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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2년 10월 22일 | ||
함경도
무산도호부 읍면사[2] (現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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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4년 10월 24일 (향년 92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1가 396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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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116호 | ||
재임기간 | 제3대 부통령 | ||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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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 강릉 함씨[3] | |
부모 | 아버지 함우택, 어머니 원주 변씨 | ||
배우자 |
밀양 손씨(사별)[4] 전주 최씨(사별)[5] 고숙원(삼혼)[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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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남 함병철 차남 함병승 삼남 함병창 사남 함병욱 오남 함병조 육남 함병호 칠남 함병돈 팔남 함요한 구남 함병소 십남 함병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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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법관양성소 (졸업) 평양신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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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 해당 사항 없음 | ||
종교 | 유교 ( 성리학) → 개신교 ( 한국기독교장로회) | ||
자 | 자경(子卿) | ||
호 | 송암(松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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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태영 목사는 청렴결백하고 외유내강한 전형적인 한국인이었고, 우리나라 법조계의 원로로서 지조와 지혜를 지닌 명법관이었을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한 모범적인 지도자였다.
연동교회 100년사 中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연동교회 100년사 中
2. 약력
- 1896.11. 법관양성소 졸업
- 1897.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 1897.9. 한성재판소 검사
- 1898.1. 한성부재판소 검사
- 1898.8. 법부검사 주임관 5등 1급, 고등재판소 검사
- 1898.11. 주임관 4등, 법부검사
- 1899.3. 한성부재판소 주임관 4등 1급
- 1949.11. 제2대 심계원장 (1949.11.24 ~ 1952.7.22)
- 1952.7. 심계원 심계관
- 1952.8.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
- 1954.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한국신학대학교 학장
- 1955.3. 인촌 김성수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
- 1955.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 1956.8.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 한국 측 기독교 대표
- 1959.3. 한신대학교 명예학장
- 1960.1. 자유당 제4대 정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7]
- 1962. 건국공로훈장 국민장(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1963.1. 이승만박사 환국추진위원회 위원장
- 1964.1. 중앙대학교 명예법학박사
3. 생애
3.1. 조선 말기
1872년(고종 9) 10월 22일 함경도 무산도호부 읍면사(현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함우택(咸遇澤, 1837. 12. 2 ~ ?)[8]과 어머니 원주 변씨(原州 邊氏, 1850. 12. 10 ~ 1886. 9. 1)[9]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 및 가문의 300여년간의 세거지는 전라도 김제군(현 전라북도 김제시)라 그를 김제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이후 부친이 50대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을 시작하면서 그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1895년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하였다.[10] 이듬해 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20대에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다.1898년 9월 김홍륙의 고종 · 순종 독살 미수 사건에서 김홍륙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서 그를 무죄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민씨 척족으로부터 김홍륙을 역모로 다스리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고종의 외압으로 인해서 다른 판사로 교체되었다. 이후에도 함태영은 이 사건의 전말과 배후가 의심스럽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1898년 10월 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함태영은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하였는데,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으니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했다. 이후로도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직, 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3.2. 일제강점기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법복을 벗어던지고 사인으로 돌아갔다. 1912년 4월 1일 일제는 그를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복직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이에 불응하여 휴직하고 같은 해 7월 21일자로 퇴직하여 일제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저항했다. #이후 개신교에 귀의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서 개신교 세력을 이끌고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3.1 운동의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23년, 조선예수교장로회[11]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신대학교 총장과 이사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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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무렵의 함태영 |
3.3. 광복 이후~말년
8.15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장을 지냈다.1952년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고, 대한민국 헌정 사상 4명의 부통령 중 유일하게 임기를 온전히 채우고 물러났다.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권유한 이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처음에는 고령을 이유로 고사했지만 계속되는 부탁에 결국 수락하고 출마한 것이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12]을 받았으며 1964년 향년 92세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13] 유해는 당초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에 안장되었다가 2004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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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함태영. e영상역사관 정부기록사진집 제3대 민의원 선거(5).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1 | 제2대 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0 (6.62%)[14] | 낙선 (3위) | [15][16][17] |
1952 | 제3대 부통령 선거 | 2,943,813 (41.26%) | 당선 (1위) | 초선 |
5. 가족 관계
5.1. 함태영의 선계
- 조부 함두삼 (咸斗三, 1792 ~ 1860) / 妻 나주 임씨 (1805 ~ ?)
