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에 등록된 동명의 정당 - 한나라당(2012년)[1]
- 2014년에 등록된 동명의 정당 - 한나라당(2014년)[2]
대한민국의 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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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2004.5.20.~2007.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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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 |
<colcolor=#0095da> 영문 명칭 |
<colbgcolor=#fff,#1f2023>Hannara Party Grand National Party |
창당일 | 1997년 11월 21일[3] |
당명 변경 |
2012년
2월 13일 (
새누리당) 2017년 2월 13일 ( 자유한국당) |
해산일 | 2020년 2월 17일 ( 미래통합당으로 신설 합당) |
통합한 정당 |
[[신한국당| ( 1997년 11월 21일 신설 합당) |
[[미래희망연대| |
|
비상대책위원장 | 박근혜 / 4선 (15-18대) |
원내대표 | 황우여 / 4선 (15-18대) |
사무총장 | 권영세 / 3선 (16-18대) |
정책위의장 | 이주영 / 3선 (16-18대) |
대통령 | 이명박 / 제17대 (2008.2.25.~2012.2.13.) |
정치적 스펙트럼 | 중도우파 ~ 극우 |
중앙당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8 (여의도동, 한양빌딩)[4] |
의석 수 |
174석 / 295석 (18대 국회, 당명 변경 직전)
|
당 색 |
파란색 (#0000A8) [5]
|
파란색 (#0095DA) [6]
|
|
국제조직 |
|
정책연구소 | 여의도연구소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출범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성기를 누린 정당이다. 야당이었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기에도 그 존재감은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계 정당보다도 강했다.[9]
특히 참여정부 말기~ 이명박 정부 초기에 그 위세가 절정에 이르러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17대 대통령 선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연승을 거두게 된다. 이 당시엔 20대의 민주당 지지율은 19.5%에 불과한 반면 한나라당은 무려 53.1%에 달했었다. #[10] 2007년 17대 대선 때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서울과 경기도에서 24.5%와 23.8% 득표한 것에 비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53.2%와 51.8%를 득표했는데, 이는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서울특별시 지역 최고 득표율이자 2위와의 최다 표차 신기록이다.
이후 2011년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2012년 열릴 총선과 대선에서 패색이 짙어졌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결국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미지 쇄신을 위하여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 최장수 정당명(14년 3개월)이다.[11] 이렇게 같은 당명으로 오래 존속했으나, 의외로 여당이었던 기간(4년)보다 야당이였던 기간(10년)이 더 길었다. 또한 사단(社團)의 결성과 해체를 따지면 최장수 사단이기도 하다. 중간에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2차례 당명 변경만 이루어졌으니, 1997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12] 자그마치 22년 동안 존속했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hannara.or.kr'[13]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오랜 기간 보수진영의 최대 정당으로 군림했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이 사라진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노년층을 중심으로 후신인 국민의힘을 한나라당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남아있다. 당명이 새누리당으로 바뀐 이후부터 2024년 지금까지도 이를 노리며 동년 4월 10일에 시행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까지도 한나라당(2014년)이라는 극우정당이 비례대표 기호37번으로서 출사표를 던진다.
2. 성향
전신인 신한국당 시절 IMF 외환위기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인기를 잃으면서 보수 내부의 헤게모니를 상실했고 뒤이어 등장한 삼김청산을 외친 개혁적인 성향의 감사원장 출신이자 국무총리을 지낸 이회창을 중심으로 보수가 재편하는 와중에 한나라당이 창당되었다. 하지만 이회창은 삼김청산 과정에서 당내 다수파이자 김영삼의 계파인 상도동계를 적으로 돌렸고 그러면서 강경보수 세력인 5. 6공을 뿌리 둔 민정계와 손을 잡았다. 이로 인해서 당이 보수화되기 시작했다고 평가되는데, 실제로 신한국당 시절보다는 확실히 우경화된 당의 정치적 색깔이 도드라졌다. 다만 이회창이 기본적으로는 민정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을 이끌었지만, 외연확장을 위해 개혁보수 성향의 인사들[14]을 영입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회창을 제왕적 총재라고 비판하며 당 내 개혁을 요구하였고, 이 때문에 이회창 체제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시점에서는 이회창이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회창이 제16대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 후 당대표로 취임한 친YS계 최병렬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사건으로 조기 사퇴하면서 한나라당 내 개혁보수 세력의 당내 입지는 매우 약해졌다. 이 때 소위 독수리 오형제라고 불리는 개혁파 의원 5명과 김원웅 의원 등 개혁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열린우리당으로 이탈하기도 했다.이후 2004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자 보수정당의 뿌리 대구경북의 출신이지만, 이회창 체제에서는 당 내 비주류였던 박근혜가 탄핵 열풍 속에서 당권을 차지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전하면서 박근혜 체제 또한 공고해진다. 박근혜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과거 이회창을 지지했던 민정계 인사들은 박근혜를 중심으로 다시 뭉치게 된다. 이에 2006년 자유민주연합 합당 이후 당에 영입된 공화계 의원들 또한 박근혜가 휘두르는 막강한 당권을 중심으로 뭉치며 한나라당의 주류에 편입되었고, 여기에 이회창 직계인 유승민과 이혜훈, 상도동계 출신의 김무성과 서청원 등의 인사들도 박근혜 진영으로 이동하기도 했다.[15] 15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한나라당의 정치적인 대격변이 일어났던 시기가 바로 박근혜가 당권을 잡았던 2000년대 중반으로, 이전까지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 한정으로 인기를 얻었던 박근혜는 이 시점을 계기로 한나라당의 유력 대권 주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2007년 대선경선 시즌이 시작되자 온건보수 세력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 집결하였고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하며 실용적 보수주의를 지향했는데, 특히 녹색 성장을 외치면서 녹색 보수주의의 색채를 드러냈다. 경제정책으로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과거 박정희식 친(親) 대기업적 관치경제가 혼합된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다만 신보수주의적인 정체성은 명확해서 친미, 친서구적인 외교노선을 뚜렷이 하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이회창계와 친박계에 대한 공천 학살이 있었고, 이로 인한 탈당파들은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를 만들었다. 이후 이명박 정부 집권 중후반기부터 무상복지 열풍이 불어닥치고 정권 차원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다시 온건보수는 헤게모니를 상실했고 친이계는 당내 입지를 크게 상실하였다.
2011년 말 박근혜 비대위 출범 이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발판으로 박근혜는 새누리당의 제18대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박근혜는 2008년 국회의원 퇴임 이후 야인 생활을 하던 김종인을 캠프로 영입, 경제민주화 슬로건을 내설고 대선판에 뛰어들어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했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의사가 강력히 반영된 것[16]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나라당은 15년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된다. 단, 비법인사단(社團)으로서의 정당 자체는 2020년 미래통합당 창당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정작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도리어 강경보수 세력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보수 정당은 우경화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의 경우에는 경제민주화의 요소들을 일부 도입한만큼, 경제적 자유주의가 퇴조하고 과거보다 좌경화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냉전적 반공주의, 매카시즘적 성향이 강화되어서 사회 전반의 영역에 걸친 보수화를 추구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새누리당은 보수정당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표결 여부를 놓고 친박계와 비박계가 크게 갈라서며 보수의 분열이 일어났고, 이에 비박계 의원들은 바른정당을 창당해 떨어져 나갔다. 이에 새누리당은 2017년 2월 13일, 창당 5년만에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개정하고 경선을 통해 홍준표 전 경상남도지사를 대선후보로 출전시켰다. 그러나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헌법재판소로부터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직 파면 선고를 받고 물러나면서 자유한국당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워졌고, 결국 5월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역대 대선 사상 최대 표차로 패배하며 정권을 내주는 치욕을 당하고 야당이 되었다.
야당 시절 자유한국당의 성향은 새누리당 시절보다 우경화되어 완고한 사회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띄었다. 7월 전당대회를 통해 홍준표 대표 체제를 출범시키고 박근혜를 출당조치 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으나, 탄핵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12:3이라는 참패를 당하며 홍준표 대표는 물러나게 된다. 이로 인해 홍준표 대표를 밀었던 비박계의 당내 입지가 매우 위태로워졌으며, 이를 틈타 2019년 2월 박근혜 정부의 권한대행을 맡았던 황교안 전 총리가 대표가 되어 다시 친황, 친박계의 당내 입지가 다시 높아지는 듯 보였다.
