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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 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핌 포르타윈 | 빌럼 1세 판 오라녀 | 빌럼 드레이스 | 안토니 판레이우엔훅 | 에라스뮈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크루이프 | 미힐 더라위터르 | 안네 프랑크 |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 | 빈센트 반 고흐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알레타 야콥스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아니 M. G. 슈미트 | 율리아나 여왕 | 요한 뤼돌프 토르베커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알리다 보스하르트 | 안톤 필립스 | 프레디 하이네컨 | 하니 스하프트 | 빌헬미나 여왕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바뤼흐 스피노자 | 톤 헤르만스 | 클라우스 폰암스베르크 | 요한 판올덴바르네벌트 | 마르코 반 바스텐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핏 피터르손 헤인 | 요프 던아윌 | 얀 레이흐바터르 | 파니 블랑커르스쿤 | 판코턴 언 더비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후고 그로티우스 | 요한 더빗 | 안토니 포커 | 에뒤아르트 데커르 |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빔 콕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 마르코 보르사토 | 에릭 하젤로프 룰프제마 | 티에스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베아트릭스 여왕 | 티튀스 브란츠마 | 코르넬리스 렐리 | 한스 테이우언 | 요서프 륀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레온틴 판모르설 | 빌럼 콜프 | 홋프리트 보만스 | 헨드릭 안톤 로런츠 | 아벌 타스만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요프 판던엔더 | 안드레 판다윈 | 요스트 판던폰덜 | 리누스 미헬스 | 미스 바우만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빌럼 바런츠 |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언하위스 | 뤼트 뤼버르스 | 얀 틴베르헌 | 빔 소네벌트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요커 스밋 | 프리츠 볼케스테인 | 히에로니무스 보스 | 조니 크라이캄프 | 마르하 클롬페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요하너스 페르메이르 | 딕 브뤼나 | 알베르트 플레스만 | 요프 주테멀크 | 헬라 하서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토마스 아 켐피스 | 윌리엄 3세 | 케나우 시몬스도흐터르 하셀라어르 | 요하너스 디데릭 판데르발스 | 부보 오컬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아나 마리아 판스후르만 | 헤르만 부르하버 | 루드 굴리트 | 모니크 판더번 | 프레이크 더용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안톤 픽 | 바우데베인 더그로트 | 빌럼 프레데릭 헤르만스 | 피터르 옐러스 트룰스트라 | 알버르트 헤인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파울 더레이우 | 약 P. 테이서 | 얀 볼커르스 | 핏 몬드리안 | 시몬 스테빈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하윌라우머 흐룬 판프린스테러르 | 륏허르 하우어르 | 하리 뮐리스 | 아브라함 카위퍼 | 마르턴 트롬프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빔 칸 | 폴 버호벤 | 이자벨 드 샤리에르 | 람서스 샤피 | 아버 렌스트라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1]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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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06년 7월 15일 |
네덜란드 공화국 레이던 | |
사망 | 1669년 10월 4일 (향년 63세) |
네덜란드 공화국 암스테르담 요덴부르트 유대인 거주구역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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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화가 |
분야 | 회화, 판화 |
종교 | 개신교[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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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임은 물론, 유럽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다. 자의적으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능숙하게 사용한 스타일이 특징이며, 정교한 구도와 인물의 탁월한 묘사로 오묘한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던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2. 생애
레이던에서 제분업자의 9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공식적으로는 개신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본래는 레이던 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일찌감치 예술에 두각을 보이기 시작해 대학 공부를 포기하고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624년에 고향인 레이던으로 돌아와서 아틀리에를 열었다. 한동안은 독학으로 친척이나 이웃 노인, 성경 등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다가 초상화가가 되어 화가로서 자리 잡게 된다. 렘브란트는 카라바조 등 이전 시대의 화가에게서 영향을 받아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주어 극적인 화면을 만드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의 국가와 다르게 왕이나 귀족이 아닌,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 계급이 태동하던 나라였으며 성공한 상인들을 위한 초상화의 수요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빛과 그림자를 능숙하게 다루며 인물에 대한 극적인 묘사를 보여주던 렘브란트도 점차 인기를 얻게 된다.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 협회에게 의뢰받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La leçon d'anatomie du docteur Nicolaes Tulp)>가 호평을 받으면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되었다. 흔히 해부학 강의로 줄여 부르는 이 걸작은 소재 자체는 당대에도 여러 번 그려진 적이 있으나 렘브란트처럼 인물들을 극적으로 배치시키고 생생한 표정을 담아낸 작품은 없었다. 훗날 1656년에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했을) 렘브란트가 유사한 소재의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다시 그렸던 것을 보면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때부터 10년간은 렘브란트의 생활이 가장 빛나던 때였다. 명문가의 딸이었던 사스키아 판아윌렌부르흐와 결혼했고,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 많은 의뢰를 받았고 제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렘브란트 자신의 화풍이 성숙하면서 평면적인 초상화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점차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종교적/신화적인 소재를 따서 그리거나, 자화상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세속적인 성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빛을 훔친 화가."