5.2. 함태영의 후손
함태영은 10남 4녀의 자녀들을 얻었으나, 4명의 딸들에 대한 정보는 불명이다.5.2.1. 1남 함병철
- 1남 함병철 (1889 ~ 1947) / 妻 강이백가 (1890 ~ 1947)[22]
- 1남 함인섭 (1907 ~ 1986)[23] / 妻 류순희 (1907 ~ 1949)[24]
- 1남 함양호 (1931 ~ ) / 妻 홍숙희 (1934 ~ )[25]
- 1남 함영덕 (1963 ~ )
- 2남 함춘호 (1934 ~ 1994) / 妻 김정자 (1940 ~ )[26]
- 1녀 강릉함씨 (? ~ ) / 夫 김두하 (? ~ )
- 2녀 강릉함씨 (? ~ ) / 夫 장작용 (? ~ )
- 3녀 함선호 (? ~ ) / 夫 이광서 (? ~ )
- 4녀 강릉함씨 (? ~ )
- 5녀 함연호 (? ~ ) / 夫 이호재 (? ~ )
- 2남 함의섭 (1910 ~ 1995)[27] / 妻 이차례 (1912 ~ ?)[28]
- 1남 함상호 (1936 ~ )
- 2남 함명호 (1938 ~ )
5.2.2. 2남 함병승
- 2남 함병승 (1896 ~ 1956) / 妻 허경도 (1897 ~ 1933)[29]
- 1남 함재원 (1919 ~ ?) / 妻 이원희 (1928 ~ ?)[30]
- 1남 함철호 (1952 ~ ?)
- 2남 함덕호 (1955 ~ ?)
- 3남 함성호 (1956 ~ ?)
- 4남 함준호 (1960 ~ ?)
5.2.3. 3남 함병창~8남 함병욱
3남 함병창부터 8남 함병욱까지 6명은 어릴 때 혹은 결혼도 하기 전에 사망하였거나 자손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다.- 3남 함병창 (1907 ~ ?)
- 4남 함병욱 (1911 ~ 1930)
- 5남 함병조 (1913 ~ 1966)
- 6남 함병호 (1923 ~ 1940)
- 7남 함병돈 (1925 ~ 1986)
- 8남 함요한 (요절로 추정)
5.2.4. 9남 함병소
5.2.5. 10남 함병춘
6. 여담
- 대한제국 개창 전 조선 조정에서 벼슬길에 올라 대한제국의 법관으로 재직하고, 조선총독부의 법관 임명장을 받았으나 불응하고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부통령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로,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에서 모두 공직을 역임한 몇 안 되는 인물로 조선과 대한제국의 연장선상으로 대한민국이 연결되는 고리를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굉장히 젊은 나이에 소년등과하여 9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 그 덕에 장손 함인섭과 이승만 행정부에서 함께 등용되는 세계사적으로도 보기드문 사례가 생겼다. 그것도 최소 장관급 이상으로 말이다. 장손은 농림부장관만 하였으나 함태영은 심계원장과 심계관, 부통령을 맡아 입지전적이란 말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 조손 간의 나이 차는 불과 35세이다.[37]
- 대한민국 수립 이래 유일하게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사례다. 아버지 함태영은 전직 대한민국 부통령 자격으로 국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함병춘은 현직 대통령비서실장 자격과 순직한 17명의 정부 공식 수행원의 일원으로 국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
- 1959년 1월, 조정환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을 대표로 하는 행정부 국무위원단[38]이 함태영 前 부통령 댁에 새해 인사를 드리러 왔다. 그러나 현직인 장면 부통령 댁 새해 인사는 빼놓았는데, 이는 장면이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소속 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얼마나 장면을 경계하고 미워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사실로 인해 현직 부통령에게는 세배를 안 가고 전직 부통령에게는 세배를 가는 이상한 새해 인사라며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 #
- 92세까지 장수했고 세 명의 부인과 10남 4녀를 두었는데, 그중 셋째 부인과 19세 차이가 나고, 큰아들과 막내아들의 나이 차가 43년이나 났다.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셋째 부인을 맞이했을 것이고, 그 셋째 부인이 장남 함병철보다 낮은 나이라는 점에서 자식들 간 그러한 차이가 많이 났을 것이다.[39]
[1]
咸泰榮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2]
관련 자료.