2020년 2월 17일, 황교안 전 대표는 총선을 앞두고 당명을 미래통합당으로 개정했다. 미래통합당 창당 당시 새로운보수당과 신설합당하는 형태로 정당을 재등록했다. 하지만 법원은 서울남부지방법원 2023. 5. 25. 선고 2022가합104526 판결에서 국민의힘은 한나라당으로부터 이어져 온 정당이라고 해석했다. 대한민국의 정당은 법인이 아니기 때문.
2.1. 분파
- 중도~중도우파
-
보수자유주의 분파
주로 강경 소장파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대체입법을 하는 식으로 악법을 교체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내셔널리즘 자체가 점차적으로 비판받는 상황 속에서 공동체 자유주의를 외치던 박세일 같은 국민자유주의 성향에 가까운 정치인도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존재하기 힘들어보인다. 이 분파는 사실상 거의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래의 자유보수주의로 보수화되면서 사라졌는데 왜냐하면 이회창이 당권을 잡는 과정에서 민정계와 제휴하고 민정계가 부활하면서 국보법 폐지를 외치는 목소리가 먹혀들기 힘들어졌고 오히려 보수정당 내의 색깔론 공세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대 중반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 넘어간 사람들도 있다.[17] -
자유보수주의 분파
온건 소장파나 신한국당 시절 주류였던 상도동계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친이계의 경우, 비록 이명박 정부가 중도실용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우익적인 경제, 사회정책들도 추진한만큼 완전히 중도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꽤나 스펙트럼이 넓은 분파다. 보수정당에 위기 상황이 올 때마다 쇄신을 외치면서 당 개혁을 주도하려고 했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2004년 총선 참패 후에 신보수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이념적으로 적극 수용하였다. - 우파
-
국민보수주의 분파
정확히 언제 이들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수십년에 걸친 정치적인 역동성의 과정에서 사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맞다. 핵심적인 이념은 반공주의, 특히 냉전적 반공주의 이념이고, 강한 대북정책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보수와 진보를 대북관으로 판단했다. 그외에는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선호하였고,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선호하면서 지방자치에 부정적이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친대기업적 관치경제를 지지하는 성향을 가진 신보수주의 이전의 보수였다. 엄밀히 말해서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지만 시장경제의 원리와 자본주의에는 동의하고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적극적 재정정책으로 인한 인위적인 경기부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또한 복지국가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큰 정부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모가 존재했다. 2000년대 중반 박근혜를 중심으로 강경보수가 전반적으로 재편되면서 와해되었다. -
사회보수주의 분파
신보수주의 운동 이후 등장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유보수주의 분파가 신보수주의를 수용하고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왔다고 보는 것이 편하다. 사회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이념으로 대표되는데 2000년대 중반 이후 주류계파가 되었으며 2020년까지 계속해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3. 정강·정책
1997년 11월 21일 처음으로 만든 판이다.[18]3.1. 전문
국가발전과 국정운영을 주도해온
신한국당과 정통야당의 맥을 이어온
민주당이 통합한 「한나라당」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확립함과 동시에 깨끗한 정치와 튼튼한 경제를 이룩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분열과 부패의 구정치구도와 행태를 청산하는 정치혁신으로 국민대통합의 선진민주정치를 구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 안정 속의 개혁을 통해 국민의 삶의 질을 더욱 높여 나가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어 인류의 공동번영에 이바지하는 「21세기 위대한 선진한국」을 창조할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과 기본정책을 밝힌다.
3.2. 강령
1.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정치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깨끗하고 합리적인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함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주민자치ㆍ생활자치를 구현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정착 발전시켜 전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한다.
2. 우리는 자율과 협동, 창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정의를 실현함으로써 활력 있는 선진경제를 이룩한다.
3.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발전과 선진대국 진입의 근간임을 자각하여, 과학기술의 획기적 진흥을 통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의 도약과 정보화 시대의 세계중심국가가 되도록 한다.
4. 우리는 온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며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통해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참여와 협력의 공동체적 노사관계를 정착시켜 선진산업사회를 이룩한다.
5. 우리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지속적인 교육개혁으로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국제화시대에 부합하는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육성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하여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6. 우리는 쾌적한 환경을 향유할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며 개발과 보전이 조화를 이루는 환경친화적인 자원절약형사회를 지향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건강한 녹색사회를 구현 한다.
7. 우리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기회를 확대하며 여성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하게 함으로써 남녀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이룩한다.
8. 우리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주적 방위역량을 구축하고 주변국과의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확고한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9. 우리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공영(共榮) 공동발전을 적극 추진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며 능동적인 외교를 펼침으로써 세계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고 국제적 협력과 노력에 적극 동참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에 기여한다.
2. 우리는 자율과 협동, 창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정의를 실현함으로써 활력 있는 선진경제를 이룩한다.
3.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발전과 선진대국 진입의 근간임을 자각하여, 과학기술의 획기적 진흥을 통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의 도약과 정보화 시대의 세계중심국가가 되도록 한다.
4. 우리는 온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며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통해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참여와 협력의 공동체적 노사관계를 정착시켜 선진산업사회를 이룩한다.
5. 우리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지속적인 교육개혁으로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국제화시대에 부합하는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육성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하여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6. 우리는 쾌적한 환경을 향유할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며 개발과 보전이 조화를 이루는 환경친화적인 자원절약형사회를 지향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건강한 녹색사회를 구현 한다.
7. 우리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기회를 확대하며 여성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하게 함으로써 남녀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이룩한다.
8. 우리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주적 방위역량을 구축하고 주변국과의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확고한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9. 우리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공영(共榮) 공동발전을 적극 추진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며 능동적인 외교를 펼침으로써 세계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고 국제적 협력과 노력에 적극 동참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에 기여한다.
3.3. 기본정책
1. 깨끗하고 생산적인 21세기의 새로운 정치 구현
2. 활력있고 공정한 선진경제의 건설
3.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도약
4. 「삶의 질」을 높이는 선진복지사회의 실현
5. 자율적이며 창의적인 인간교육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달
6.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조성
7. 여성참여 기회의 확대와 실질적 남녀평등 사회의 실현
8. 확고한 국가안보역량의 강화
9. 통일실현과 세계평화에 기여
2. 활력있고 공정한 선진경제의 건설
3.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도약
4. 「삶의 질」을 높이는 선진복지사회의 실현
5. 자율적이며 창의적인 인간교육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달
6.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조성
7. 여성참여 기회의 확대와 실질적 남녀평등 사회의 실현
8. 확고한 국가안보역량의 강화
9. 통일실현과 세계평화에 기여
아래는 새누리당의 정강 및 정책으로 바뀌기 직전의 버전이다.
1. 미래지향적 선진정치
2. 큰 시장·작은 정부의 활기찬 선진경제
3.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질서
4.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나라
5. 일자리가 넘치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
6. 과학기술강국과 정보복지사회
7. 자생복지체제를 갖춘 그늘 없는 사회
8. 양성평등사회
9. 국제적 분업과 지역적 특성에 입각한 지방화
10. 안전하고 편안한 나라
11. 품격 높은 문화대국
12. 교육입국과 인재대국
13. 지속가능한 친환경사회
14.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의 공동체
15.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16. 실용주의 외교 추구
17. 굳건한 안보체제의 확립
18. 한반도 통일노력과 통일 이후 대비 전략 수립
2. 큰 시장·작은 정부의 활기찬 선진경제
3.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질서
4.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나라
5. 일자리가 넘치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
6. 과학기술강국과 정보복지사회
7. 자생복지체제를 갖춘 그늘 없는 사회
8. 양성평등사회
9. 국제적 분업과 지역적 특성에 입각한 지방화
10. 안전하고 편안한 나라
11. 품격 높은 문화대국
12. 교육입국과 인재대국
13. 지속가능한 친환경사회
14.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의 공동체
15.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16. 실용주의 외교 추구
17. 굳건한 안보체제의 확립
18. 한반도 통일노력과 통일 이후 대비 전략 수립
4. 당명
- 한국어: 한나라당( 한자 혼용 시: 한나라黨)
- 영어: Hannara Party 또는 Grand National Party (GNP)[19]
-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Hannaradang
- 중국어
- 일본어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은 조순 전 총재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한'은 수 관형사로 '하나의'라는 뜻으로도 읽히고, 형용사로 '크다'는 의미의 옛말 '하다'[21]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또한 한민족과 한국을 뜻하는 '한(韓)'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중의적 의미에 따라 '하나로 통합된 정당, 크게 성장하는 정당, 한민족과 한국의 정당'이라는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로서는 드문 순우리말 당명이었다.
