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계 친김대중계 | DJ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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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AA7B> 형성 | <colbgcolor=#ffffff,#1f2023> 1971년 | |
해체 |
2003년(공식) 2004년(실질적)[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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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 | 김대중 | |
정치적 이념 |
진보적 보수주의[2] 중도개혁주의 자유민주주의 보수자유주의 온건보수(일부) 사회자유주의(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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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이념 |
민주적 시장경제[3] 신자유주의 제3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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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인 |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박지원 한광옥 김상현 정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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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직계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표현. 김대중이 정치인 생활을 하며 대부분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에서 거주했기에[4] 동교동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권노갑, 이해찬, 임채정, 김원기, 문희상이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2. 명칭의 유래
동교동계나 상도동계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갑론을박이 있지만[5], 보통 대중적으로 유행한건 1980년대 신군부( 하나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김대중, 김영삼과 그 직계 정치인들을 모조리 정치활동규제로 묶어서 제도정치권에서 추방하면서부터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렇게 졸지에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재야 세력들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나섰는데, 독재정권의 언론통제에 묶여서 김대중, 김영삼의 이름을 언론에서 직접적으로 쓰기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이리저리 돌려서 쓰다가 각자의 서울시 내 자택 소재지에서 따온 상도동계, 동교동계라는 명칭이 등장했다는 것.[6] 아니면 신군부 이전처럼 손학규계, 박지원계 등 중심 인물의 성명+계의 형태로 회귀해 쓰기도 한다.3. 상세
이들은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 및 재야민주화운동세력과 연대해서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 대선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고 통일민주당을 뛰쳐나와 독자적으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결국 양김 분열의 결과로 대선 결과 노태우가 어부지리 당선되었고,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자[7] 독재 세력에 맞서 협력하던 양 세력은 이젠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를 비난하는 사이가 된다.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가 부산, 경남 이른바 PK를 지지기반으로 했다면 김대중이 이끄는 동교동계는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했기에 지역 감정도 끼어들게 된다. 1992년 대선에선 김영삼에게 정권을 내줬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 속에 DJP연합으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이루어낸다.[8]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권재창출을 위해서 각개약진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권노갑을 비롯한 상당수 동교동계 주류들은 이인제를 지원했고, 동교동계의 또 다른 실력자 한화갑은 스스로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9] 하지만 양쪽 다 노사모를 앞세운 노무현 바람에 나가떨어진다.(...)[10]
다만 당시 민주당계 당권은 여전히 동교동계가 쥐고 있었기에, 민주당 내 비주류였던 노무현은 김대중의 암묵적인 호응에도 불구하고[11] 동교동계와는 이후에도 사이가 좀처럼 회복되질 못한다. 대선 경선 승리 이후에도 '김영삼 시계 사건'[12]과 2002년 지방선거 참패로 민주당 내 노무현 불신론이 떠오르자, 동교동계 일부는 아예 후단협[13]에 가담해서 대선후보 교체를 주장[14]하였고, 동교동계의 원로들도 이들의 행동을 방관하면서 당 내분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갈등을 임시로 봉합하고 대선에 나섰지만 동교동계는 선거운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대선은 노무현 후보 캠프와 개혁당/ 노사모 위주로 치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노무현의 기적적인 대선승리 직후부터 다시 불거지기 시작해서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2003년 정치개혁을 둘러싼 논의에서 대폭발한다.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등이 주도하는 범노무현계가 신당창당 수준의 과감한 정치개혁을 주장하자, 당내 기득권을 쥐고 있던 동교동계가 강력반발하였고, 여기에 대북송금 특검 문제로[15] 기존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과 호남 민심이 악화되자 동교동계와 범노무현계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16] 친노 세력이 2003년 11월에 한나라당 개혁파들을 끌어모으고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해 나가자, 동교동계가 주도하던 민주당은 한나라당, 자민련과 손을 잡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몰락했다.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는 동안 새천년민주당은 겨우 9석을 얻었다.
17대 총선 이후 권노갑 등 동교동계 1세대들은 정치일선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한화갑 등은 여전히 민주당을 지키다가[17] 열린우리당의 급속한 몰락으로[18] 2007년 17대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 과정에서 친노세력과 다시 손을 잡았지만 감정의 앙금은 여전했다. 결국 계속 당내에서 충돌하다가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동교동계 중 상당수가 안철수와 박지원[19] 등 일부 호남계 의원들이 연합한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그래도 다수는 이후 다시 민주당계로 돌아오긴 하는데, 진짜 일부는 보수정당으로 넘어가[20] 한광옥처럼 탄핵 직전 당시 박근혜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한다.
