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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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2003.2.25.~2008.2.24.) |
통합민주당
(2008.2.25.~2008.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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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2008.7.6.~2011.12.16.) |
대통합민주신당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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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합민주당 | → |
민주당 (당명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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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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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주인연합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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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선택 (개별 합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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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민주당 | |
<colbgcolor=#f5f5f5,#2d2f34> 한문명 | 統合民主黨 |
영문명 | United Democratic Party |
등록 약칭 | 민주당 |
고유번호 | 107-82-12235 |
등록일 | 2008년 2월 18일[1] |
당명 변경 | 2008년 7월 6일 ( 민주당) |
해산일 | 2011년 12월 23일 ( 민주통합당으로 신설합당) |
통합한 정당 |
[[대통합민주신당| ( 2008년 2월 17일 신설합당)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버드나루로14길 25 ( 당산동) |
공동대표 | 손학규 / 4선 (14-16·18대) |
박상천 / 5선 (13-16·18대) | |
원내대표 | 김효석 / 3선 (16-18대) |
사무총장 | 김영주 / 초선 (17대) |
정책위의장 | 최인기 / 재선 (17·18대) |
의석 수 |
81석 / 299석
|
당 색 |
초록색 (#419639)
|
홈페이지 |
|
2008년 7월 6일 기준 |
[clearfix]
1. 개요
|
통합민주당 출범 행사 |
2008년 2월 17일, 대통합민주신당(구 열린우리당)과 민주당(구 새천년민주당)이 18대 총선을 앞두고 합당해 창당된 정당. 2008년 7월 6일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으로의 당명변경을 결정하였다.
2. 성향
"통합민주당은 강령과 정책비전을 통해 서민, 중산층,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정당 실현과 민주 번영 통합 평화 환경을 5대 기본가치로 하는 정당을 자임".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책임, 더 넓은 배려’와 ‘소외계층의 보호' 주장.
3. 당가
나가자 통합민주당! 나가자 통합민주당! 언제나 국민들과 함께 어디서나 국민들과 함께 희망의 깃발을 들어라 우리는 통합민주당이다 국민의 소중한 뜻으로 국민의 뜨거운 힘으로 승리의 깃발을 들어라 우리는 통합민주당이다 나가자 통합민주당 국민들의 믿음직한 사랑이 되어라 나가자 통합민주당 자랑스런 민주주의 당당하게 지켜라 나가자 통합민주당 살맛나는 대한민국 우리가 만들자 언제나 국민과 함께 가자 통합민주당 |
- 총선을 앞두고 율동곡 형식의 당가를 만들었는데, 민주당(2008년) 때도 약간의 수정만 거쳐 그대로 사용되었고, 민주통합당 창당 이후에도 개사 후 그대로 사용하였다.
4. 역사
4.1. 합당 이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도로 창당된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배출했으나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직후 당내 계파가 운동권 출신 중심의 친노와 동교동계 출신 중심의 비노로 나뉘며 갈등을 빚는다. 결국 2003년 말 친노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돼 새천년민주당은 창당 3년여 만에 분열한다.이후 새천년민주당 잔류 세력은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손을 잡고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헌정 사상 최초의 파국을 거쳤는데 이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민주당계 정당으로는 역대 두 번째로[2] 원내 과반 의석(152석)을 거머쥐며 압승한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꼴랑 9석을 건지는데 그치며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모두 17대 국회에서 대혼란을 겪게 된다. 열린우리당은 다수당이 된 이후에도 혼란 속에 정국 주도권을 잡지 못하며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 사상 최악의 대참패를 기록했고[3] 온갖 이합집산과 김한길계 중심 의원들의 집단 탈당 등 내외의 분열을 거듭한 끝에 와해됐다. 소수 정당이 된 새천년민주당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2석을 따내며 선전했지만 미약한 존재감은 해결하기 어려웠다.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2007년 초부터 중도·민주 세력 대통합(범여권 대통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나락으로 가버린 참여정부의 지지도 때문에 정권 교체 가능성이 커진 만큼 보수 야권 측에서 단일대오를 형성한 한나라당을 대적하기 위해서는[4]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분열된 여권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민주세력 대통합의 첫 단추로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한길이 2007년 5월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하고 6월에는 민주당과 손을 잡고 중도통합민주당을 신설 합당했으나 불과 2개월도 안돼서 김한길계가 당을 깨고 나가는 바람에 중도통합민주당은 도로 민주당으로 돌아가게 된다. 중도통합민주당을 나온 김한길계는 열린우리당 출신 인사와 손학규계 인사들과 함께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게 된다.