공천 불복 탈당 및 당선 후 복당 이력을 제외하면 정계 입문 이후 줄곧 보수정당에 몸담아온 홍준표 대구시장(전 경남도지사)은 방송에서 여러 차례 자신이 당원으로 속해 있던 역대 보수정당의 당명 중 최고였다고 밝히곤 했다.
당명의 모든 글자에 모음 ‘ㅏ’가 쓰여 모음조화가 잘 지켜져 발음하기 쉽고, 안정적인 단어구조 때문인지 상당수가 ‘한나라당’ 이라는 이름을 역대 보수정당의 당명 중 가장 마음에 들어한다.
5. 로고
특이하게도 한나라당은 한 차례 로고를 바꾼 적이 있다. 정당이 당명까지 갈아치우는 게 아닌 당명은 유지하고 로고만 바꾼 경우는 드물다.1997년 11월 21일부터 2004년 3월 21일까지 쓰였던 로고. 신한국당 때 쓰던 짙은 푸른색을 썼으며 로고 가운데 모양이 한반도와 비슷하다. 여러모로 신한국당의 로고와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회창계과 민주계가 당권을 쥐고 있던 시절로, 한나라당이 여러모로 개혁우파적인 모습을 보였던 시기였다. 민주계와 민정계가 치열하게 권력다툼을 벌였던 시기라 구 세력이 당을 쥐고 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로고를 사용하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모두 이기는 기염을 토했지만, 가장 중요한 대통령 선거는 2연속으로 패배했다.
2004년 3월 22일부터 2012년 2월 13일까지 쓰였던 로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당이 사면초가에 몰리자 분위기 쇄신을 위해 새롭게 교체한 로고다. 옅은 푸른색을 사용하였으며, 갈고리 모양이 가운데에 있다. 새로운 로고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깨알같이 모형 위에 'New' 가 붙어있다. 명실상부 한나라당의 리즈 시절 사용됐던 로고로, 이 로고를 쓰며 제17대 총선에서 석패했고 이 후 재보궐선거와 제4대 지방선거를 압승하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하며 한나라당 창당 이래 첫 대선 승리를 거뒀다. 제18대 총선 압승까지 이 로고를 쓰는 동안의 성적은 압도적으로 좋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한나라당' 하면 이 로고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보다 이 로고는 한나라당의 세대 교체를 상징하는 로고이기도 한데, 이 로고를 공개한 2004년 전당대회 당시 박근혜가 대표에 선출되며 당권의 정면에 나서게 된다. 박근혜가 대표가 되면서 구 세력으로 대표되는 민정계, 민주계가 와해되어 민정계는 친박계로 편입되고 민주계는 이명박에게 결집해 친이 세력을 만드는 등 새로운 당권싸움이 시작됐던 시기이기도 하다.
2012년 2월, 집권 후반기에 들어 MB 정부 국정 지지율이 20%대로 하락하면서 당의 쇄신을 위해 19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면서 보수세력은 15년 이상 대표 색으로 써오던 푸른색을 과감하게 붉은 색으로 바꿨다.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명을 변경하며 푸른색을 가져가며 현재 더불어민주당까지 푸른색을 사용하고 있다. 현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또한 붉은색 로고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6. 당가
(1절) 나라를 책임질 우리는 하나 자유와 정의 넘치는 통일한국 만드세 미래 위한 횃불 들고 함께 나아가자 (후렴) 민족의 꿈을 이루는 새희망 한나라당 국민과 하나되어 사랑받는 한나라당 (2절) 헌신과 봉사의 열정 모아서 희망찬 미래 향하여 우리 두 손 잡았네 21세기 통일한국 함께 열어가요 |
한나라당의 당가는 민주노동당 당가 같이 너무 운동권 느낌이 크지 않는 데다가, 민주통합당과 국민의당 같이 지나치게 가볍지 않아 중장년층 지지자에게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이후 1차 개명한 정당인 새누리당 당가가 동요 만도 못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7.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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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전신
한나라당의 전신은 1990년 1월에 창당된 민주자유당(민자당)이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총재로 있던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야당이던 통일민주당(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의 이른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것. 특히 신민주공화당의 전신인 민주공화당은 1963년 박정희가 창당했고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은 그 기반을 일부 흡수하였기 때문에, 한나라당을 깔 때 뿌리가 군사정권 시기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이라는 공격이 많은 편이다. 다만 YS가 집권한 후엔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공화계와 민정계가 가차없이 축출당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정계는 절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떨어져 나간 공화계와 민정계가 3당 합당에 버금가는 DJPT연합을 통해서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공헌했다.어찌 됐든 민자당은 1992년 말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성공하지만, 2년여 지난 1995년 초 김종필이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떨어져 나가고 그 해 말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와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구설수에 오른다. 결국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는 139석을 얻으며 상당히 선전한다.
7.2.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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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87년 | 1990년 | 1997년 | |
통일민주당 분당 | 3당 합당 | DJP 연합 | 신한국당-통합민주당 합당 | |
<rowcolor=#ffffff> 2007년 | 2015년 | 2016년 | 2018년 | |
열린우리당 분당 | 통합진보당 3자 합당 |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 새누리당 분당 | |
<rowcolor=#ffffff> 2018년 | 2019년 | 2020년 | ||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 | 바른미래당 분당 | 미래통합당 창당 | 민생당 창당 | |
<rowcolor=#ffffff> 2022년 | 2023년 | 2024년 | ||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 | 제3지대 신당론 | 정의당 분당 | 국민의힘 분당 | |
<rowcolor=#ffffff> 2024년 | ||||
개혁신당-한국의희망 합당 | 새로운미래-미래대연합 통합 | 더불어민주당 분당 | 개혁신당 3자 통합 |
통합민주당은 조순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지지율의 부진으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신한국당은 15대 대선 국면이던 1997년 11월 21일에는 통합민주당[22]과 합당하면서,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조순을 총재로 임명하면서 한나라당을 창당하였다.[23]
7.3. ' 잃어버린 10년'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의 연대(일명 DJP연합)에 패하면서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겪게 되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 당시 161석의 과반 의석을 점하던 한나라당은 철새들의 국민회의 및 자민련으로의 이적으로 과반의석을 상실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상도동계와 민정계, 청구동계 중 반(反) 이회창 계열이 탈당했다. 그래도 친 이회창 세력의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 덕분에 제1당을 유지했고 통합민주당 출신까지 합해서는 안정된 의석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예상[24]을 뒤엎고 과반에 육박하는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승리하게 된다. 물론 민정계,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이 은퇴, 공천 탈락, 낙선하였지만 다른 의원들의 상당수가 당선되며 한나라당 내 민정계와 상도동계, 통합민주당 계열 원로 및 중진들의 세는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진 인사들이 재선에 성공하고 오세훈, 원희룡과 같은 향후 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인물들이 이 시기에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당시 민정계는 15대 총선보다 더 세가 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를 과시하였다. 당시 한나라당에 남아 있던 민정계 정치인은 총 49명이었다. 당시 자민련이나 새천년민주당 세력까지 합치면까지 합하면 당시 국회 내에 남아있던 민정계와 공화계는 총 62명이었다. 비록 제15대 국회 때보다 더 세가 줄었지만, 국회 내에서 민정계와 공화계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일부 의원들이 당선 무효 또는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 직을 사퇴하거나 잃은 뒤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고, 연이어 정치 신인들이 탄생하거나 재선에 성공했고, 중진들과 원로들도 복귀했다. 또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국회의원들이 한나라당으로 입당하며 의석이 최대 161석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으나, 같은 해 치러진 16대 대선에서는 패했다. 이미 15대 대선부터 알려진 1996년 안풍사건, 1997년 세풍사건, 총풍 사건의 "3풍"도 여전했지만 1997년 대선 말 기승을 부린 병풍 사건과 2002년 차떼기 의혹이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이후 한나라당은 개혁 소장파들이 탈당했다. 이회창은 16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런 흑역사를 뒤로 하고 천막당사 시절을 거쳐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재 보 선 승리로 다시 힘을 비축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지금도 한나라당 내부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당의 일부에서는 '천막당사 시절을 생각하라!'는 투의 반성조의 발언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당 내부에서도 충분히 반성을 하고 되새겨 볼만한 과거였던 듯하다. 특히 2006년 지선의 경우 한나라당이 광역단체장 16곳 중 전라도와 제주특별자치도[29]를 제외한 12곳을 휩쓸고 기초단체장 155곳을 쓸어가며 압승했고, 광역비례 정당득표도 53.9%로 과반이다. 이후의 재보선에서도 연전연승했고 2007년 4.26 재보선 패배[30]를 빼면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반전'으로, 이 천막당사의 임대료는 오히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당사 건물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천막 당사를 설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 임대료로 약 4,200만 원을 지불하였는데, 총 기간은 50일 정도였다. 반면 당시 열린우리당 당사의 건물 임대료는 월 2,500만 원선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으며, 부지 임대에 대한 서울특별시의 특혜 논란도 약간 있었다(당시 서울 시장들이 모두 한나라당이었기도 했다).
