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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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종류 | 지난 선거 | 다음 선거 |
대통령 선거 |
제20대 2022년 3월 9일 |
제21대 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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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선거 |
1960년 3월 15일 |
폐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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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
제6차 1987년 10월 27일 |
시행 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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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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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선거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48년
7월 20일 1대 부선 |
→ |
1951년
5월 16일 2대 부선 |
→ |
1952년
8월 5일 3대 부선 |
}}} | ||
투표율 | 74.88%[1] ▼ 24.11%p | |||||||
선거 결과 | ||||||||
후보 |
[[민주국민당| 민주국민당 ]]김성수 |
[[무소속| 무소속 ]]이갑성 |
||||||
득표율 | ||||||||
51.32% | 48.03% | |||||||
득표수 | 78 | 73 | ||||||
부통령 당선인 | ||||||||
|
||||||||
민주국민당 김성수 |
[clearfix]
1. 개요
|
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
2. 배경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은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국민방위군 사건에 크게 분노하여 이승만 정권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국민에게 고함, 1951년 5월 9일, 동아일보
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국민에게 고함, 1951년 5월 9일, 동아일보
부통령의 임기는 4년이었는데, 이시영이 사퇴함에 따라 잔여 임기를 채우기 위해 보궐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친여 성향의 신정동지회는 이갑성 의원을, 야권의 민주국민당과 공화구락부는 김성수 민국당 최고위원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임시수도 부산의 2대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실시한 결과 민주국민당 김성수가 당선되었다.
3. 결과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선거 | |||
1차 투표 |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당락 | |
김성수(金性洙) | 66 | 1위 | |
|
43.05% | ||
이갑성(李甲成) | 53 | 2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5.10% | ||
함태영(咸台永) | 17 | 3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1.26% | ||
장택상(張澤相) | 11 | 4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7.28% | ||
지청천(池靑天) | 2 | 5위 | |
|
1.32% | ||
김창숙(金昌淑) | 1 | 6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0.66% | ||
계 | 선거인 수 | 203 |
투표율 74.38% |
투표 수 | 151 | ||
무효표 수 | 1 | ||
2차 투표 |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당락 | |
김성수(金性洙) | 68 | 1위 | |
|
45.03% | 결선 | |
이갑성(李甲成) | 65 | 2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3.05% | 결선 | |
함태영(咸台永) | 10 | 3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62% | 낙선 | |
장택상(張澤相) | 5 | 4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31% | 낙선 | |
지청천(池靑天) | 2 | 5위 | |
|
1.32% | 낙선 | |
김창숙(金昌淑) | 1 | 6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0.66%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203 |
투표율 74.38% |
투표 수 | 151 | ||
결선 투표 |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당락 | |
김성수(金性洙) | 78 | 1위 | |
|
51.32% | 당선 | |
이갑성(李甲成) | 73 | 2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8.03%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203 |
투표율 74.88% |
투표 수 | 152 | ||
무효표 수 | 1 |
김성수는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에 항의하여 부통령직을 중도 사임하였는데, 부통령의 궐위 시 즉시 후임자를 뽑으라는 제헌 헌법 규정에 따라 국회는 7월 초까지 제3대 부통령을 보선할 계획이었으나, 7월 7일부터 대한민국 헌법 제2호가 시행되면서 부통령 선거가 국민 직선제로 바뀌어 이뤄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