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간 무역협상(Multilateral trade negotiations) | |||
회차 | 명칭 | 최종타결 | 가입국 |
제1차 | 제1차 제네바 라운드 | 1947년 10월 | 23개국 |
제2차 | 안시 라운드 | 1949년 4월 | 32개국 |
제3차 | 토키 라운드 | 1950년 9월 | 34개국 |
제4차 | 제2차 제네바 라운드 | 1956년 1월 | 22개국 |
제5차 | 딜런 라운드 | 1961년 5월 | 26개국 |
제6차 | 케네디 라운드 | 1967년 5월 | 74개국 |
제7차 | 도쿄 라운드 | 1979년 11월 | 82개국 |
제8차 | 우루과이 라운드 | 1994년 4월 | 93개국 |
제9차 | 도하개발어젠다 | 협상중(난항) | WTO 가입국 전체 |
Uruguay Round: UR
1. 개요
우루과이 라운드는 1986년 9월에 열렸던 관세 무역 일반 협정(GATT)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새로운 다자간 무역 협정을 뜻하는 말이다. GATT의 제8차 다자간무역협상이었으며,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저런 명칭이 붙었다. 1994년 4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마라케시 선언이 채택되어 막을 내렸다.세계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마라케쉬 협정(WTO)(Marrakesh Agreement Establishing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WTO))으로 세계 무역은 GATT체제에서 WTO체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2. 상세
일단 기존 GATT를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농산물 분야다. 기존에는 농산물 부문을 비롯해 몇 개 부분은 제외되었으나 우루과이 라운드를 통해 포함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이 2014년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원래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개방되어야 했던 것인데 그동안 의무적으로 일정량을 수입하는 대신 이를 유예해왔었다는 내용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 이미 한국처럼 자국 농산물 시장을 보호하려던 다른 국가들도 의무수입량을 늘리겠다는 제안을 하고도 퇴짜를 맞았고 끝내 한국도 완전개방을 하게 되었다.2.1. 협상 참가자격
- GATT 체결국
- 잠정가입국
- 사실상의 GATT 적용국으로서 1986. 4. 30 이전까지 GATT가입 및 UR 참여의사를 밝힌 국가
- GATT 가입의사를 GATT 이사회에서 공식 표명한 국가(중국)
- GATT 가입절차를 1987. 4. 30까지 개시한 국가
2.2. 의제
시장 접근, 섬유, 농업, 규범제정 및 투자, 지적재산권, 제도분야, 서비스 총 7개 부문에 대해서 논의되었다.3. 한국에 미친 영향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은 농업이다. 이전까지 자급자족의 농업이 중심이었던 한국의 생산시장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특히 식량작물을 위주로 발전한 농업문화[1]가 특용작물과 같은 특산품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많은 논이 밭이나 과수원으로 탈바꿈 했으며, 새로운 농촌문화(농촌체험이나 친환경 농업이용 등)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FTA처럼 수출, 수입시 관세를 없애는 게 아니라 일부 품목에 대해 의무수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 농산물의 자립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한국 농촌 특유의 보수성이 더해지면서 의무수입 품목의 경우 가격이 폭락하거나 농가가 생산을 기피하는 등의 문제로 이어졌다. 쌀의 경우는 특이한 케이스로 자급률이 한때 130%에 달했지만.[2] 어쨌든 당시 대통령이 쌀 개방만큼은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했으나 그 결과 쌀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농산물이 개방되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쌀의 경우도 계속 의무수입량을 늘리며 다른 나라들을 설득해야 했고 그나마도 2015년 1월부터는 조건부로 완전 개방되었다. 결국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며 한국의 농업 경쟁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정부가 한국 농업의 발전과 세계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 한국농수산대학교도 설립하는 계기가 된다. 다만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 시점으로부터 정부가 제법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농촌에 변화를 주는 정책을 폈더라면 더 좋을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3]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후 농촌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사업 및 농촌근대화와 농기계 보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농수산대학교와 새만금 사업이나 공동 농기계 보관소 건립, 군마다 지역별 농촌기술센터 설립 등이 이시기에 추진되었으며, 읍, 면마다 보건소 건립이나 우체국, 면사무소, 농협 등이 대대적으로 생기기 시작한다.2001년에 제정된 '농어업인 부채경감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1989년 말에 제정되었던 '농어가부채경감에관한특별조치법'의 후신이기는 하지만, 우루과이 라운드를 계기로 제정한 법률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조에서 대놓고 "이 법은 우루과이라운드·세계무역기구의 출범과 농어업인의 부채증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어업인의 금융부담을 완화함으로써 농어가의 경영안정과 농어업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됐던 전원일기와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사에 우루과이 라운드가 자주 언급됐을 정도로 농업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였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영향으로 그린 라운드, 블루 라운드 등의 엉터리 용어가 나오기도 했다. 그린 라운드는 오지 않는다(시사저널 1994년 5월 5일)
[1]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과거의
영동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88올림픽고속도로 등이악랄하게 좁고 구불구불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의 토목기술도 형편없었지만, 농토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좁게, 구불구불하게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2]
쌀의 경우 한국정부가 끝까지 안된다고 했다가 결국 완전개방했다. 사실 한국에서 기계화가 90%를 넘는 작목은 쌀이 유일하다. 한마디로 한 나라의 주력농업이었기 때문에 정부도 끝까지 막다가 결국 허락한 것.
[3]
특히 쌀의 전면개방으로 쌀값이 폭락하며 정부가 수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의 경우 자국쌀을 사료형식으로 처분하여 외국쌀과의 경쟁을 최소화하며, 이앙기나 콤바인등 여러 농기계를 개발하며 자국의 농산물을 보호했고, 농촌마을이나 지역 특산품 선전이나 다각화를 한 점에서 많이 아쉬운 부분. 물론 말이야 쉽지
현실은 시궁창인지라...