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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민정부 출범 후 추진한 운동. 1949년 반민특위, 1960~61년 장면 내각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과거사 청산에 이은 민주화 이후 첫 과거사 청산운동( 적폐청산)이기도 하다.2. 배경
1990년 당시 김영삼이 주축이 된 통일민주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끌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거대여당이 탄생되었다. 당시 명분은 보수 대연합이라는 기치였지만, 사실 세 사람의 입장은 서로 달랐기 때문에 합당 이후에도 각 계파별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야 했다. 오죽하면 당시 문화방송에서 높은 인기에 방영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을 이 상황에 빗대 풍자하기도 했다.이후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군사정권이 완전히 종식되고, 드디어 국민의 손으로 뽑은 첫 문민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다.[1] 국민의 손으로 문민정부를 탄생시킴으로써 국민들이 문민정부에 거는 기대는 컸으며, 취임 초기의 지지율이 90% 이상 나오고, 93년 사회인 인기투표에서 연예인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를 정도였으니 국민들이 거는 기대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김영삼은 이러한 기대를 등에 업고, 군사독재 체제에서 자행된 온갖 낡은 악습을 타파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취임부터 온갖 개혁 작업에 시동을 걸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역사바로세우기다.
더군다나 당시 전세계적으로 정치정의(PC) 열풍이 분 데다가 한국 사회의 일원이었던 X세대는 이념적이고 통제 일색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을 중시하던 세대였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 상으로도 이러한 개혁 요구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점들이 맞아떨어져 문민정부는 대대적인 과거사 청산에 나서게 된다.
3. 내용
1993년부터 사정개혁의 일환으로 신군부의 잔재로 군에 남아있던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청산하고, 각 군 조직에 앉아있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모두 몰아내기에 이른다. 자세한 내용은 하나회 숙청 항목 참조.청와대 내의 뇌물수수 창고로 쓰이던 대형 금고도 전부 해체해 버렸으며, 청와대 내에 있는 안가도 12채 모두 철거하는 등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그리고 금융 부정부패를 막고자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동원해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에도 나서서,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2월에는 ' 쇠말뚝 뽑기 사업'을 실시하고, 8월 15일에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기에 이른다. 철거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정부는 이 건물을 통째로 옮겨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가, 이에 열 받은 김영삼은 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폭탄 발언을 했고,[2] 결국 건물을 철거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다만 김영삼이 그 발언을 한 건 맞지만,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건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의 식민지 시절에 관한 발언 파문이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에토 다카미 총무청 장관이 식민지 시절에 잘 해준 것도 있다는 식의 망언을 했기 때문에 보인 반응이라고 봐야 한다. 애초에 총독부 건물 철거는 1995년 8월 15일에 했고, 저 발언은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1월 14일에 나왔다.
물론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을 무렵 반대하던 여론도 많았다. 비록 일제 치하의 건축물이지만 광복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보다 더욱 긴 시간 동안 오랫동안 한국사의 여러 사건의 현장이었으므로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혹은 새 국립중앙박물관 짓고 구 총독부 해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및 조선총독부 청사 항목 참조.
그 외에 같은 해 새해부터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농통합시를 대거 만든 것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가 조선인/일본인 거주지 기준으로 행정 구역을 분리 시킨 것을 통합하는 것으로 일제 잔재 청산의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지번 주소 체계를 도로명주소 체계로 바꾸는 사업도 추진했다. "지번 주소가 일제 잔재?" VS "그래도 도로명 주소 너무 불편해"
이와 비슷하게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모두 바꿨는데 이는 국민학교가 제3차 조선교육령 당시 일제가 황국신민을 만들어 내는 학교라는 의미로 소학교를 죄다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기 때문이다.[3] 일제 잔재 청산의 목적인 셈. 다만 이 당시 똑같은 일제 잔재인 유치원은 유아학교로 이름이 고쳐지지 못하고 남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사노동조합연맹 등의 교원단체들이 임용고시를 통과한 교사가 근무하는 국공립유치원만 유아학교로 이름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유치원으로 불린다.
군사정부 당시 ‘혁명’으로 불렸던 5.16 또한 5.16 군사정변으로 분명히 규정했다. 김영삼 대통령 5.16쿠데타로 규정, 5.16은 쿠테타
역사바로세우기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가장 큰 사건은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과 사형 선고였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참고. 헌정사에서 유일무이한 전직 대통령 2명이 동시에 구속되고 역사의 단죄를 받은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된다.