[3]
동원군파(東原君派) 48세손.(
족보(1)
족보(2))
[4]
아들 함병철, 함병승만을 낳았다.
[5]
함병창만 낳고 죽었다.
[6]
나머지 자녀들의 생모이다.
[7]
이갑성과 공동 선출.
[8]
咸愚澤이라고도 한다. 초명 함병권(咸炳權). 1891년(고종 28) 7월 16일 부사과(副司果, 종6품)에
제수되었으며, 1903년(고종 40) 5월 14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5월 16일
사직했다.
[9]
변동준(邊東俊)의 딸이다.
[10]
그래서
서울대학교 로스쿨(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호 졸업생이 바로 함태영이다. 서울대학교 로스쿨의 역사적 연원인 대한제국 법관양성소 1기를 수석으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 실제로 서울법대에서는 함태영을 서울법대 1호 동문이자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추대했다.
#
#.
[11]
장로회 교단 분열 전 한국의 장로회 단일교단. 1912년 결성되어 1943년 해산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등으로 분열한 건 모두 해방 이후의 일이다.
[12]
現
건국훈장 독립장.
[13]
막내아들인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도 1983년 아웅산 테러 사태로 순직하여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부자가 모두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사례인 셈.
관련 기사
[14]
2차 투표에서의 결과
[15]
전임자
이시영 1951.5.9 부통령직 사퇴
[16]
제헌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17]
1차 투표 17표 11.26%로 4위
[18]
함태영의 큰아버지
[19]
함태영의 큰어머니
[20]
함태영의 고모
[21]
함태영의 고모부
[22]
강성흠(姜星欽 또는 강종근(姜種謹))의 딸.
[23]
다른 이름은 함재인(咸在仁), 춘천농대 학장, 농림부 장관 역임.
[24]
문화인 류기환(柳基桓)의 딸.
[25]
남양인 홍은표(洪恩杓)의 딸.
[26]
김성현(金成炫)의 딸.
[27]
다른 이름은 함재의(咸在義)
[28]
신평인 이동현(李東鉉)의 딸.
[29]
양천인 허정정(許鼎丁)의 딸.
[30]
양성인 이상용(李尙鎔)의 딸.
[31]
공무원, 기업인, 상공부 공업제1국 중화학과장 역임.
[32]
안동인 김용우(金用雨)의 딸.
[33]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 1983년 10월 9일에
버마에서 일어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순직.
[34]
청송인 심원구(沈元求)의 딸, 화가.
[35]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36]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37]
반면 막내아들인 함병춘과는 무려 60세나 차이났다. 그럼에도 함태영은 92세까지 장수하여 막내 아들이 성인이 되면서 교수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작은아들도 얻는 것까지 보았다.
[38]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이자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의 아버지인
홍진기 법무부장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39]
늦은 나이에 자식보다 어린 여자와 혼인한 것을 현대의 우리 기준으로 색안경으로 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함태영은 혼란기에 고위직을 역임하며 공무상으로도 엄청나게 바빴던 인물로 배우자의 내조가 반드시 필요했으며, 이혼이 아닌 사별 후 재혼이므로 비난받을 것도 없다. 이 시기 함태영의 나이에 결혼 상대로 마땅한 사람이 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