7.4.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2007년 17대 대선 경선 당시 찍힌 사진으로, 사진 속 인물들은 왼쪽부터 이명박, 원희룡, 박근혜, 홍준표이다. |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검역 문제로 인한 2008년 촛불시위는 한나라당에 치명상을 입혔다. 2007년 17대 대선과 허니문 선거였던 2008년 18대 총선에서 압승하며 일본의 자유민주당처럼 일당 독주 시대를 열 것만 같았던 # 한나라당은 총선 한 달도 되지 않아 지지율이 폭락하며 전성기가 조기 종료되고 말았다. 이후 당내에서 2007년 경선부터 갈라진 자유선진당과 친박(박근혜)계열, 그리고 친이(이명박)세력의 내부 다툼[35] 등으로 인해 2009년 4.29 재보선에서 5곳의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단 한곳에서도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에 구본철, 윤두환, 김일윤이 의원직을 잃었는데 한나라당이 차지하였던 2곳은 민주당에 빼앗기고, 그래도 친박 계열 무소속이 당선된 경주는 보수텃밭을 사수했다. 당시 그나마 살아온 보수성향 정치인도 친박 성향이었던 정수성이었다.
같은 해 10.28 재보선 역시 5곳의 선거구에서 치러졌는데, 박희태 대표가 스스로의 정치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양산시에 셀프공천을 시전하면서 뒷말이 많았다. 그래서 정몽준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게 된다. 수도권 2곳을 민주당에 내주고, 텃밭인 경남 양산시(당시 단일 선거구.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갑과 을로 분구)에서도 고전 끝에 신승[36]을 거두는 등, 야당에 3:2로 패배하여 심상찮은 민심을 겪어야 했다.[37] 당사자들은 재보궐선거에서 이만하면 잘했다고 자축했으나, 한나라당이 확실히 승리한 곳은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강원도 강릉시가 유일했다. 그래도 권성동이 정치에 진출했고, 박희태 전 대표가 복귀하며 이재오의 공백으로 흔들리던 친이계가 규합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계열 정당에서는 허범도가 의원직을 잃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을 주축으로 혼전이 예상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추진했고,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세종시 문제 등 몇가지 이슈로 인해 한나라당이 야당이었던 2006년보다는 고전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전 터진 천안함 사태로 북풍을 몰아 어느 정도 우세할 것으로 내다보았지만 선거는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여당은 선거 전까지는 상당한 우세를 자신하였으나, 막상 선거가 끝나고 보니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서울특별시장마저 한명숙 후보가 상당히 따라왔으며[38][39] 부동의 텃밭이라고 생각했던 경상남도[40]와 충청남도, 강원도[41]에서도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 후보에게 패해버렸을 정도다. 2030 유권자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2배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특히 만년 텃밭 경남에서의 패배는 당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문수가 겨우 수성한 경기도지사도 심상정이 부재자 투표 이후에 사퇴하지 않았더라면 유시민에게 패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패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당 내 내분이 다시 불이 붙었다. 정몽준 대표는 참패의 책임을 지면서 사퇴하고 김무성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다시 계파갈등의 늪에 빠지게 되는데 경남지사를 비롯해 경선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져버린 친이 계열은 패배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친박도 역시 박근혜 전 대표가 친박 계열 후보들만 지원 유세를 해줬는데도 친박은 단체장 자리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이후 친박은 선거 직후인 6월 29일 자유선진당, 민주당과 함께 세종시의 행정도시화를 중단하는 수정안을 부결시켰으며, 이로서 친박이 여당내 야당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결국 친이/친박 모두 대선 후보 지지율 동반 하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 부결에도 불구하고, 당시만 해도 현직 대통령의 힘이 아직 강한 집권 3년차였다. 2010년 7월 14일의 제11차 전당대회에서도 안상수, 나경원, 정두언 등 대표적인 친이계 의원들이 대거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42] 친박은 서병수 딱 한 명으로, 그나마도 꼴찌였다. 무당파나 개혁계 후보들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7.28 재보선에서 승리하며 친이계의 좌장격인 이재오가 돌아왔고, 이상권, 한기호, 윤진식, 김호연 등의 정치 신인들도 탄생했다. 이후 잠깐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오르게 된다.
하지만 친이계는 나름대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차기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불만(소위 "진노")만을 샀다. 이른바 보온병, 자연산 실언 논란과 함께 안상수 전 대표의 이미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김태호 의원[43]을 제외한 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했으며, 심지어 민주당 측 이광재 강원도지사의 비리 문제로 터진 강원도지사 재보궐선거에서조차 또 패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에서 거물인 강재섭 전 대표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에게 나가떨어진 것[44][45]역시 치명타였다. 그나마 의의를 두자면 야권에서 떠오르던 친노계 유시민이 타격을 입은 것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46]
결국 안상수 전 대표는 사퇴했으며, 한나라당은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했다.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하다가 당대표에 홍준표 의원을 선출하며 당을 일신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고 한 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성공 등으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다시 올랐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이 발의한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하여 그야말로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율(33.3%에 미치지 못하는 25.8%) 미달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약속대로 서울시장을 사퇴하게 되었다.[47]
이 여파로 홍준표 체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최고위원이던 나경원 전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20~40대 유권자들의 이반과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 등으로 인하여 여론이 나빠졌고, 결국 야권 단일후보인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1:1 정면 대결에서 패배하였다.[48]
그 여파는 커서, 당 내부에서는 백가쟁명식으로 당 쇄신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선관위 DDOS 공격 사건이 벌어지자 당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여당은 그럼에도 남경필 최고위원이 위원장인 외교통상통일위원회 - 국회 본 회의에서 한미 FTA 강행 처리를 주도했으나 이 역시 야당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49]
결국 12월 8일 남경필, 원희룡(당시 소장파), 유승민(당시 친박) 최고위원이 사퇴한 데 이어, 9일에는 홍준표 전 대표까지 사퇴하면서 최고위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관련 기사. 이에 결국 박근혜가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말, 비대위가 설치되어서 위원장에 박근혜가 임명되었으며, 각종 쇄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폭로되면서[50] 한나라당이란 브랜드 자체의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관련 기사. 결국 상황을 타개하고자 2012년 2월, 미래희망연대와 합당함과 동시에 당의 이름을 바꿔 재결성하게 되었고, 기본적인 당헌과 규칙, 당원들은 새누리당이 승계하게 된다.
7.5. 새누리당 - 박근혜 정부
2012년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후 한나라당은 친박 성향의 미래희망연대와 합당하였고 이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19대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새누리당은 과반을 차지하면서 승리를 거뒀고 18대 대선에 대비해서 대통합 행보를 내세우며 호남 출신의 동교동계를 포섭하고 선진통일당과 합당하며, 이회창 전 대선후보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민주화하고 제6공화국 최초로 대선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달성하였다.2014년에는 6회 지선에서 여론조사상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정국이 돌변하면서 무승부격의 결과를 얻었다. 이후 제 3차 전당대회를 통해서 김무성을 대표로, 유승민을 원내대표로 하는 새누리당의 2대 지도부가 선출된 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총 15개 의석 중 무려 11개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애초에 기존 의석이 새누리당 당선인이 많았던 지역이긴 하지만 민주당계 텃밭이던 호남에서 이정현 후보가 당선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정미경, 이정현이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홍철호, 이종배, 배덕광, 김용남, 유의동, 김제식 등의 정치신인들도 탄생했다.
2015년에는 2016년에 있을 20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과 비박간의 계파갈등이 이뤄지는 가운데 2016년 3월 24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가 터졌고 그 결과 20대 총선에서 122석을 획득하며 원내 2당이 되면서 기존의 보수정당 최악의 선거결과라는 17대 총선의 121석 다음의 참패를 겪었다. 그리고 2016년 10월 24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면서 당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으며 총선 전부터 있었던 계파갈등의 불신까지 더해져서 당을 분당 위기로 몰고갔다. 여기에 더해서 12월 3일에는 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
한편 정계 개편도 동시에 이뤄졌는데 2016년 11월 22일에는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와 김용태 전 의원이 탈당하였으며 12월 27일에는 29명의 의원이 탈당하였다. 그리하여 99석의 원내 2당으로 주저앉았다.
