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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은철 金恩哲|Kim Eun-ch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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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6년 10월 7일 | ||
사망 | 2024년 8월 7일 (향년 67세) |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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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김녕 김씨 (金寧 金氏)[1] | ||
학력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 화학공학 / 학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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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김영삼, 어머니 손명순 | |
형제자매 |
큰누나 김혜영(1952년생), 작은누나 김혜경(1954년생) 남동생 김현철 여동생 김혜숙(1961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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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황경미(1958년생)[2] | ||
자녀 |
장녀 김진(1983년생) 장남 김성민(1990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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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추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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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의 장남.2. 생애
1956년 10월 7일, 김영삼과 손명순의 5남매 중 장남(셋째)으로 태어났다.1982년 10월 7일, 종로구 평창동 귀빈예식장(현 귀빈웨딩문화원)에서 결혼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야당 정치인이었던 부친 때문에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고, 김영삼이 5공 정권에 의해서 가택연금 중이었기 때문에 결혼식도 아버지 없이 치러야 했다.[3]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회사원, 옷장사 등을 했고 김영삼 대통령 사망 전까지 약 30년 이상 한국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4] 얼마나 접촉을 피했던 것인지 본인이 장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에 발생했던 친 할아버지 김홍조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산에 온 YS부자. 가운데 인물이 김은철, 우측의 인물이 김현철.
그나마 김영삼 전 대통령 사후에는 한국을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손명순 여사 사망 직후부터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김현철과는 달리 대외 활동은 물론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도 않는 조용한 삶을 살았다. 대통령 자녀임에도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특이 케이스.[5] 이 때문에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렸다.[6]
젊은시절 여러 고초를 겪었던 탓인지 폐렴, 기흉 등의 여러 지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11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에 모습을 드러내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도 이미 병색이 완연했고 이동 과정에서 가족의 부축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 때도, 손명순 여사의 장례 때도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며 자신의 언론 노출을 거의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24년 8월 7일,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에서 의식이 없는 채로 발견돼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으로 이송됐지만 향년 67세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손명순이 사망한 지 불과 5개월 만이었다. #
[1]
충정공파(忠貞公派) 29세손.(
족
보)
[2]
창원 황씨이며
강원대학교
음대를 졸업했다.
[3]
이때
5공 정권이 가택연금을 일시적으로 풀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김영삼은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누군가의 아버지 이전에 야당 정치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튼 본인 입장에서는 꽤 충격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있다.
[4]
말이 좋아서 건너간 것이지, 사실상 5공 정부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간 셈이었다.
[5]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 결과도 1982년 결혼 소식과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재산공개 내역에서 곁다리로 언급되는 2건이 전부다.
[6]
사실 이 표현은 과거 "소통령"으로 불렸다가
한보 사태로 몰락한 동생인
김현철에게도 쓰이는 표현이며, 표현 특성상 실제 상황과 상관없이 너무 지나치게 남발되는 점도 없잖아 있다. 더구나 김은철은 정치계에는 크게 발을 붙이지 않았던지라 더더욱 그렇다. 비슷한 예시로 재계에서도
이맹희도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고
이창희도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