그 결정타는 바로 1642년에 완성한 명작인 '
야경'[4][5]이었다. 이는 암스테르담
자경단 협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렘브란트는 당시의 기념사진 같은 단체 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해, 명암 효과를 주는 식으로 대담한 구성을 시도했으나 혹평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같은 돈을 냈는데 누구는 주인공처럼, 누구는 배경처럼 묘사되어서 당대의 그림 구조와 크게 어긋났기 때문.[6] 마치 빛나는 여인처럼 보이는, 렘브란트 부인인 사스키아에 대한 자의적인 묘사도 혹평받는 요소였다.보통은 이렇게 알려졌었으나, 렘브란트가 야경을 그린 후 단원 중 하나인 프란스 바닝 콕 대위가 찾아와 자신의 초상화와 야경의 수채화 모작을 부탁하였다. 위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는 자경단원들이 야경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혹평을 퍼뜨린 것으로 나타났으나 그랬다는 사실은 없으며, 단순히 몰락한 시기와 맞아떨어진 것에 대한 추측이다. 렘브란트가 몰락한 데는 당시 사스키아의 죽음에 관련돼 있는데, 사스키아가 죽게 되면서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당시 아트 컬렉터들이 밝고 화사한 그림[7]을 선호하며 인기가 떨어진 것이 몰락의 이유다. 참고로 모사도를 보면 원래 이 작품은 더 컸었는데 이 그림이 걸려있던 건물이 개축되면서 놓을 장소가 없어 그림 일부를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 그 잘린 부분이 어땠는지는 모작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당시 이 그림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8]. 물론 현대에는 불멸의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더군다나 같은 해에 아내인 사스키아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2번째 아내인 헨드리켜의 내조를 받아 작품 세계가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렘브란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1640년대 이후에 완성되었다. 화가로서의 명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생활이 사치스러웠던 탓에,[9] 생활이 가면 갈수록 어려워져서 1656년에는 파산 선고를 받고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저택과 미술품마저도 전부 팔아야 했다. 하지만 사후 네덜란드 정부가 발 벗고 나서 렘브란트가 팔아치워야 했던 미술 작품 120점가량의 대부분을 사들여 렘브란트의 생가에 전시해 놓는다. 그중에는 루벤스와 같은 거장의 작품들도 많다고. 한때는 정말 잘나갔던 듯[10]. 1662년에는 헨드리켜도 세상을 뜨고, 1668년에는 사스키아의 사이에서 본 아들인 티튀스마저 세상을 뜨면서 렘브란트도 1669년, 유대인 구역의 허름한 집에서 눈을 감았다. 참고로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유대인 친구가 많고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낸 편이다.
렘브란트는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화가로,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었고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자화상을 무척 많이 그린 화가였는데, 100점 이상을 남겼다고 하며, 죽은 해인 1669년에도 자화상을 남겼다.[11]
3. 종교관
《청년 예수의 얼굴》1648년
종교화를 그릴 때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12] 성경 인물 혹은 순교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나약한 듯한 모습으로 그릴 때가 많았다. 이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렘브란트 자신이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위 그림도 일반적인 예수 초상화와는 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인데 당시 지인이던 세파르딤 유대인 청년을 모델로 해서 그렸기 때문이다.[13]
다만 어머니가 가톨릭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단순히 화풍을 갖고 렘브란트를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 확신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의 종교화 중에는 가톨릭 후원자들의 주문을 받아 그린 명백히 가톨릭 화풍의 그림들도 많기 때문에, 하나로 고정된 화풍으로만 그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안재경 목사가 쓴 렘브란트의 하나님이란 책에서는 그가 확실하게 개신교 신자인 것처럼 서술해 놓았지만, 신빙성은 좀 낮다. 반면 김학철 교수가 쓴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라는 책에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학술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이쪽을 추천한다. 이 책에서는 그의 신앙관이 주류 칼뱅주의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일단 네덜란드의 국가 교회와 종종 충돌을 겪었던 데다가, 그의 후원자 중에는 개신교도도 있고 가톨릭 신자도 있고 유대인도 있었다. 게다가 가톨릭 화가가 스승이다.[14]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들은 거의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바로크 미술이 가톨릭 내부의 종교 개혁에서 유래한 화풍이기 때문이다. 단지 상업 국가라 실용주의 성향이 강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개신교 후원자들이나 가톨릭 후원자들을 막론하고 그림을 주문할 때 화가의 종교를 딱히 따지지 않는 경향이 강했을 뿐이다.