7.6. 자유한국당 - 암흑기의 시작
2016년 봄, 20대 총선에서 122석을 얻으면서 노무현 탄핵 정국 이후에 치러진 17대 총선의 121석 다음으로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원내 2당이 되면서 패배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까지 겪으면서 새누리당은 분당되었고, 2017년에는 분당 세력에 의해서 중도우파 성향의 바른정당이 창당된 뒤에 자유한국당으로 2번째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93석까지 당이 쪼그라든 상태에서 3월 10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여당의 지위를 잃고 '구(舊) 여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대선 직전인 5월 6일에는 바른정당에서 탈당해온 국회의원 12명과 정갑윤 전 의원이 복당하여 107석의 원내 제2당이 되었다.이후 2017년 5월 9일에 치러진 19대 대선에서는 항간의 예상을 깨고 홍준표 대선후보가 24.03%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하며 실버크로스를 달성했고, 21.41%를 차지한 3위 안철수와 6.76%를 차지한 4위 유승민을 앞질렀다. 동년 11월 4일에는 홍준표 전 대표에 의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명되었다. 11월 8일에는 바른정당 탈당사태로 바른정당에서 8명의 의원이 탈당해 이튿날 복당하였고, 11월 13일 주호영 의원이 추가 탈당해 다음 날 복당하였다. 같은 날 홍준표 전 대표는 "건국 시대의 상징인 이승만, 조국 근대화의 상징인 박정희, 민주화 시대의 상징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겠다."고 말하고 난 후에 서울 여의도 당사를 비롯해서 전국의 시도당에다가 초상화를 걸었다. 여기에 대해서 자유한국당 전 대변인 김철근은 이승만과 박정희, 김영삼은 모두 전임자를 극복하고 역사적인 발전을 꾀했으며, 자유한국당이 1990년도 3당 합당을 통해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을 기리는 게 맞는다고 밝혔다.
2018년 1월에는 김세연 전 의원과 박인숙 전 의원이 바른정당을 탈당하고 복당하였으며, 2월 9일에는 늘푸른한국당의 이재오 전 대표가 당을 해산하고 자유한국당에 흡수 통합하였다. 3월 16일에는 당 소속인 김기현 전 울산시장이 압수수색을 당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은 문재인 정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으로 불거졌다. 5월 6일에는 강길부 전 의원이 탈당하였고, 6월 13일 치러진 7회 지선에서는 17개의 광역자치단체장 중에서는 겨우 2석[51]밖에 획득하지 못하는 최악의 참패를 겪었는데, 이는 홍준표 전 대표의 온갖 막말이 누적된 결과라는 지적을 받았다. 참고로 광역의원 비례대표 합산 전국 득표율에서는 27.76%를 차지했는데, 이것은 더불어민주당이 획득한 51.42%의 득표율에 한참 미치지 못한 참패였다. 이로 인해서 TK 자민련이라는 비판이 공공연히 나왔다. 같은 날 치러진 12곳을 두고 벌어진 재보궐 선거에서도 송언석 의원의 1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해갔다.
2018년 6월 14일 홍준표 전 대표는 지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6월 20일에는 8선 의원인 친박계 좌장 서청원 전 의원이 국민의 분노를 자초한 책임을 지겠다며 탈당했다. 7월 16일에는 친노계 출신인 김병준 전 국민대학교 교수가 혁신비대위원장을 맡았다. 11월 29일에는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에 입당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복당하였다. 12월에는 바른미래당 소속이었던 이학재 전 의원과 류성걸 의원이 바른미래당을 탈당한 후 복당하였다. 김병준 비대위 시절에는 홍준표 전 대표 시절보다 지지율이 상승하여 리얼미터 기준으로 25%대까지 상승하였다.
2019년 2월 8일에는 2019년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이 일어났고 2월 중후반에 전당대회를 앞두고 태극기 세력이 대거 유입하여 친박이라고 평가받는 황교안 전 총리가 압도적으로 당대표 후보 지지율 1위를 받으며 당대표가 되었다.[52] 이후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30%를 회복하면서 비토층을 다시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며, 패스트트랙 무렵을 전후해서 리얼미터 기준 중도층 지지율도 민주당을 거의 따라잡아서 5월 2주 주간지지율 기준 오차범위까지 따라잡았다.
2019년 7월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가 이루어지고, 이에 반발하여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이뤄질 정도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거세진 상황에서, 이번 수출 통제의 잘못은 일본보다 문재인 정부 측이 더 크다고 주장하는 등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와 정반대되는 행보를 보였고, 그 결과 지지율이 추락하였다.
2019년 8월 말부터 조국 사태로 인해 그 동안의 불상사들을 만회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잡았고, 조국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들과 부정적인 여론조사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결국 조국 임명을 강행하면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크게 올라 부활하였다. 2019년 10월에는 개천절과 한글날에 이뤄진 대규모 광화문 집회의 영향으로 인해서 민주당과의 지지율 차이는 오차범위로 좁혀졌다. 거기다 문재인이 임명하고 여당이 옹호했던 윤석열 전 총장의 지휘로 전방위적으로 조국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펼쳐지면서 조국에 대한 여러가지 의혹들이[53] 드러났다.
그러나 2019년 10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셀프표창장 사태 및 인재 영입 1호로 박찬주 전 장군을 영입하려다가 각종 망언과 갑질 옹호로 거세게 역풍을 맞으면서 지지율은 다시 조국 사태 이전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당이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황교안 전 대표의 영수회담이 거절되자 황교안 전 대표의 8일의 단식 이후 국내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1월 말부터 필리버스터를 하겠다고 한 것이 민식이법과 관련돼서 부정적인 여론을 얻은데다가 황교안 전 대표의 청년들이 52시간보다 더 일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겹치면서 또다시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2019년 12월에는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서 모든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거는 등 제대로 된 입법활동을 보여주기는커녕 협의조차 거부하는 태도로 여론이 많이 식었다. 이후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들이 여당과 야합하여서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하였다.
2020년 1월에는 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대응으로 위성정당 비례자유한국당의 창당을 공식화했다. 또 입당 보류자의 입당을 전면허용하였으며 여러 국회의원들이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그 와중에 자유한국당과 새로운 보수당이 '보수통합 추진위원회'와 신당 결성에 합의하였으며 추진위원장에는 박형준이 선정되었다. 이것은 황교안 전 대표가 유승민이 제시한 '보수재건 3원칙'[54]을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2020년 2월 9일, 바른미래당을 탈당해 재창당한 구 바른정당 세력인 새로운보수당의 핵심 중진인 유승민이 자유한국당과 신당 창당 형식으로 합당을 추진하고, 본인은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2월 13일에는 손학규계에 속했던 이찬열 전 의원이 2006년 탈당한지 13년만에 복당하였고, 새로운보수당과 전진당과의 신설합당이 의결되면서 16일, 미래통합당의 창당이 공식화되었다.
여담으로 2016년부터 시작된 보수정당의 암흑기는 미래통합당 시기인 2020년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4년간의 보수정당 암흑기는 미래통합당이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교체하고 쇄신을 시작하고 치러진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2024년 12월 이후부터는 다시 암흑기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8. 계파 갈등
의 계파 분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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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이 | 중립/소장파 | 친박 | |||
친이 중진 이재오 최병국 안경률 맹형규 이윤성 |
친이 소장파 김기현 정두언 임해규 안형환 김영우 박형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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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계 정창화 이한동 김기배 정재철 김종하 신경식 |
친박 서청원 김기춘 홍사덕 강창희 현경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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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회 이상득 이병석 임태희 박창달 박승호 장제원 |
범친이 안상수 나경원 심재철 홍준표 박진 정의화 전여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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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계 이원복 정진석 김동욱 강재섭 |
청구동계 김용환 노철래 정우택 이종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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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별 계파 ( 기타 진보정당 · 우리 · 한나라 · 선진 · 극우정당) | ||||||
계파 역사 ( 민주당계 · 보수정당) |
선행 조직이었던 민주자유당[55]이나 신한국당[56] 역시 계파간 갈등이 심하긴 했지만 이회창계와 반이회창계가 다투던 전반기를 지나서 한나라당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계파 간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서 공천학살과 경선/공천 불복 후 탈당이 밥먹듯 일어났다. 민주자유당의 계파갈등이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3자 대결이었다면 한나라당의 계파갈등은 그 유명한 친이 vs 친박의 양자구도였기 때문.