사실 동교동계가 본디 보수우파 성향의 정치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민주당보다 국민의힘 계열 정당과 생각을 같이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박지원 등이 변화한 민주당의 노선에 유달리 잘 적응한 편이라고 봐야 할 수도 있다. 동교동계의 대표 주자인 조윤형이 1989년 한 발언을 생각해보자. 당시 평화민주당은 당세 확장을 위해 재야 진보 세력을 적극적으로 영입한 상황이었다. 당시 조윤형은 인터뷰를 통해 "지금까지는 당의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 다시 보수 세력이 고개를 들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렇듯 동교동계는 언제나 보수주의 성향이 강했고, 민주당의 좌클릭을 우려했다. 김대중 역시 생전에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온건 보수주의자를 자처했다. 거기다 일본에 적대적인 친노-친문-친명과는 다르게 동교동계는 일본에 우호적인 편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대통령 임기 동안 일본과 가깝게 지냈다.[21]
이러한 박근혜 정부까지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통해 대략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과 17대 총선의 대몰락 이후로 사실상 단일한 정치세력으로서의 동교동계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워낙 오래전부터 활동하던 사람들이라 동교동계의 핵심인사들 대다수는 이미 고령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이고, 현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도 대부분 고령의 나이. 일례로 미디어에서 동교동계에서 나이가 적은 편으로 분류되는 설훈 전 의원이 이미 60대 후반이다. 주로 1970~1980년대 김대중을 따라서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인사들이 18대 총선 이후로 미디어를 통해 동교동계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인사들 외에도 국민의 정부 시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라 정치에 입문한 인사들도 상당히 많지만 그들 스스로 '동교동계'로 칭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6회 지선 당시 당선되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고양시장 최성이 그 예이다.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구 동교동계 인사들은 전보다 각 당으로 흩어지는 양상을 심하게 드러내었다. 보수정당에 있던 일부 인사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자유한국당에 잔류했다. 한편,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이후 동교동계가 가장 많이 있었던 국민의당에서는 2017년 말엽, 안철수 대표가 추진한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과 관한 심한 이견차로 결국 국민의당 내의 대다수 동교동계는 민주평화당으로 떨어져나갔다. 박주선 국회 부의장, 이동섭 의원을 포함한 일부 인사들만이 안철수 대표와 같이 통합을 찬성하며 신설합당을 통해 바른미래당에 합류했다. 그 이후에도 바른미래당이 보수계의 이탈등으로 사분오열되고, 민주평화당 또한 사분오열되며 대안신당이 창당되는 등의 과정을 거쳤다가, 다시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 민주당계 적자인 더불어민주당에 합류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모아 신당인 민생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민생당 내의 동교동계 인사들이 전부 낙선되어 동교동계가 더이상 정치권에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2010년대 이러한 정치격변의 결과로 2020년대 현직에 활동하는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주로 더불어민주당에 분포되어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에는 문희상, 설훈, 김한정[22], 이훈, 최경환 등이 있다.[23]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두 정당의 이념이 비슷해보여 두 정당의 동교동계 인사들간의 이념 차이가 없어보일 수도 있으나 따지고 보면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24] 예를 들어 더불어민주당 내 동교동계는 노무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친노 성향을 가진 동교동계이고, 민생당 내 동교동계는 비노, 비문 성향을 가진 동교동계이다.
어떻게 보면 과거 한국 정치세력의 한계를 말년에 온몸으로 보여줬던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핵심 가신으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세우는 일등공신들이었고 김대중에게 정치적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인사들이 다수 있었다. 그렇게 끝이 났다면 후대의 모범도 되었을테니 좋았겠지만, 레임덕이 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친노와 정면으로 맞붙었고, 안방인 호남 지역을 경선과정에서 대부분 내어주며 완패했다. 상기했듯 박지원 전 비서실장을 통해 노무현 후보를 흔들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밝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단협 사태 등 친노와 갈등이 계속되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탄핵 시도의 역풍을 정면으로 맞으며 지지 기반이 비슷했던 친노에게 동교동계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기며 단일세력으로는 완벽하게 무너졌다. 어떻게 보면 동교동계의 몰락은 하나의 인물을 중심으로 보스정치를 하던 구시대 정치가 중심 인물이 사라지면 보여주는 한계를 한국 정치사에서 보여준 셈이다.