게다가 두번째 결혼을 할 때 원래 연인이랑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다른 여자랑 눈이 맞아 파기하곤 위자료 책임지기 싫다는 이유로 상대 가족을 매수해 정신 병원에 보내버리는 등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짓을 했던 점들을 볼 때, 그가 신앙적으로도 독실했다 보긴 힘들 것이다.
4. 기타
- 인공지능에게 렘브란트의 그림을 학습시켜 렘브란트풍의 그림을 그리게 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이름하여 넥스트 렘브란트.
- AMD ZEN 3+ 마이크로아키텍처의 코드네임으로 쓰인다.
-
1639년에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을 보고 드로잉과 메모를 남겼다.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백작' 그림이 3500길더에 팔렸다. 뤼카스 판위펠런 경매의 전체 수입이 59456 길더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거상 뤼카스 판위펠런(Lucas van Uffelen)의 어마어마한 컬렉션이 사후 경매에 부쳐져 팔렸는데 그때 가서 본 것 같다. 이 거래 액수는 이전 40여 년 동안 거래된 전체 예술품 액수의 60% 인 59496
길더에 달했다고 한다. 3500길더는 당시 그림 거래액의 최고가로 이전 40년 동안 최고가의 5배에 달했다.
[1]
풀네임을 해석하면
라인강 근처(레이던)에 사는 하르먼의 아들 렘브란트란 뜻이 된다.
[2]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로 자랐다. 성인이 된 후에는 특정 교단에 소속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3]
단, 확실하게
개신교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실제로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가 없다. 이처럼 복잡한 가정 환경 때문인지 그는 자기 아들인 티튀스에게
수도복을 입힌 코스프레 그림도 그렸었다.
[4]
원제목은 따로 있는데 '프란스 바닝 콕 대위의 민간 경비대(The Company of Frans Banning Cocq Preparing to March)' 아니면 줄여서 '야경'이라고 부른다.
[5]
밤 풍경이라는 뜻의 야경이 아니라, '야간 경찰'이라는 뜻이다. 흔히 '작은 정부'를 옹호하는 측에서 자주 말하는 '야경 국가론'에 쓰이는 말이다.
[6]
이건 요즘 단체 사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는 얼굴이나 그림자에 가려져 안 나오고 누구만 부각된다면 잘 찍은 단체 사진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그림이 현재 소장된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 가보면 이 그림의 인물들이 누구누구인지도 다 조사해서 안내판에 적어놓고 있다.
[7]
예를 들어 로코코 시대 작품
[8]
당시 건물 크기가 작아 자른 것도 있으며 작품을 일부 잘라내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9]
작품에 대한 투자라는 명목으로 소품들이나 예술품들을 과소비했다.
[10]
전에도 말했지만 사스키아가 죽으며 렘브란트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을 정도로 사스키아는 큰 경제적 버팀목이 되었다. 사스키아가 경제력이 컸다는 것은 그녀의 결혼
지참금을 통해서 알 수있는데 4만 길더로 약 한화 40억 원....
[11]
지식채널 e에서 렘브란트를 주제로 한 에피소드에서는 세월이 지날수록 파멸되어 간 렘브란트의 삶을 묘사하는 연출로 이용되었는데, 실제 초상화 속 렘브란트는 젊었을 적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치는 청년의 모습이었다가 늙어가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자식이 죽고, 부인들과 사별하면서 희망을 잃어가는 얼굴로 바뀌어 간다.
[12]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화가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에 백인의 외모, 거기에 후광(헤일로)까지 그려 넣어서 일반인과 다르다는 걸 강조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이건 동시대가 아니라 한참 전 시대의 화가들과 비교한거라 미술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비교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화가들이고 렘브란트는 바로크 화풍을 따른 화가다.
[13]
참고기사
[14]
렘브란트의 종교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Perlove, Rembrandt's Faith: Church and Temple in the Dutch Golden Age, 2009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