사실 계파간 갈등이 이렇게까지 심했던 이유는 한나라당이 가진 폭넓은 정치적 스팩트럼이 주 원인이다. 당시 한나라당 vs 민주당계 정당의 구도는 영호남간의 지역구도가 강해서 한나라당에는 극우적 인물, 중도 우파 성향의 인물 뿐 아니라 개혁적인 인사들까지 여럿 포진해 있었고 다양한 정치 스팩트럼을 가진 이들이 모이다보니 자연히 계파갈등이 심해진 것.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 적극 가담한 한나라당은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최병렬이 당대표직을 물러나고, 박근혜가 당대표에 선출되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지휘하게 되었다. 당초 개헌저지선까지 넘겨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선거에서 121석이라는 호재를 얻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르고 당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박근혜의 급부상과 함께 한나라당 내 세대교체가 일어나, 기존 민정계를 필두로 한 강경 보수 인사들은 박근혜를 중심으로 뭉쳐 친박을 이루었고 남은 상도동계, 민주계, 소장파 등 온건 보수 인사들은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쳐 친이계를 이루었다. 이 시기부터 한나라당 내 세력 싸움은 친이 VS 친박 구도로 재편되어 격렬한 계파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이는 17대 대선, 그리고 18대 총선을 거치며 폭발. 대선에서 승리하며 당권을 장악한 친이계가 친박계의 서청원, 김무성 등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고 이에 반발한 친박계가 친박연대, 친박 무소속 연대를 만들어서 이른바 이재오, 이방호 낙선운동을 벌이며 경남 사천에서 이방호 후보가 강기갑에게 밀려 낙선하고 이재오 역시 은평구에서 낙선했다가 보궐선거로 다시 돌아오는 등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홍준표[57][58] 대표 체제가 무너지고 이명박 정부 말기로 들어서면서 마땅한 대권주자[59]를 세우지 못한 친이계는 자연스레 당권을 빼앗겼고 박근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친이계를 사실상 궤멸시키면서 계파간 갈등 역시 친이 vs 친박에서 친박 vs 비박으로 변화되었다.
9. 역대 전당대회
자세한 내용은 한나라당/역대 전당대회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역대 당대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95da); min-height: 31px;" {{{#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총재와 대표위원 병행 | |||||||||
초대 총재 조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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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표위원 이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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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 ||||||||||
권한대행 이기택 |
2대 이회창 |
권한대행 강창성 |
3대 이회창 |
권한대행 박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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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대표최고위원 | |||||||||
2대 서청원 |
권한대행 박희태 |
3대 최병렬 |
4대 박근혜 |
|||||||
권한대행 김덕룡 |
5대 박근혜 |
권한대행 김영선 |
6대 강재섭 |
|||||||
7대 박희태 |
8대 정몽준 |
9대 안상수 |
비대위 정의화 |
|||||||
10대 홍준표 |
권한대행 나경원 |
권한대행 황우여 |
비대위 박근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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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width: 10%; text-align: left" |
}}}}}}}}}}}}}}}}}} |
아래 대수는 총재, 비대위, 권한대행 등을 가리지 않고 매겨져 있다.
10.1. 총재
- 1대: 조순(1997.11.21~1998.8.5)[60]
- 권한대행: 이기택(1998.8.5~1998.8.30)
- 2대: 이회창(1998.8.30~2000.5.22)[61]
- 권한대행: 강창성(2000.5.22~2000.5.31)
- 3대: 이회창(2000.5.31~2002.4.1)
- 권한대행: 박관용(2002.4.1~2002.5.13)[62]
10.2. 대표위원
10.3. 대표최고위원
- 2대: 서청원(2002.5.13~2003.1.29)[65][66][67]
- 권한대행: 박희태(2003.1.30~2003.6.25)[68]
- 3대: 최병렬(2003.6.26~2004.3.22)[69][70]
- 4대: 박근혜(2004.3.23~2004.7.4)[71][72]
- 권한대행: 김덕룡(2004.7.5~2004.7.18)[73]
- 5대: 박근혜(2004.7.19~ 2006.6.15)[74]
- 권한대행: 김영선(2006.6.15~2006.7.10)[75]
- 6대: 강재섭(2006.7.11~2008.7.2)[76][77][78]
- 7대: 박희태(2008.7.3~2009.9.6)[79][80][81]
- 8대: 정몽준(2009.9.6~2010.6.3)[82][83]
- 비상대책위원장: 김무성(2010.6.3~2010.7.12)[84]
- 9대: 안상수(2010.7.13~2011.5.8)[85][86]
- 비상대책위원장: 정의화(2011.5.8~2011.7.3)[87]
- 10대: 홍준표(2011.7.3~2011.12.9)[88][89][90]
- 권한대행: 나경원(2011.12.9~2011.12.11)
- 권한대행: 황우여(2011.12.11~2011.12.18)[91]
- 비상대책위원장: 박근혜(2011.12.18~2012.2.13)[92]
10.4. 원내총무/원내대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95da); min-height: 31px;" {{{#fff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원내총무 | ||||
초대 목요상 |
제2대 이상득 |
제3대 하순봉 |
제4대 박희태 |
제5대 이부영 |
|
제6대 정창화 |
제7대 이재오 |
제8대 이규택 |
제9대 홍사덕 |
권한대행 정의화 |
|
원내대표 | |||||
제10대 김덕룡 |
제11대 강재섭 |
제12대 이재오 |
제13대 김형오 |
제14대 안상수 |
|
제15대 홍준표 |
제16대 안상수 |
제17대 김무성 |
제18대 황우여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width: 10%; text-align: left;" |
}}}}}}}}}}}}}}}}}} |
- 1대: 목요상(1997.11.21~1997.12.21)
- 2대: 이상득(1997.12.22~1998.04.19)
- 3대: 하순봉(1998.04.20~1998.8.27)
- 4대: 박희태(1998.8.28~1999.1.14)
- 5대: 이부영(1999.1.15 ~ 2000.6.1)
- 6대: 정창화(2000.6.2 ~ 2001.5.13)
- 7대: 이재오(2001.5.14 ~ 2002.5.16)
- 8대: 이규택(2002.5.17~ 2003.6.29)
- 9대: 홍사덕(2003.6.30~ 2004.5.18)[93]
- 10대: 김덕룡(2004.5.19~2005.3.4)[94]
- 11대: 강재섭(2005.3.5~2006.1.11)
- 12대: 이재오(2006.1.12~2006.7.12)
- 13대: 김형오(2006.7.12~2007.8.26)
- 14대: 안상수(2007.8.27~2008.5.17)
- 15대: 홍준표(2008.5.18~2009.5.20)
- 16대: 안상수(2009.5.21~2010.5.3)
- 17대: 김무성(2010.5.4~2011.5.5)
- 18대: 황우여(2011.5.6~2012.2.13)[95]
11.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식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10 |
이명박 (1941 ~ ) |
17 |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
2007년 대선 직선 48.67% |
한나라당 (2008 ~ 12) 새누리당 (2012 ~ 13) |
12. 역대 선거 결과
12.1. 대통령 선거
연도 | 선거명 | 후보자 | 득표수 (득표율) | 결과 |
1997년 | 15대 | 이회창 | 9,935,718 (38.74%) | 낙선 (2위) |
2002년 | 16대 | 11,443,297 (46.58%) | 낙선 (2위) | |
2007년 | 17대 | 이명박 | 11,492,389 (48.67%) | 당선 (1위) |
12.2. 국회의원 선거
연도 | 선거명 | 지역구 (비율) | 비례대표 (득표율) | 총 의석 (비율) | 결과 |
2000년 | 16대 | 112 / 227 (49.3%) | 21 / 46 (39.0%) | 133 / 273 (48.7%) | 원내 1당 |
2004년 | 17대 | 100 / 243 (41.2%) | 21 / 56 (35.8%) | 121 / 299 (40.5%) | 원내 2당 |
2008년 | 18대 | 131 / 245 (53.5%) | 22 / 54 (37.5%) | 153 / 299 (51.2%) | 단독 과반 |
12.3. 지방선거
연도 | 선거명 | 광역단체장 (비율) | 기초단체장 (비율) | 광역의원 (비율) | 기초의원 (비율) |
1998년 | 2회 | 6 / 16 (37.5%) | 74 / 232 (31.9%) | 244 / 616 (39.6%) | |
2002년 | 3회 | 11 / 16 (68.8%) | 140 / 232 (60.3%) | 467 / 682 (68.5%) | |
2006년 | 4회 | 12 / 16 (75.0%) | 155 / 230 (67.4%) | 557 / 733 (76.0%) | 1,621 / 2,888 (56.1%) |
2010년 | 5회 | 6 / 16 (37.5%) | 82 / 228 (36.0%) | 287 / 762 (37.7%) | 1,247 / 2,888 (43.2%) |
12.4. 재보궐선거
연도 | 국회의원 | 광역단체장 | 기초단체장 | 광역의원 | 기초의원 |
1997년 12월 | 1 / 1 | ||||
1998년 4월 | 4 /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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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 0 / 1 | 8 / 11 | 4 / 11 | 6 / 19 |
1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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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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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4) |
14. 여담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당 이름을 패러디한 듯한 핵나라당이 창당준비위원회가 나오기도 했다.[105] 핵나라당의 대표는 '정희원'[106]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공보가 뭔가 허경영스러워서(...) 인터넷에서 유머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분이 돌아온다!! 핵.나.라.당!홍준표는 자신이 신한국당 시절부터 몸담아 온 보수정당의 이름 중 가장 잘 지은 이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자유한국당, 국민의힘 등 보수정당의 새 당명이 발표될 때마다 한나라당의 작명 센스와 비교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온 걸 보면 이름에 대한 호평이 많다.