3.1. 민주당계 정당 내 동교동계
애초에 동교동계가 김대중 전 대통령 중심의 계파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당계의 거물이다보니 대부분의 동교동계는 민주당계 정당에 있다.3.1.1. 더불어민주당 내 동교동계
더불어민주당에는 2010년대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이후 잔류한 동교동계 인물들이 속하는데, 원로 정치인 그룹으로는 김원기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임채정 상임고문, 박성수 전 동작구의회 부의장, 문희상 상임고문[25], 이해찬 상임고문[26]이 있다.현역급 정치인으로는 이강래 전 의원[27], 김한정 전 의원, 윤호중 의원 등이 있다. 김대중의 막내아들인 김홍걸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있다가, 21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더불어시민당에서 당선되었다. 경북 성주군 출신 국토교통수석전문위원인 김우철 국회정책연구위원도[28] 더불어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이강래는 정동영계로, 김한정은 무계파, 윤호중은 이재명계(친명) 중진으로 분류가 된다.
민생당에서 돌아온 원로들은 동교동계 맏형으로 유명한 권노갑, 정대철 상임고문[29], 이훈평 전 의원, 최경환 전 의원 등이 있다. 이들은 국민의당 합류를 위해 탈당한 이후 약 6년여 만인 2022년 1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탈당자 대사면 정책에 따라 복당하고 이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3.1.2. 새미래민주당 내 동교동계
설훈 전 의원, 이낙연 전 국무총리[30], 이석현 전 의원, 이훈 전 의원이 있다.특이점이라면 이들은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우파적 성향이 있으며 당 주류인 이재명계와 사이가 험악하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을 거쳤거나, 구민주계 인사들과 달리 반노, 반문 성향이 아니라는 점도 특이점이다.[31]
3.2. 보수정당 내 동교동계
동교동계가 과거 민주당계 정당의 주축이었던 시기에는 전체 계파가 민주당 계열에 있었지만, 200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계파 해체선언과 김 전 대통령의 서거, 계파 갈등 등으로 동교동계는 각자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흩어지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일부 동교동계 인물들이 보수 정당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18대 대선과 20대 대선을 앞두고 나타났는데, 18대 대선 때는 김대중이 직접적으로 탄압받았던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후보 쪽에 붙은 것에 대해, 이희호 여사가 박근혜를 지지한 동교동계 소수를 변절자라고 하기도 했다. #3.2.1. 국민의힘 내 동교동계
한광옥[32], 안동선, 이윤수 전 의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친 DJ 인사였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노무현 후보의 대선승리 직후, 민주당계 정당의 주도권을 잃었다. 이후 친노가 중심이 된 민주통합당에 반발하여 한광옥 주도로 정통민주당을 만들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이들은 모두 2012년 18대 대선에서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했었으며 한광옥 전 의원은 아예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이 중 한광옥은 탄핵 직전 박근혜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33]그리고 바른미래당에 참여했던 의원 중에 일부는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으로 넘어왔고 일부는 탈당후 20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으로 넘어온 의원들이 있다. 친안으로도 분류되는 김영환, 이동섭, 장성민, 김동철, 박주선 전 의원이 이 부류에 속한다. 또한 손학규계로도 분류되었던 임재훈 전 의원은 민생당에 당적이 있었으나, 미래통합당에서 주로 활동했고[34] 20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민생당을 탈당하고 미래통합당에 입당했다.
3.3. 무소속 동교동계
송석찬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4. 구성원
4.1. 주요 인물[35]
- 권노갑: 김대중의 최측근으로 동교동계의 좌장. 하지만 한보사태에 연루되거나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는 김근태에게 정치자금을 주는 행위를 하여 구태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 김병오
- 김영배
- 김영진
- 김옥두
- 김한정: 동교동계의 막내 중 하나이다.
- 김희철: 전직 국회의원(18대). 한광옥의 최측근으로 관악구청장 재선을 한 바가 있다.
- 남궁진
- 노승환
- 문동환
- 문희상: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 민영삼
- 박광태
- 박상천: 전직 5선 국회의원(13~16, 18대). 국민의 정부 시절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 박실: 전직 3선 국회의원(12~14대). 이후 국회사무총장 역임.
- 박양수
- 박지원: 현직 5선 국회의원(14, 18~20대, 22대). 국민의 정부 시절에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 박정훈
- 배기선: 정계 은퇴 후 설훈 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다.