범여권 대통합은 주도권 싸움 끝에 사실상 무산됐고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양당 체제로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됐다. 민주신당에서는 당내 최고 파벌을 형성한 정동영이 후보로 나섰으나 이명박에게 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패를 당한다. 더 심각한 것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인제였는데 본선 득표율이 1%에도 못 미치는 안습의 성적을 내고[5] 패퇴했다.
결국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주고서야 야권 통합의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오랜 협상이 오간 끝에 결국 2008년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극적으로 재결합에 성공하며 '통합민주당'으로 거듭났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약 4년 3개월 만에 복구된 셈.
4.2. 18대 총선
18대 총선 공천을 위해 대한변협 회장 출신인 박재승 공천관리위원장을 외부에서 데려왔는데, 전과 기록이 한 차례라도 있는 후보에게는 공천을 안 준다는 원칙을 세움에 따라 역대급 물갈이가 벌어져서 공천관리위원회가 아니라 '공천 특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원칙 덕분에 도봉구 을의 설훈[6]과 성북구 을의 신계륜[7], 중랑구 을의 이상수, 논산시·계룡시·금산군의 안희정, 이인제, 무안군·신안군의 김홍업[8] 등이 출마하지 못 하는 일이 생기고 만다. 이 중에서 설훈, 안희정은 공천 결과에 승복했지만 이상수와 신계륜이 의도치 않게 팀킬을 해서 각각 한나라당 유정현, 김효재[9]에게 당선을 안기는 결과를 맞았다. 게다가 이인제는 한나라당 - 통합민주당 - 친박연대 - 무소속 전직 의원이라는 제법 강한 경쟁구도에서 살아남았다.[10]또한 당내 중진 험지차출론이 고개를 들어서 손학규 대표가 서울 종로에 출마해서 현직 의원인 한나라당 박진과 맞붙었고, 또한 정동영 전 대선후보는 과거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주시 덕진구 대신 서울 동작구 을에 출마했다.[11] 본래 동작 을은 교총 회장 출신의 비례대표 이군현 의원이 공천을 받은 상황이었으나 정동영의 등판소식을 들은 한나라당에서는 울산 동구[12]의 거물인 정몽준을 이곳에 전략 공천시켜 맞불을 놓았다.[13][14][15]
한편 이인제는 논산-계룡-금산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에 반발하며 결국 통합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27.67%(...)를 득표하며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에 복당하지 않았고 한동안 무소속으로 남아 있다가 2011년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이인제는 선진통일당 대표가 되어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의 통합을 주도했고, 이후 계속해서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에 잔류한다.
청주시 전 지역구를 얻는 등[16] 충청북도에서 예상밖으로 선전했으나 수도권에서 뉴타운 바람 때문에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는 바람에 81석으로 참패했다.[17]
하지만 촛불집회 정국의 영향으로 두 달 뒤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선전한다.
2008년 7월 6일 전당대회를 통해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하게 된다.
5. 역대 지도부
5.1. 대표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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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419639> 초대 손학규 박상천 |
}}}}}}}}}}}} |
5.2. 원내대표
원내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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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효석 |
제2대 원혜영 |
}}}}}}}}}}}}}}} |
6. 역대 선거 결과
6.1. 국회의원 선거
연도 | 선거명 | 지역구 (비율) | 비례대표 (득표율) | 총 의석 (비율) | 결과 |
2008년 | 18대 | 66 / 245 (26.9%) | 15 / 54 (27.7%) | 81 / 300 (27.1%) | 원내 2당 |
6.2. 재보궐선거
연도 | 국회의원 | 광역단체장 | 기초단체장 | 광역의원 | 기초의원 |
2008년 6월 | 3 / 9 | 14 / 29 | 6 / 14 |
7. 관련 문서
- 민주통합당 (이름이 비슷하나 민주통합당이 나중에 나온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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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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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2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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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제헌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21 ·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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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월 17일 열린 행사는 정당법상 창당대회가 아니었고, 이에 일부 당원이 무효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서울행정법원은 신설합당은 창당이 없다고 보았다.