대표적인 멸칭으로는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차떼기당', 어감상의 이유로 사용된 '딴나라당'이 있다.[107][108]
장기간 보수정당의 구심점으로 군림해 온 까닭에 당명이 변경된 후에도 국민의힘 같은 보수정당을 "한나라당"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다.
15.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 · 포괄 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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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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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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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당은 2006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2년이다.
[2]
창당은 2013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4년이다.
[3]
공교롭게도 이날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4]
천막당사, 염창동 당사를 거쳐 복귀 한 당사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잇따라 배출한 정치명당이라 불렸다고 한다.
[5]
1997~2004
[6]
2004~2012
[7]
정당법인은 일본법상 개념이다.
[8]
걸어온 길(연혁) 참조. 물론 실질적인 가장 오래된 뿌리는
민주자유당이다.
[9]
민주당계 정부 10년 간 동일한 명칭의 야당 제1당으로 존속했으니 당명이 밥 먹듯이 바뀌는 건 물론, 분당도 잦았던 여당에 비해 존재감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득표력 역시 강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에 약간 미달한 1당을 차지했으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거두었다는 의석도 120석을 사수하였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는 말할 것도 없는 과반 여당이었다. 지선은 자그마치 4회를 참여했는데, 야당이 된 직후에 치러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부진했으나 영남권+강원 지역을 지켰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연달아 호남을 제외한 전국을 휩쓰는 압승을 거두었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부진하였으나, 그래도
서울특별시장,
경기도지사를 포함한 6곳에서 승리하였다.
[10]
13년이 지난 뒤에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후신인
국민의힘 20대 지지율, 수도권 지역 지지율은 한나라당 시절을 재현하게 된다.
[11]
민주화 이전의 최장수 정당명은 17년 동안 존속한
민주공화당이다.
[12]
2020년 2월
미래통합당이 신설 합당을 통해 창당되면서 한나라당이라는 비법인사단은 해산되었다. 정당은 법인이 아니라 비법인사단이다.
[13]
2024년 7월 기준 도메인이 제3자에게 팔렸다.
[14]
남경필,
정병국,
원희룡,
유승민,
오세훈,
권영세,
이재오,
나경원,
이혜훈,
주호영 등.
[15]
단 서청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 모두 박근혜의 곁을 떠나 비박계가 되었다.
[16]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2004년 한나라당 대표에 오른 후에도 당명을 선진한국당으로 교체하려고 했으나 당내 의원 반발로 중단했다.
[17]
대표적인 예로 2002년
개혁국민정당에 합류한
김원웅 전 의원과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며 탈당한 이른바 독수리 5형제(김부겸,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김영춘).
[18]
#
[19]
외신에서는 후속 정당인
새누리당은 한국어 발음을 옮긴 Saenuri Party를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한나라당은 영어로 번역한 Grand National Party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이 보였다.
[20]
물론 구자체를 고집하는 소수의 보수파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이런 표기는 안 쓴다고 봐도 무방하다.
[21]
중세 국어에서 보통 '하다'는 앞뒤 문맥에 따라 '크다(big)'와 '~한 행동을 하다(do)' 두 가지 단어로 쓰였다. 일례로
대전(大田)의 순우리말인 '한밭' 역시 '큰 밭'이라는 뜻이다.
[22]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김대중이 한축을 이루던 당이
민주당이었는데 1995년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떨어져 나갔고 이 때의 잔류 세력이 민주당 간판을 지키다가 신한국당과 합당한 것. 현재의 민주당은 엄밀히 말하면
새정치국민회의가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 이어진 정당이다.
[23]
초대 총재인 조순이 작명했는데, 순우리말이라 처음에는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쓰는데 저항이 많았다 한다.
[24]
중진들, 것도 대개 영남권 중진들이 대거 탈락하는 공천 파동과 수도권의 강한 민주당세 때문에 고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선거 직전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실시를 발표하는 바람에 보수표가 대결집해 과반에서 고작 4석 모자란 133석을 얻었다.
[25]
영등포구 의사당로 18 아시아원빌딩. 민자당 시절인 1994년부터 계획하여 한나라당이 결성된 이후 완공된 당사로, 기존에 건축된 건물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사로만 사용하기 위해 민자당에서 지은 당사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자부할 정도로 큰 규모에다가, 총재 집무실에 샤워실까지 있었던 까닭에 호화당사라는 비판을 들었다. 이 9층짜리 당사는 대림그룹에서 인수했다가 2012년에 현대캐피탈로 소유주가 바뀌었고 리모델링을 거쳐 외관도 크게 달라졌다.
[26]
차떼기 사건으로 인한 부채를 갚기 위한다는 명목.
[27]
도로명주소는 공항대로 541.
[28]
2019년 이후 해당 건물은 철거되었고 LG전자는 (구)화진화장품 부지로 이전했다.
[29]
제주는 친야 성향의
김태환의 당선 덕분에 범야권 13석이 되었다.
[30]
엄밀히 말해서 패배도 아니었다. 범보수, 범야권 무소속 후보들이 선전한 선거였기 때문. 당시 열린우리당은 여기서도 참패를 하였다.
[31]
이를 드러내듯 이명박 후보의 슬로건이 "실천하는 경제대통령"과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 혹은 "국민 성공시대"였다.
[32]
원래는 180석 이상을 바라보았으나,
친박과 선진당의 선전으로 153석 밖에 거두지 못한다. 망해도 153석이었으니, 당시 한나라당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다.
[33]
이후
홍사덕 등
친박연대 지역구 당선인들이 복당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180석 남짓의 초거대 여당이 된다. 거기에 합당만 안 했을 뿐이지 친한나라당 성향을 보이는 8명의
친박연대 비례대표를 더하고 가끔씩 한나라당에 동조하던
자유선진당 18석을 더하면 개헌선을 넘는 초거대 보수진영이었다. 이는 18대 국회 말기에 통과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의석이기도 했다.
[34]
강재섭 전 대표는 본인의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서구 공천을 받아 출마할 예정이었으나, 공천 파동의 책임을 지고 불출마했고, 대신 이종현
경북대학교
교수가 공천을 받았다.
[35]
주로 이재오계와 이상득계의 다툼이었다. 원외인사였던 이재오보다는 대통령의 친형인데다가 현직 국회의원 신분이던 이상득이 더 강했다는 것이 중론.
[36]
양산시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양수 전 의원이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13% 이상의 득표율을 거두면서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야권 분열 덕택에
박희태 후보가 겨우 이겼다.
[37]
그러나 민주당 역시 텃밭인
전주시
덕진구에서
무소속 출마한
정동영 전 후보와 무소속 연합을 이룬
신건 후보(전주
완산구 갑)에게 참패해 이미지를 크게 구겼다.
[38]
개표 결과 0.60% 26,000여표 차이었다. 거의 모든 자치구에서 이겼으나 끝내
강남3구의 몰표를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
강남
3
개 선거구에서만 126,930표 차이가 나왔다. 참고로 다른 22개 선거구에서는 10,000표 이상의 차이가 난곳은 불과 3곳이며 35,245표 차의
관악구를 제외하면 11,000표 정도차이 였다.
[39]
또 서울시장 본선과는 별개로 선거 이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구청장과 시의회 의석은
민주당이 싹 쓸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세훈이 뭔 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민주당 출신 구청장들이 반발해댔고 시의회는 오세훈이 추진하려는 정책에 맞는 입법이 심의조차 잘 안 돼서 뭘 제대로 할 수 있던 것이 없었다. 반대로 민주당이 추진하려는 조례에 대해 오세훈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민주당에게 그걸 상쇄시킬 정도의 의석이 있었기에 민주당이 원하는 입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오세훈이 2선 임기 당시 식물시장이라 불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키였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추진해 캐삭빵을 했던 게 아니었다.