- 배기운
- 설훈
- 송석찬
- 신순범
- 신창현
- 안동선
- 유승희
- 유종근
- 윤철상
- 윤호중: 동교동계의 막내 중 하나이다.
- 이석현
- 이용희: 전직 6선 국회의원. 60년대부터 인연이 되어 'DJ의 오른팔'로 불리기도 했으며,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앞두고 있었던 '여야 8인 정치회담'에 DJ계를 대표해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김대중에게 대선 불출마를 권유한 적도 있는 등 가신 그룹에는 속하지 않는다. 열린우리당과 자유선진당에 몸담기도 했다. #
- 이윤수
- 이훈: 동교동계의 막내 중 하나이다.
- 이해찬
- 임채정
- 장성민: 전직 초선 국회의원(16대). 동교동을 드나들며 재택비서를 지냈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16대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고 이후 구 민주계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다가 장성민의 시사탱크 진행을 기점으로 우경화되었다. 현재는 보수진영 인사에 가깝다.
- 장영달
- 정균환
- 조세형
- 조순형: 형 조윤형과 같이 상도동계였지만, 조윤형은 1988년에, 조순형은 1990년 3당 합당을 기점으로 상도동계를 탈퇴하고 동교동계에 합류했다.
- 조윤형
- 최재승
- 한광옥: 전직 4선 국회의원으로, 김대중 대통령 임기 중반에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다. 18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못 받으면서 완전히 밀리기 시작했고, 정통민주당 창당과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 입당을 통해 민주당계 정당과 완전히 척을 진다.
- 한영애
- 한화갑: 권노갑과 더불어 양갑으로 불리던 전직 4선 국회의원.
- 허경만
4.2. 범 동교동계
- 김상현 - 민추협과 동교동계를 만든 장본인이자 범동교동계의 수장으로 김대중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전부터 김대중을 따랐고, 김대중이 군사정권으로부터 각종 탄압을 받아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동안 외적으로 김대중을 대리하고 동교동계의 민추협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양갑이나 김옥두는 김대중의 비서에 불과했으나 김상현은 이미 3선 의원으로 위상이 한참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8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단독 출마를 선택하자 본인은 통일민주당에 잔류해 YS를 지지했다가 새정치국민회의에 와서야 다시 김대중에 합류했다. 이로인해 범 동교동계로 분류된다. 정계 은퇴 이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재직하다 2018년 4월 18일 작고.
- 김원길 - 국민의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2002년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 김종완 - 김대중과 민주당 시절부터 오랜 기간동안 가까이 지내 왔으나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될 때 따라가지 않고 잔류하면서 동교동계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 김중권 - 본디 노태우 정부 청와대에서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민정계 정치인으로 15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로 넘어와 국민의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하였다.
- 류청 - 신민당 시절부터 김대중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13대 총선 때 장남 류훈근이 공천에서 탈락하자 결별하였다.
- 박세경
- 박영록 - 김종완과 마찬가지로 김대중과 오랜 기간동안 가까운 사이였지만 1992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하면서 결별한다.
- 엄창록 - 김대중 캠프의 선거공학자로 71년 대선 직전까지 같이 일했으나 의문의 실종사건 이후 두번 다시 김대중을 만나지 않았다.
- 오탄 - 정계 입문 당시에는 김대중 및 동교동계 인사들과 가까왔으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에서 탈락한 데다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멀어졌다.
- 정대철 - 정대철 前 의원은 한때 당 총재선거에서 김상현과 연합하여 DJ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던터라 범 동교동계로 간주되는 일이 있다. 부친인 정일형 박사 때부터 김대중과 인연이 있다. #
- 조연하 - 신민당 시절부터 동교동계에 속했지만 통일민주당 시절 동교동계와 갈라섰다.
- 홍영기 -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하면서 갈라섰다.
4.3. DJ키즈
동교동계 직계처럼 신민당, 신한민주당, 평화민주당 때부터 김대중을 따른게 아닌 김대중에 의해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된 인사들은 DJ키즈라고 부른다.권칠승, 김동철, 김민석, 김영주, 김영환, 김운용, 김진표, 김한길, 김홍걸, 김효석, 노무현[36], 박병석, 박선숙, 박주선, 박준영, 서철모, 송영길, 신기남, 신낙균, 신영대, 심재권, 안민석, 우상호, 유성엽, 이강래, 이낙연, 이동섭, 이인영, 이종걸, 임재훈, 임종석, 정동영, 정상원, 정세균, 조배숙, 조은희, 주승용, 천정배, 최경환, 추미애, 한명숙, 한병도, 함승희, 황장수, 황희 등이 있다.