서울행정법원 2008. 12. 17. 선고 2008구합19741
[2]
민주당계 정당이 헌정사상 최초로 원내 과반을 획득한 것은
4.19 혁명 직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의
민주당이었다. 이는 민주당의 숙적이었던
자유당이 이승만의 하야 이후 궤멸 수준으로 붕괴한 탓이다.
[3]
16석의 광역자치단체장 중
전라북도지사 1곳만 빼고 나머지 15석을 야당에 내줬다. 특히 텃밭으로 꼽혔던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에서도 시장과 도지사 자리를
민주당에게 내주고 만다.
[4]
당시 야권에는
심대평을 주축으로 한
국민중심당이 있었으나
충청권 지역정당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후
이회창이
자유선진당을 창당하며 보수 세력을 분할하지만 이 당은 17대 대선 이후에 탄생한 정당이다.
[5]
제3지대 후보로 나섰던
창조한국당의 정치 신인
문국현에게도 졌고
민주노동당 출신
권영길에게도 졌다. 최종 순위는 6위.
[6]
병풍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7]
17대 국회의원으로 재직 도중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인해 낙마했다.
[8]
무려 이 쪽인 민주당계의 대부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이었음에도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되는 바람에 출마가 막혔다.
[9]
이쪽은 단일화가 되어도 당선이 안됐다는 의견이 많다. 왜냐하면 통합민주당 + 신계륜의 득표 수를 합쳐도 김효재의 득표 수에 못미치기 때문.
[10]
통합민주당은 열린우리당 당협위원장 출신인
양승숙 예비역 준장을, 한나라당은 김영갑 당협위원장을, 자유선진당은 당협위원장 출신인 신삼철 전
조달청 차장을 공천했으며, 친박연대는
심정수 전
충청남도의회 의원을 공천했고 여기에 자유선진당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한
김범명 전 의원이 가세해서 6명 + 최약체였던 통일교 후보 1명의 경쟁구도가 되었다. 결국 27.67%를 받은 이인제 의원이 5선을 확정지었고, 그 뒤로 한나라당 - 민주당 - 친박연대 - 자유선진당 - 김범명 - 통일교 후보 순으로 결과가 나왔다. 이때 한나라당, 민주당 후보는 선거비용 보전을 받았고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 후보도 선거비용 반액 보전을 받는 수준의 득표를 거뒀다.
[11]
애초에는 동작구 을에는 통합민주당 현직 의원인
이계안이 있었으나 불출마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12]
현대중공업이 울산 동구에 있다. 정몽준은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이자 1980년대에는 현대중공업 회장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
[13]
정몽준이
16대 대선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밤에 갑자기
노무현의 통수를 친 이유는 정동영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노무현이 합동연설하는 자리에서 다른 정치인은 안 올린다고 사전에 약속을 했건만 정동영과
추미애를 올렸고 결국 심기가 불편했던 정몽준이 갑자기 통수를 친 것이다. 물론 정동영 본인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지만 여튼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추미애와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일단 같은 영남계(추미애는 대구 달성군, 정몽준은 부산 동구)에다, 추미애는 여야 상관 안 하고 친화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나쁜 관계는 아니었는데, 하필 정동영이 노무현의 남자로 불렸기 때문에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
[14]
참고로 정몽준의 원래 지역구인 울산 동구는 정몽준의 심복인
안효대가 차지했고 18~19대 재선을 했다. 허나
20대 총선에서는 떨어졌다.
[15]
이군현은 고향인 통영시-고성군으로 내려가서 현역의원인 김명주의 지역구를 뺏어서(...) 출마했고 18~20대에 내리 3선을 했다. 특히 20대 총선에서는 워낙 이군현이 강했던지라 야당과 무소속에서 후보가 없었고 무투표 당선 되었으나, 선거비리로 2018년에 의원직을 잃으며 정치생명이 끝났다.
[16]
남부3군은 자유선진당 이용희 의원이 5선에 성공했는데
이용희 의원이 자유선진당 소속이긴 해도 애초에 출신이 열린우리당이었다. 18대 국회의원 중에서 최고령 의원이었고 19대 총선을 앞두고서 원대복귀했다.
[17]
지역구 전국+비례대표 포함해서 81석이다. 참고로
제20대 총선에서 당시 야권인 민주당계 정당이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으로
분당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수도권 지역구만 82석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