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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colbgcolor=#ededed> 출생 | 1885년( 고종 22) 2월 4일 |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무산방 망일리 (現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망일리 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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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4년 1월 4일 (향년 78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묘소 | 재북인사릉 |
본관 | 서촉 명씨 [1] [2]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및 초대 심계원장.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5년 2월 4일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무산방 망일리(現 평안북도 녕변군 망일리)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조선에서 보내다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를 3년 만에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09년 이후부터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남북만주와 시베리아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0년 이후 광복단에 가입, 활동하였다.1919년 3월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박은식(朴殷植) 등 30명과 선언서도 작성하였다. 항일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선홍(趙宣弘) 등 30여 명과 같이 같은 해 4월 18일 중국 톈진(天津) 시내 프랑스 조계 내에서 톈진불변단(天津不變團)을 조직, 항일투쟁의 구심점을 삼았다.
톈진불변단에서 단장 조선홍을 도와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그 해 8월 15일에 단장이 되었다. 톈진불변단의 실질적인 핵심 책임자로서 상해임시정부의 광복정책에 협조하였으며, 중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동양 시찰을 목적으로 중화민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고자 귀국하여 경기도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거주하였으며, 대한광복단원 한훈·김동순(金東淳)·윤익중(尹益重) 등과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주살을 계획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그 해 9월 22일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
1920년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전·후면 |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살인예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공문서 위조, 공갈취재 미수, 사기 등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 같은 해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에서 나열한 혐의 중 공문서 위조와 공갈취재 미수 혐의를 제외한 나머지 6가지 혐의에 대해 징역 3년(미결 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1926년 11월 29일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조직에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신간회(新幹會)와의 합작 통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및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로 건국 및 통일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1948년 9월 4일부터 1949년 11월 23일까지 초대 심계원장(審計院長)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3]. 납북된 이후 삶은 별로 알려진 게 없으며, 북한에서 사망했다는 게 전부이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북한에서는 재북인사릉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