1995년 7월 18일에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12.12 군사반란 피해자들이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한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학살 관련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수사 결과가 발표된다. 여기서 장윤석 검사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발언이 문제가 되자 직접 크게 화를 내며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민주자유당에 지시해 95년 12월 21일 법률안이 제정되었고 결국 검찰이 사정변경의 법리에 따라 재수사에 착수해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기소하게 된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헌법을 유린하며 동시에 김영삼 자신을 그간 옥죄던 세력들을 일갈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직전 한 달 전까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에 지지부진하다가,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자신의 대선 자금 의혹으로 불거지자 국면전환용으로 썼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
결국 이 두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재판에 넘겨져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무기징역과 막대한 추징금을 선고 받았으나, 이들은 12.12나 5.18 피해자들에게 사죄나 반성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훗날 김영삼 정권이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정부로 정권을 교체당한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 특별사면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요청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대의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덕분에 김영삼 정권 당시에는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이끌어냈다.임기 극초기에 한 하나회 숙청은 대성공이었다. 대통령과 비선들끼리만 해체를 논하다가 어느 순간에 펑 터뜨리는[4] 기습 전략으로 반발이 채 나오기도 전에 하나회를 군에서 뿌리 뽑아 내었다. 하나회 해체로 국군은 드디어 온전한 국민의 군대로서 정상화됐고 군대의 반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는 당시에 반발이 조금 있었긴 해도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업적이 맞다. 총독부가 철거되며 그동안 가려져 있던 경복궁이 광화문 거리에서 훤히 보이게 되었다. 이로 하여금 우리 문화의 부활을 이끌어 낸 건 물론이고 일본에게 짓눌렸던 자존심 하나를 다시 세울 수 있었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성장에 이바지하였다. 반란수괴이자 학살사범을 단죄한다는 명분도 확실하고 유례 없는 전직 대통령 구속은 대통령이라도 죄가 있다면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았다.
그 외에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민주화운동의 왜곡을 차단할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
4.2. 부정적 평가
큰 틀에서 명분 자체는 동의하더라도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실제로 파고들어보면 불완전한 부분이 많았던 점이 부정적 평가로 주로 꼽힌다.김종필 전 총리는 역사바로세우기에 대해 "역사의 평가는 역사가에게 맡겨둬야 한다. 정치인이 역사를 단죄(斷罪)하려 들면 역사를 오도(誤導)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해서 고고학회에서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었던 총독부 건물 철거 이전에 새 박물관 건물이 먼저 지어져야 한다는 "선 건립, 후 철거"론을 내세우며 비판했다. # 김대중도 "철거가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를 떠나 문화재들을 보관할 박물관을 먼저 건설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전체 철거가 아닌 한국 현대사의 공간이기도 했던 중앙홀만은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자던 김종필은 "일제시대의 어두움은 청산해야겠지만 그곳은 광복 이후 현대사의 산실이었던 만큼 정치 이벤트가 아닌 역사의 긴 안목으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고 지적했다. # 건축학계에서는 근대건축물 보존에 관한 논의를 10년 이상 후퇴시켜 그동안 등록문화재급 건축물들 상당수가 쉽게 헐려나가게 된 원인으로 보고 비판한다.
또한 검증되지 않은 것들을 강행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쇠말뚝 사건이다.
하나회 숙청에 대해서는 "군화 대신 등산화가 등장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군인 출신들을 각종 인사에서 배제했다. 그 대신 김영삼 대통령을 따랐던 상도동계 및 '민주산악회'와 '나라사랑운동본부'(나사본) 등의 사조직 출신 인사들이 정부와 산하기관에 대거 배치됐다. 이렇다 보니 해당 기관에서는 "군화가 퇴장하니 등산화(민주산악회 출신)가 대신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국일보> YS는 '군화 대신 등산화' 盧는 '386'
전두환 · 노태우 구속은 명분만큼은 아주 좋았으나,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자 국민 통합을 이유로 둘을 사면해준 것은 정치인들의 사면이 줄줄이 이어지는 부정적인 선례로 남았다. 사면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 합의한 것이었으니 김영삼만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뭐가 되었든 국민 통합 때문에 전두환 · 노태우를 사면해준 것은 납득이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전두환은 사면된 이후에도 끝까지 반성을 안 하고 사망하였으며, 노태우는 그나마 투병중에 아들 노재헌을 통해서 광주에서 5.18사태 관련 사과를 하였지만 전두환은 "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와 같은 발언을 하며 사과 한 마디 없이 생을 마감했고 그의 손자인 전우원이 와서 사과했다. 또한 소급입법이 적용됨으로써 전두횐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김종필이 이끌던 자유민주연합 등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처벌은 좋은 일이겠지만, 후일 악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다만 소급입노에 비판적인 진영에서도 전두환과 노태우의 재산 압류 및 다른 조치를 요구하는 등 이 당시 신군부의 편을 들어줄 만한 세력은 사실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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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조부 김동옥 · 아버지 김홍조 · 아내 손명순 · 아들 김은철, 김현철 · 손자 김인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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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게 되었지만, 그 직선제 첫 대통령의 영광은
양김의 분열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군부 출신인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로 돌아가버렸다. 당시 우스갯소리처럼 나오던 별명이
제5공화국에서 반쯤만 바뀌었다고 해서 제5.5공화국.
[2]
김영삼이 장쩌민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 회견에서 한 말이다.
관련 기사
[3]
이전에는 4차라고 되어 있었으나, 국민학교 개칭은 1941년, 4차(황국신민 강요)는 1943년이었다.
[4]
우선 하나회 출신들이 먹고 있던
육군참모총장과
국군기무사령관을 경질했다. 이 두 직책은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예방하기도 용이한 요직이어서 만일의 쿠데타를 막고자 제일 먼저 비하나회 인물로 바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