대다수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지만 일부 국민의힘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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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을 앞둔 2003년 1월, 퇴임 후 국내 정치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동교동계라는 말이 나와서도 안되고 동교동계라는 모임이 있어서도 안되며, 이를 이용해서도 안된다라며 사실상 동교동계의 해체를 지시한 바 있다.
기사 그러나 계파라는 게 수장이 해체를 선언한다고 그 즉시 해체되는 건 아니다 보니, 동교동계는 구심점을 잃었음에도 정계에 남아있던 이들을 중심으로 그럭저럭 계파로서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제17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이 궤멸당하면서 동교동계는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이후 이들은
정동영계,
박지원계,
김한길계 등으로 분열되었으며 일부는 아예 보수정당으로 갈아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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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무려 1960년대부터 꾸준히 자신이 온건 보수, 진보적 보수임을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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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라이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상도동에서만 살았던 것과 다르게 김대중은 동교동을 떠난 적이 있다. 1995년,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동교동 자택을 장남
김홍일 전 의원에게 넘기고 자택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당시에는 일산구 일산동)으로 옮겨 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퇴임 이후 동교동으로 돌아왔고, 동교동 자택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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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가 아닌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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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거주지+계 명칭은 임시방편이고 직관적이지도 않아서였는지, 신군부 퇴진 이후에 등장한 정치세력들은
친노,
친이,
친박,
친문,
친낙,
친명 등과 같이 친+중심적 인물의 성씨 혹은 성씨가 겹칠 경우 가운데나 마지막 글자에서 따와 짓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허나 이에 대해 외국처럼 연속성이 있는 이름이나 이념, 사상 등을 나타내는 계파명도 아니고, 단순히 한 인물과의 친함 정도를 따져 계파명을 따진다는 것부터가 한국 언론들의 수준 낮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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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도 권유를 받았지만4당합당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거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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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김대중은 최초의 그리고 아직까진 유일한 호남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다.
[9]
애초에 야당 시절부터 권노갑과 한화갑 소위 양갑 사이의 갈등은 유명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김대중이 직접 당과 동교동계를 통제하면서 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말이 되자 정계은퇴를 앞둔 김대중이 이제 알아서들 하라며 손을 놔버리자 동교동계가 양갑을 따라서 바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 훗날 권노갑은 게속해서 민주당계 진영에 머물렀지만, 한화갑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를 지지하며 보수 진영 쪽으로 넘어갔다.
[10]
권노갑이
김근태에게 정치자금을 준 것이 결정타였다.
[11]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이 계속 노무현 후보를 흔들어대는 동교동계 중진들을 만나서 대통령의 뜻이니 그러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거의 먹히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엄격하게 보자면,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 개입한 것이기 때문에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는데, 박지원이 훗날 이제 공소시효가 다 끝나서 하는 이야기라면서 언론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사실이다.
[12]
노무현은 대선 후보 확정 이후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는데, 이때 YS가 선물로 줬던 손목시계를 차고 와 내보이면서 "총재님 생각날 때는 꼭 차고 다녔다"면서 YS와의 인연을 강조했고 면담이 끝난 뒤 YS는 대문 앞까지 나와 노 후보를 배웅했다. 그런데 이 'YS 시계' 사건은 노 후보에게 역풍으로 작용했다. "3당 합당은 야합", "3김 시대 청산"을 외치던 정치인 노무현의 이미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사건으로 지지자들은 받아들였다. 특히 부산,경남권에 여전한 영향력이 있는 YS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
지역주의를 부활시킨다"는 역풍이 불었다.
새천년민주당 지지자들의 비판은 물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도 "옛날로 돌아가 정략적인 합종연횡을 통해 정권을 따자는 것은 이뤄질 수도 없고, 국민이 호응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YS와 노 후보를 싸잡아 비판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전 의원도 "YS 시계를 보이며 애교떨고 아양떨면서 YS가 마치 민주당 공천권을 쥐고 있는 듯 얘기하는 것은 보통 코미디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급기야 노무현발 정계개편 시나리오까지 회자되면서 노 후보 지지율은 급락했고, 민주당 내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의 싹을 키웠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노 후보는 이후 방송기자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YS)과의 회동이 지지도 하락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발언했는데, YS는 이를 듣고 격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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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당시 월드컵 4강 붐을 타고 지지율이 오르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사실상 정몽준으로의 후보교체)를 요구하며 노무현 후보 사퇴를 주장하던 새천년민주당 의원 그룹이다. 참고로 정몽준 전 의원 역시 당시엔 DJ정부를 돕는 등 친 민주당 행보를 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4]
동교동계뿐만 아니라 DJP연합과 국민의 정부 출범과정에서 유입된 상당수 당내 보수파들도 후단협으로 결집했다. 그리고 이때를 계기로 이인제,
안동선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서
자유민주연합으로 갔고,
원유철,
전용학,
강성구는
한나라당으로 간다.