[40]
김혁규 -
김태호로 이어지는 두 명의 도지사가 4선을 한 곳이었다.
[41]
북한과 가깝고, 영동 지방 특유의 보수적 정서 때문에 친한나라당 성향이 강한 곳이다.
[42]
홍준표 최고위원은 범친이였지 순수한 친이라고 보기엔 거리감이 있었다.
[43]
1998년 37살의 최연소 경남도의원, 2002년 41살의 최연소 거창군수를 거쳐서,
2004년 6.5 재보선 당시 43살으로 최연소로
경남도지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경남지사 3선을 포기하고 국무총리 입각을 노렸으나 청문회에서 낙마했던 상황.
[44]
이 곳은 공천 파동의 영향이 컸다.
정운찬 전 총리와 강재섭 전 대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놓쳐버린 경우.
[45]
강재섭 전 대표의 '15년 분당토박이' 포지션 자처와 박근혜의 지원거부 등이 패배의 요인이었다.
[46]
이후 통합진보당 창당과 함께 유시민의 정치적 생명은 저물어갔다.
[47]
홍준표 대표는 '사실상 승리' 운운하면서 오 시장을 달랬지만 끝내 독단적으로 시장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홍 대표가 격분했다는 후문.
[48]
박근혜 전 대표가 선거를 돕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49]
민주당에게도 타격이 되었는데 막겠다고 공언한 한미 FTA가 통과되었기 때문.
[50]
현재는 잘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사실상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의장직에서 사퇴했을 정도로 여파가 컸었다.
[51]
대구광역시장,
경상북도지사.
[52]
참고로 한국 갤럽이 조사한 전체 여론의 자유한국당 당대표 후보 선호도에서, 유일하게 탄핵을 인정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1위를 차지했다.
[53]
조국 사태/딸 조민 관련 의혹,
조국 사태/학교법인 웅동학원 관련 논란,
조국 사태/코링크PE 사모펀드 투자약정 논란 문서 참조.
[54]
박 전 대통령 탄핵 찬반 책임 면제ㆍ개혁보수 노선 설정ㆍ흡수 통합이 아닌 제3의 정당 창당.
[55]
민주계 vs 공화계 vs 민정계와의 갈등. 이 결과 결국 민주자유당에서 분당되어
자유민주연합이 창당되었다.
[56]
민주계 vs 민정계의 계파 갈등
[57]
"독고다이 정치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친이계의 지원을 업어 당대표로 취임하는 등 엄연히 친이계의 일부로 보는 것이 맞다.
[58]
이명박 전 대통령 탄생에 기여한 정두언을 친이계로 안 보듯 이 때 홍준표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다. BBK 저격수임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대신 환경부장관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홍준표는 이 당시 친박에 가까운 무계파로 분류되었으며, 당대표도 친이계가 아닌 사실상 친박계의 묵인으로 될 수 있었다.
#
[59]
김문수,
김태호,
임태희 등이 경선에 출마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박근혜의 대항마가 될 수 없었다. 인지도나 정치 기반부터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0]
구 민주당 계열의 수장이다. 그러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 김윤환과 이기택 등 중진들이 공천탈락을 당하자 자신의 종로 지역구 공천을 반납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지만 민국당이 망해서 정계에서 은퇴했다.
[61]
당시 한나라당의 총재로 재임했으며, 16대 총선에서는 김윤환, 이기택, 한승수 등의 거물을 줄줄이 숙청하기도 했다. 이후 2002년 대선출마 시
당청분리 선언을 하여 당 총재직과 전국구 의원(1번)직을 사퇴했다.
[62]
총재직 폐지 및 대표최고위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변경.
[63]
2000년 한나라당 탈당 후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 역임. 2007년 복당 후 상임고문 위촉
[64]
1997~1998년에는 총재직과 대표직이 별도로 존재.
[65]
당시 5선 지역구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갑)을 맡고있었다. 이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66]
이한동-서청원간의 공백기가 길고 대표위원과 대표최고위원의 역할이 어느 정도 달라서 따로 서술
[67]
집단지도체제에서의 대표이다. 당시 최고의원은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이었다.
[68]
서청원 전 대표 퇴진에 따른 승계.
[69]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여파와 불법대선자금 의혹으로 수감된 서청원, 최돈웅 등의 석방가결안 날치기 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의 역풍으로 사퇴했다.
[70]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 대표이다.
[71]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소방수 격으로 선출된 대표이다.
[72]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 대표이다.
[73]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
[74]
당시 최고위원은 박근혜, 원희룡, 김영선, 이강두, 이규택.
[75]
박근혜 대표가 커터칼로 피습당하면서 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서 박근혜 대표가 당규에 따라서 사임한 것도 있다.
[76]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대표 퇴임 후 정계 은퇴했다.
[77]
이 당시 박근혜는 당권장악을 위해서 민정계 출신의 강재섭을 지원했고 이명박은 자신의 최측근인 이재오를 지원했다. 결국 강재섭이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친이계로 갈아타는 바람에...
[78]
당시 최고위원은 강재섭, 이재오, 강창희, 전여옥, 정형근 이었다.
[79]
경남 양산시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로 사직
[80]
당시 최고위원은 박희태, 정몽준,허태열, 공성진, 박순자(여성)이었다.
[81]
당시 친박계는 허태열을 지원했으나 친이계가 주류가 된 상황이었기에 6인회의 좌장인 박희태가 유리했다.
[82]
지방선거 패배로 사퇴.
[83]
박희태의 사퇴로 차순위인 정몽준이 승계받았다.
[84]
당시 당 원내대표였다.
[85]
보온병을 폭탄으로 착각한 그 분 맞다. 인천시장을 지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며, 민선6기 경남 창원시 시장을 지냈다.
[86]
당시 최고위원은 안상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서병수이다.
[87]
국회부의장직을 겸임했다.
[88]
이후 2017년 7월,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의 대표를 맡게 된다.
[89]
당시 최고위원은 홍준표, 유승민, 나경원, 남경필, 원희룡이 당선.
[90]
이 당시 친이계는 원희룡을 밀었다. 홍준표는 당시 계파색이 옅은 사람이라 특정 지지층이 없었다. 이 때문에 홍준표는 원희룡에 반대하는 캐릭터로 친박계의 2등표(당시엔 1인 2표제였다.)를 모으는 전략을 사용했다.
# 그래서 딱히 존재감이 없던 유승민이 오로지 친박계의 힘으로 2등을 차지하고, 홍준표가 당대표가 된 데 반해, 친이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원희룡이 4등에 그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화됐다.
'한나라당, 계파 해체 신경전‥친이계 '허탈''
[91]
원내대표 겸임. 이후 새누리당으로 바뀌고서 당대표.
[92]
새누리당으로 당명 개정.
[93]
홍사덕 전 의원까지가 원내총무 칭호 사용.
[94]
김덕룡 전 의원부터가 원내대표 칭호 사용.
[95]
당명 개정 이후에도 원내대표직 유임. 2012년 5월 8일에 공식 임기 종료.
[A]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
[A]
[A]
[A]
[A]
[A]
[A]
[A]
[A]
[105]
참고로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끈질기게 창준위를 구성하고 있다.
[106]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대전광역시
중구에
신정치개혁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07]
실제로 2006년 말에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어느 고등학교의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문제 지문에 언급되기도 했다! 이에
전여옥 전 의원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108]
이게 어감상 조금 와전되어서
딴따라당이라는 멸칭도 통했다.
[A]
반 이회창 세력이 탈당하여 2000년 창당, 2004년 해산 이후 다시 한나라당으로 개별 합류.
[B]
박근혜가
이회창과의 갈등을 계기로 2002년 탈당하여 창당하고 동년 11월 해산 이후 한나라당으로 개별 합류.
[111]
2001년 1월 해산 이후 일괄 개별 합류
[112]
2002년,
김원웅 등.
[B]
[114]
2003년,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
이부영,
김부겸 등.
[A]
[116]
이태희 등.
[117]
2004년
[118]
2007년
[119]
2006년
[120]
2007년,
이수성 등.
[121]
2008년
[122]
2007년,
이용휘 등.
[C]
친박계가 2008년에 탈당하여 창당하고, 2012년에 미래희망연대 시절에 한나라당으로 흡수 합당.
[124]
2011년,
윤영오 등.
[C]
[126]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