45.03%)이고, 충북에서는 전국 평균보다는 높은 득표율(13.52%)을 얻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표를 얻은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충남(+대전. 13대 대선은 대전이 충남에서 분리되기 이전이었다.)은 행정수도 이전 이슈에 대한 기대감으로 노무현이 이회창을 10% 이상의 압도적인 격차(심지어 대전에서는 15% 이상의 격차)로 앞지른 지역이다. 이 격차를 메우고도 남아 역전시킬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김종필이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 쉽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결국 본 문단에서 여러 번 강조된 것이지만, 김종필은 물론 거물 정치인이었지만 흑막의 킹메이커로서든 충청권 맹주로서든 그 영향력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정치를 이미지로 소비하는 이들이 종종 그 이미지를 너무 과장하여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16대 대선의 경우, 노무현보다 이름값이 훨씬 높던 이회창이 의외의 패배를 당한 선거라 적지 않은 이들이 '이회창이 진 이유'를 어떻게든 찾으려 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와 관련되면 이런 오해가 더 부풀어오르기도 쉽다.) [59] 상기된 1강 2중 1약의 4개 정파 구도로 설명하자면, 공화계를 이끌던 김종필의 첫 선택은 1강(민정계) + 1중(통민계)의 통합에 자신도 합류하여(3당 합당) 1초강 - 1약 구도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적이라고는 1중 평민당밖에 없는 상태에서 1강과 1중이 손까지 잡았으니 그나마 4대 정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작던 1약 공화계는 자연히 있으나 없으나 별 존재감이 없는 처지가 되고, 당 내 주도권은커녕 제대로 된 지분조차 보장받기 힘든 깍두기로 내몰릴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1 + 1 + 1 = 3이 꼭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혼자 고립된 평민당이 그 반대급부로 유일 야당의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면서 일단 성립되었던 1초강 - 1약의 구도가 1강 - 1중 정도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김종필과 공화계(자민련)이 기사회생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김종필계 정치 세력은 여전히 1약의 처지였지만, 1강 - 1중의 대립 구도에서는 1약이 1중에 힘을 보탬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 다르게 보면,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은 김종필의 협력이 간절히 필요한 처지였지만, 김종필 역시 김대중 이외에는 자신의 역량을 받아줄만한 상대가 없는 처지였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15대 대선 이외에, 특별히 김종필이 당락을 좌우했다고 할 만한 대선은 전혀 없다. 즉, 킹메이커라는 별명에만 눈에 빼앗긴 이들이 흔히 김종필을 대선 때마다 "이번에는 누구에게 힘을 실어줘서 대통령을 만들어볼까?"하고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배후의 흑막 같은 이미지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전혀 달리, 실제로 제 6공화국(민주화) 이후 김종필의 행보는 단 한장의 카드를 꼭 부여잡고, 참기 힘든 것도 묵묵히 참고 견뎌내다가 결국 찾아온 승부의 순간에 그 단 한 장의 카드로 극적인 역전승을 이뤄낸 승부사에 더 가깝다. [60] 실제로 이렇게 간단한 아침식사 덕에 며느리가 고생을 덜한다고 좋아했다고 한다. [61] 이들 중 김영삼은 실제로 한 남성이 제기한 친자확인 청구소송에서 패소하였다. [62] 출처 : 연합뉴스, 2018. 6. 23.일자 보도 및 모바일한경, 2018. 6. 23.일자 [63] 박영옥 여사한테 청혼할 때 사용했다. [64]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이다. [65] 반면 1995년 1월, 여당인 민주자유당에서 "자의 반 타의 반"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을 때는, "나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라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1번 보여주겠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66] 출처 : 중앙일보 연재 김종필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 2015.09.18일자 [67] 중국 송나라 선종(禪宗)의 대표적 전적을 담아낸 <벽암록>에 나오는 글귀로, 아기 병아리는 건강하게 부화하고자 알 속에서 두드려 나갈 때가 됐음을 알리고 + 어미 닭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밖에서 알을 쪼아 껍데기를 깨줘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은 시기가 적절히 맞아야 한다."는 뜻. 당시 대선 정국에서 적절한 시기의 결단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는 해석이다. [68] 민주공화당에 흡수 합당. [69]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 [7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71] # [72] 이명박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 # 정계 복귀는 아니다. [73] 2월 17일 [74] 부여군 [75] 제9대 총선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3년 임기로 2번 나눠서 선출했다. 김종필은 1기와 2기 모두 선출되었으며, 1기 당시는 현직 국무총리였다. [76] 부여군, 서천군, 보령군 [77] 신민당 조중연 후보와 동반 당선 [78] 80.7.4: 의원직 사퇴 [79]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 3당합당) [80] 1995년 자유민주연합 창당 [81]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단일화로 인한 대선 불출마. [82] 최다선(9선) 타이틀. 9선을 기록한 인물은 같은 3김 중 하나였던 김영삼 박준규 前 국회의장이다. [83] 0.2% 차이로 10선 도전 실패, 정계은퇴. 탄핵정국 당시이다. 10선에 성공했다면 앞으로 깨기 힘든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84] 부여군 [85] 부여군, 서천군, 보령군 [86] 한인수의 경우 체격과 목소리가 너무 중후해서 이 시기보다는 노년기의 김종필에 더 닮았다. [87] 한일회담 때 언저리 사진을 보면 많이 닮은 편이다. [88] 공화국 시리즈 등 TV 드라마에서는 이철승을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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