[15]
이때 양갑과는 별개의 라인이었던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구속된다. 수감생활 도중에 녹내장이 악화되어 실명위기에 처했었으나, 구속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다.
[16]
이 과정에서
난닝구라는 멸칭이 생긴다. 헌데 재미있는 점은 정작 해체를 선언했다지만 그래도 수장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떻게든 갈등을 봉합하고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 측의 손을 들어주려 했다는 것.
[17]
김홍일과 한화갑은 2006년 말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18]
김홍업이 이 과정에서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들어갔다. 다만,
박상천은 이인제와 같이 대선을 완주하고 구 민주계의 주주가 되어
통합민주당으로 들어간다.
[19]
2010년대 당권을 놓고 친문과 극한 갈등을 벌이다 결국 문재인에게 당권을 뺏기자 탈당한다. (참고로 김대중이 사망 직전 영호남 세력 분열되지 말고 절대 뭉쳐야 한다고 유언을 남길 때 문재인과 같이 있던 인물이라 탈당 당시 더 욕을 먹기도 했다.) 다만 이후엔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장도 지내는 등 다시 사이가 회복된다.
[20]
이미 2012년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다.
[21]
다만 당시는 일본의 장기 경제불황 및
일본의 우경화가 불거지기 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김대중조차도 퇴임 후 말년에는 점차 불거지고 있던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강연에서 우려했다.
[22]
이 사람은 DJ의 비서진 출신인지라 동교동 라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23]
박지원의 경우 2020년 국정원장에 발탁되면서 탈당하였다.
[24]
이 차이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25]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에 정무수석으로 임명되었으나, 이강래와 자리를 맞바꿔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갔다.
[26]
이해찬 의원의 경우에는 출신은
평화민주당으로 동교동계가 맞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DJ 선거캠프에서 중역이었으며,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장관,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퇴임 후에도
동교동을 찾아가 김대중을 깎듯이 예우하고 사이가 좋았다.
박지원에 따르면 김대중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해찬을 대선후보로 추천했다고 한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2WM6f9KnoHBEDRvHNac4dWg2PrVvgHNpBhFe337UHMmBECp3AeoPRHC9eWoK2LU2nl&id=100002799990016&mibextid=Nif5oz
[27]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에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문희상과 자리를 맞바꿔 정무수석으로 갔다.
[28]
설훈, 김한정 국회의원 두 사람과 함께 김홍걸 교수의 더민주 행을 제안한 3인방으로 꼽힌다.
[29]
하지만 정대철은 김상현과 더불어 동교동 원로들과 사이가 썩 좋지는 않다. 1997년에 당 총재,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상현과 연합하여 DJ 견제를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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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DJ 키즈 출신이지만,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돕고, 노무현 탄핵을 반대하였으며, 국민의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하는 등 주류 동교동계와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문재인이 2012년 대선 낙선 후 이낙연에게 태도보수를 배우거나 문재인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것을 계기로 친문으로 분류되며 친문 내에서 이낙연계라는 독자적인 계파를 조직하였다.
[31]
다만 설훈은 열린우리당 분당 과정에서 친노와 갈라섰고, 이후에도 동교동계 + 민평련(김근태계)이라는 계파를 빼면 민주당 주류와 입장을 달리하던 인사였다.
[32]
현재는 정계에서 은퇴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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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개로
류준상 전 의원의 경우 김대중 당선 이전인 1997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현재까지 자유한국당 당적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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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이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는 탈당 시 의원직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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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키즈를 제외한 동교동계 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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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DJ는
DJP 연합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꼬마민주당의 'PK 4인방' 영입에 나섰는데, 이중 한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 노무현은 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DJ 캠프에서 김대중을 도왔고,
국민의 정부에서
새천년민주당 부총재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김대중을 청와대에 불러 깍듯이 예우했다. 이렇듯이
친노,
친문과도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김대중도
노무현의 추도사에서 노무현이
햇볕정책이나 복지정책을 계승했다고 안 한 것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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